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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임소경서>라는 편지글에서 술회하였다. <보임소경서>는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비통함과 치욕, 그리고 역사서의 완성이라는 의무(義務)를 짊어진 한 천재(天才)의 집념이 뛰어난 문채로 묘사된 명문장(名文章)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은 출옥 후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겉으로 보면 궁중의 중요한 직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개 환관(宦官)의 신분으로서 내정(內廷)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일반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았다. 임안은 사마천이 중서령이라는 관직을 이용하여 자신이 선처되도록 힘 써줄 것을 부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과거 자신이 당했던 비통한 교훈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심각한 인식 때문에, 임안의 부탁처럼 행하기가 어려워서 내내 답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친구인 임안이 일단 처형되고 나면 영원히 답장할 기회를 잃고, 이것이 또 다른 평생의 한(恨)으로 남게 될까 걱정하여, 인정상 이 답장을 썼던 것이다. 후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시종(侍從)이 되어다가 그의 추천으로 낭중(郎中)이 되었다. 그후 관직은 익주자사(益州刺使)에 이르렀다. 당시 임안은 경성(京城) 금위군(禁衛軍)의 북군(北軍)을 관리하는 군관으로 있었는데, 그는 여태자의 출동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북군의 한 말단 관리의 모함으로 이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처형될 상황이 되었다. 임안은 처형되기 전에 사마천에게 구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사마천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답장마저도 제때에 하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 임안은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지고 말았다.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사마천(司馬遷) 소경인 임안에게 보내는 답서-사마천(司馬遷) 史公牛馬走(태사공우마주) : 태사 司馬遷再拜言少卿足下(사마천재배언소경족하) : 사마천이 삼가 소경족하에게 재배하며 말씀드립니다 曩者辱賜書(낭자욕사서) : 저번에 외람되이 서신을 보내셔서 敎以順於接物(교이순어접물) : 교우 관계를 신중히 하고 推賢進士爲務(추현진사위무) :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는데 힘쓰라는 가르침을 잊을 주셨습니다 意氣懃懃懇懇(의기근근간간) : 말씀이 간곡하셔서 若望僕不相師(약망복불상사) : 제가 따르지 않을 것 같아 원망하시는 듯했는데 而用流俗人之言(이용류속인지언) : 세상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僕非敢如此也(복비감여차야) : 제가 감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僕雖罷駑(복수파노) :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亦嘗側聞長者之遺風矣(역상측문장자지유풍의) : 어른들의 유풍을 어렴풋이나마 들었습니다 顧自以爲身殘處穢(고자이위신잔처예) : 그러나 돌아보면 스스로 궁형을 당하고 이름이 더럽혀져 動而見尤(동이견우) : 걸핏하면 허물을 입고 欲益反損(욕익반손) : 잘 하려고 하지만 일을 그르칩니다 是以獨鬱悒而與誰語(시이독울읍이여수어) : 그러니 혼자 수심에 잠길 뿐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諺曰(언왈) : 속담에 이르기를 誰爲爲之(수위위지) :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누구를 위해 일하고 孰令聽之(숙령청지) : 또 누구에게 기를 기울이겠는가?”라고 했습니다 蓋鍾子期死(개종자기사) : 종자기가 죽자 伯牙終身不復鼓琴(백아종신불복고금) : 백아는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타지 않았습니다 何則(하칙) : 왜 그랬을까요 士爲知己者用(사위지기자용) :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女爲說己者容(여위설기자용) : 여자는 자리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용모를 꾸밉니다 若僕大質已虧缺矣(약복대질이휴결의) : 저처럼 몸이 망가지면 雖才懷隨和行若由夷(수재회수화행약유이) : 록 재능이 수후주나 비화씨벽 같고 終不可以爲榮(종불가이위영) : 행실이 허유 백이처럼 고결히도 끝내 영광스럽지 못하고 適足以見笑而自點耳(적족이견소이자점이) :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 당해 스스로 더럽힐 뿐입니다 書辭宜答(서사의답) : 당신의 서신에 회답을 드려야 했는데 會東從上來(회동종상래) : 공교롭게 임금님을 따라 동쪽에서 장안으로 오게 되고 又迫賤事(우박천사) : 또 잡다한 일도 생겼습니다 相見日淺(상견일천) : 만나 뵐 기회도 적었고 卒卒無須臾之閒(졸졸무수유지한) : 또 매우 바빠 틈을 내어 得竭志意(득갈지의) : 저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今少卿抱不測之罪(금소경포불측지죄) : 지금 당신께서 생사가 달린 큰 죄를 지으신지 涉旬月(섭순월) : 한 달이 지나 12월이 迫季冬(박계동) : 가까워졌습니다 僕又薄從上雍(복우박종상옹) : 저는 또 임금님을 모시고 옹지역으로 가게 되어 恐卒然不可爲諱(공졸연불가위휘) : 당신께서 뜻밖에 죽음을 당할까 걱정됩니다 是僕終已不得舒憤懣以曉左右(시복종이불득서분만이효좌우) : 이렇게 되어 저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고민을 끝내 당신에게 알리지 못하면 則長逝者魂魄(칙장서자혼백) : 저 세상으로 간 당신의 혼백에 私恨無窮(사한무궁) : 한없이 유감스러울 것입니다 請略陳固陋(청략진고루) : 이제 저의 비루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闕然久不報(궐연구불보) : 오랫동안 끌어오다가 아제서야 답장하게 되었으니 幸勿爲過(행물위과) : 허물로 여기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僕聞之(복문지) : 제가 듣건대 脩身者(수신자) : 수신이란 智之符也(지지부야) : 지혜가 쌓인 것이고 愛施者(애시자) :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이 仁之端也(인지단야) : 인의 시작이며 取與者(취여자) : 주고받는 것을 엄격히 하는 것이 義之表也(의지표야) : 의의 표현이고 恥辱者(치욕자) : 수치를 알고 욕된 것을 참는 것이 勇之決也(용지결야) : 용기 있다는 증거이며 立名者(입명자) :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行之極也(행지극야) : 행동의 극치라고 들었습니다 士有此五者(사유차오자) : 선비는 이 다섯 가지를 갖추고 然後可以託於世(연후가이탁어세) : 그렇게 된 뒤에 세상에 나갈 수 있고 而列於君子之林矣(이열어군자지림의) : 군자의 행렬에 설 수 있습니다 故禍莫憯於欲利(고화막참어욕리) : 그래서 재앙 중에서 이익을 탐하는 것보다 더 비통한 것이 없고 悲莫痛於傷心(비막통어상심) : 슬픔 중에서 상심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며 行莫醜於辱先(행막추어욕선) : 행동 중에서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이 없고 詬莫大於宮刑(후막대어궁형) : 부끄러움 중에서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刑餘之人(형여지인) : 형을 받은 사람이 無所比數(무소비수) : 보통 사람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은 非一世也(비일세야) : 지금 한 세상 뿐이 아니라 所從來遠矣(소종래원의) :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昔衛靈公與雍渠同載(석위령공여옹거동재) : 전에 위나라 영공과 환관인 옹거가 같이 수레를 타고자 孔子適陳(공자적진) : 공자께서 화가 나셔서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셨습니다 商鞅因景監見(상앙인경감견) : 상앙이 환관인 경감의 소개로 진나라 효공을 만나자 趙良寒心(조량한심) : 조량이 상앙을 한심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同子參乘(동자삼승) : 환관인 조담이 문제를 모시고 수레에 오르자 袁絲變色(원사변색) : 원사가 화가 나 안색이 변했습니다 自古而恥之(자고이치지) : 옛날부터 환관을 멸시 했었습니다 夫以中才之人(부이중재지인) : 보통 사람들도 事有關於宦豎(사유관어환수) : 모든 일에 환관이 연관되면 莫不傷氣(막불상기) : 기가 상한다고 여기는데 而況於慷慨之士乎(이황어강개지사호) : 기개 있는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如今朝廷雖乏人(여금조정수핍인) : 지금 비록 조정에 인재가 모자라지만 奈何令刀鋸之餘(내하령도거지여) : 궁형을 받은 제가 어떻게 薦天下豪俊哉(천천하호준재) : 천하의 호걸을 천거할 수 있겠습니까 僕賴先人緖業(복뢰선인서업) : 저는 선인이 남기신 공로에 힘입어 得待罪輦轂下(득대죄연곡하) : 경성에서 일을 한 지 二十餘年矣(이십여년의) :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所以自惟(소이자유) : 上之(상지) : 위로는 不能納忠效信(불능납충효신) : 충성과 신의를 다하고 有奇策才力之譽(유기책재력지예) : 훌륭한 책략을 올려 재능이 있다는 이름을 날렸어도 自結明主(자결명주) : 현명하신 임금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次之(차지) : 다음으로는 又不能拾遺補闕(우불능습유보궐) : 또 잘못을 바로잡고 招賢進能(초현진능) :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천거하며 顯巖穴之士(현암혈지사) : 은거하고 있는 훌륭한 선비를 세상에 드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外之(외지) : 대외적으로는 又不能備行伍(우불능비행오) : 군대를 거느리고 攻城野戰(공성야전) :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우며 有斬將搴旗之功(유참장건기지공) : 적장의 목을 베고 기를 빼앗는 공로도 세울 수 없습니다 下之(하지) : 아래로는 不能積日累勞(불능적일루로) : 오랜 세월 공을 쌓아서 取尊官厚祿(취존관후록) : 높은 관직이나 후한 봉록을 받아 以爲宗族交遊光寵(이위종족교유광총) : 친척이나 친구들이 영광으로 생각사게 할 수 없습니다 四者無一遂(사자무일수) :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고 苟合取容(구합취용) : 남의 비이나 맞추고 영합해서 無所短長之效(무소단장지효) :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한 것이 可見如此矣(가견여차의) : 이와 같습니다 嚮者(향자) : 전에 僕亦常廁下大夫之列(복역상측하대부지열) : 제가 하대부 서열에 있을 때 陪外廷末議(배외정말의) : 외정 말석에 참여하였습니다 不以此時引維綱(부이차시인유강) : 그때 법도를 바로잡지 못하고 盡思慮(진사려) : 생각도 깊이 하지 못하여 今已虧形(금이휴형) : 지금 몸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하고 爲掃除之隸(위소제지례) : 청소나 하는 노예처럼 在闒茸之中(재탑용지중) : 천한 사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乃欲仰首伸眉(내욕앙수신미) : 이에 고개를 들고 슬픈 눈썹을 펴고서 論列是非(론열시비) :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不亦輕朝廷(불역경조정) : 이는 조정을 무시하고 羞當世之士邪(수당세지사사) : 당세의 재능 있는 선비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嗟乎(차호) : 아 嗟乎(차호) : 아, 如僕尙何言哉(여복상하언재) : 저와 같은 천한 사람이 尙何言哉(상하언재) :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且事本末(차사본말) : 게다가 일의 본말도 未易明也(미역명야) : 쉽게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僕少貧不羈之材(복소빈불기지재) : 젊었을 때 좀 출중한 재응이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長無鄕曲之譽(장무향곡지예) : 그러나 장성하고 난 후로는 시골구석에서도 훌륭한 평판조차 없습니다 主上幸以先人之故(주상행이선인지고) : 다행히 임금께서 저의 선친의 연고로 使得奏薄伎(사득주박기) : 태사의 일을 이어받게 하시어 出入周衛之中(출입주위지중) : 궁중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僕以爲戴盆何以望天(복이위대분하이망천) : 저는 두 일을 겸직해서 할 수 없다고 여기고 故絶賓客之知(고절빈객지지) : 손님과의 왕래도 끊고 亡室家之業(망실가지업) : 집안일도 잊어버렸습니다 日夜思竭其不肖之才力(일야사갈기불초지재력) : 밤낮으로 불초한 능력을 다하고 務一心營職(무일심영직) : 일심으로 자구에 힘써 以求親媚於主上(이구친미어주상) : 임금님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而事乃有大謬不然者夫(이사내유대류불연자부) : 그러나 일이 크게 잘못되어 그렇지 못했습니다 夫僕與李陵(부복여이릉) : 저와 이릉은 俱居門下(구거문하) : 같은 같은 시중이었으나 素非能相善也(소비능상선야) : 평소 서로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趣舍異路(취사이로) : 서로 자기의 길을 걸어 未嘗銜盃酒(미상함배주) : 일찍이 함께 술을 마시며 接慇懃之餘懽(접은근지여환) : 은근한 기쁨을 나눠 본 적도 없습니다 然僕觀其爲人(연복관기위인) :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릉은 사람됨을 보건데 自守奇士(자수기사) : 비범한 선비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며 