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사이와 간격☆]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사이와 간격]
오성일 시집 / 현대시세계시인선 073 / bookin(2017.03.31) / 값 8,000원
================= =================
사이와 간격
오성일
저녁이 오고
별들이 제 자리를 찾아 떠오를 때
어떤 별자리의 꼬마별은,
가령 게자리의 어린별 하나는
어제 떴던 그 자리에 표해두는 걸 깜빡 잊고
제자리를 못 찾아 허둥댈 때 있다지
그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리를 맞춰 주는 건
오래된 떡갈나무라지
가지 하나를 높이 쳐들어
왼쪽, 좀 더 왼쪽
아니 너무 왼쪽 말고 거기쯤……
실눈을 뜨고 간격을 재가며
방향을 맞춰줄 때
게자리 어린별은 게걸음으로
엉덩이를 달싹달싹 놀려가면서
뒤똥대똥 제자리를 찾아간다지
초저녁 유난히 깜빡이며 바동대는
푸른 별이 바로 그 별이라지
떡갈나무가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젖히고
한참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이면
그 때 비로소 별들은 일제히 빛을 밝혀
하룻밤의 축제를 시작한다지
눈동자에 별빛을 담은 어진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듯이
나무의 손짓에 눈 맞추며
어린별처럼 제 자리를 찾아간다지
친구의 자리 먼저 가 빼앗지 않고
남의 자리 제 자리라 밀치지 않고
사이와 간격을 지켜준다지
별처럼 함께 어울려 빛을 낸다지
변명
오성일
나는 사실 같은 거짓을 써볼까 합니다 거짓을 거짓 아닌 듯이 쓸까 합니다 남들은 아는 거짓을 나는 모르는 척 써볼까 합니다 남들도 알고 나도 아는 뻔한 거짓을 짐짓 참인 듯 써볼까 합니다 거짓이지만 현실인 것에 대해, 거짓과 거짓 아닌 것의 경계쯤에 대해 써보자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을 써보자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알 듯 모를 듯 써야합니다 모르는데 아는 듯 써야 합니다 못 알아듣고도 알아들었다는 낯빛으로 말입니다 벌거벗고도 벌거벗은 듯 써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쓸 수가 없습니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벌거벗은 것을 벌거벗었다고 배꼽을 잡고 깔깔댈 아이가 있을까봐 도무지 그렇게는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시 생각합니다 모르는데 아는 듯 쓰는 것을 그만 두고자 합니다 거짓을 참인 듯 쓰는 것을 단념코자 합니다
꽃 보고도 웃지 못하는 저녁이 있어
오성일
나는 견디는 사람
내 아들을 견디는 사람
내 어머니는 견뎌낸 사람
나를 견뎌낸 사람
나는 좀 배우고 먹고는 살아
이럭저럭 내 아들을 견뎌내는데
이렇다 할 배움도 없이 밤도 없이
내 어머니 나를 어찌 견디셨는가
꽃 보고도 웃지 못하는저녁이 있어
멈추어 자식의 일 생각하느니
그해 겨울
오성일
밤새 큰 눈이 온 아침,
늙은 소나무가
거친 눈을 다 받아내고
착하고 따스한 눈가루만
솔가지 사이사이로
포슬포슬
내려주었다
산토끼들이
어린떡갈나무 밑줄기를 갉아먹고
동그란 똥을 몇 알씩
뜨뜻하게 싸놓고 떠난 뒤에
늙은 소나무는
눈 쌓인 가지를 툭, 꺾으며
후우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악착
오성일
안개 낀 봄밤이었지요
노숙의 절름발이 하나가
허공을 한 바퀴 휘저어
허기를 한 발짝씩 옮기고 있었지요
한 발은 악착같이 버티며
한 발은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을 저으며 가고 있었지요
들렸던 왼발이 내려놓이고
바텼던 오른발이 들리는 순간이
휘청하고, 그 때 바람은 빨리 불어갔지요
그 순간을 남자와 여자와 나와
다리가 좀 성한 절름발이들이
절름 절름 절름,
악착같이 앞지르고 있었지요
지하철 막차를 알리는 소리도
그 때 딩딩딩딩 울어대고 있었는데
악착 같은 안개는
밤의 밑바닥을 거진 삼키고 있었지요
우리
오성일
우리라는 말은 참 든든한 말
힘이 센 말
갖고 싶은 말
그러나,
그래서 우리라는 말은 위험한 말
가난한 우리가 만나면 밥이 되고
쓸쓸한 우리가 만나면 별이 되고
착한 우리가 만나면 숲이 되지만
그러나, 그러나
모리배들이 만나면 밥을 빼앗고
정상배들이 만나면 별을 훔치고
폭력배들이 만나면 숲을 짓밟고
저희끼리 나누고 눈감고 봐주는
괴물 같은 우리가 되느니
우리 아닌 무리가 되나니
함부로 우리를 만들지 말 것
섣불리 우리 속에 갇히지 말 것
우리는 지금 무리가 아닌지
고요한 때에 고요히
의심할 것
기대다
오성일
기댄다 꽃애 기대고, 송사리떼 지나는 물그늘애 기대고, 조금 남은 저녁햇살의 등짝에 기댄다 기댔다가 넘어진 날이 많았다 실은 너 몰래 네게도 기댔다가 기우뚱 중심 잃은 마음을 부축해 돌아온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샌가 또 기대고 있다 서로 발을 빼지 못하는 그 기댐에 기대고 있다 기댄 채 함께 흔들리고 있다 마음 한 쪽 기울이니 내게 기대오는 꽃, 그늘, 저녁, 그대의 글씨체를 닮은 따스한 상처들
한로寒露
오성일
잠자리를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때.
