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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겨울 채비
하늘에서 땅 위로 눈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수한 선을 그리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먹고 게이조는 거실의 난로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창 너머로 새끼로 동여맨 가지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뜰의 주목나무가 보였다.
“눈이 많이 내릴 모양이에요.”
“응.”
게이조는 앞에 놓인 사과 한쪽을 집어 들었다.
“요코, 이제 엄마가 할 테니 넌 가서 공부해.”
부엌에서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있는 요코에게 나쓰에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대답하는 요코의 목소리도 밝았다.
“잘됐지요? 요코도 진학할 결심을 하게 되었으니…..”
“응.”
게이조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싫어요. 무슨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응, 아니오. 겨울을 보내고 있는 환자들을 생각하고 있었소.”
요코에 대한 나쓰에의 태도는 치가사키로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눈에 띄게 부르러워졌다. 그것은 게이조가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었으나, 그 일에 좀 마음을 놓게 된 지금에 와서는 유카코의 눈이 게이조의 걱정거리였다.
도쿄에서 돌아온 다쓰코의 말에 의하면 유카코의 눈은 절망적이라는 것이었다. 진단은 시신경 위축이었다. 거기다가 녹내장 증상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게이조가 무라이에게 그 말을 하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허, 그건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경우군요, 원장님. 유카코는 의사의 치료도 변변히 받지 못했다면서요? 녹내장이라면 안통, 두통에 구토증세도 일어나고 홍륜도 보였을 텐데요. 그리고 시야도 점점 좁아졌을 텐데 의사를 찾아가지 않았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네요…..하긴 유카코는 고집이 센 여자니까 설사 죽거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할 수 없다며 그냥 방치했던 게 아닐까요?”
그러나 무라이는 아무래도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진찰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눈과 정신적인 충격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밤을 세워 간호하던 남편이 죽자 밤낮을 울던 부인이 이틀 사이에 눈이 멀어 버린 예가 있어요. 유카코도 원장님을 사모하여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울며 지냈다지요, 원장님?”
게지조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하던 무라이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게이조는 사과를 두어 쪽 더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 왜 더 안 드세요?”
“아니, 그냥…..”
게이조는 도쿄에서 돌아온 유카코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눈이 내리고 있어 외출할 구실을 만들 수가 없었다. 게이조는 슬그머니 옆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치가사키는 아직도 따뜻하던데.”
나쓰에는 창 너머로 끊임없이 내리는 눈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여보, 따뜻한 곳이나 추운 곳이나 세금은 똑같이 내는군요.”
“응.”
“같은 요금을 내고 우리는 3등실에, 치가사키 사람들은 1등실에 타고 있는 셈 아녜요?”
“글쎄.”
“싫어요. 또 무슨 단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나쓰에는 난로 옆에 앉은 채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아니, 다카기의 결혼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소.”
“그분 정말 결혼하실 생각일까요?”
“어머니가 안 계시니 역시 쓸쓸한 모양이야.”
“하지만 자식이 둘씩이나 딸린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고생이 많을 거예요.”
부엌에 있는 요코를 의식하고 나쓰에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각오는 하고 있을 테지.”
요코는 설거지를 마쳤는지 자기 방으로 갔다.
“하지만 다카기 씨가 결혼단다니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아요. 다카기 씨는 혼자 지내는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다카기가 결혼한다니까 당신 섭섭한 모양이군.”
“그게 아녜요. 다카기 씨답지 않다는 느낌이 들 뿐이죠.”
“그런 말을 들으면 다카기가 난처해할걸.”
게이조는 잠시 떠보는 듯한 눈길을 던졌다. 다카기의 결혼에 대해 나쓰에가 질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요.”
나쓰에는 게이조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차갑게 흘겨보았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누굴까요?”
나쓰에는 게이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는 머리를 매만지며 밖으로 나갔다.
“여보, 기타하라 씨예요. 오랜만이네요.”
기타하라가 거실로 들어왔다. 눈을 맞았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니,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데 용케왔군.”
기타하라가 쓰지구치 집에 온 것은 요코가 약을 먹은 후로는 처음이었다.
기타라하른 난로 옆에 앉아서 감개무량한 듯이 거실을 둘러보았다.
“기차로 왔나요?”
“아뇨, 차로 왔어요.”
“이렇게 눈이 오는데……”
“가무이 고단 저쪽으로는 눈이 내리지 않았어요. 아사히가와에만 오고 있는 모양이에요.”
게이조는 요코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꽤 떨어져 있는 요코의 방에는 기타하라의 큰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쓰에는 부르러 갈 기색도 보이지 않고 홍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기타하라 씨, 식사는요?”
“먹고 왔습니다.”
말씨가 공손하다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잠자코 기타하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저…….요코 씨는 집에 있나요?”
기타하라가 수줍어하면서 물었다.
“어머, 요코에게 볼일이 있으세요?”
나쓰에는 놀란 듯이 홍차를 따르던 손을 멎었다. 게이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네.”