事親孝(사친효) : 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與士信(여사신) : 사람과 사귐에 신의가 있고 臨財廉(임재렴) : 재물에 임해서 청렴하며 取與義(취여의) : 주고받는 데는 의롭고 分別有讓(분별유양) : 분별함에 겸양이 있고 恭儉下人(공검하인) : 아랫사람에게 공손했습니다 常思奮不顧身(상사분불고신) : 항상 분발해 일을 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以徇國家之急(이순국가지급) : 국가의 위험함에 군령을 내림은 其素所蓄積也(기소소축적야) : 그것이 평소에 쌓은 바였습니다 僕以爲有國士之風(복이위유국사지풍) : 저는 국사의 위풍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夫人臣出萬死不顧一生之計(부인신출만사불고일생지계) : 무릇 신하된 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인생의 책략을 내어 赴公家之難(부공가지난) : 조정의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斯以奇矣(사이기의) : 비로소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今擧事一不當(금거사일부당) : 지금은 일을 하다가 한 가지만 잘못되어도 而全軀保妻子之臣(이전구보처자지신) : 자신과 처자만 보호하려는 신하들이 隨而媒糱其短(수이매얼기단) : 멋대로 그 잘못을 날조합니다 僕誠私心痛之(복성사심통지) : 정말 속으로 이런 일을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且李陵提步卒不滿五千(차이릉제보졸불만오천) : 게다가 이륭은 오천 명도 안되는 보병을 거느리고 深踐戎馬之地(심천융마지지) : 적진 깊숙이 들어가 足歷王庭(족력왕정) : 흉노 군주의 근거지까지 갔으니 垂餌虎口(수이호구) : 이는 먹이를 호랑이 입에 늘어드린 것과 같습니다 橫挑彊胡(횡도강호) : 그렇지만 막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하여 仰億萬之師(앙억만지사) : 수십만 군사를 올려다보고 與單于連戰十有餘日(여단우련전십유여일) : 흉노의 왕과 연이어 10여 일을 싸웠는데 所殺過當(소살과당) : 죽인 적군의 수가 虜救死扶傷不給(로구사부상불급) : 죽은 아군의 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旃裘之君長咸震怖(전구지군장함진포) : 적군이 사상자를 구하려 오지도 못하자 흉노의 왕이 매우 놀라 乃悉徵其左右賢王(내실징기좌우현왕) : 측근의 현왕을 부르고 擧引弓之人(거인궁지인) : 궁인을 일으켜 一國共攻而圍之(일국공공이위지) : 거국적으로 이릉을 공격하고 포위했습니다 轉鬪千里(전투천리) : 아군은 천리 길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싸우다 矢盡道窮(시진도궁) : 화살도 다 떨어지고 도로도 막히게 되었으며 救兵不至(구병불지) : 구원병이 끊기고 士卒死傷如積(사졸사상여적) : 사상자도 들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然陵一呼勞(연릉일호로) : 그러나 이릉이 군사들을 큰 소리로 위로하자 軍士無不起(군사무불기) : 모두 분기 하지 않음이 없었어 躬自流涕(궁자류체) : 절로 감격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沬血飮泣(매혈음읍) : 온 얼굴에 피눈물을 뒤집어쓰고 更張空弮(갱장공환) : 소리 죽여 울면서 빈 활을 잡고 冒白刃(모백인) : 시퍼런 칼도 무릅쓰고 北嚮爭死敵者(북향쟁사적자) : 북쪽을 향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陵未沒時(릉미몰시) : 이릉이 전쟁에서 패배당하지 않은 사실을 使有來報(사유래보) : 사자가 와 보고하자 漢公卿王侯皆奉觴上壽(한공경왕후개봉상상수) : 한나의 공경과 완후가 술잔을 들어 천자께 축하를 드렸습니다 後數日(후수일) : 며칠 후 陵敗書聞(릉패서문) : 이릉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主上爲之食不甘味(주상위지식불감미) : 천자께서는 식사를 하시기는 하나 맛을 모르시고 聽朝不怡(청조불이) : 조회에 참석하나 기쁜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大臣憂懼(대신우구) : 대신들도 걱정하고 두려워 不知所出(불지소출) :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僕竊不自料其卑賤(복절불자료기비천) : 저는 자신이 비천하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見主上慘愴怛悼(견주상참창달도) : 천자께서 몹시 슬퍼하시는 것을 뵙고 誠欲效其款款之愚(성욕효기관관지우) : 저의 자그마한 충성이나마 다하려 했습니다 以爲李陵素與士大夫絶甘分少(이위이릉소여사대부절감분소) : 이릉은 사대부들과 본래부터 동고동락하여 能得人死力(능득인사력) : 다른 사람들의 사력을 다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雖古之名將不能過也(수고지명장불능과야) : 이런 점은 비록 옛날의 명징이라 할지라도 이릉보다 못합니다 身雖陷敗(신수함패) : 그가 적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彼觀其意(피관기의) : 속뜻을 보건대 且欲得其當而報於漢(차욕득기당이보어한) :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가 나라에 보답하려 하고 있습니다 事已無可奈何(사이무가내하) :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其所嶊敗(기소최패) : 그가 적을 무찌른 공로는 功亦足以暴於天下矣(공역족이폭어천하의) : 세상에 나타내기에 충분합니다 僕懷欲陳之而未有路(복회욕진지이미유로) : 제가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適會召問(적회소문) : 우연히 부르시고 하문하시어 卽以此指推言陵之功(즉이차지추언릉지공) : 이러한 취지에서 이릉의 공로를 말씀드려 欲以廣主上之意(욕이광주상지의) : 천자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塞睚眦之辭(색애자지사) : 원성을 막으려 했지만 未能盡明(미능진명) : 명백히 설명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明主不曉(명주불효) : 천자께서 저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시고 以爲僕沮貳師(이위복저이사) : 제가 이사 장군을 모함하고 而爲李陵遊說(이위이릉유설) : 이릉을 위해서 유세한다고 여기시어 遂下於理(수하어리) : 영옥을 맡은 관리에게 저를 넘기셨습니다 拳拳之忠(권권지충) : 간절한 저의 충성심을 終不能自列(종불능자열) : 끝내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因爲誣上(인위무상) : 그래서 천자를 속인다고 卒從吏議(졸종리의) : 여겨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家貧貨賂不足以自贖(가빈화뢰불족이자속) : 집이 가난하여 속죄할 수도 없습니다 交遊莫救(교유막구) : 평소 교제하던 사람들도 구해주려고 하지 않고 左右親近(좌우친근) : 측근에 있던 사람들도 不爲一言(불위일언) : 저를 위해 한마디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身非木石(신비목석) : 제가 목석처럼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닌데 獨與法吏爲伍(독여법리위오) : 옥리와 함께 深幽囹圄之中(심유령어지중) : 깊은 옥중에 갇혀 있으니 誰可告愬者(수가고소자) : 누가 억울하게 겪은 이런 고통을 이야기해 주겠습니까 此眞少卿所親見(차진소경소친견) : 이것은 당신께서 친히 보신 바이니 僕行事豈不然乎(복행사기불연호) : 저의 사정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李陵旣生降(이릉기생강) : 이릉이 살아서 적에게 항복하여 隤其家聲(퇴기가성) : 그 가뭄의 명성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而僕又佴之蠶室(이복우이지잠실) : 저도 궁형을 시행하는 밀실로 불려가 重爲天下觀笑(중위천하관소) :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悲夫(비부) : 슬프고 悲夫(비부) : 슬픕니다 세 事未易一二爲俗人言也(사미이일이위속인언야) : 상 사람들에게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僕之先(복지선) : 저의 선친께서는 非有剖符丹書之功(비유부부단서지공) : 부부나 단서를 가질 만한 공로가 없습니다 文史星歷(문사성력) : 천문·태사·율력과 같은 일을 담당하였는데 近乎卜祝之閒(근호복축지한) : 점치는 일과 비슷합니다 固主上所戲弄(고주상소희롱) : 이러한 일은 본래 천자께서 장난삼아 노시던 것으로 倡優所畜(창우소축) : 광대를 양성하는 것 같아 流俗之所輕也(유속지소경야) : 세상 사람들이 경시하는 것이었습니다 假令僕伏法受誅(가령복복법수주) : 만약 제가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는다 하더라도 若九牛亡一毛(약구우망일모) : 아홉 마리의 소리에서 털 하나 잃어버리는 것과 같고 與螻蟻何以異(여루의하이이) : 땅강아지나 개미와 같은 미천한 것이 죽는 것과 다름이 무엇이겠습니까 而世又不與能死節者(이세우불여능사절자) : 게다가 사람들은 저를 절개를 지켜 죽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特以爲智窮罪極(특이위지궁죄극) : 생각이 모자라 죄가 극에 달해 不能自免卒就死耳(불능자면졸취사이) : 마침내 스스로 죽임에 나가 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何也(하야) : 왜 그렇겠습니까 素所自樹立使然也(소소자수입사연야) : 평소에 스스로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人固有一死(인고유일사) :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는데 或重於太山(혹중어태산) :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或輕於鴻毛(혹경어홍모) :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 하나보다 더 가볍습니다 用之所趨異也(용지소추이야) : 이는 죽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太上不辱先(태상불욕선) : 가장 훌륭한 죽음은 선조를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其次不辱身(기차불욕신) : 그 다음이 자신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其次不辱理色(기차불욕리색) : 그 다음은 이치에 어긋나거나 얼굴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其次不辱辭令(기차불욕사령) : 그 다음이 언사에 욕됨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其次詘體受辱(기차굴체수욕) : 그 다음은 무릎을 끊기고 욕 당하는 것이고 其次易服受辱(기차역복수욕) : 그 다음이 죄수복을 입고 욕 당하는 것입니다 其次關木索(기차관목색) : 그 다음이 죄인이 되어 형틀을 쓰고 밧줄로 묶여서 被箠楚受辱(피추초수욕) : 곤장을 맞으며 욕을 당하는 것이고 其次剔毛髮(기차척모발) : 그 다음이 머리를 깎이고 嬰金鐵受辱(영금철수욕) : 목에 쇠사슬을 두르고 맞으며 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其次毁肌膚(기차훼기부) : 그 다음이 살갗을 훼손당하고 斷肢體受辱(단지체수욕) : 몸을 잘리는 욕 당하는 것이고 最下腐刑極矣(최하부형극의) : 가장 나쁜 것이 궁형을 받는 것입니다 傳曰(전왈) : 옛 책에 이르기를 刑不上大夫(형불상대부) : ‘대부에게는 형벌을 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此言士節不可不勉勵也(차언사절불가불면려야) : 이 말은 선비의 절개는 강제로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猛虎在深山(맹호재심산) : 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에 있으면 百獸震恐(백수진공) : 모든 짐승이 두려워 떱니다 及在檻穽之中(급재함정지중) : 그러나 우리에 같혀 있게 되면 搖尾而求食(요미이구식) : 꼬리나 흔들며 먹이를 구하게 되는데 積威約之漸也(적위약지점야) : 이것은 굴복 당해 호랑이의 위엄이 점점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故士有畵地爲牢(고사유화지위뢰) : 그래서 선비는 땅 위에다 선을 그어 감옥으로 삼는다 해도 勢不可入(세불가입) : 기개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지 않고 削木爲吏(삭목위리) : 나무를 깎아 법관으로 삼는다 해도 議不可對(의불가대) : 논의 때문에 그 심문을 받지 않는 것이니 定計於鮮也(정계어선야) : 이것은 이미 계획된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今交手足(금교수족) : 저는 지금 손발이 묶이고 受木索(수목색) : 머리에는 형구를 쓰고 暴肌膚(폭기부) : 몸을 다 드러내고 受榜箠(수방추) : 채찍을 맞으며 幽於圜牆之中(유어환장지중) : 옥에 갖혀 있게 되었습니다 當此之時(당차지시) : 이러한 때를 당하여 見獄吏則頭槍地(견옥리칙두창지) : 옥리를 보면 머리를 조아리고 視徒隸則正惕息(시도례칙정척식) : 교도관을 보면 놀래어 가슴이 뛰는데 何者(하자) :왜 그렇겠습니까 積威約之勢也(적위약지세야) : 오랫동안 감옥에 갖힌 기세 때문입니다 及以至是(급이지시) :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言不辱者(언불욕자) : 욕 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所謂强顔耳(소위강안이) : 소위 뻔뻔스러운 사람이니 曷足貴乎(갈족귀호) : 어찌 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且西伯伯也(차서백백야) : 문왕은 서백으로 계실 때 拘於羑里(구어유리) : 강리에 갇혔었고 李斯相也(이사상야) : 이사는 재상 노릇 할 때 具于五刑(구우오형) : 오형을 받았습니다 淮陰王也(회음왕야) : 회음왕은 受械於陳(수계어진) : 진 지역에서 체포되었고 彭越․張敖(彭越․장오) : 팽월과 장오는 南面稱孤(남면칭고) :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다가 繫獄抵罪(계옥저죄) : 옥에 같혔습니다 絳侯誅諸呂(강후주제려) : 강후로 봉하여진 주발은 權傾五伯(권경오백) : 여씨 일족을 평정하였으나 囚於請室(수어청실) : 청실에 같히게 되었고 魏其大將也(위기대장야) : 두영은 대장이었으나 衣赭衣(의자의) : 죄인의 옷을 입고 關三木(관삼목) : 몸에는 삼목을 걸치게 되었습니다 季布爲朱家鉗奴(계포위주가겸노) : 계포는 주씨 가문의 목에 칼을 쓴 노예가 되었고 