그러나
서글퍼지는 때.
공범들
오성일
컵라면 끼니 삼아
빨리빨리
스크린도어를 고쳐야 했던 청년이
열차에 치어 죽었다
사람들이
득달같이 들고일어나
무슨무슨 매뉴얼을 흔들어대며
관계자들을 성토했다
눈만 뜨면
빨리빨리,를 외쳐대던
그 사람들이었다
눈사람
오성일
하얀 눈사람
그림자가 어둡다
때 묻지 않은 눈의 사람도
마음속에 볕 안 드는 응달 있는지
사람 눈길 적은 쪽으로
하얀 그림자 적막하다
눈꽃처럼 하물 없는
눈나라의 사람도
눈마다 눈물 담은 땅 위의 사람이나
눈발 같은 슬픔 한 가지라는 듯
그림자 속에 설핏설핏
눈물의 비늘 박혀 있다
큰일 보다
오성일
오늘 아침
화장실 휴지가 툭, 끊어진다
오늘을 너무 달기지 말라는 뜻인가
아닌 게 아니라
내일이 딸려라도 올 것처럼
생각을 잡아당긴 날 있었다
그러다가 툭 끊어져버린
휴지 한 칸 같은 하루를
멀뚱하니 바라본 날 있었다
엉덩이를 내놓은 채
다시 헤아려보는 마음에
오늘 여기 앉아 큰일 본 일
이보다 아주 큰 일
딱히 무얼까 하며
시詩
오성일
세상은 나에게 왜 살 궁리를 하지 않느냐고
자꾸 나의 궁리를 추궁하네
나는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는데
쓸쓸하고도 아늑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는데……
긴 졸음, 잠깐의 비
지나고
귀가 밝아진 이 새벽에
방심
오성일
그대로 두어라
텅 빈 마음
여름비 지난 뒤
저 혼자 말라가는 뒷마당의,
바람기 없는 여름 저녁의
오동잎 한 잎의,
거기 근심이 없어 조는
청개구리의 눈꺼풀의,
끝도 없이
꽉 찬
방심
은하열차에서 역을 놓치다
오성일
퇴근길 지하철
내 앞에 앉은 볼이 맑은 처녀가
사내의 어깨에 작은 머리를 기댄 채
핸드폰 게임 중입니다
바둑판 칸칸이 곰돌이 얼굴들
그 중 몇 개가 펑, 터지면서
주르륵 아래로 쏟아지고
별이 반짝 터지고 점수 터지고
호호호 처녀의 웃음이 터지고
내려보던 사내가 방긋이 웃고
그러면서 둘은 던지거니 받거니
따스한 눈길을 나눕니다
따스한 저녁을 실은 기차가
아늑한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 갑니다
나도 잠깐 따스한 딴생각을 하다가
별 정거장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눅눅
오성일
김통을 왜 다 열어놓고 먹느냐고
김이 다 눅는다고
밥 먹는 나를 아내가 건드렸다
난 한 마디도 안 했다
입천장에 김이 붙어 있었다
잠든 아내의 옷섶을 헤쳐놓았다
가슴뚜껑도 열어 두었다
쪽창문을 조금 젖혀두었다
갱년기의 여자
이제부터 긴 건기를 지나야 할 저 여자
달빛에 좀, 꽃숨에 좀,
눅눅해지라고
꽃싸움
오성일
꽃들이 한창 몸싸움 중입니다 한철 권력이니
밤낮을 가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싸움구경만한 구경 없다고
사람 눈들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여의도 국화 앞마당에 지금
사생결단 꽃싸움이 한창입니다
시절로는 보릿고개인데
잠시 민생이 환해졌습니다
월하정인月下情人
오성일
달이 지나다
빈 방이 있느냐 묻는다
살구꽃 그림자를
처녀처럼 이끌고 와서는
고지서
오성일
이번 달은 관리비가 많이 나왔습니다
조금 더 쓸쓸했을 뿐인데
