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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회심 직후 활동
사도행전 9:19~31
오늘 우리가 함께 받들어 읽은 본문 말씀은 바리새인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약 3년 내지 4년 동안의 활동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되는 이 청년 사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부터 초기 몇 년 동안에 걸쳐서 보여준 신앙과 사역의 행적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영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울은 회심 직후 다메섹 교회 형제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18절부터 19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며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여기서 보면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의 빛을 쐰 결과 그의 눈이 시력을 상실했는데, 아나니아 성도가 와서 그에게 안수함으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보게 되자 곧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가 되었다는 확실한 공적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제자가 된 사울은 먹고 마심으로 삼일 금식으로 연약해진 몸이 회복되자마자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사울이 그리스도의 형제들과 깊은 연대감과 일치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기독교회를 예수님 자신과 일치되게 말씀하심을 통하여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인가를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례를 받자마자 주님의 제자들인 다메섹 교회 성도들과 함께 며칠 동안을 함께 머물면서 교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참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을 가장 소중하고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자신이 유대인 랍비요 산헤드린 공회의 준회원 정도의 높은 지체를 가진 자일지라도 사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특권이 없음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시편 84:10 이하에서 고라 자손은 고백하기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함께가는교회 성도 여러분도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청와대 만찬에 참석하는 것보다, 재벌 총수의 초대로 호화로운 만찬에 참석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 되어, 주님의 궁정의 예표인 교회의 뜰 안에 모여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고 이를 사모하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사울은 즉각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20절로부터 2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원문에 보면 강조된 단어가 ‘즉시로’라는 단어입니다. 사울은 회심하고 다메섹 성도 공동체와 하나 된 마음을 나눈 직후에 곧장 다메섹 성 안에 있는 유대인 회당들을 돌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문화적으로는 헬라적인 영향에 많이 노출되어 있으며 언어적으로는 아람 말을 하는 유대인들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의 영적인 영향력을 상당히 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사울이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받아와서 자기들에게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가는 일에 앞장서 협조해달라고 청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기네 회당에 와서 증거하는 내용을 보니,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구약 성경을 펼치더니 그를 성경과 맞지 않는 가짜 그리스도요 이단의 괴수라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의 머리요 유대인들의 종교적 수장인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자기 앞에 두고서 묻기를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태복음 26:63)
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기를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이 신성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라고 말하면서 사형을 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죄목의 이유가 바로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인데, 십자가 형에 처하도록 예수님께 내린 대제사장의 선고가 부당하고 도리어 예수께서 주장하신 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진실이라고 유대인 회당에서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에 다메섹 회당의 유대인들은 황당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 이 사람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멸하려고 왔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끌어가려고 왔는데,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지 그 속내를 몰라서 황당해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속임수로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할 궁리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 회당 내에도 기독교인들이 정체를 숨기고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을 체포할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 예후라는 장군이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 시절에 바울 숭배가 크게 번성하자 이것을 척결하려고 속임수를 쓴 적이 있습니다. 예후 장군은 정권을 잡자 자기가 열심 있는 바울 숭배자라고 소문을 내놓고 바알 신을 섬기는 큰 제사가 있다고 바알 대성회를 열어 놓고서 전국에서 바울 선지자들을 다 불러서 큰 바알 신당 안에 밀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복을 다 입혀놓고 제사를 드리게 한 후에 군인들 팔십 명을 밖에 배치해놓고 그 군인들에게 명령하기를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고 다 죽여서 바알 숭배자들을 없애라고 함으로써 단번에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바알 숭배자들을 척결한 적이 있었습니다(열왕기하 10장).
그래서 사울 청년이 옛날 예후 장군처럼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열심히 변증하고 있는 줄 알고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좀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 회당에서만 그렇게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 아니요 다메섹의 다른 유대인 회당에 가서도 아주 열정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구원자이심을 성경을 펼쳐놓고 차례로 입증하여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한편은 반대도 하고, 한편은 의아스러워서 지켜보자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서 큰 혼란이 유대인 회당에 퍼져나갔습니다. 반면에 다메섹의 기독교 형제들은 사울의 이러한 활동을 보면서 큰 용기와 안심을 얻고 전도의 용기를 내게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이 진실한 신자가 되자 마자 즉시로 전도하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3 말씀에 이르기를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을 결코 속에 감추어둘 수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 그 진리에 대한 참 믿음을 가진 자는 입을 열어 담대히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0:9 말씀에 보면 선지자가 고백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한 것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뿐 아니라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 참 믿음을 가진 자라면 이 생명의 말씀을 마음에 숨겨놓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예수님을 자랑하며 예수님이 세상이 오신 구원자 그리스도요 그가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의 영이시요 만민의 심판장이요 세상 모든 군왕들의 왕중 왕이심을 담대히 입술로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는 성도요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제자요 교회에서는 성도들 간의 사랑하는 형제지만 세상에 대하여서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요 충성된 제자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인 동시에 세상에서의 담대한 증인으로 사는 것이 참 성도다움의 증거이므로, 사도 바울이 믿자마자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즉시로 담대히 세상에서 증거한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울은 아라비아로 가서 삼년 동안을 지냈습니다.