灌夫受辱於居室(관부수욕어거실) : 관부는 감옥에서 욕을 당했습니다 此人皆身至王侯將相(차인개신지왕후장상) : 이분들은 각각 황제·제후·장군·제상에 올라 聲聞鄰國(성문린국) : 이웃나라까지 명성을 떨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及罪至罔加(급죄지망가) : 그러나 죄를 지어 법에 저촉되었는데도 不能引決自裁(불능인결자재) : 우유부단하여 자결하지 못하고 在塵埃之中(재진애지중) : 세속에서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古今一體(고금일체) : 이러한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이니 安在其不辱也(안재기불욕야) : 어찌 욕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由此言之(유차언지) : 이로 말하건대 勇怯(용겁) : 용감한 것과 겁이 많은 것은 勢也(세야) : 정세에 좌우되는 것이고 强弱(강약) : 강하고 약한 것은 形也(형야) : 당신의 형세에 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審矣(심의) : 살피건데 何足怪乎(하족괴호) : 이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夫人不能早自裁繩墨之外(부인불능조자재승묵지외) : 범 앞에 서기전에 자결하지 못하고 以稍陵遲(이초릉지) : 우유부단하여 至於鞭箠之間(지어편추지간) : 매를 맞고서 乃欲引節(내욕인절) : 자결하겨고 하니 斯不亦遠乎(사불역원호) : 역시 너무 늦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古人所以重施刑於大夫者(고인소이중시형어대부자) : 옛 사람들이 대부에게 법을 적용할 대 신중을 기했던 까닭은 殆爲此也(태위차야) : 이러한 것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夫人情莫不貪生惡死(부인정막불탐생악사) : 사람의 마음은 살고 싶어 하고 죽기를 꺼리며 念父母(념부모) : 부모를 생각하고 顧妻子(고처자) : 처자를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至激於義理者不然(지격어의리자불연) : 그러나 의리에 감동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乃有所不得已也(내유소불득이야) : 이는 부득이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今僕不幸(금복불행) : 지금 저는 매우 불행합니다 早失父母(조실부모) : 부모님을 일직 여의고 無兄弟之親(무형제지친) : 형제도 없으며 獨身孤立(독신고립) : 홀로 되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少卿視僕於妻子何如哉(소경시복어처자하여재) : 소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처자 대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且勇者不必死節(차용자불필사절) : 또 용감한 사람만이 반드시 절개를 지켜 죽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怯夫慕義(겁부모의) : 유약한 사람도 능히 의를 사모하면 何處不勉焉(하처불면언) : 어찌 힘쓰지 못하하겠습니까 僕雖怯懦(복수겁나) : 제가 비록 겁이 많아 欲苟活(욕구활) :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亦頗識去就之分矣(역파식거취지분의) : 또한 생사의 명분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何至自沈溺縲紲之辱哉(하지자심익류설지욕재) : 어찌 스스로 감옥 안에 갇혀 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且夫臧獲婢妾(차부장획비첩) : 종이나 옆에서 시중드는 계집도 由能引決(유능인결) : 오리려 자결할 수 있는데 況僕之不得已乎(황복지불득이호) : 어찌 제가 할 수 없겠습니까 所以隱忍苟活(소이은인구활) : 제가 욕됨을 참고 구차히 목숨을 보존하면서 幽於糞土之中而不辭者(유어분토지중이불사자) : 더러운 감옥에 갇혀서도 오히려 사양하지 않은 것은 恨私心有所不盡(한사심유소불진) : 개인적인 생각을 다 표현해 내지 못했고 鄙陋沒世(비루몰세) : 비루하게 죽으면 而文采不表於後世也(이문채불표어후세야) : 후대에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古者(고자) : 예전에 富貴而名摩滅(부귀이명마멸) : 부귀하면서도 이름을 내지 못한 인물이 不可勝記(불가승기) : 수없이 많았지만 唯倜儻非常之人稱焉(유척당비상지인칭언) : 뜻이 크고 기개 있는 비범한 인물만이 칭송을 받았습니다 蓋文王拘而演周易(개문왕구이연주역) : 문왕께서 구금되시어 주역을 풀이하셨고 仲尼厄而作春秋(중니액이작춘추) : 공자께서 곤궁하셨을 때 춘추를 저술하셨습니다 屈原放逐(굴원방축) : 굴원은 추방을 당하고서 乃賦離騷(내부이소) : 이소를 지었고 在丘失明(재구실명) : 좌구명은 눈이 먼 후에 厥有國語(궐유국어) : 국어를 편찬했습니다 답답하고 孫子臏脚(손자빈각) : 손자는 다리를 잘린 후에 兵法脩列(병법수열) : 병법을 논했고 不韋遷蜀(불위천촉) : 여불위가 촉으로 쫓겨난 뒤에 世傳呂覽(세전여람) : 여씨춘추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韓非囚秦(한비수진) : 한비는 진나라에 갇힌 뒤에 說難孤憤(설난고분) : 세난과 고분을 지었고 詩三百篇(시삼백편) : 시경 300편도 大抵聖賢發憤之所爲作也(대저성현발분지소위작야) : 대개 성현께서 발분하여 지은 것입니다 此人皆意有鬱結(차인개의유울결) : 이러한 분들은 뜻이 있었으나 막혀 답답하고 不得通其道(불득통기도) : 자기의 견해와 도리를 전할 방법이 없어 故述往事(고술왕사) : 지난 일을 서술하여 思來者(사래자) : 후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乃如左丘無目(내여좌구무목) : 좌구명은 눈이 멀고 孫子斷足(손자단족) : 손자는 다리를 잘려 終不可用(종불가용) : 끝내 관리로 임용되지 못하자 退而論書策(퇴이논서책) : 물러나 책을 써서 以舒其憤(이서기분) : 마음속의 울분을 풀고 思垂空文以自見(사수공문이자견) :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僕竊不遜(복절불손) : 요즈음 저는 불손하게도 近自託於無能之辭(근자탁어무능지사) : 쓸 줄 모르는 문장에 기탁하여 網羅天下放失舊聞(망라천하방실구문) : 예부터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누락된 이야기를 망라하여 略考其行事(약고기행사) : 간략하게 고증하고 綜其終始(종기종시) : 시작과 결말을 종합하여 稽其成敗興壞之紀(계기성패흥괴지기) : 성공·실패·흥성·쇠망의 이치를 고찰하고자 했습니다 上計軒轅(상계헌원) : 그리하여 위로는 현원에서 下至于玆(하지우자) :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爲十表(위십표) : 표 10편 本紀十二(본기십이) : 본기 12편 書八章(서팔장) : 서 8장 世家三十(세가삼십) : 세가 30편 列傳七十(열전칠십) : 열전 70편 등 凡百三十篇(범백삼십편) : 도합 130편을 지어 亦欲以究天人之際(역욕이구천인지제) : 천도와 인사의 관계를 궁구하고 通古今之變(통고금지변) : 고금의 변화를 살펴 成一家之言(성일가지언) : 일가의 문장을 이루려 했습니다 草創未就(초창미취) : 그러나 초고를 작성하기도 전에 會遭此禍(회조차화) : 이런 재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惜其不成(석기불성) : 이 일을 다 완성하지 못한 것을 是以就極刑而無慍色(시이취극형이무온색) : 애비록 극형을 당했으나 노기를 띠지 않은 것은 석히 여겨 僕誠以著此書(복성이저차서) : 제가 이 책을 저술하여 藏諸名山(장제명산) : 명산에 간직해 두었다가 傳之其人(전지기인) : 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에게 전하여 通邑大都(통읍대도) : 모든 고을과 도시에 알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則僕償前辱之責(칙복상전욕지책) : 이렇게 되면 제가 이전에 욕됨을 참고 자결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보상받게 될 것이다 雖萬被戮(수만피륙) : 비록 수만 번 죽임을 당해도 豈有悔哉(기유회재) : 어찌 후회스러움이 있겠습니까 然此可爲智者道(연차가위지자도) : 그러나 슬기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지만 難爲俗人言也(난위속인언야) : 일반 사람에게는 하기 어렵습니다 且負下未易居(차부하미역거) : 또한 죄를 지은 자는 처신하기가 어려우며 下流多謗議(하류다방의) : 천박한 사람은 비방받기가 쉬운 법입니다 僕以口語遇遭此禍(복이구어우조차화) : 제가 말을 삼가지 못하여 이러한 화를 입고 重爲鄕里所戮笑(중위향리소륙소) :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以汙辱先人(이오욕선인) : 조상을 욕되게 했으니 亦何面目復上父母丘墓乎(역하면목복상부모구묘호) : 무슨 명목으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가겠습니까 雖累百世(수루백세) : 수많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垢彌甚耳(구미심이) : 수치만 더 심해질 뿐입니다 是以腸一日而九迴(시이장일일이구회) : 이로 인하여 근심스런 마음이 하루에도 수없이 생기고 居則忽忽若有所亡(거칙홀홀약유소망) : 집에 있으면 정신이 몽룡하여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으며 出則不知其所往(출칙불지기소왕) : 문을 나서며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每念斯恥(매념사치) : 매번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汗未嘗不發背沾衣也(한미상불발배첨의야) : 등에서 식은땀이 흘려내려 옷을 적십니다 身直爲閨閤之臣(신직위규합지신) : 환관과 같은 신하가 되었으니 寧得自引於深藏岩穴邪(영득자인어심장암혈사) : 어찌 스스로 은거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故且從俗浮沈(고차종속부심) : 그래서 잠시 세상의 부침과 與時俯仰(여시부앙) : 시대의 파고를 따라 以通其狂惑(이통기광혹) : 행동하며 미치고 어리석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있습니다 今少卿乃敎以推賢進士(금소경내교이추현진사) : 지금 소경께서 저에게 현인을 추천하라고 하셨는데 無乃與僕私心刺謬乎(무내여복사심자류호) : 이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과 상반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今雖欲自雕琢曼辭以自飾(금수욕자조탁만사이자식) : 지금 비록 제가 미사여구로 제 자신을 숨다 해도, 無益於俗(무익어속) :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不信(불신) : 사람들도 불신할 것이니 適足取辱耳(적족취욕이) : 도리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취할 뿐입니다 要之(요지) :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死日然後是非乃定(사일연후시비내정) : 죽은 후에나 옳고 그름이 가려질 것입니다 書不能悉意(서불능실의) : 글로써는 저의 생각을 다 쓸 수 없어 略陳固陋(약진고루) : 비루한 생각을 간략하게 적는 바입니다 謹再拜(근재배) : 삼가 재배드립니다
【이야기】사마천은 옛사람들을 예(例)로 들면서 말을 시작한다.
" ....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는데, 이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士爲知己者用, 女爲悅己者容)..... " * 悅(기쁠 열) 容(얼굴 용)
士爲知己者用(사위지기자용; A scholar works for those who know him) 【뜻풀이】「사람은 자신을 인정(認定)해 주어야 최선(最善)을 다하여 일함」 을 비유한 말이며, 「女爲悅己者容(여위열기자용; A girl will doll herself up for the man who loves her;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위하여 화장(化粧)함)」 과 같은 의미이다. 士(shi4; 선비 사; 士-총3획) 爲(wei4; 할 위; 爪-8획) 知(zhi1; 알 지; 矢-3획) 己(ji3; 자기 기; 己-총3획) 者(zhe3; 놈 자; 老-4획) 用(yong4; 쓸 용; 用-총5획)
【English】 -Nightingale will not sing in a cage. (나이팅게일은 새장에서는 노래하지 않는다) * nightingale : 나이팅게일(새 이름) cage : 새장 -Respect a man, he will do the more. (사람을 존경(尊敬)하라, 그러면 그는 더 많은 것을 할 것이다) * respect : 존경하다
【이야기】사마천은 한무제에게 이렇게 충성을 하였다는데...
"....저는 동이를 이고 어떻게 하늘을 바라보겠는가 생각하였으므로 (僕以爲戴盆何以望天), 빈객들과의 교유를 사절하고, 집안 일도 잊고, 밤낮으로 미약한 재주를 다하고, 한 마음으로 직무에 힘써서, 이로써 주상(主上)의 환심을 구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에 큰 착오가 있게 되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而事乃有大謬不然者)..... " * 僕(종 복) 爲(할 위) 何(어찌 하) 乃(이에 내) 事(일 사) 乃(이에 내)
大謬不然(대류불연; Great mistake, it is not so) 【뜻풀이】「일이 실제(實際)와 크게 다르거나 잘못 되어버림」을 뜻하는 말이다. 大(da4; 큰 대; 大-총3획) 謬(miu4; 그릇될 류; 言-11획) 不(bu4; 아닐 불; 一-3획) 然(ran2; 그러할 연; 火-8획)
【English】 -To get hold of the wrong end of the stick. (지팡이의 다른 끝을 잡다; 오해(誤解)하다, 착각(錯覺)하다) =To have hold of the wrong end of the stick. * stick: 막대기, 지팡이
【참고】戴盆望天(대분망천; To look at the sky under a basin) 【뜻풀이】「머리에 동이를 이고 하늘을 우러러 보다」라는 뜻으로 「두 가지 일을 함께 하고자 하지만 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戴(dai4; 일 대; 戈-14획) 盆(pen2; 동이 분; 皿-4획) 望(wang4; 바랄 망; 月-7획) 天(tian1; 하늘 천; 大-1획) 【English】 -To try see the sky with a basin over one's head. (머리에 대야를 올려놓고 하늘을 보려고 하다) -To work blindly.(맹목적으로 일하다)
【이야기】사마천은 자신이 변호했던 이릉의 인품을 이렇게 말했다.