홀로 깨어 무언가를 생각하는 밤이 길었을 뿐인데
그걸 계량기 눈금이 읽었던 것인지
귀신같이 관리비가 더 나왔습니다
상추꽃
오성일
여름내 뜯어도
여름내 새 잎 주더니
가을볕 빈 하늘
마른 대궁 꼭대기
무명꽃술 여남은 송이
흔들리고 있어라
숱 적어진
귀밑머리 몇 올로
우리 어미 그림자
엷게 웃고 있어라
여름내 죽지 뜯겨도
여름내 새 잎 주머니
그 사이
오성일
그 놈이
나무 아래로 걸어와
쉬는 사이
나무가
그늘에 발을 식힌다
결경로당 빈 방에
선풍기 혼자 돌고
문지방에 노파 하나
졸고 있는
그 사이
그리운 겨울
오성일
양철 뚜껑을 인 황토굴뚝과 삼십 도쯤 기울어진 나무전봇대와 브로크 담 아래 뒹구는 살빛 연탄재와 송판을 듬성듬성 잇댄 낮은 울타리 끝 한 종지 얹힌 눈 속에 발을 묻고 두리번거리는 아침 까마귀, 그것들 없이도 십이월이 가고 일월이 올 수 있을까 골목을 돌면 반창고를 끊어 붙인 금간 창문, 그 너머 볕 안 드는 방 아랫목 이불 밑 주발 두 개, 우물가 늙은 꽃나무를 빙 둘러 아버지의 소주병들이 거꾸로 박혀 있던 그 안으로 또 다시 커다란 송이눈은 날아들 때 마당귀 하얀 눈밭에 뿌려지던 내 오줌의 귤물빛의 나른함이 없이도 세 시가 가고 다섯시가 올 수 있을까 녹슨 철대문 갈라진 틈새로 날아들던 분홍봉투의 성탄 카드와 그 애를 별이라 생각하며 쪽지를 적던 밤 성에 낀 간유리창으로 젖어오던 백열가로등의 불빛도 없이 내가 지나는 이 계절이 겨울일까 정말 겨울일까
.♣.
=================
■ 시인의 말
멸치는 꼬리 때문에 반짝이고,
미루나무는 이파리 때문에 반짝이고,
저녁은 바다 끝의 노을 때문에
반짝인다,
반짝인다는 것은
무언가의 끝을 파르르 떨고 있다는 것,
나는 마지막 한 줄 끝에서
얼마나 진저리를 쳐야 하는 것일까.
2017년 2월
오성일
.♣.
=============== == = == ===============
오성일 詩集 [※사이와 간격※]
[ 해설 ] -
생의生意, 또는‘엘랑 비탈Elan Vital’의 시적 공간
백인덕 / 시인
1.
시, 특히 모든 서정시의 본질적인 특성인 주관성(독백,지향), 일회성, 무목적성 등은 개별 작품들이 회감, 즉 융화融和의 상태를 지향하면서 일정 부분 상쇄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차원을 벗어나 읽는 이를 감흥하면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간다. 어떤 연관, 맥락 속에서 본질적인 결속을 통해 영혼의 깊은 향훈香薰,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어떤 정조를 동시대의 정서적 울림으로 크게 증폭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시적 태도이며 수법이다. 무작정 자기를 노출하는 것은 자기 고백에 충실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타자와의 관계 맺음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울림(나의 정조가 동시대적이라는 다른 믿음)만이 시를 실용적 가치가 아닌 존재적 가치로서 소통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질일지도 모른다.