23절의 초반절에 보면 “여러 날이 지나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문에 보면, 이 ‘여러’라는 단어는 헬라어 ‘히카노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허다한, 충분한, 넉넉한, 만족한, 오랫동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러 날이 지나매’라는 말은 단지 며칠 지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기간은 삼년이나 되는 긴 기간임을 알려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1:15 이하의 말씀에 보면 이 기간 동안의 사도 바울의 행적을 알려주는 그의 진술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에 삼 년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라디아서 1:15~19)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시간이 회심 후 삼년이 지난 때라고 사도가 회상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삼년 동안 다메섹의 신앙공동체에 속하여 활동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말했듯이, 그 다메섹 형제들과 계속 함께 삼년 동안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기간 동안에 아라비아로 떠났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아라비아로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가능성은 전도하러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다메섹 성이 아라비아를 지배하고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당시 나바테아 왕국의 지배자는 아레타스 4세, 곧 고린도후서 11:32에서 아레다 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왕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울이 다메섹에서 전도하고 있는 중에 아레타스 왕의 성읍 장관이 사울을 체포하려고 성의 입구를 막고 지키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미 사울은 나바테아 왕국의 평안을 해치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체포 대상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울이 나바테아 지역에서 복음 전도를 계속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큰 영향력을 어디에서 끼쳤을까 추측하면, 사울이 그 삼년 기간 동안 다메섹에만 머물지 않고 아라비아로 내려가서 전도하였을 가능성도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그의 초창기부터 이방 지역에 전도활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두 번째로 가능성이 더 큰 것은 사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주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라비아는 곧 호렙산이 있는 장소입니다. 사해 부근의 느보산은 모세가 별세한 곳이요 그곳을 넘으면 곧 바란 광야, 미디안 광야, 시내 광야가 펼쳐집니다. 그곳에는 호렙산, 시내산이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사람들 모세와 엘리야가 그 광야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사명을 받곤 하였습니다. 그 시내산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년 동안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삼년 동안 영적 훈련을 받았듯이, 자기도 광야에서 삼년 동안 주님과 더불어 성령으로 영적 훈련을 받으며 복음의 비밀을 깨우치기를 사모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절 이하를 보면, 사울은 그가 다른 사도들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은 분들과 교제하면서 배운 바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아 복음의 비밀을 받았노라고 고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가 전한 복음을 종종 ‘나의 복음’(로마서 16:25, 2:16)고 부르곤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1,12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러면서 그는 갈라디아서 1:15 이하의 말씀에서 이르기를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사울은 결심하고서 아라비아로 가서 삼년 동안 모세와 엘리야처럼 광야에서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복음의 깊은 비밀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특별한 성령의 계시로 복음 곧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담긴 구속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승귀하신 존귀하신 영광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영광과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각양 성령의 은사들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전개에 대한 계시들을 풍성히 받는 은총을 입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우리 주님께서 신약 교회의 영적인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영적 지혜와 지식을 받아서 이를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에 전달하고자 주님이 택정한 귀한 금그릇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풍부한 복음의 비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계시는 주님의 작정하신 계획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 사막에 들어가서 거룩한 고독 속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그와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갈망했던 선택에 대한 복스러운 주님의 선물이라 생각됩니다. 그가 혈육과 상의를 나누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 거룩한 결단을 주님께서 받으시고 이러한 깊은 영적 지식의 은총을 주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울의 삼년 동안의 아라비아의 고행과 묵상이 후대의 교회에게 큰 젖줄이 된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의 직분을 가진 자가 아니니 사도 바울처럼 새로운 복음을 받겠다고 다 내려놓고 홀로 깊은 산속 동굴에 들어가는 모험을 해서는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딱 이단의 괴수가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박명호라는 이단 괴수가 얼마전에 티브에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에서 나왔는데, 그는 세상 공부는 전혀 배우지 않은 평범한 나뭇꾼 출신이라면서 자기만이 순수한 영으로서 참된 영적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혼자만의 영적 세계를 추구했는데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이름이 ‘석국’ 곧 ‘돌나라’라는 공동체를 건설하여 제주도에만 해도 그의 추종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찰들이 그의 비리를 추적하니까 브라질로 도망가서 거기서도 집단 농장을 만들어 신도들을 가스라이팅시켜서 어린 아이들이나 처녀들까지 다 자기의 성적 몸종으로 만들고 남자 신도들 역시 모두 무일푼 노동자로 만들어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이렇듯 계시된 성경적 진리를 떠나서 무엇인가 자기가 영적인 세계를 열고자 하면 반드시 이단과 사이비의 영에 속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속이는 영인 마귀는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계시된 진리를 벗어나 헛된 것들을 추구하게 만들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추구하게 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도들이 순결한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의 기록을 벗어나지 말고, 이 말씀의 터 위에서 순종함으로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인치신 대속의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서 요동하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진리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려는 왜곡된 복음을 일체 배격합시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 곁에서 듣고 보고 경험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들을 기록한 사도들의 편지들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만나주시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친히 자기를 계시해주신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만을 신약 성경의 정경으로 삼고 그 이상 다른 것들을 추구하지 맙시다.