".... 사람과 교왕(矯枉)함에 믿음이 있었고, 재물에 임하여 청렴하였으며, 가진 것을 나눠줌에 의기가 있었고, (사리를) 분별함에 겸양함이 있었고, 아래 사람에게는 공손하고 검약하였습니다. 항상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의 위급함에 목숨을 버릴 것을 생각하였습니다(常思奮不顧身, 以殉國家之急) ....." * 常(항상 상) 思(생각할 사) 殉(따라 죽을 순) 急(급할 급)
奮不顧身(분불고신; So brave as to care not one's body) 【뜻풀이】「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함」을 뜻하는 말이다. 奮(fen4; 떨칠 분; 大-10획) 不(bu4; 아닐 불; 一-3획) 顧(gu4; 돌아볼 고; 頁-12획) 身(shen1; 몸 신; 身-총7획)
【English】 -Neck or nothing. (필사(必死)적으로) -At all hazards.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 hazard: 위험, 모험 -To take one's life in one's hands (어리석게도 위험한 짓을 하다, 모험(冒險)하다) -To move heaven and earth. (백방으로 노력(努力)하다) -To go all lengths. (무슨 짓이든지 하다)
【이야기】사마천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 ....또한 이릉은 거느린 보병이 오천도 채 되지 못하였는데, 흉노의 땅을 깊숙이 밟고, 발이 흉노의 왕정을 지났으며, 호랑이 입에 미끼를 드리우고, 용감하게 완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하여, 억만 군대를 쳐다보며, 싸우기를 십여 일, 죽인 자는 당해야 할 적수의 반을 넘었지만, 적군이 죽은 자를 구하고 부상자를 부축함에 미처 겨를이 없게 되자 (所殺過當, 虜救死扶傷不給).... " * 所(바 소) 殺(죽일 살) 過(지날 과) 當(당할 당) 虜(포로 로{노}) 給(넉넉할 급)
救死扶傷(구사부상; Save the one dying and help the injured) 【뜻풀이】「죽어 가는 자를 구하고 다친 자를 부축함」을 뜻하는 말이며, 「扶傷救死(부상구사)」이라고도 한다. 유사한 표현으로 「扶危濟困(부위제곤; To help those in distress or in difficulty; 위험(危險)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곤궁(困窮)에 빠진 사람을 구제(救濟)함)」 이라는 말이 있다. 救(jiu4; 건질 구; 복-7획) 死(si3; 죽을 사; 알-2획) 扶(fu2; 도울 부; 手-4획) 傷(shang1; 상처 상; 人-11획)
【English】 -To rescue the perishing.(죽어 가는 사람을 구조(救助)하다) * rescue: 구출하다, 구조하다 perishing: 죽는, 망하는 -To care for the dying. (죽어 가는 사람을 돌보다) * care: 걱정하다, 돌보다 dying: 죽어 가는 -To help a lame dog over a stile.(절뚝거리는 개가 계단을 넘도록 도와주다). * lame : 절름발이의, 절뚝거리는 stile : 밟고 넘는 계단
【이야기】절대 권력의 횡포에 무력함을 느끼는 사마천은 ....
" .... 설령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터럭 하나가 없어진 것과 같으니 땅강아지나 개미와 어찌 다르겠습니까(若九牛亡一毛, 與루蟻何以異)? .... " * 若(같을 약) 與(줄 여) 루(땅강아지 루) 蟻(개미 의) 異(다를 이)
九牛一毛(구우일모; One hair from nine oxen) 【뜻풀이】「많은 것 가운데 섞인 아주 사소(些少)한 것」 또는 「하찮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유사한 표현으로는 「滄海一粟(창해일속; 넓은 바다에 한 알의 조)」이라는 말이 있다. 九(jiu3; 아홉 구; 乙-1획) 牛(niu2; 소 우; 牛-총4획) 一(yi1; 한 일; 一-총1획) 毛(mao2; 털 모; 毛-총4획)
【English】 -A drop in the ocean.(큰 바다에 물 한 방울) =A drop in the bucket * drop: 방울, 물방울, 떨어지다 ocean: 바다 bucket: 양동이
【이야기】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 .... 사람은 본래 한 번 죽는 것인데, 그 죽음이 혹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혹은 기러기털보다도 가볍기도 한 것은(死或重於泰山, 或輕於鴻毛), 죽음으로써 나아가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 " * 或(혹 혹) 重(무거울 중) 於(어조사 어) 泰(클 태)
輕如鴻毛(경여홍모; As light as a goose feather) 【뜻풀이】「기러기의 털처럼 가벼운 것」 또는 「하찮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泰山鴻毛(태산홍모)」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경중(輕重)의 차이가 매우 큼」을 비유한 말이다. 輕(qing1; 가벼울 경; 車-7획) 如(ru2; 같을 여; 女-3획) 鴻(hong2; 큰기러기 홍; 鳥-6획) 毛(mao2; 털 모; 毛-총4획)
【English】 -As light as feather. (깃털처럼 가벼운) * feather: 깃털
【이야기】선비의 강한 기개를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 .... 선비는 땅에 선을 그어놓고 감옥이라 한다 해도, 선비의 기세로 들어가서는 아니 되며, 나무를 깎아서 형리(刑吏)라고 해도, 심문에 응한다 하여 대답해서는 아니 되는데 (士有畵地爲牢, 勢不可入; 削木爲吏, 議不可對), 이는 미리 마음을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 " * 士(선비 사) 勢(기세 세) 議(의논할 의) 對(대답할 대)
畵地爲牢(화지위뢰; To draw a circle on the ground to serve as a prison) 【뜻풀이】「땅바닥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놓고 감옥(監獄)으로 삼는다」 는 뜻으로서, 이는 「단지 지정(指定)된 범위(範圍)에서만 활동을 하게 함」 을 비유한 말이다. 「劃地爲牢(획지위뢰)」라고도 한다. 畵(hua4; 그림 화; 田-8획) 地(di4; 땅 지; 土-3획) 爲(wei2; 할 위; 爪-8획) 牢(lao2; 우리 뢰{뇌}; 牛-3획)
【English】 -In narrow circumstances. (제한된 환경에서, 궁핍(窮乏)하여) * circumstance: 사정, 정황, 환경 -To impose restrictions on-.(-에게 제한(制限)을 가하다) =To place restrictions on-. =To put restrictions on-. * impose: 부과하다, 지우다 restriction: 속박, 제한, 구속 【참고】削木爲吏(삭목위리; To regard a whittled wood as a jailer) 【뜻풀이】「옥리(獄裏)의 잔인하고 무서움」을 형용한 말이다. 削(xue1; 깎을 삭; 刀-7획) 木(mu4; 나무 목; 木-총4획) 爲(wei2; 할 위; 爪-8획) 吏(li4; 벼슬아치 리{이}; 口-3획) 【English】 -To be unable to suffer the humiliation made by the warder even if he is a whittled phony one. (깎아 만든 가짜라고 할지라도 교도관에 의한 굴욕(屈辱)을 겪을 수 없다) * humiliation; 굴욕 warder: 간수, 교도관 whittle: 깎아내다 phony: 가짜의, 위조품인
(내친 김에 사마천의 고통과 비장함을 조금 더 읽어본다)
" .... 지금은 손발이 묶인 채 형틀을 매여 있고, 살갗은 드러난 채 태형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옥리를 보면 머리가 땅에 닿고 마음이 두려워 숨을 죽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싫어하며, 부모를 생각하고 처자를 돌보지 않음이 없으나,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 제가 구차하게 살아서 더러운 흙 가운데에 갇혀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나의 생각에 다하지 못한 바가 있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으면 문채가 후세에 드러나지 못하게 될 것을 한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부귀했으나 명성이 소멸된 사람은 그 수를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탁월하고 비상한 사람들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문왕은 구속되어서 주역을 연역했고, 공자는 어려움에 처해져서 춘추를 지었고, 굴원은 쫓겨나서 이소를 지었고, 손자는 발을 잘리는 형벌을 받아 병법을 정리했고,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히고서 더욱 유명해졌으니, 이들은 모두 마음에 맺힌 바가 있었으나,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기록하여 미래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 .... 저는 스스로 무능한 글에 의탁하여, 천하의 잃어버린 구문을 망라해, 그 일을 고증하고, 그 원인과 결과를 종합하여, 성패와 흥망의 이치를 고찰하였습니다. 위로는 헌원 황제(黃帝)를 헤아리고,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니 모두 130편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이 훗날 사람들과 큰 도시에 전하여 진다면, 전날의 욕된 빚을 보상받게 되는 것이니, 비록 만 번 죽임을 당한다 해도 후회함이 있겠습니까? .... .... 수 천년을 지날지라도, 치욕은 더 심해질 뿐이니, 창자는 하루에 9번 뒤틀리며, 집에 있으면 갑자기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고, 나가면 가야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땀이 등에서 솟아나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 (임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사마천은 편지를 이렇게 끝 맺는다)
" .... 요컨대, 죽는 날이 지난 후에야, 옳고 그름이 비로소 결정될 것입니다."
사마천은 궁형의 수치로 자살, 즉 기러기털보다 가벼운 죽음을 택하려 했지만, 죽음의 의미를 태산보다 무겁게 느끼고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웅지(雄志)를 불태우게 된다.
사마천의 「보임소경서」에 대한 역사적 해석 제1장 어느 사형수(死刑囚)에게 보내는 편지 -------환관(宦官) 사마천(司馬遷)의 진심 한(漢)의 태시(太始)4년, 서력으로 헤아리면 기원전 93년, 부쩍 더위가 심해진 구력(舊曆) 5월의 어느 날 한대(漢代)의 으뜸가는 영주(英主)로 불려진 무제(武帝)는 태산(泰山)에서 山東지방까지의 성지의 순행(巡幸)을 함께 한 중서령(中書令)사마천(司馬遷)은 2개월만에 수도 장안(長安)에 돌아왔다. 중서령은 중서알자령(中書謁者令)의 약칭이다. 알자(謁者)란 궁정(宮廷)의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리로 (현재 일본의) 궁내청(宮內廳)의 식부관(式部官)에 해당하는 관리다. 관등(官等)은 4백석(白石)으로 별로 높진 않지만, 특히 미염대음(美髥大音-아름다운 수염과 큰 목소리)의 호청년(好靑年-잘 생긴 사람)이 선발되어 일했다. 상적(緗積)이라는 옅은 황색의 삼으로 된 큰 관(冠)을 쓰고 외겹으로 된 하얀 명주의상을 입은 수려한 모습은 궁중에서 한층 눈에 띄는 존재였다. 알자 중에서 후궁(後宮)의 시중을 드는 자는 중알자(中謁者)라고 하는데 죄를 지어 궁형(宮刑)에 처해진 환관(宦官)이 지명되었다. 오년 전인 천한(天漢)3년(98 B.C), 고독(孤獨)의 패장(敗將)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황제의 역린(逆鱗)을 건드려(황제의 분노를 사) 궁형에 처해진 사마천은 그 재능을 살려 곧 중서알자령에 임용되었다. 대단히 제 멋대로인 전제군주이기는 했지만 많은 신하의 특징을 파악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등용한 무제의 안목과 도량은 선조인 고조(高祖)에 거의 뒤지지 않는다. 사마천에 대한 처우도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육십세를 넘겨 정치와 군사에 대한 정열을 잃기 시작한 무제는 정전(正殿)에 나아가 군신을 모아 정무를 보는 것을 슬슬 귀찮아하기 시작했고, 후정(後庭)에서 새로운 애비(愛妃) 조첩녀(趙倢伃) 등과 노니는 연유장(宴遊場)에 서류를 가져오게 해 결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때에 환관 중 황제의 비서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는 자가 천문관 겸 기록소장(記錄所長)의 경험을 가진 사마천(司馬遷)말고 누가 있을 것인가. 사마천은 일약(一躍) 처형(處刑)전의 직책이었던 태사령(太史令)의 배에 달하는 이천석(二千石)의 대우를 받았다. 전과자였던 그는 뜻밖에 한 제국의 정치의 추기(樞機)에 참여하는 운명이 된 것이다. 장안에 귀착(歸着)한 지 수 일 후, 순행 중 밀린 서류정리를 끝낸 사마천은 겨우 휴가를 얻어서 일류귀족저택과 관료의 갑제(甲第), 즉 관저(官邸)가 즐비하게 늘어선 미앙궁(未央宮) 궁전(宮殿)의 북쪽부근에 있는 자택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한대에는 궁중에서 군무하는 관리는 5일마다 하루씩 목욕하기 위해 자택에 귀휴(歸休)한다는 명의(名義)로 휴목(休沐)이라고 불려진 휴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푹 잠들었던 까닭에 기분이 상쾌해진 사마천은 아침식사도 대충대충 끝내고 공부방이 되 있는 집밖의 객당(客堂)에 들어갔다. 붓을 든 지 십 여년 만에 최근 겨우 윤곽이 잡힌 역사(歷史)원고에 손을 대기 위해서이다. 세로 30cm, 폭 5mm정도의 대나무와 나무 조각, 이른바 죽간(竹簡)․목간(木簡)의 표면에 까맣게 문자를 적어 넣고 철(綴)하여 하나로 만들어 부피가 커진 책들의 두루마리가 벽 삼면에 어지럽게 높게 쌓여있다. 자리에 앉아 무릎 앞에 놓인 벼루에 왼손에 든 물병에서 물을 부어 먹을 갈기 시작하자, 하인 노예가 「집을 비우신 사이에 임소경(任少卿)님한테서 온 편지입니다. 빨리 살펴보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내밀었다. 세로 30cm, 폭 10cm정도로 된 두 장의 나뭇조각을 끈으로 묶고 매듭에 점토를 발라 봉인하고 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면(面)에 예서(隸書)로 쓰여져 있어서 편지라기보다 10년 전 우리나라 목수였던 동량(棟梁)이 나뭇조각의 잘려진 토막에 부본을 썼던 수판(手板)이라고 하는 쪽이 좋을 것 같다. 