오성일 시인은 세계를 대상화하지 않고, 즉 굳건한 자아의식과 명료한 이성적 판단으로 대상을 인과관계나 필연성 등으로 묶어 분석, 비판, 판단하려 하지 않는 시적 태도를 통해 ‘생의生意’를 새롭게 번뜩이는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인은 이번 시집 『사이와 간격』에서 ‘생을 지향하는 우주적 의지’를 ‘창조적 도약’을 위한 지렛대로 응축하는 이유와 과정을 섬세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자서」를 통해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멸치는 꼬리 때문에 반짝이고/미루나무는 이파리 때문에 반짝이고/저녁은 바다 끝의 노을 때문에/반짝인다/반짝인다는 것은/무언가의 끝이 파르르 떨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이미 체득하고 있다. ‘멸치’, ‘미루나무’, ‘저녁’처럼 그것이 물질이든 개념이든 상관없이 ‘떤다’는 것은 생명의 약동이 끊임없이 분출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그 양태는 ‘반짝임’으로 포착된다. 시인은 거기서 ‘진저리’쳐야 하는 자신의 숙명을 본다 읽는다는 관념적 이해보다 본다(‘반짝인다’,‘떤다’는 시어가 유도하는 시각성에 따라)는 생생한 질감으로 존재의 사태들을 관조하려는 시적 채도를 명확하게 밝힌다.
반지하방 창문으로 보면
아침마다 낡은 구두 신고 돈 벌러 가는
중년의 뭉툭한 발목 빼꼼히 보이고
살 부러진 세발자전거 바퀴 혼자
민들레와 한나절 뱅뱅 노는 것 보이고
일주일에 사나흘은 새벽에 딸깍대며 돌아오는
옥탑방 처녀 에나멜 구두 보이고
꽃 지는 밤 담벼락에 기댄 채
가난한 입술 부비며 붙어 있는
다리 네 개 보이고
철지난 털신 신고 폐지 줍는 노인네의
빵꾸난 리어카 바퀴도 보이고
얼굴은 하나도 안 보이지만
안 봐도 누군지 다 알 것 같고
하늘은 안 보이지만
하늘 밑 사람의 일들 대략은 알 것 같고
나만 아는 발목 근처의 세상사를
곰팡이 약으로 닦아내다가
설핏 눈물이 날 것도 같고
-「풍경을 닦다가」전문
사실, 시의 울림을 이끌어내는 제일의 기제機制는 음악성, 즉 리듬의 효과를 극대화해서 입안에 오래 남게 하는 것이지만 진술성이 강한 작품들에서는 단지 몇 개의 어휘가 리듬을 대체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앞의 시「풍경을 닦다가」의 경우에는 ‘발목’,‘바퀴’,‘구두’,‘다리’등이 그런 효과를 생산한다. 물론 전체로서 창, 작품에서는 ‘반지하방 창문’이 필요하다. 시인은 세계를 대상화하지 않는다. 낡은 구두 신고 동 벌러 가는 ‘중년의 뭉뚝한 발목’을, 민들레와 한나절 노는 ‘세발자전거의 바퀴를’, 새벽에 돌아오는 ‘옥탑방 처녀 에나멜 구두’와 폐지 줍는 노인네의 ‘리어카 바퀴’를 “얼굴은 하나도 안 보이지만/안 봐도 누군지 다 알 것 같은”심정으로 지켜본다. 아니 더 잘 보기 위해, “나만 아는 발목 근처의 세상사”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반지하방 창문’을 “곰팡이 약으로 닦아내”고 있다. 물론 이때 시인은 감정이입이 된다. 대상에게 던져진 시선은 반추反芻하면서 “설핏 눈물이 날 것도 같”은 상태로 동화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하나는 앞에서 본 것처럼 세계를 대상화하지 않고, 동화나 투사投射와 같은 수법을 통해 일체감을 형성하려는 시작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몇 개의 중심 어휘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의미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인용 작품의 경우, ‘다리(발목)’, ‘구두’, ‘바퀴’와 같은 시어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하나같이 지상과의 접점에 위치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다시 말해, 머리(하늘)를 의미하는 대상들이 아니라는 점인데, 시인은 이를 통칭해서 “발목 근처의 세상사”라고 한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생의의 축적은 머리보다 발목에서 이루어진다. 생생한 현실로 살아 있는 오늘은 ‘눈’에 포착되기보다는 ‘다리’로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아직 ‘진저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는 ‘반지하방’이라는 위치가 함축하는 의미보다 ‘보면(본다)’이라는 일종의 관조의 영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읽을수는 있지만, 살아낼 수는 없다는 데서 서정 시인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 물음이 붐비는 진흙탕은 얼마나 조마조마 살맛이 났던지
그랬던 아슬아슬한 흙맛, 살맛 지금 어디 있는지
내 발가락들은 어디쯤에서 꼬물거림을 멈추었는지
세상은 점점 더 진흙탕이 되었는데
발가락은 왜 더 이상 묻지 않는지, 말문을 닫고 사는지
-「물음의 행방」부분
시인의 본래 중심이 머리가 아니라 다리라는 것을 인용 작품의 명징한 비유를 통해 드러낸다. ‘구멍난 양말’이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던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흙맛, 살맛”의 세계가 시인이 정위定位되고자 했던, 아니 뭇 생명들의 가장 자연스런 자리였을 것이다. ‘발가락’으로 존재의 상태를 인식하는 방식은 시인이 얼마나 자기 근원에 충실하고자 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더불어 “세상은 점점 더 진흙탕이 되었는데/발가락은 왜 더 이상 묻지 않는지, 말문을 닫고 사는지”하는 시적 진단과 한탄은 지금 시인이 가로놓여 있는 지점의 모순과 뒤틀림을 그대로 유비하면서 동시에 그 극복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짙은 여운을 남긴다. 사족일지 모르지만, 「엄마의 다섯 번째 계절」에 기록된 에피소드와 “그나저나 오늘은 실이 좀체 안 꿰어져서 구멍난 인현 씨의 양말만 멀뚱하니 멀뚱하니 바라보는 인현 씨의 어머니입니다”라는 마지막 연은 시인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보인다.