넷째로, 사울은 다메섹에서 도피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고향 다소로 내려갔습니다.
23절로부터 30절 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여러 날이 지난 것은 사울이 회심한 지 삼년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전도하다가 주님과의 영적 교제와 깊은 복음의 비밀을 배우고자 아라비아로 가서 엘리야처럼 호렙산 동굴 같은 곳에서 기도하면서 복음 진리의 계시를 받고서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하고 당국에 참소하여 나바테아 다메섹 지방 장관이 그를 체포하려고 성문에 병력까지 배치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을 신뢰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렸습니다. 이처럼 투옥이나 순교를 일부러 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바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여서 핍박을 만나면 이를 적절하게 피하고 다른 곳,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계속 찾는 것이 지혜로운 전도 자세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피신한 직후 예루살렘으로 처음으로 올라갔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울은 사도들과 만나 교제하고자 했으나 아무도 그의 전향을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워낙 교회를 핍박한 악명이 높아서 사울이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체포하려는 술수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 바나바라는 훌륭한 신자를 사울에게 붙여주셨습니다. 바나바는 성품이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고 격려의 사람인지라, 사울의 소식을 자세히 듣고 그의 진정한 회심을 확인하고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했습니다. 사도들과 약 2주간에 걸쳐 지내는 중에도 그는 쉬임없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스데반 집사가 했던 일과 같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사울은 과거에 자기가 스데반에게 행한 일처럼 이제는 자기가 돌 맞아 죽거나 칼 맞아 죽을 각오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2장 17절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계시해주셨습니다. 읽어드리면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2:17~21)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열렬하게 전하는 중에 유대인들의 흉악한 살해 위협이 고조될 때에 주님께서 친히 기도하는 사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주의 뜻을 깨달은 사도 바울에게 형제들 역시 사울의 신변 위협을 깊이 인식하고 그를 데리고 가이사랴 항구로 데려와서 배를 태워서 그의 고향 다소로 보내 그곳에서 피신하여 쉬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사울은 고향 다소에서 거의 몇 년 동안 지내면서 그 지역 길리기아 지역에서 전도하며 차분하게 때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의 회심 직후에 있었던 교회의 불안정한 상황이 일단락지어졌습니다. 교회는 사울로 인하여 평지풍파를 당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흩어져 들불처럼 더 번지게 되었으니 핍박자 사울까지 담대한 복음 전도자로 변신한 이 때쯤에는 이제 교회는 평안해지고 든든해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31절에서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핍박으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회심과 그 이후의 활동 과정에서 신약 교회는 이제 예루살렘 뿐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교회에까지 든든하고 평안하게 서가게 되었고, 그 지역을 넘어서 안디옥, 이디오피아, 아라비아 지역까지도 복음이 전파되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진 핍박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친히 자기의 몸된 교회를 지키시고 세워가시며 핍박자 사울까지 위대한 복음의 증인으로 삼으시고 교회의 영적 젖줄로 삼아 복음의 비밀을 교회에 풍성히 증거하는 교사와 이방 전도자로 삼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막으려는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도리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더 드넓은 지역으로 확산되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역사의 주인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시대에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굳게 믿고 이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서 요동하지 맙시다. 또한 이 복음 진리를 담대하게 믿은 즉시 증거한 사울처럼 우리도 힘있게 이 복음을 입을 열어 담대하게 전합시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역시 보고 들은 바를 증언한 것이 신약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사도 바울에게도 주님께서 아라비아 사막에서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시고 진리의 풍성함을 그에게 전해준 바를 그의 서신에 담아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로 남겨놓았으니, 우리들은 이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서 요동하지 맙시다. 그리고 초신자와 같은 사울을 다메섹의 아나니아 성도가 도왔고, 예루살렘에서는 바나나가 그를 잘 인도하여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처럼, 우리도 초신자들이 들어오면 교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자가 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도운 초신자들이 교회에 잘 정착하고 기쁨으로 헌신하도록 도와줍시다. 그리하여 이 시대 우리 함께가는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성도의 수가 더 많아지도록 귀하게 쓰임받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