“미안해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요코는 요즘 수험공부 때문에 날마다 정신없거든요.”
“그렇습니까? 드디어 시험칠 결심을 하게 됐군요.”
기타하라는 한시름 놓은 듯이 이렇게 말하고 게이조에게,
“대학은 도쿄로 정하셨나요?”
하고 물었다.
“역시 가까운 데가 좋을 것 같아요. 멀리 보내는 건 아무래도 걱정이 돼요. 당신도 그렇죠?”
하고 게이조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스에가 재빨리 말했다.
“그만 요코를 불러오지 그러오.”
게이조가 독촉했다. 나쓰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바로 거실을 나갔다.
“여자란 아무래도 좀……..”
게이조가 중얼거렸다. 기타하라는 못 들은 척하고 말했다.
“그래도 진학할 마음을 먹게 된 건 옛날의 요코 씨로 돌아갔기 때문일까요?”
“글쎄. 옛날로 돌아간 것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어서 와요, 기타하라 씨, 지난번에는 폐가 많았어요.”
F교향악단의 연주회를 들으러 삿포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기타하라는 요코를 다키가와까지 바래다주었던 것이다.
“요코, 응접실로 안내해. 난로를 피워 두었으니까.”
나쓰에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기타하라와 요코가 나가자 나쓰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기타하라 씨는 무슨 일로 온 걸까요?”
게이조는 말없이 홍차에 설탕을 넣었다.
“여보, 기타하라 씨는 역시 요코와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글쎄.”
게이조는 마음이 무거웠다. 요코가 언젠가는 누군가와 결혼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게이조는 요코가 아무와도 결혼하지 말고 집에 남아 있어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특히 도오루와 결혼하는 것만은 말리고 싶었다. 게이조는 도오루가 요코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을 알고 있었다.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찬성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남매로 자란 데 대한 저항감도 있었다. 그러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게이조는 올 봄부터 일기장에 가끔 단가를 짓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노래였다. 누구한테서 따로 배운 건 아니었다. 며칠 전에 게이조는 요코를 생각하며 노래를 지었다.
동그스름한 어개를 가진 너와 단둘이서
무엇이 괴로우리, 너는 나의 딸이거늘.
게이조로서는 한때 품었던 마음의 동요를 노래한 것이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연가였다.
이 노래는 일기장에 적어넣지 않았다. 게이조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요코는 딸이라기보다는 이성이었다. 게이조는 요코가 중학생일때부터 때때로 그렇게 느껴 왔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애써 떨쳐 버렸다.
요즘 들어 유카코에게 갖는 감정도 어쩌면 요코를 향한 억눌린 감정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물론 게이조 자신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오루와 요코의 결혼을 원치 않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그런 생각이 잠재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전 기타하라 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그럴 테지.”
기타하라와의 말다툼이 요코를 자살로까지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쓰에에게 한평생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도오루의 마음도 생각해 줘야 해요.”
“……….”
“도오루와 요코라면 우리 내외도 소중히 생각해 줄 거예요.”
“뭐, 요코가 마음먹기 달렸지. 요코는 아직 어려요. 이제 겨우 열아홉이잖소.”
“하지만 전 왠지 불안해요. 요코의 마음을 확인하고 일찌감치 도오루와 결혼시키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젊었을 때는 마음이 멈춰 있지 않아요. 해마다 사고방식이 현저히 달라지니까 말이오.”
나쓰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잠시 수돗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포도를 접시에 담아 들고 왔다.
“기타하라 씨에 대해서는 어쩐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는 도오루보다 경험도 많소. 그리고 어딘지 훌륭한 데가 있어요.”
“어머! 그럼 당신은 도오루와 요코의 결혼에 반대하시는 거예요?”
응접실로 옮겨 온 기타하라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이곳에서 나스에와 심한 말다툼을 했던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이시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이대며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던 나쓰에의 창백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피아노도 테이블도 의자도 그 날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날 나쓰에가 응접실을 나갔을 때, 기타하라는 간신히 몸을 가누서 서 있던 요코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주었었다. 그때 메마른 요코의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기타하라는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았을 요코에게 도저히 키스를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요코와 갑자기 말이 통하지 않게 된 듯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을 기타하라는 다시금 떠올렸다.
그 후로 요코는 기타하라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지난번에 요코를 배웅하러 삿포로 역에 나왔던 기타하라는 미처 기차에서 내릴 틈이 없어 다키가와까지 한 시간 동안 동행했다. 그때도 요코는 기타하라 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헤어질 때 요코는 이러헥 말했다.
“준코 씨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기타하라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준코를 자신의 애인으로 오해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진학을 한다고요? 어디로 결정했어요?”
“홋카이도 대학에 가려고 해요.”
“잘됐군요. 그럼 때때로 만날 수 있겠지요?”
요코는 미소를 지을 뿐 만나자고도 만나지 않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요코를 빤히 바라보 있다가 키타하라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요코 씨, 저번엔 실례했어요. 기분 나빴지요?”