2.
시가 가진 매력 중에 가장 유혹적인 것은 자기모순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좀 그럴듯하게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러고 나서 매장하는 지상의 역설이다”라는 칼 샌드버그의 말이 적확할지도 모른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에서 초월을 이루는 방법은 ‘상승과 하강’, 즉 ‘극복과 체념’의 두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주 체념해서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것 또한 이 진절머리나는 현실이나 자기라는 존재를 초월하는 방법 중 하나임은 명확하다.
시인이「끙」에서 보여주는 “앉으며, 일어서며, 뱉는 듯, 쏟는 듯, 뭔가, 억울하다는 듯, 마땅찮다는 듯, 누군가, 괘씸하다는 듯, 치민다는 듯, 창자는, 지껄일 게 있다는 듯, 좀 터뜨려야겠다는 듯, 무릎은, 들어맞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듯, 오지게 한 번은 꺾어봐야겠다는 듯, 세월? 그만 됐다는 듯, 저리 꺼지라는 듯” 일종의 “욕같은/독 같은/시 같은” 한마디 ‘끙’이 ‘하강’으로서의 초월을 대표적으로 표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음은 간혹 새어나오는 몸의 신호일 뿐, ‘창조적 도약’을 지향하는 시인의 주된 경향이라고는 볼 수 없다.
‘엘 랑 비탈Elan Vital'은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이 기억-오늘-기대라는 시간론을 전개한 이후, 시간의 비인간성에 질겁해서 도입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오늘을 살 수밖에 없다. 순간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그저 지나치는 시간의 한 통과지점에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순간 그 지점을 지렛대 삼아 다른 차원과 층위로 도약해버리기 때문이다.
생의 진정한 ‘도약’을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겹무늬들이 결국은 같은 질과 양태를 가졌다는 것에 대한 철저하고도 확장적인 인식을 필요로 한다. 시는 정조의 드러냄이지만 정조를 영혼의 울림으로 만드는 것은 인식의 힘이다.
가장 맑은 소리는 유년 혹은 그 이전에 울림통이 텅 비어 있을 때 내는 소리일 것이다. 릴케도 말했지만, 그도 곧 체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맑은 소리가 반드시 향기로운 소리가 아니란 것을 강조했다. 개인의 주관적 정조도 성장한다. 그의 초월이 단순한 체념이나 달관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올 화살을 쏘아올리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 돌아가신 연락도 못 받고
아비 잃은 큰형이 우는 줄도 모르고
순한 눈 꿈벅대며 마석에 사는
네팔 청년 차마르가
차르르 차르르
일 없이 전동 드릴을 돌렸다 놨다 하며
고향 처녀의 검은 머리칼만
삼삼해하는 한낮이다
-「마석가구공단」부분
안다. 나는 잘 안다
저 집 어느 뒷방 구석에는
남에게 안 들키게 가둬 기르는
오래된 울음 하나가 살고 있어서
남들 안 보는 밤이 오면
밥도 울음과 나눠 먹고
연속극도 울음과 같이 보고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깨어
가여운 울음이 잘 자나 살피곤 한다는 것
-「울음이 사는 밤」부분
오성일 시인은 ‘반지하방 창문’의 확장된 시각으로 인용한 두 개의 존재 양태를 보여준다. 이 두 작품의 생의 역설, 혹은 역설적 비극을 다 내포하고 있지만, 그것의 표출과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다른 두 양상으로 드러낸다.
