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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 해도 즐거운 일들만 가득하시길
오늘 빛살무늬님은 아빠가 되실/되었을 텐데
아이와 엄마 아빠 세 가족 모두 무탈하게
밤에는 잘 자고 낮에는 잘 노는 그런 가족 되기를 바랍니다.
29-30
제5장
이태리 국가-위대한 서구엘프족과 길베리네족 가계의 시작-프레드리히 2세 황제의 서거-만프레드가 나폴리왕국을 지배하다-롬바르디에서 구엘프족과 길레리니족의 운동-교황 앙주의 찰스를 시칠리아왕국과 나폴리 왕국을 수여invest A with B-교황 니콜라스3세의 야심찬 계획-교항의 조카들-시칠리아 만종사건- 로돌프 황제가 수많은 도시에게 독립을 허용하다-Institution of Jubilee-아비뇽 유폐
이 시기에 이태리 국가(?)는 다음과 같은 수단에 의해 다스려졌다. 로만족은 더이상 집정관들consuls을 선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대신에 동등한 권력을 지닌 한 명의 원로senator를 임명했지만 때때로 그 이상의 원로를 임명했다. 롬바르디 도시들이 프레드릭 바바로싸(프레드리히 1세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여 형성한 동맹league은 여전히 유지되었으며 밀라노, 브레시아, 만투스와 베로나, 비첸자, 파두아 그리고 트레비사와 더불어 로마냐 지역의 훨씬 더 많은 도시들을 포함하고 있었다.comprehended 황제를 지지하는take part with 도시들은 크레모나, 베르가모, 파르마, 레지오 그리고 트렌토였다. 롬바르디의 다른 도시와 요새, 로마냐와 트레비사의 경계지역march은 필요에 따라 이쪽저쪽을 오갔다.
오토 3세 시기에 에쩰린이라는 사람이 이테리에 왔다. 그는 이태리에 머물면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 또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이 이름도 에쩰린이었다. 이 사람은 부와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프레드리히를 지지하였다. 이미 말했듯이 프레드리히는 교황에게 적의를 갖고 있었다. 프레드리히는 에쨀린의 도움과 선동으로 베로나와 만투스를 탈취하고took 비첸차를 파괴하고 파두라를 점령하였다. 그런 후에 도시 연합의 군대에게 행군명령을 내려 투스카니를 향해 곧바로 진격시켰다. 도중에 에쩰린은 트레비시안 경계 전 지역을 정복하였다. 하지만 페라라에게는 승리하지 못했는데 교황이 롬바르디 지역에 보유하고 있는 군대와 아조네 다 에스테가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들이 물러남에 따라as the enemy were compelled to withdraw 교황은 아조네에게 페라라를 봉토로 주었다. 아조네는 그 도시를 통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승계받았다. 프레드리히는 피사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투스카니의 영주가 되고자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에서 누가 적이고 친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던 와중에 프레드리히는 때에 따라occasioned 이태리를 황폐화시킬 수도 있는 수많은 불화의 씨앗을 뿌렸다. 이 불화의 씨앗은 구엘프와 길베리니의 파당faction에 의해 증폭되었다. 구엘프는 구엘프라 불리는 교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고, 길베리니는 황제를 따르는 추종자들인데 이 명칭이 처음 등장한 곳은 피스토리아이다. 프레드리히는 피사에서 행군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 영토들을 습격하고 황폐화시켰다.wasted 그리하여 별다른 구제책remedy이 없는 교황은 자신의 선임자들이 사라센에 대항하여 했던 것처럼 프레드리히에 대항하여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내걸었다. 프레드리히는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와 다른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신민들people에 의해 갑자기 내처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took into his pay a number of Saracens.(다수의 사라센인에게서 자신의 급료를 챙겼다. 즉 사라센을 공격했다. 뭐 이런 뜻?) 그리고 교황의 저주papal maledictions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신민들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교회에 대항하여 굳건한 방벽bulwark을 이태리에 건설하기 위해 프레드리히는 나폴리 공국에 노체라(?)를 그들에게 주었다. 노체라는 신민들만의 피난처를 가지고 있으며 보다 더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지금 교황은 이노센트 4세인데(The pontificate교황의 임기 was now occupied by Innocent 4) 그는 프레드리히를 두려워 제노아로 가서 거기에서 다시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에서 이노센트 4세는 리용에서 열릴 평의회를 소집하였다. 그 평의회에 프레드리히도 참석할 의향이 있었는데 파르마에서 발생한 반란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거절당하였기에 프레드리히는 투스카니로 갔고 그곳에서 시칠리로 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아들 콘라드는 수아비아에 있었고 맨프레드는 푸글리아에 있었다. 맨프레드는 베네벤토에서 듀크를 나았는데 첩concubine에게서 태어났다. 콘라드는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왔는데 나폴리에 도착하는 중에 죽었다. 미성년자인 아들 코르라디노를 남겨 두었는데, 코르라디노는 그 때 독일에 있었다. 이런 와중에 만프레드는 국가를 장악하고 처음에는 코르라디노의 수호자로 (자처했지만) 나중에는 코르라디노가 죽었다고 발표한 공보에 따라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교황과 나폴리사람들의 소망과는 반대로 복종할 것을 강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