허리 왼쪽에 매달린 단검을 빼 끈을 잘라 떨어뜨려 문면(文面)에 눈을 기울인 사마천의 얼굴은 순식간에 흐려졌다. 사마천은 하인에게 답장은 곧 쓸 테니 잠시 정리해 두라고 무뚝뚝하게 명령하고 수북하게 쌓여있는 원고 중 한 권을 집어들었다. 임안의 서간(書簡)은 상당히 사마천을 불쾌하게 만든 것 같다.이 해 12월, 황제의 시종(侍從)을 들면서 장안에서 서쪽으로 160Km, 지금의 봉상현(鳳翔縣)에 해당하는 옹(雍)에 있는 신사(神祠)에 참배하러 나갈 때까지 약 반년간의 재경(在京)기간동안 그는 결국 답장을 쓰지 않았다.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해가 바뀌어 정화원년(征和元年) 정월(正月), 옹(雍)에서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끝낸 무제는 조금 북방으로 방향을 돌려 경하(涇河)유역을 한 바퀴 돌고 장안의 서쪽 변두리에 있는 이궁인 건장궁(建章宮)으로 환행(還幸)했다. 건원 원년(建元元年-기원전 140년), 17세로 즉위한 이래 65세 때까지 50년 가까운 치세(治世)를 이룩했던 무제도 역시 심신(心身)에 쇠약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북쪽 변경의 한 왕조 최대최강의 적국 흉노(匈奴)에 여러 해를 거듭해 공격을 가한 끝에 거의 대부분을 제압하고 또 서쪽으로 지금의 신강성(新疆省)내의 서역제국(西域諸國)의 대부분을 복속(服屬)시켰다. 동쪽으로는 조선(朝鮮)반도에 출병해 그 북반(北半)에 한의 군현(郡縣)을 두고 이것을 통치했다. 남쪽으로는 동월(東越), 민월(閩越), 남월(南越)의 여러 민족을 멸망시켜 지금의 절강성(浙江省)의 남부,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에서 인도네시아 반도에 이르는 해안지대를 영토로 만들었다. 한은 고조이래 대외적으론 소극적 정책을 취해 외국과 일을 벌이는 것을 꺼렸고 재정적으로도 조세를 경감해 오직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적극적인 외교정책과 건설계획의 지나침을 시정(是正)하는 데만 전념해 왔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만사(萬事)에 소란 떨기를 좋아했던 무제는 이 소극적 방침을 버리고 군사, 외교, 재정상에 있어서 적극적 정책을 밀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전제군주로서 비길 자가 없던 재능의 소유자였던 무제는 발 밑을 살펴보지 않으면서 오직 마차를 끄는 말처럼 전진한 것은 아니다. 군주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제를 완전하게 만들면서 국내에 있는 대항세력의 대두(擡頭)를 억누르는 정책을 추진하고 그걸 위해서는 음험(陰險)한 수단을 쓰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이리하여 한제국의 통치는 동쪽의 한반도 북부에서부터 서쪽의 돈황(敦煌)까지 동서 약3000Km, 북쪽의 몽강(蒙疆)의 포두(包頭)에서부터 남쪽의 사이곤 부근까지 남북 약2000Km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구석구석 골고루 미치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전대(前代)의 경제(景帝)의 정책을 이어나가 동성이성(同姓異姓)인 봉건제후의 세력을 소감(逍减)하는 정책이 느슨해지지 않고 실시됐다. 중앙에서는 천자(天子) 다음가는 경쟁자라고 해도 충분한 실력을 가진 승상(丞相),즉 현재의 국무총리를 엄하게 감시해 조금이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가차없이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 무제는 54년에 걸친 긴 치세기간 동안 12명의 승상을 두었지만, 그 중 무사히 끝까지 일한 것은 유교(儒敎)학자 출신으로 처세술에 뛰어났던 노회(老獪)한 공손홍(公孫弘)등 3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 9명중엔 법을 어겨 면직된 자가 3명, 범죄가 발각되어 자살한 자가 3명, 옥(獄)에 넣어져 사형에 처해진 자가 3명인 것처럼 비참하게 생을 마친 자가 6명에 달한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동아시아 제일의 문명국인 한제국 최전성기의 태평시대에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재상(宰相)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관료(官僚), 특히 고급관료에 대한 행정감찰(行政監察)은 진나라의 것을 한나라가 이어받은 것이었지만 무제는 이 조직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사찰(査察)을 엄격히 실시하였다. 무제의 아버지 경제 때에 발포(發布)된 칙령(勅令)에 「관리(官吏)는 시민의 스승이 될 만한 자이기 때문에 관등에 상당(相當)하는 차가(車駕-탈 것)․의복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연봉(年俸) 600석(石)이상의 관리는 장리(長吏-과장급 대우를 받음)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가짐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관리의 제복을 착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길거리를 거닐고 일반시민과 분간이 안 되는 자가 많은 것은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후 장리2000석(국장급 대우를 받음)의 수레는 양측(兩側)의 툭 튀어나온 부분을 주홍색으로 칠하고 1000석에서 600석까지는 좌측만 주홍색으로 칠하기로 한다. 차마(車馬-수레를 끄는 말)의 종자(從者)에게 관(官)에 상당하지 않는 의복을 입히는 자, 또 속관(屬官)의 신분으로 길거리를 거닐고 관리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자가 있다면 2000석의 장리가 그 관속(官屬)을 상신(上申)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이 삼보(三輔(도내(都內))에서 이 법령에 위반하는 자는 승상, 어사(御史)에게 상신하여 그 처분(處分)에 대한 지시(指示)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이 있다. 이런 식으로 관리는 특별한 색으로 칠한 승용차에 타고 외출시에는 제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되고, 무턱대고 길거리를 산보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면 바로 고발된다는 규정(規定)이 실시(實施)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 적용시키면 관계 있는 회사의 초대로 공용족(公用族-기득권층)의 특권을 발휘하는 것도 절대로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관청에서 퇴근하는 길에 자기 돈으로 술집에 출입하는 일 같은 것도 마음놓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법률이란 것은 인민(人民)보다도 우선 관리, 특히 고급관리를 대상으로 해 이들을 법에 묶어두는 것이 중국 법가(法家) 본래(本來)의 법치주의였으니 이것은 법가의 진수를 실로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급관리(高級官吏)에 대해 검찰관(檢察官)이 노렸던 것은 황제권을 위협하는 제2의 경적(勁敵)인 대자산가(大資産家)와 호족(豪族)이었다. 무제는 이들 민간(民間) 유력자(有力者)에 대한 억압책으로서 경제 때에 발포된 산민(算緡)이라는 자본이자세법(資本利子稅法)을 한 충 더 확충(擴充)하려고 했다. 기원전 119년 각의(閣議)의 결과로 제출된 재산신고법안은 재가(裁可)되어 칙령으로서 시행됐다. 「선제(先帝)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에는 상업용의 선차(船車)와 가인(賈人-길드․마챤드)의 민전(緡錢)에 각각 세(稅)를 부과해 왔지만 그 후 중지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최근 국가재정의 팽창을 감안해서 종래의 이자세를 다시 일으켜 賈人뿐만 아니라 일반상공업자라도 일반적으로 질대(質貸-?), 화물(貨物)의 매매(賣買), 사혹매점(思惑買占-?),중개(仲介)에 의해 이득을 얻고 있는 자는 설령 정식으로 시장의 동업조합원(同業組合員)으로 허가등록(許可登錄)을 받지 않았어도 자발적으로 그 재화(財貨)를 각각의 관청에 신고하고 동전이관(銅錢二貫(貫-무게의 단위-약3.75Kg))의 자본(資本)마다 년(年)40문(文), 노동(勞動)의 성과(成果)를 파는 공업자(工業者)는 동전사관(銅錢四貫)마다 년20문을 납부하도록 한다.」 만약 신고(申告)를 게을리 하거나 또는 허위신고를 하는 자는 변경(邊境)의 전선(戰線)으로 보내 군역을 지게하고 그 자본재(資本財: 재산)는 전부 몰수한다. 다른 사람이 부정신고 하는 것을 밀고(密告)한 자는 부정신고 한 자의 자본재의 반액(半額)을 보상(報償)으로서 내리겠다.」 신고과세(申告課稅)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정직하게 신고를 하는 자가 상당히 드물다. 한(漢代)에도 현재의 이러한 상태와 별 차이가 없었다. 몰수자본재(沒收資本財)의 반액을 보상으로 내린다는 것을 미끼로 밀고를 장려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산(資産)이 몰수된 상공업자가 속출(續出)하게 됐고 이로 인해 대공황(大恐慌)이 일어나게 됐다. 이 같은 가혹(苛酷)한 징세책(徵稅策)을 강행한 것은 재정지출이 증대하는 것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무제는 중년(中年)이후 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의 꾀임에 빠져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약을 얻기 위해 대순행(大巡幸)을 자주 행했고 이궁(離宮)과 신사(神社)를 조궁(造宮)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국비를 소비했다. 그러나 여기에 쓴 비용은 외정(外征)에 직접간접(直接間接)으로 사용한 군사비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군사비의 증대는 한왕조의 정치체제와 사회조직에 큰 변화를 가했던 것이다. 정화이년(征和二年)의 여름은 가뭄이 극심했다. 하루는 건장궁(建章宮)의 어전(御殿)에서 이 지방의 건조하고 먼지투성이인 더위를 피하고 있던 무제 앞에 남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무제가 바라보니 궁중에서는 분명히 금제(禁制)로 정한 검(劍)을 등에 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붙잡으라는 무제의 큰 소리에 근시(近侍-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 남자는 검을 팽개치고 나는 듯이 도망가 이윽고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열화(烈火)같이 노한 무제는 문위대장(門衛隊長)을 사형에 처하고 도내(都內)의 기병(騎兵)을 총동원해 장안의 성문을 열 하루간에 걸쳐 폐쇄하고 엄중하게 탐사(探査)했지만 얻은 것은 전혀 없었다. 짐(朕)의 목숨을 늘 노리는 자가 있다. 나를 죽이려 한 자의 주인은 누군가. 시의심(猜疑心) 강한 늙은 황제의 눈엔 문득 후궁 위황후(衛皇后)와 위태자(衛太子)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위태자는 무제가 29세 때 위황후가 낳은 아이로 지금은 37세의 성인이 되어있다. 어렸을 때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할 정도로 귀여워했던 아이였으나 아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성인이 되자 온후(溫厚)하고 인정깊은 성격을 가지게 되 무제에게는 이것이 어딘지 미흡하게 느껴졌다. 또한 유교사상(儒敎思想)에 심취했던 태자는 황제의 침략주의에 항상 반대상주(反對上奏)를 했었기 때문에 당시 평화주의자의 방패막이 되어있었다. 무제는 태자를 바꿀 의지(意志)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지만 2년 전 최후(最後)의 애비(愛妃)였던 조부인(趙夫人)이 황자(皇子) 불릉(弗陵)을 낳았을 때 자신의 광희(狂喜)와 만족하는 모습, 그리고 지나치게 축하를 해준 것이 늙은 위황후와 위태자에게 큰 불안을 준 게 틀림없다고 무제는 상상(想像)했었기 때문이다. 전제군주의 총애(寵愛)를 받기 위한 후궁들의 다툼은 바로 정계의 당파(黨派)로 나타난다. 위황후와 태자파에 대항해 신황자파(新皇子派)가 대두(擡頭)한 것이다. 그 당수(黨首)가 강충(江充)이라는 자였는데 이 자는 한의 분가(分家)의 하나인 조국(趙國)의 신하였던 자로 조의 태자에게 벌을 받게 되자 장안으로 도망쳐 역으로 조의 태자의 은사(隱事)를 무제에게 밀고해 그를 폐립(廢立)시킨 경력이 있는 남자다. 무제가 접견해 보니 체격이 우람하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좋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고 게다가 당세(當世) 유행(流行)한 의상(衣裳)을 입고 있는 것이 또 별스러웠다. 중년시대의 무제였다면 이런 경박(輕薄)한 인물의 결점을 충분히 파악해 그 재능을 적소(適所)에 사용했겠지만 말년의 무제는 억제력(抑制力)을 잃고 있었다. 남의 의견을 듣고 그걸 그대로 신용해 버린 것이 큰 실책(失策)이었다. 무제는 이런 것도 괜찮겠지 하고 겉보기엔 호걸(豪傑)이었으나 속마음엔 남에게 아첨만 해대서 출세하려는 생각이 가득했던 간물(奸物)인 강충을 측근(側近)으로 등용해 후궁반대파의 적발(摘發)을 맡기고 방패막으로 삼아 버렸다. 한의 후궁(後宮)의 시중을 드는 삼천명의 어전(御殿)시녀들 사이에서는 액땜을 위해 마루 밑에 나무로 만든 인형을 묻고 거기에 액(厄)을 떠밀고 굿을 하는 풍습(風習)이 있었다. 동료와의 사소한 말다툼을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상대를 조복(調伏-부처의 힘으로 원수나 악마를 제어하거나 굴복시킴)시키기 위해서나 의심을 풀기 위해 한 것이지만 급기야는 황제를 저주하기 위해 나무인형을 묻거나 참소(讒訴-남을 헐뜯어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고해 바침)하는 자(者)까지 생겼다. 무제는 이 사건의 추급(追及)을 강충에게 맡겼던 것이다. 강충은 위(衛)태자파가 자기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혹시 무제에게 만일(萬一)의 일이 생겨 위태자가 즉위한다면 자기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예상(豫想)해서 이 불상사(不祥事)를 위태자파가 무제를 저주했다고 하고 이를 위태자와 연결시켜 황태자를 정치적으로 실각(失脚)시키려 했다. 