‘차마르’는 ‘가구가 싸고’ 그래서 “사람이 아주 싼 곳” 남양주 화도 마석가구공단의 외국인 노동자다. 네팔 청년이 그와 지금의 마석을 이어주는 것은 ‘눈’뿐이 없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연락도 못 받고/아비 잃은 큰 형이 우는 줄도 모르고”일 없어 한가한 오후를 ‘전동 드릴’을 돌리며 “고향 처녀의 검은 머리칼만/삼삼해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짙은 비극성은 차마르가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라는 데서, 또는 일거리가 없다는 데서, 또는 고향 처녀나 생각한다는 데서 비롯하지 않는다. 객관적 시각에서는 ‘눈’이 네팔과 마석을 연결해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자연을 생활의 정보로 읽어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연락’의 두절이 네팔 청년 차마르의 비극, 아니 소통하지 못하는 존재 일반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함축한다.
반면에 두 번째 인용 작품은 “안다, 나는 잘 안다”라는 직접 진술로 정황이 서술되고 있다.‘오래된 울음’하나는 언표 자체로는 지극히 관념적이지만, 그 맥락은 소통의 여러 경로를 거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고 직접적이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내 집만 이러나 싶어 억울하고/남들도 그러지 싶어 안쓰러운”이라고 그 실상을 공개한다. 이 약간의 편차偏差, 즉 작품을 형상화하면서 시인이 개입하는 정도의 차이는 실제 경험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확장된 시각을 통해 생의 창조적 도약을 지향할 때, 개인과 집단, 혹은 동질성과 이질성과 같은 벽에 가로막히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 시적 효과, 감흥을 이끌어내는 데는 차이가 없지만 시인이 스스로의 생의를 응축하고자 할 때는 불가피하게 균열이 발생한다. 시인은「우리」에서 “함부로 우리를 만들지 말 것/섣불리 우리 속에 갇히지 말 것”이라고 경계하기도 하고.「이러한 셈법」에서 “어쨌거나 되도록 살아 있는 내 생을 위한하며 살아보겠다는 최선의 셈법”이라고 자기 위로도 해보지만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어 보인다.
저녁이 오고
별들이 제자리를 찾아 떠오를 때
어떤 별자리의 꼬마별은
가령 제자리의 어린별 하나는
어제 떴던 그 자리에 표해두는 걸 깜빡 잊고
제자리를 못 찾아 허둥댈 때 있다지
그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리를 맞춰주는 건
오래된 떡갈나무라지
가지 하나를 높이 쳐들어
왼쪽, 좀 더 왼쪽
아니 너무 왼쪽 말고 거기쯤……
실눈을 뜨고 간격을 재가며
방향을 맞춰줄 때
제자리 어린별은 게걸음으로
엉덩이를 달싹달싹 놀려가면서
뒤뚱뒤뚱 제자리를 찾아간다지
초저녁 유난히 깜빡이며 바둥대는
푸른 별이 바로 그 별이라지
떡갈나무가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젖히고
한참을 올려보다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비로소 별들은 일제히 빛을 밝혀
하룻밤의 축제를 시작한다지
눈동자에 별빛을 담은 어진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듯이
나무의 손짓에 눈 맞추며
어린별처럼 제자리를 찾아간다지
친구 자리 먼저 가 빼앗지 않고
남의 자리 제자리라 밀치지 않고
사이와 간격을 지켜준다지
별처럼 어울려 빛을 낸다지
-「사이와 간격」전문
이 ‘자리 찾기’는 그대로 존재의 정위를 유비한다. 가령, “어제 떴던 그 자리에 표해두는 걸 깜박 잊고/제 자리를 못 찾아 허둥”대는 ‘제자리의 어린 별 하나’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메일을 자기 자리를 다시 찾아 시작해야 하는 존재 일반의 표상이다. 시인은「꽃 보고도 웃지 못하는 저녁이 있어」에서 ‘견딤’을 테마로 ‘어머니-나-자식’의 자리를 성찰하지만 천륜天倫이란 이름의 이 자리매김은 모든 생명에게 있어 원초적이면서 동시에 부여된 것으로서의 한계를 갖는다. 이 관계는 엄밀하게 말해 ‘게자리 꼬마별’과 ‘떡갈나무’가 맺는 상관관계와 같은 유형의 관계가 아니다. 시인은 “친구 자리 먼저 가 차지하지 않고/남의 자리 제자리라 밀치지 않”는 세계와 그 조화를 꿈꾼다. 그러나 그 꿈은 강렬하지만, 일종의 몽환으로서 초월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상을 내려온, 시인이 집중했던 ‘발목’의 ‘생의’가 강렬하게 번뜩아며 이번 시집을 관통할 수는 없을까.
