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노동자 축구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방문한 북한노동자 대표들이 참배를 한 곳은 현충원이
아니라 마석 공원 묘지에 있는 전태일의 묘소이었다.
1970년 11월 동갑내기인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 상가 다락방에서
풀빵을 먹으면서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리는 어린 여공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하여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어 얹고 불을 붙였을 때 나는 그 곳에서
몇 km 떨어지지 않은 교회에서 여공들을 상대로 4영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청계천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교회 장로님이 나이 어린 여공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신학생이었던 나에게 그들의 새
신자 교육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전태일은 자신을 버려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경계를 넓히고 있을 때 나는
같은 대상을 향해서 죽어서 들어간다는 천국의 표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즉 전태일은 여공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을 때 나는 그들에게 구름 과자를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내가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십 여년 후이었다. 비록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래도 전태일 때문에 삶에서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최근에 명성 교회 김삼환 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증여한 문제로 교계 여론이 들끓고 있다.
80 년대 초 김 목사가 명일동 500번 뻐스 종점 앞 3층 건물에 교회를 개업했을 때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상고의 교목이어서 우리는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이였고 김 목사는 나에게 자기
교회에 와서 교육 목사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묻기도 했지만 교단이 달라서 갈 수 없었다. 이 때 김 목사는
대단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역시 그는 목회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내 친구 가운데 김 목사만큼은 못하여도 자신이 교회를 개업해서 대교회를 만든 사람이
있다. 그는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려고 해서 신학 공부도 시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아들이 결국 목회를 하고
싶지 않아해서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은퇴를 했다.
나는 친구가 평생을 바쳐서 이룩한 교회를 아무런 조건 없이 깨끗이 물려주고 완전히 손을
털고 은퇴를 했으리라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조건이 있고 은퇴 후에도 자신 평생을 바쳐 이룩한 교회에 대하여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서 전혀 궁금하지 않다.
북한에 있는 봉수 교회는 사회주의 사회의 교회이고 남한의 교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교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교회가 자본주의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교회가
성경이나 신앙의 원칙대로 운영되기를 바라지만 엄밀하게 볼 때 기독교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예수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했을 때 비록 자기가 세운 교회를 염려하여 꼭 자식에게 물려주어야만 문제 없이 잘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나는 호주와 한국의 2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2중 국적은 얻기 쉽지만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2중 국적은
얻기 어렵다.
나라라면 당연히 법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 나라도 법이 있을 것이다. 그 나라의 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희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의 희망인가? 약자들의 희망이다. 한이 되고 원이 되는 희망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한이 되고 원이 되게 사모하는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종교를 말한 것이 없이 기성의 종교는 대중들의 눈에 꽁깍지를 씌어서 그
나라를 보지 못하게 함으로 강한 자들의 종 노릇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기성의
종교는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아니라 장애가 되어 왔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지만 예수는 성전에서 난장을 부리지 않았던가?
첫댓글 한국도 만 65세 이상이면 이중국적 취득이 가능하여 많이들 이중국적을 가지고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