정화(征和)2년 여름, 위태자는 서북(西北)의 감천궁(甘泉宮)으로 피서(避暑)를 가 병을 치료하고 있는 무제를 알현(謁見)하고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것을 아뢸려고 했으나 실패, 진퇴유곡(進退維谷) 처한 태자는 7월9일 천자(天子)의 사자(使者)라고 사칭(詐稱)하고 강충을 붙잡아 참살(斬殺)하고 이를 황후(皇后)에게 고한 후 미앙궁(未央宮)에 난입(亂入)해 그 정전(正殿)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장안(長安)성내는 대혼란이 일어났지만 무제가 건장궁(建章宮)에 환행(還幸)해서 독전(督戰)했었기 때문에 내란(內亂) 5일째에 일어나 수 만인의 사상자를 낸 대시가전 후 패한 위태자는 간신히 성을 탈출해 수도 장안의 동쪽 경계 가까이에 잠복(潛伏)했지만 결국 발견되어 자살하였다. 이것이 무고(巫蠱)의 난(亂)이라 불리는 대사건(大事件)이었다. 이 내란의 관련자로 위(衛)황후가 자살한 것을 비롯해 다수의 연좌자(連坐者)가 나왔다. 그 중에는 사마천의 친구 전인(田仁)과 임안(任安)이 있었다. 전인은 재상부(宰相府)소속(所屬)의 검사장(檢事長)같은 직무를 맡아 일해 반란당시 장안성문을 폐쇄(閉鎖)해서 패군(敗軍)의 탈주(脫走)를 막으라는 명(命)을 받았으면서 고의로 태자를 도망치게 했다는 죄목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임안은 북군(北軍)이라고 불리는 수도주둔상비군(首都駐屯常備軍) 사령부(司令部)부참모(副參謀)에 해당하는 호북군사자(護北軍使者)의 요직(要職)에 있었다. 북군이 황제편에 서느냐, 태자편에 서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정도로 북군은 강한 전력(戰力)을 가지고 있었다. 임안은 태자에게서 위조(僞造) 절령(節令), 즉 군대출동명령을 받았지만 군문(軍門)을 닫고 응하지 않았다. 처음엔 사건의 직접관련자로서는 고발되지 않았지만 불평을 가진 부하의 밀고(密告)에 의해 연좌되어 하옥되게 되었다. 무제는 임안이 취한 기회주의적 태도가 발칙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내린다고 선언(宣言)했다. 정화(征和)2년의 여름, 사마천은 무제를 따라 감천궁(甘泉宮)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위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 무제가 즉시 수도 장안으로 환행(還幸)했던 때도 사마천은 무제와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자가 피를 흘리며 서로 싸우는 비참하고 슬픈 투쟁(鬪爭)을 눈 앞에서 봤던 것인데도 직접적으로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기사를 『史記』안에 써서 남기지 않았다. 단지 친우(親友)인 전인(田仁)의 죽음에 관해서는 그의 아버지 전숙(田叔)전(伝)의 말미(末尾)에 위태자 사건(事件) 때 태자의 탈출을 묵인했다는 죄과(罪科)에 의해 사형됐다는 것을 간단히 기술하고 있고 전인(田仁)은 내 친구이기 때문에 우정을 위해 부재(付載)했다고 특별히 해명의 글을 적어 놓았다. 사마천에게 있어 임안(任安)은 아마 전인(田仁)과는 달리 껄끄러운 사이의 친구로 그 우의(友誼)에 있어서 전인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인이 붙잡힌 후 얼마 안 있어 임안(任安) 또한 연좌(連坐)되고 수감(收監)된 이상 사형 집행(執行)도 시간문제라는 것 정도는 무제의 비서(秘書)역할을 했던 사마천이 재빨리 알았음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갑자기 2년여 전에 임안이 익주자사(益州刺史), 즉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의 감찰관(監察官)으로 있었을 때 그에게서 받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힐문장(詰問狀)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였던 그 편지를 생각해 냈다. 그래서 그가 옥중(獄中)에서 살아있는 사이에 조급(早急)하게라도 답장을 보내서 자기의 본의(本意)를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사마천이란 인물은 정말이지 박정(薄情)한 남자구나 라고 생각되어질게 틀림없다. 붓을 들고 답장을 쓰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보이지 않게 가슴속에 담아 뒀던 불평과 분노가 뒤얽혀 붓이 생각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미천한 태사공(太史公)의 자리를 황송하게 생각해 마지않는 사마천 삼가 소경(少卿-임안의 자(字))형(兄)에게 편지를 올립니다. 꽤 이전(以前)의 일이었습니다. 일부러 서간(書簡)을 보내주셔서 폭넓게 사람들과 사귀어 현자(賢者)를 찾아 금상폐하(今上陛下)에게 추천(推薦)하는 것이 저의 책무(責務)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말 극진한 배려에 감사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단지 말씀하신 것 중에 제가 소경(少卿)형 같은 유직자(有職者)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신 점은 정말로 세간(世間)의 속인(俗人)들이 만들어 낸 소문으로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저는 결코 그런 자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천성이 극히 우둔(愚鈍)하긴 하지만 얼마간 선배(先輩)님이 있던 자리 가까이에서 형을 모시다가 훈계(訓誡)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의 무슨 뜻인지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소경형도 알고 계시지만 제가 가문을 존속시킬 수 없는 불구자(不具者)가 돼 보기에도 역겨운 경애(境涯-처하여 있는 환경과 생애)가 돼 버린 나의 몸, 무언가 행동(行動)을 하려하면 바로 타인(他人)이 입방망이질을 해대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마음먹어도 전부 결과는 마이너스가 돼 버립니다. 가만히 참다가 생긴 우울함은 도대체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아아, 정말이지 요즘 유행(流行)하는 노래『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연지와 이를 검게 물들이는 화장을 하나』를 부르며 중얼거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사(士-선비)는 자기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여자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자를 위해 치장한다고 말합니다. 저 같은 놈은......아아 육체는 이미 결손(缺損)돼 버렸다. 설령 수후(隨侯)의 주(珠-진주), 하화(下和)의 옥(玉-구슬)같은 능력을 가진 허유(許由), 백이(伯夷)같이 결백(潔白)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영광이 된다기보다 역으로 조소(嘲笑)의 대상이 되어 저에게 오점(汚點)만을 더할 뿐입니다. 편지를 받고 즉시 답장을 드려야 했습니다만 공교롭게도 행행(行幸) 때문에 폐하를 모시고 산동(山東)에 가서 돌아오다가 관청에서 하찮은 볼일이 생겨서 이에 정신이 팔려 틈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충분히 난 후에 형과 만나서 차분히 이야길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조금도 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상황이었습니다.」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 붓을 여기까지 무리하게 써 내려왔지만 사마천의 찌푸려진 눈이 점점 빛을 띠기 시작했다. 말투도 완전히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저런하는 사이에 이번엔 소경형, 자네도 말도 안 되는 혐의로 옥에 들어가는 재난(災難)이 일어났다. 이미 한 달을 넘어 슬슬 형(刑)이 집행될 계절인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말하기 괴로운 일이라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갑자기 최악(最惡)의 사태(事態)가 일어나 버려서 문득 두려움이 생긴다. 나로서는 내 가슴속의 분만(憤懣)을 형씨가 몰라주는 것이 종생(終生)의 유감(遺憾)이다. 사형에 처해져 세상을 떠나가는 자네의 혼백(魂魄)에게라도 말을 안 한다면 미련이 남아 내 원한은 영구(永久)히 사라지는 날이 없을 것 같네. 그래서 문득 하찮치만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주자고 생각하게 됐네. 소경형, 부디 용서해 주게. 아주 격조(隔阻)했었네. 미안하게 됐네.」 이렇게 쓰고 나서 사마천은 붓을 내려놓고 임안이 보낸 힐문에 가까웠던 어조로 된 받은 편지를 다시 한 번 되 읽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해도 합격점(合格點)이 안 나온다. 소경 네 녀석은 확실히 오해하고 있단 말이다. 어째서 이 사마천이 중서령(中書令)이란 고관(高官)이 됐다 하여 이를 자랑하고 폐하의 총우(寵遇)에 마음이 오만해져 옛 친구를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건가. 자네는 내가 현자를 폐하에게 천거해 올리지 않은 것을 어째서 꽤심하다고 말한 것인가. 그것은 오랜 친구인 우리들을 폐하에게 왜 추거(推擧)하지 않았냐고 넌지시 돌려서 말한 것이겠지. 정말로 그런 것임이 틀림없겠지. 나는 그 때 이렇게 생각했다. 환관(宦官)이라는 듣기에도 싫고 보기에도 불쾌한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영락(零落)한 나다. 죽음보다도 더한 괴로움을 맛봤었단 말이다. 내가 영달(榮達)에 자족(自足)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한 거냐. 바보 같은 소릴 하는구나.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소경 네 녀석은 사형수로서 내일 목숨을 모르는 몸이다. 네 녀석이 죽음에 직면해 있다고 들은 순간 답장 같은 걸 보낼 것 같으냐 라고 하면서 쳐 박아 둔 네 녀석의 편지를 다시 한 번 꺼내서 되 읽었다. 이번엔 네 녀석한테 어떻게 해서든 복서(復書)를 쓰자고 결심했다.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죽음에 당면(當面)한 네 녀석이라면 죽음보다도 더한 오욕(汚辱)스러운 운명에 처하고도 살아가야 하는 내 기분을 조금은 알아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경, 아무쪼록 들어주게.----- 그는 다시 붓을 집어들었다. 「어째서 내가 현자(賢者)를 추거(推擧)하지 않았냐고 말했지만 대관절 지금의 나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 역시 나도 옛날은 내조(內朝=閣議)에서 태사(太史公)로서 하대부(下大夫)와 대등하다고 해도 좋을 위치에 있었고 또 외조(外朝)의 회의(차관․국장급회의)에도 출석하고 있었다. 그 때의 나라면 조금은 의논이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선비 된 자의 행동엔 선조(先祖)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 이상 가는 추태(醜態)가 없고 궁형(宮刑)을 받는 것보다 큰 수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궁형을 받은 형여(刑餘)의 인간과는 동석(同席)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세상의 관습이다. 보통 인물(人物)이라도 환관(宦官)과 뭔가 일이 있으면 기(氣), 즉 도끼가 정령(精靈)을 상처 입힌다고 말하고 있다. 하물며 강개지사(慷慨志士)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 지는 말할 것도 없겠지. 아무리 조정(朝廷)에 인재(人材)가 부족하다고 해도 나같이 톱 같은 칼로 육체에 형(刑)이 가해져 불완전한 신체가 돼 궁중(宮中)에서 청소 같은 잡역(雜役)에 종사하게 된 자가 목을 빳빳히 세우고 어깨를 펴고 조정(朝廷)에서 시비(是非)를 논한다면 이것은 조정을 가볍게 보는 것이고 당세(當世)의 선비에게 수치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아아 나 같은 놈이 무엇을 발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그리고 나서 사마천은 지긋이 눈을 감고 태어나서부터 정화(征和)2년말(末)까지의 반생(半生)을 돌이켜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만 나의 생애(生涯)는 어쩌면 이렇게 비참한 것일까라는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지위(地位)와 명성(名聲),남자의 일생의 사업(事業)을 구하기 위해서 들인 헛된 노력과 고투(苦鬪)의 연속(連續)이 아니었던가.----- 잠시 사마천의 회상(回想)을 따라가 그의 삶을 더듬어 보자. 사마천은 기원전145년에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延安)에서 동남쪽 35Km 지점의 황하(黃河)서안(西岸)에 위치한 섬서성(陝西省) 한성현(韓城縣)의 남쪽 변두리에 있는 그의 성을 따서 사마(司馬)고개라고 불려지는 부근에서 태어났다. 통설(通說)에 따르면 기원전145년이지만 그가 언제 태어났는가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이설(異說)이 끊이지 않는다. 한편 그가 사망한 년도(年度)에 관해서는 근거로 할 만한 사료가 전혀 눈에 띠지 않는다. 그의 생애는 대체로 전한(前漢)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루고 있는 영주(英主) 무제의 치세(기원전141-187년)와 시종(始終)하고 있다. 아마 기원전87년을 전후해서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 추정(推定)하고 있을 뿐이다. 향리(鄕里)에서 촌동(村童)과 한 무리가 되어 구릉(丘陵)에서 가축을 쫓아다니고 논밭에서 김을 매고 집안 일을 도왔던 그는, 여섯 살 때 태사공(太史公), 즉 공식기록관 겸 천문대장(天文臺長)의 자리에 임관(任官)한 사마담(司馬談)에게 이끌려 대(大) 한제국의 수도 장안의 서북쪽에 위치한 무릉(茂陵)으로 거처를 옮겼다. 무릉(茂陵)은 무제가 어머니의 본적(本籍)이 여기에 있다하여 자기가 능묘(陵墓)할 곳으로 정한 땅이다. 생전에 자기가 사후(死後) 묻혀질 묘지를 정하는 풍습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무렵부터 성행해지게 되었다. 중국의 고대인은 사자(死者)가 능묘내(內)에서 생전과 똑같은 생활을 영위하도록 모든 일상 생활용기, 혹은 도기로 만든 모조품, 즉 명기(明器)등을 안에 넣었다. 