3.
쌓이면 폭발한다. 문제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발 딛고 사는 지표면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듯이, 우리 내면에서 어떤 창조적 에너지가 임계점에 닿아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오성일 시인은 뜻밖에도 ‘사이와 간격’을 말한다. 그것은 ‘틈’이고 우리가 숨을 쉬고, 사랑하고, 반성하고, 계획할 수 있는 시공간의 여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메밀꽃 필 무렵」에서 “애당초 시라는 것 배워본 적 없는/반평생을 나귀처럼 늙어온 여든의 아버지가/메밀 심어/메밀꽃 피워 놓고/메밀꽃 보고 시 쓰라고/어머니를 시켜서 부르셨습니다/메밀꽃 필 무렵에 부르셨습니다”라고 이 공간을 이해와 정감이 가득한 지점으로 형상화한다.
필자는 이번 시집에서 ‘창조적 도약’을 향한 응축을 보았다. ‘사이,간격’과 ‘응축’이 상반되는 개념이라는 것은 유아적 발상이다. 꼭지점을 내세워 응축하는 것은 분노로 표출하지만, 사이와 간격, 즉 숨쉴 틈을 형성하는 응축은 생의 창조적 도약을 성취한다. 물론 시는 ‘구멍난 양말’처럼 작은 것, 곳에서 그 내밀한 힘을 감지하고 스스로 폭발할 그날을 계획한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밥 먹고 사는 나와
화물차 몰아서
밥 먹고 사는 태식이와
아파트 경비 서서
밥 먹고 사는 병수와
가끔 밥 먹기도 힘들다는 진호가
넷이서 둘러앉아
술을 먹는다
문 밖으로
밥 굶은 짐승처럼 바람이 우는데
오늘은 딴 생각 먹지 말고
술이나 먹자고
술을 먹는다
문턱 너머 추위는 칼칼하고
뱃속은 얼큰해서
더불어, 밥 생각
잊기 좋은 날이다
-「밥을 잊다」전문
반백 가까이서 ‘책상머리’나와,‘화물차’기사 태식이, ‘아파트 경비’인 병수와 아직도 가끔 일하는 진호가 둘러앉아 술을 먹는다. “문밖으로/밥 굶은 짐승처럼 바람”이 운다. 사내 넷이 아니라 바람이 울고, 밥은 알게 모르게 이들의 청춘과 꿈과 미래를 쥐고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결국 한 사람뿐이다. 그 숙명을 기꺼이 용인하며 시인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한국 현대시는 ‘밥과 자유’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지퍼로 닫아버릴 수도 없는 쓸쓸함을 배면에 깔고 성장했다. 시인은 오늘 굳이 ‘사이와 간격’을 따지지도, 되묻지 않아도 되는 결코 대상화되지 않은 존재들과 한 힘으로 출렁이고 있다. 이런 날 “뱃속은 얼큰해서/더불어, 밥 생각/잊기 좋”으면 또다시 시에 집중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 표4의 글 ◆
시를 읽는 서러운 기쁨을 맛보게 할 시편들
사람살이의 비애와 적막을 씨줄로, 곡진한 인간애를 날줄로 삼은 시편들이 독자로 하여금 먹먹하다. 그것도 ‘모르는데 아는 듯 쓰는 것’과 ‘거짓을 참인 듯 쓰는 것을 단념’한 채 서정의 수틀 위에 분을 바르지 않은 언어를 애써 골라 한 땀 한 땀 엮어냈으니! 그러다보니 우리네와 하등 다를 것 없는 시인의 일상이 식물의 잎맥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를 떠나지 않는 지겨운 것들에’ ‘속수무책’이다. ‘꽃 보고도 웃지 못하는’ 번민을 머리에서 좀처럼 내려놓지 못한다. 부조 봉투에 ‘오만 원을 넣을까 십만 원을 넣을까 망설’이기도 한다. 그런 나날 속에서 시인은 문득 그 ‘지겨운 것들’이 ‘기특하니 좋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되도록이면 살아 있는 내 생을 위안하며 살아보겠다는 최선의 셈법’에 다다른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글씨체를 닮은 따스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동시대인에게 따뜻한 세한도 한 폭과도 같은 위안과 희망을 건넨다. 특히 우리 시가 한낱 요설로 치닫는 바람에 시를 멀리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시를 읽는 서러운 기쁨을 맛보게 할 것이다. - 윤 효 / 시인
웅숭 깊은 시선으로 눈물겹게 읽어낸 ‘사람과 사물의 마음’
오성일의 새 시집을 읽다가 몇 군데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가 읽어내는 사람과 사물의 마음이 눈물겨워서다. 그의 웅숭깊은 시선이 닿는 순간 대상은 우주의 주체가 되어 나를 사로잡는다. 가령 세상의 저녁을 물들이는 어스름이 ‘이 짓도 저으기나 쓸쓸해서 인제는 그만 작파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세상을 홀로 떠돌다 죽은 삼촌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어서 한참을 먹먹히 앉아 있어야만 했다. 앞으로 난 숨겨둔 곶감 빼먹듯이 이 시집을 자주 꺼내 읽어야만 할 것 같다”
- 오봉옥 / 시인.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
=================
▶오성일 시인∥
∙ 1967년 경기도 안성 출생
∙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 2011년 『문학의 봄』등단
∙ 시집『외로워서 미안하다』『문득 아픈 고요』가 있다.