“네?”
요코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다키가와까지 동행했던 거 말이에요.”
“어머, 어째서요? 기타하라 씨는 그때 미처 내릴 틈이 없었잖아요. 기차에 탄 김에 다키가와의 집에 가신 것뿐이고. 안 그래요?”
“…………”
“그런 일로 기분 상해하거나 하지 않아요.”
“난 나쁜 놈이에요.”
기타하라는 내뱉듯이 말했다.
“실은 그 날 일부러 역에 늦게 나왔었어요. 발차 벨이 울릴 즈음에 뛰어오를 생각을 했어요.”
기타하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요코를 바라보고 나서 덧붙였다.
“난 아주 급한 듯이 기차에 뛰어올랐죠. 요코 씨에게 선물을 주고 내릴 틈도 없이 문이 닫혀 버렸어요. 계획대로 되었던 거예요. 참 미성숙한 인간이에요, 난.”
그때 문을 노크하고 나쓰에가 포도를 가지고 들어왔다.
“미안해요, 아무것도 대접할 게 없어서요. 요코가 대학에 들어가면 한턱 단단히 낼께요.”
포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서 나쓰에는 이렇게 말하고 곧 방을 나갔다. 그것은 요코는 수험 공부 때문에 바쁘다, 그러니 다음에 다시 오는 게 좋겠다는 인사로도 생각되는 쌀쌀한 태도였다. 그러나 기타하라에게는 방금 고백한 자신의 말에 대한 요코의 반응 쪽이 더 중요했다.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내가 그렇게 했는지 알겠어요? 사실 난 요코 씨를 단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요코 씨를 만나보니 그런 마음이 사라져 버렸어요.”
다그치는 듯한 기타하라의 시선에 요코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만일 요코 씨에게 그렇게까지 충격을 준 나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쯘 우린 서로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며 사귀고 있을 거예요.”
“…………”
“요코 씨는 죽으려고 작정했었어요. 너무나 처참한 사건이라 난 멀리서 요코 씨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헤어져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어요.”
잠자코 있는 요코 앞에서 기타하라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요코의 심정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이러헥 일방적으로 말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요코의 가슴에 스며들지 않고 허공에 울리고 다시 돌아오는 듯한 불안을 느끼면서 말을 계속했다.
“나와 도오루는 친한 친구예요. 난 도오루의 심정도 헤아려 보았어요. 요코 씨를 향한 도오루의 오랜 감정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요코 씨를 도오루에게 양보하는 것이 요코 씨에게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그러나 지난번에 삿포로에서 요코 씨를 만나보고 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요코는 조용히 눈을 들어 기타하라를 바라보았다.
“기타하라 씨, 전 기타하라 씨에게 사과하고 싶어요.”
“뭘 말입니까?”
“저는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마음이 식어 버렸어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저 자신에 대해서나…….”
“쓰지구치에 대해서도요?”
하고 말하고 나서 기타하라는 얼굴을 붉혔다.
“누구에 대해서나 마찬가지예요.”
요코는 기타하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석유 난로의 송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실내가 이제야 따뜻해졌다.
“그럼 누구에 대해서나 지금은 백지 상태라고 생각해도 좋겠군요, 요코 씨.”
밖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타하라 씨, 전 이번 여름에 고아원에 갔다왔어요. 그곳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불행해진 아이들이 많이 잇었어요.”
“그래서요?”
“그때 전 지금 나이에 이성에 대해 생각하는 건 너무 이르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기타하라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자신의 생활태도를 정하고 나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누구하고든 그냥 가벼운 친구 사이로 지내고 싶어요.”
“알겠어요.”
기타하라는 다소 실망한 듯이 대답하고 난로의 불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기타하라 씨를 배신한 게 되는군요.”
“그렇지는 않아요. 젊었을 때는 누구나 생각이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기타하라 씨는 언젠가 제게 말했었지요. 인간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요. 그때 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했었어요. 제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요코 씨, 난 요코 씨와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요코 씨가 절 배신했다고는 절대 생각지 않아요.”
그때 기타하라는 분명히 말했었다. 지금은 자신도 한평생 변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맹세할 수는 없으므로 결혼 약속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고마워요, 기타하라 씨!”
기타하라의 너그러운 태도에 요코는 감동했다.
“하지만 저로서는 배신한 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요.”
“요코 씨, 용서해 줄 테니 안심하세요.”
기타하라는 쾌활하게 말했다. 다행히 요코의 가슴속에는 아무도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기타하라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엇다.
“하지만………”
요코는 문득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기타하라는 요코의 변심을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요코는 용서받은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이 배신했다는 사실은 설사 기카하라가 용서해주더라도 엄연히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기타하라에게도 진정으로 인간을 용서할 능력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왜요?”
“정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든 요코의 검은머리가 어깨에 흘러내렸다.
“난 벌써 다 잊었는데 스스로 자신을 탓하는 건 말도 안돼요.”
기타하라는 요코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