서민이라도 이 일에는 상당(相當)한 비용이 들어 파산하는 일까지 있었으니 천자쯤 된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설영(設營)에는 오랜 년월(年月)의 준비를 필요로 했으며 수능(壽陵)이라고 해서 재위(在位)중에 그 땅을 선정(選定)해서 건설(建設)에 착수하는 것이 관례였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려산(驪山)에 거대한 능(陵)을 건조(建造)한 것은 전제군주(專制君主)의 폭정(暴政)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후세(後世)의 유교(儒敎)학자들에게서 맹렬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생전에 수릉(壽陵)을 만드는 일은 전국진한시대(戰國秦漢時代)부터 있었던 현상(現象)이기 때문에 유교학자들이 비난을 한 것은 수릉을 만든 것에 대한 이론(異論)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수릉의 규모(規模)가 진시황제 마음대로 지나치게 거대하게 만들어져 각종 시설의 사치스러움이 도가 지나쳤다는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진시황제에 대한 비판은 그의 폭정(暴政)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다. 유자(儒者)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도덕가(道德家)인 척 하는 학자들이 진시황제를 비판한 것 중에는 이와 유사한 것이 꽤 많지 않을까. 무제는 기원전 139년에 무릉(茂陵)에 능묘(陵墓)하기로 정하고 무릉을 향(鄕)에서 현(縣)으로 승격(昇格)시켰다. 한의 고조(高祖)부터 무제의 즉위(卽位)까지 61년간의 태평(太平)의 여택(餘澤)을 받아 쌓여진 충실한 국력, 특히 문제(文帝)의 절약에 의해 축적된 재력이 이 신릉(新陵)을 만드는 데 아낌없이 쓰여졌다. 능묘는 원읍(園邑)이라고 했고 그 주위(周圍)엔 묘지기라 할 수 있는 예민(隸民)을 수 백호(戶) 부속(附屬)시켰다. 한대(漢代)엔 수도 장안과 그 기내(畿內)는 제국(帝國)의 전판도(全版圖)에서 보면 약간 서쪽에 편재(偏在)하고 있었고 또 동쪽의 황하하류에 있는 확 트인 평야(平野)지방에 비해 경제력도 뒤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제는 그 지방에 대항(對抗)할 수 있도록 경제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천하(天下)의 부호(富豪)를 기내(畿內)에 이주(移住)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능묘인 원읍, 즉 신도시의 건설계획에 이 경제력 집중정책을 더하였다. 전국(全國)의 인민(人民)중 이 무릉 신도시에 이주하는 자는 한 호(戶)마다 동화(銅貨)20만전(錢),전(田)20경(頃)이 정부(政府)에서 무상(無償)으로 급부(給付)됐다. 이런 우대조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정부가 이주해 오길 바라고 있던 함곡관(函谷關)바깥에 사는 관동(關東)의 명족(名族)과 재산가(財産家)들은 선조가 분묘(墳墓)된 땅에서 떨어지는 것이 싫어 좀처럼 이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권유(勸誘)가 상당히 강제적(强制的)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정부는 그다지 목표(目標)로 삼지 않은 무산(無産)계급에 속하는 대중(大衆)의 이주는 다른 문제로 생각했다. 만약 오늘 날 수도 도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불편하긴 하지만 정부가 직접 단지(団地)를 만들고는 땅 값을 받지 않고 이전비(移轉費)는 상당액(相當額)을 정부가 하부(下付)한다고 한다면 아마도 희망자가 쇄도(殺到)하는 상태(狀態)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분묘가 있는 본적지(本籍地)에 각별한 애착심(愛着心)을 가지고 있는 중국 인민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본적지를 떠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어서 희망자가 쇄도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지라도 이 새로운 단지에 끌려 입주할 마음이 생긴 자도 어느 정도(程度)는 있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아버지에게 이끌려 무릉에 와 살게 된 것은 실은 아버지가 빈핍(貧乏)한 농가 출신이었던 이유에 기인한 것 같다. 학력만으로 태사공이라는 관리가 된 자에게 집에 비축해 둔 돈이 있을 리 없고, 때문에 정부가 공포(公布)한 호조건(好條件)에 끌려 살기에 불편하긴 하지만 단지의 공영주택(公營住宅)에 응모(應募)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일만 봐도 사마천이 자란 가정이 얼마나 가난하다는 것과 사마천이 보잘것없는 영세민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계(家計)가 어렵긴 했지만 아버지가 태사공이었다는 걸로 봐서 사마천은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혹독한 읽고 쓰기 훈련을 받았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도 장안에서 서북쪽으로 40Km지점에 위치한 무릉은 관중(關中)에 있는 큰 강인 위수(渭水)의 북쪽 둔덕에 있었지만 무제는 위수에 변문교(便門橋)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장안과 무릉과의 교통문제도 원활하게 해결되었다. 다리가 세워지기 전까지 시골에 묻혀 있던 소년 사마천도 이 때부터 수도(首都)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당대(當代)의 석학(碩學)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단지 유교 전문가의 제자가 돼 경학(經學)의 비의(秘義)를 전수 받기 위해서는 속수(束脩-고대 중국에서 문하생이 될 때 스승에게 드리는 진상물) 즉 다액(多額)의 입문료(入門料)를 납부(納付)해야만 했는데 사마천은 빈핍(貧乏)한 집 아이였기 때문에 좀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자(文字)의 기본적인 것에 관한 간단한 가르침을 받고 나서는 혼자 힘으로 고전을 탐독(耽讀)한 것이 실정(實情)이었던 것 같다. 사마천은 일곱 살부터 열 두 살까지 약 13년간의 청년시절을 이 무릉에서 보냈다고 한다. 필자(筆者)는 1954년 가을 10월, 중국방문학술대표단의 일원(一員)으로서 섬서성(陝西城)의 수부(首府) 서안(西安) 즉 한당(漢唐)의 장안(長安)으로 견학여행 범위를 늘려 하루를 할애해 서안시(市)에서 흥평현(興平縣)의 무릉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서안에서 위수대교(渭水大橋)를 지나 무릉까지는 약 2시간을 요(要)한다. 중국에서도 유수(有數)한 탁수(濁水)라 불리는 마치 진흙탕 같은 물이 낙낙하게 흐르는 위수대교를 건너 위수평야(渭水平野)에 있는 하천의 충적(沖積)평야에 있는 함양현(咸陽縣)에서 약간 가파른 비탈길을 기어올라 단구(段丘)의 위에 오르면 한 눈에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홍적기(洪積期)고원(高原)이 펼쳐진다. 무릉에 있는 무제의 본릉(本陵)엔 여러 개의 공신(功臣)들의 배릉(陪陵)이 본릉을 둘러싸면서 나란히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 흉노(匈奴)정벌에 큰공을 세워 무제에게서 절대적(絶對的)인 신망(信望)을 얻었던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의 묘가 총사령관(總司令官)인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의 묘와 나란히 있어 수많은 배릉의 분구(墳丘)중에서도 이채(異彩)로운 느낌을 준다. 북쪽 변경의 사막을 전전(轉戰)한 이 용장(勇壯)의 사적(事跡)은 『史記』에 더할 나위 없이 객관적이면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지면이 허락한다면 상술(詳述)하고 싶지만 아마도 거기까지 손 댈 틈이 없을 것 같다. 고비 사막을 넘어서 흉노의 본거지인 기련산(祁連山)에 돌입(突入)해 그 무리의 수령(首領)인 혼야(渾邪)왕(王)을 내항(來降)시킨 용장 곽거병은 아깝게도 겨우 24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떴다. 무제는 너무나 애석(愛惜)한 나머지 국장(國葬)에 준(準)하는 성의(盛儀)를 치르고 관(棺)을 장안이 아닌 무릉에 보내 바위 하나 없는 황토고원(黃土高原)인 이 지방에 원방(遠方)에서 모은 기암(奇岩)을 섞어 기련산처럼 생긴 언덕을 만들어 그 곳에 매장했다. 이 특이(特異)한 분묘(墳墓) 앞에는 흉노의 항복을 상징하는 말에 짓밟힌 흉노상(像)을 비롯해 크고 작은 가지각색의 돌로 만든 괴수(怪獸)조각이 놓여져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대의 석조조각의 대표작으로서 내외(內外)의 미술가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으로 필자도 이것을 한 번 꼭 보고 싶어서 먼길을 차를 달려온 것이다. 안내자(案內者)를 따라 기련산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분구의 정상에 올라가 서쪽을 바라보자 약 1Km를 사이에 두고 무릉 본릉의 웅대한 인공으로 된 방형(方形)의 언덕이 마치 천연(天然)의 구름처럼 둥그럽고 높게 머리를 쳐들고 있다. 이 주변 일대(一帶)에는 크고 작은 고분(古墳)이 산재(散在)해 있다. 이것들 중에는 사마천과 같은 시대 사람 것이 많이 포함돼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릉에 남아 있는 한대의 유적․유물은 위에서 말한 석조(石彫)와 겹겹이 쌓인 분구군(群)만이 있을 뿐 그 밖엔 일망평탄(一望平坦)한 아무 색다른 게 없는 고원의 한 촌락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 사마천은 무릉의 현무리(顯武里)에 사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곳은 도대체 어디에 해당하는 곳일까. 전한 말년(末年)에는 무릉현(縣)은 61,877호(戶), 인구 277,277명을 헤아리는 한제국에서 손꼽히는 큰 도읍(都邑)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곽거병의 묘 부근도 당시(當時)는 전부 인가(人家)가 밀집(密集)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청년 사마천이 처음 이 곳에 입주했을 때는 아직 그 정도로 번화(繁華)하지는 않았겠지만 문득 그 때의 공상(空想)이 떠올라 난 잠시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한 제국의 문관채용 규정(規定)을 살펴보면 17세 이상의 학동(學童)을 시험해 봐 한자 9,000자, 지금의(일본) 해서(楷書) 자체(字體)가 아닌 그 때 상용한자(常用漢字)인 예서(隸書)라는 서체(書體)로 9,000자 이상을 암송(暗誦)할 수 있는 자를 사(史), 즉 서기로 임용(任用)했다고 한다. 암기(暗記)가 아니라 암송(暗誦)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 때는 자(字)를 읽고 쓸 수 있게 하기 위해 『창힐편(倉頡篇)』같은 책에 있는 한문을 음독(音讀)으로 내리읽게 하면서 암기(暗記)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고 말하는 사자구(四字句)에서 생긴 현재의 『천자문(千字文)』의 원조에 해당하는 서적이다. 그 시험의 합격자는 다시 여덟 종류의 특수서체(特殊書體)의 고급스런 시문(試問)을 받게 된다.「전서(篆書)」,대소(大小)의 두 동류가 있지만 할부(割符)로 쓰여진 「각부(刻符)」기지물(旗指物)의 문자로만 쓰여지는 「충서(蟲書)」, 판(判)에 새기는 「모인(摹印)」, 그 시대의 문서류(類)라고 할 수 있는 죽(竹)과 목(木)으로 된 찰(札), 즉 죽간(竹簡), 목간(木簡)을 끈으로 하나로 묶고 봉(封)할 때 그 위에 쓰는 「서서(署書)」,청동(靑銅) 무기의 명문(銘文)인 「수서(殳書)」와 「예서(隸書)」가 그것이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상서성(尙書省)의 서기(書記)가 될 수 있다. 상서성은 직역(直譯)하면 현대(일본)의 총리부(總理府)라 할 수 있지만 상서성의 격(格)으로 따져 본다면 대장성(大藏省-우리 나라의 재무부(財務部)에 해당)이라고 하는 쪽이 좋을 지도 모른다. 한대에는 가장 유력(有力)한 관청(官廳)이었다. 이 문자 시험관을 담당하고 있던 것이 태사공이다. 그 태사공을 아버지로 둔 사마천이 소년시절부터 얼마나 혹독한 학습(學習)을 받았을까 하는가는 상상(想像)이 가고도 남는다. 열 살 때 이미 단순히 한대에 쓰여지고 있는 여덟 종류의 서체뿐만 아니라 전국시대에 황하하류의 제국(諸國)들이 사용했고, 공자가 편찬(編纂)했다고 하는 경서(經書)에 사용된 고문(古文)이라고 불린 서체로 쓰여진 고대(古代)의 전적(典籍)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 중국의 유능한 청년학도(靑年學徒)들은 물론 일본의 명민(明敏)한 젊은 중국연구자들이라면 할 마음만 있으면 사마천이 읽은 고전, 즉 경서의 교양(敎養)정도는 삼 년만 있으면 종료(終了)할 수 있을 것이다. 목판(木版)이라든가 활판(活版)으로 된 읽기 쉬운 텍스트를 바로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알기 어려운 고문으로 쓰여졌을 뿐 아니라 불완전하고 분량이 많은 목간 두루마리를 암송했야 했기 때문에 굉장한 노력을 요(要)했다. 그러나 나는 사마천이 이를 해낸 것은 그가 비범(非凡)한 소질을 가진 천재아였을 뿐 아니라 남자가 일생동안 해야 될 일을 이 고전 속에서 찾기 위해 전력(全力)을 다한 결과라고 해석(解釋)하고 싶다. 사마천은 다시 붓을 들고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의 소년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재능만 믿고 불패분방(不覇奔放)한 행동을 했었고 또한 그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향리(鄕里)의 나에 대한 평판은 내가 성인(成人)이 되고 나서도 결코 근사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썼다. 그는 그리고 나서 혼잣말을 시작했다. ------소경, 그렇지 않나.자네도 자네의 친우(親友) 전인(田仁)도 그리고 나도 정말이지 이름 없고 가난한 서민(庶民)들 사이에서 고투(苦鬪)하면서 인생의 도(道)를 헤쳐 나온 자들이잖나.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원광 원년(元光元年), 내가 20살 때다. 금상폐하(今上陛下)가 즉위 초에 승상(丞相)을 비롯해 대신(大臣), 제후(諸侯)들에게 현량(賢良), 방정(方正), 직언(直言), 극간(極諫) 등의 선비를 구하고 싶으니 이들을 추거(推擧)하라 하여 폐하의 그러한 말씀을 듣고 동중서(董仲舒)가 헌책(獻策)을 드려 그 해부터 천하의 군국(君國)마다 효행(孝行) 및 청렴결백한 선비를 각각 한 명씩 중앙(中央)에 추거하는 제도가 세워졌다. 그러나 향리에서도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고 있던 난 추거는 커녕 후보도 되지 못했다. 