∙ 1993년 한국방송공사(KBS)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
================= =================
[책 소개]
시를 읽는 서러운 기쁨’을 맛보게 하는 오성일 시인의 『사이와 간격』
경기 안성 출신이며 2011년 『문학의봄』으로 등단한 오성일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사이와 간격』이 출간되었다. 오성일 시인의 시는 굳건한 자아의식과 명료한 이성적 판단으로 대상을 인과관계나 필연성 등으로 묶어 분석, 비판, 판단하려 하지 않는 시적 태도를 통해 ‘생의(生意)’를 새롭게 번뜩이는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의 시세계 특징은 세계를 대상화하지 않고, 동화나 투사(投射)와 같은 수법을 통해 일체감을 형성하려는 시작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몇 개의 중심 어휘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의미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윤효 시인은 오성일의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살이의 비애와 적막을 씨줄로, 곡진한 인간애를 날줄로 삼은 시편들이 독자로 하여금 먹먹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도 ‘모르는데 아는 듯 쓰는 것’과 ‘거짓을 참인 듯 쓰는 것을 단념’한 채 서정의 수틀 위에 분을 바르지 않은 언어를 애써 골라 한 땀 한 땀 엮어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네와 하등 다를 것 없는 시인의 일상이 식물의 잎맥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를 떠나지 않는 지겨운 것들에’ ‘속수무책’이다. ‘꽃 보고도 웃지 못하는’ 번민을 머리에서 좀처럼 내려놓지 못한다. 부조 봉투에 ‘오만 원을 넣을까 십만 원을 넣을까 망설’이기도 한다. 그런 나날 속에서 시인은 문득 그 ‘지겨운 것들’이 ‘기특하니 좋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되도록이면 살아 있는 내 생을 위안하며 살아보겠다는 최선의 셈법’에 다다른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글씨체를 닮은 따스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동시대인에게 따뜻한 세한도 한 폭과도 같은 위안과 희망을 건넨다. 특히 우리 시가 한낱 요설로 치닫는 바람에 시를 멀리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시를 읽는 서러운 기쁨을 맛보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현대시는 ‘밥과 자유’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지퍼로 닫아버릴 수도 없는 쓸쓸함을 배면에 깔고 성장했다. 오성일 시인은 오늘 굳이 ‘사이와 간격’을 따지지도, 되묻지 않아도 되는 결코 대상화되지 않을 존재들과 한 힘으로 출렁이고 있다. 이런 날 “뱃속은 얼큰해서/ 더불어, 밥 생각/ 잊기 좋”으면 또 다시 시에 집중할 것이다.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오봉옥 시인은 “오성일의 새 시집을 읽다가 몇 군데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가 읽어내는 사람과 사물의 마음이 눈물겨워서다. 그의 웅숭깊은 시선이 닿는 순간 대상은 우주의 주체가 되어 나를 사로잡는다”며 “가령 세상의 저녁을 물들이는 어스름이 ‘이 짓도 저으기나 쓸쓸해서 인제는 그만 작파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세상을 홀로 떠돌다 죽은 삼촌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어서 한참을 먹먹히 앉아 있어야만 했다. 앞으로 난 숨겨둔 곶감 빼먹듯이 이 시집을 자주 꺼내 읽어야만 할 것 같다”고 격려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