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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의 제적등본. 어머니 이학규의 직업은 ‘주막업’이라 적혀 있고, 이씨와 이씨의 남편 박현주와의 관계는 ‘첩’으로, 아들 박헌영은 ‘서자’로 적혀 있다. /주간조선
박헌영은 소년 시절에 비만하고 키가 작았다. 그는 1910년에 서당을 다녔고 1912년에 예산군 대흥면의 대흥(大興)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5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합격했다. 재학 중에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책을 읽는 것이 취미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기 전이었으니 학비는 아버지가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1974년에 다시 편책한 박헌영의 호적등본에 따르면 무슨 연유였던지 1932년에 어머니 이학규는 박현주와 이혼했으며, 1934년에 박헌영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호주를 상속했다. 1932년이면 박헌영이 이미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공산주의자로 활약하던 시기였다는 점으로 본다면 아마도 첩실(妾室)의 서출(庶出)로 기록되기보다는 일가 창립을 하는 것이 더 떳떳하다는 판단에 의해서 이혼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에 작성된 호적에 직업이 주막업으로 된 것을 보면 이미 이혼 전에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주막을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우한 소년은 신양장터에서 주막집을 경영하면서 주정뱅이 사내들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술심부름을 하는 동안 가진 자에 대한 분노와 적의(敵意)를 많이 느꼈을 것이다. 뒷날 박헌영이 인민 전선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그가 누구보다도 계급적 적의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리 민족의 해방이나 통일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지주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 그 이면에는 강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토지 모순에서 해방 정국에 대한 해법(解法)의 교훈을 얻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