그 때 소경 자네는 잔꾀를 부려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기를 좋게 선전했다. 고아(孤兒)였을 뿐 아니라 빈핍(貧乏)했던 자네는 하남(河南)있는 고향 형양현(滎陽縣)에서 장안으로 떠났다. 관리(官吏)가 되기에 충분한 연고(緣故)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장안에선 상당한 커넥션이 필요했긴 때문에 일단 포기하고 수도 서쪽 변경에 있는 산지인 무공현(武功縣)으로 적(籍)을 옮겼다. 이 곳에선 큰 연고(緣故)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네는 현민(縣民)의 신망(信望)을 얻어 삼백석(石)을 받는 현(縣)의 공무원이 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 폐하가 행사(行事)하실 때 돈을 너무 적게 써 설영(設營)이 불완전했다는 죄목으로 금방 면직(免職)되었다. 분명 궁내성(宮內省)의 하급관리들을 소흘히 대접해서 사이가 나빠진 결과겠지. 우리들은 모두 그런 아부꾼들과는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전인(田仁)녀석과 자네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기세가 좋았던 위(衛)황후의 친족인 위청(衛靑) 대장군(大將軍)의 근시였다가 랑(郞-무가(武家)의 가신)이 되었는데 그 때까지는 아주 좋았다. 그 때 조정에서 위장군의 근시 중에서 지망자를 모집(募集)해 시험에 통과한 자를 랑(郞)으로 임명한다는 조칙(詔勅)이 내려졌다. 수완을 중히 여긴 위장군은 근시 중에서 돈 많은 자를 택해 새로 만든 마구(馬具)를 매단 말과 빨간 의상과 보옥을 박아 넣은 검 등을 준비시키게 하고 이를 참고해 명부(名簿)를 상정(上呈)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잔소리꾼인 대신(大臣) 조우(趙禹)가 마침 그 곳을 지나갔던 것이 자네들에겐 행운이었다. 조우는 내가 시험해 보겠다고 하고 면접(面接)을 하고선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지만 제대로 무예(武藝)를 구사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하면서 「위장군은 부자집 자식들만 채용하고 있지만 이건 마치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지 않은가. 이래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라고 말하고 전부 낙제시켜 버려 자네들이 출세하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엉겁결에 쾌재(快哉)를 불렀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윗사람들로부터 견제를 받아 전혀 출세하지 못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다시 붓을 들고 「그러나 운좋게 폐하가 돌아가신 아버지 일을 기억하고 나에게 태사공의 지위를 내려 주셔서 궁중(宮中)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붙임성이 없고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융통성 없는 남자였다.『분(盆)을 머리 위에 올렸는데 어째서 하늘이 보이는 것일까.』라고 말하고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친구와의 교제(交際)는 일절(一切)끊고 아르바이트도 그만 두고 밤낮 있는 힘을 다해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직무를 수행해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세상일에 서툴러 자칫 잘못하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소경, 실제로 그렇지 않았나.」라고 쓰고서 는 한 숨을 크게 쉬었다. 제2장 어느 사형수에게 보내는 편지 -----환관 사마천의 진심(續) 사마천은 혼잣말을 했다. -----이릉(李陵) 사건이래(以來) 나는 임소경(任少卿)을 만나 적이 없던 것 같다.내가 어째서 옛날 친구였던 패장(敗將) 이릉을 변호하다가 폐하의 분노를 사 결국 환관의 몸으로 영락(零落)하게 됐던가하는 이유와 그 경과(經過)등은 아직 얘기한 적이 없을 것이다. 세간(世間)에선 이릉과 내가 특수한 교우관계(交友關係)라서 궁정(宮廷)에서 정치적 음모(陰謀)를 꾸몄고 내가 제일 앞에 있었기 때문에 실각(失脚)하기에 이르렀다는 설(說)이 마치 정설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이 사건의 진상이라고 말하기보단 그 때 내가 취한 태도(態度)에 관해 설명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그는 편지 쓰기를 계속했다. 「이릉과 나와는 옛날, 같은 건장궁(建章宮)에 출사(出仕)하고 있던 때부터 친하게 지낸 건 틀림없지만 친우(親友)라고 할 정도는 사이는 아니다. 성격도 완전히 정반대였고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흡족해질 때까지 마음을 터놓고 환담(歡談)한 적도 없었다. 내가 본 바 그의 사람됨은 기가 뛰어난 무사였다는 것 밖에 할 말이 없다. 소극적인 면이 있었지만 일단 국가비상의 위기상황이 일어난다면 일신(一身)을 아끼지 않고 싸울 각오는 돼 있는 사나이였다. 지금도 그 사람이야말로 국사(國士)의 모범이 돼는 인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겨우 보병만을 이끌고 흉노의 대군과 역전(力戰)한 이릉은 사마천의 눈에 이같이 비추어진 무사였던 것이었다. 「이릉이 요 전에 인신(人臣)로서의 충(忠)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결사(決死)의 계획(計劃)을 세워 감연(敢然)히 군국(郡國)의 난(難)과 맞섰던 것은 당세(當世) 있었던 일 중 기특하기 그지없는 일로 아무리 찬양해도 부족하지 않는 쾌거(快擧)였다. 그러나 한 번 실수해 뜻한 바와 좀 다른 결과가 나오자 전선(戰線)에서 몇 만리(里)나 후방(後方)에서 자기는 물론 처자식의 생명과 재산의 위험도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는 궁정(宮廷)의 관료(官僚)따위가 그럼 그렇지 하면서 득의양양(得意揚揚)해져 입을 모아 이릉의 실패(失敗)를 비난(非難)하고 누구 하나 나서서 그를 위해 변호해 주는 자가 없었다.」 그렇게 쓰고 나서 사마천은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나는 이 경박(輕薄)한 재자(才子)들의 일면(一面)을 보고 나도 모르게 불끈해져 가만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소경, 자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 거라고 생각하나. 분명 나와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임이 틀림없었을 걸세.----- 그는 이릉의 원정(遠征)의 처음부터 기술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벌써 8년전의 옛 일이다. 천한(天漢)2년 9월에 있던 일이었다. 이릉이 불과 5,000이 안 되는 보병을 인솔해 거연해(居延海-영하성(寧夏省))가까이 있는 기지(基地)를 출발해서 30일간 강행군(强行軍)을 계속해 적지(敵地)인 몽고고원(蒙古高原)을 가로질러 흉노의 수령(首領) 선우(單于)의 슬하(膝下)인 준계산(逡稽山)아래에 다다랐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것이 양한(兩漢)시대를 통틀어 한의 군대가 흉노의 오지(奧地)에 도달(到達)한 최북한(最北限)이다. 기병대 없이 보병이 여기까지 도달한 일은 한민족의 긴 대북방유목민족 전쟁사상(對北方遊牧民族戰爭史上) 기적(奇蹟)이라고 할 만한 대기록(大記錄)이다. 이릉이 부하인 척후대장(斥候隊長)을 장안으로 보내 오지(奧地)의 견취도(見取圖)와 흉노의 정보를 받은 한 조정(朝廷)이 모두 경도(驚倒)하고 광희(狂喜)하면서 이 뉴스를 받아들인 것은 당연(當然)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마천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먹이를 호랑이 눈앞에 뿌려 호용무쌍(豪勇無雙)한 흉노의 성질을 자극(刺戟)한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흉노가 자랑하는 10만 가까운 기마(騎馬)대군(大軍)은 기동력이 부족하고 고립무원(孤立無援)한 한군(漢軍) 보병 소부대를 바로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4방 8방에서 맹렬한 돌격(突擊)을 가해 왔다. 명사수(名射手)였던 망부(亡父) 이광(李廣)의 혈통을 이은 이릉이 손수 돌보고 키워낸 정예(精銳) 궁사대(弓射隊)는 흉노를 맞아 싸우면서 그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해 항상 큰 타격을 입히고 후퇴했다. 말 못할 정도로 처절하게 고군분투(孤軍奮鬪)했던 한군의 모습은 나까시마아츠시(中島敦)의 걸작(傑作) 『李陵』에 묘사되어 있다. 다만 나카시마아츠시는 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의 기사(記事)를 참고해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사마천은 천한(天漢) 2년(기원전99년)에 일어난 이 사건 직후 바로 이 혈전(血戰)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지 못했었다. 그런 까닭으로 태시(太始)4년(기원전93년)말까지 어느 정도 기술(記述)이 끝난 『사기(史記)』에는 이에 대해 매우 간단한 기사밖에 실려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정화2년(기원전91년)에 쓰여진 이 「임소경에게 보내는 편지」안에 있는 좀 상세한 기술을 참고해서 이 싸움의 규모(規模)를 사마천이 아는 범위 내에서 약술(略述)하고 싶다. 이릉은 어떻게든 자군(自軍)을 흉노의 세력범위에서 철수(撤收)시키려고 전력을 다했지만 흉노기병의 추격(追擊)은 정말 집요(執拗)했다. 이릉은 그 때마다 흉노에게 맹렬한 반격을 가하긴 했지만, 「단우(單于)의 대군과 십여일에 걸쳐 연전(連戰)하고 추격군에게 과반수(過半數)에 가까운 사상자(死傷者)를 내게 하고 붙잡은 포로도 그 수용(收容)에 골치 아플 정도였다. 가죽 옷을 입은 흉노의 군주(君主)도 한 때는 이릉군(軍)의 추적(追跡)을 그만 두려고 할 정도였었다. 그러나 흉노 영토 깊숙이 침입한 이릉군이 한지(漢地)로 철수하는 것을 묵과(黙過)한다는 것은 흉노의 위신(威信)문제라는 것을 고려(顧慮)해 모든 흉노족의 전투원을 총동원해 최후(最後)의 맹공격(猛攻擊)을 개시(開始)했다. 원군(援軍)은 오지 않고 먼 길을 오면서 연전(連戰)한 까닭에 지니고 있던 활을 전부 쏴 버린 이릉군은 이 싸움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이 같은 참혹한 상태에 이르렀어도 군의 사기는 더욱 왕성(旺盛)해져 「이릉이 군사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자 부상병까지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고 이릉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군사들은 피로 물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무기를 잃은 자도 맨주먹을 치켜들고 흉노의 시퍼런 칼날을 아랑곳하지 않고 적과 사투(死鬪)를 벌였다.」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릉이 보낸 사자의 보고를 받고 한 조정의 대신들은 빠짐없이 술잔을 들고 폐하의 만세(萬歲)를 기원했는데 그 뒤 수일 후 이릉군이 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보고를 듣고 폐하는 굉장히 낙담하셨다. 식욕을 완전히 상실(喪失)하시고 매일 아침 하는 회의(會議)에 임하시긴 해도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들도 단지 우려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정황(情況)을 먼 말좌(末座)에서 엿보고 있던 사마천은 폐하의 비탄해하시는 모습을 보다 못해 폐하의 심려를 덜어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노심초사했다. 「나는 그 때 정말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릉은 평소부터 침식(寢食)을 잊고 군 장병들의 어려운 점을 살펴 줬던 까닭에 장병들은 사력을 다할 각오가 돼 있사옵니다. 이것은 옛날의 명장이라고 용이(容易)하지 않은 일이옵니다. 이릉이 적에게 패해 붙잡히게 되긴 했지만 그의 뜻을 헤아려보면 그는 뭔가 공을 세워 한왕조(王朝)에 복명(復命)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사옵니다. 단지 객관적 정세가 너무 나빠져 이를 풀지 못하게 돼 버린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가 적군에 준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그 공적(功績)은 충분히 천하에 공표(公表)할 가치가 있사옵니다. 그러니 그렇게 비관(悲觀)하실 일은 아니옵니다.”라고 황제에게 말씀 올렸다면 어찌 됐을까.』 그러나 나는 낮은 신분이었던 까닭에 황제에게 상주(上奏)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렇지만 가끔 태사공 소관(所管)의 사무(事務)때문에 폐하에게 말씀드릴 기회를 얻게 돼서 이거 다행이구나 하고 내 의견을 폐하께 말씀드려 이릉의 공적을 제대로 평가하고 폐하의 시야(視野)를 넓혀 드린 다음 이릉을 나무라는 군신(君臣)들의 비난의 소리를 막으려 했다.」 사마천은 붓을 내리고 중얼거렸다. ------소경, 네 놈은 분명 날 바보로 생각하겠지. 참으로 얼간이 같은 짓을 하는 녀석이구나. 생각만 하는 것 만이라면 그래도 괜찮지만 그런 걸 입 밖에 내서 폐하께 말씀드리는 녀석이 세상 어디에 있냐고 하겠지.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겠지. 사마천 네 녀석은 황제라든가 대관(大官)이라고 하는 자들의 심리(心理)를 조금도 모르고 있다. 소위 높으신 분들은 자기 실수를 지적(指摘)받으면 부루퉁해져 노한다고 말하겠지. 실제로 그랬다.------ 「내가 내 의견을 일단 설명해 드리긴 했지만 영명(英明)한 폐하도 이 녀석이 틀림없이 내가 신뢰하고 있는 흉노토벌군 총사령관 이광리(李廣利)장군의 트집을 잡아 자기 벗인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셨고 나는 즉각(卽刻) 무고죄(誣告罪)혐의(嫌疑)로 재판을 받게 됐다. 내 딴엔 폐하의 심려를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고 내 성의(誠意)를 보여드리려고 한 일이었지만 조금도 이해 받지 못하고 황제를 비난했다는 불경죄(不敬罪)로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判決)을 받았다.」 한대에는 「죽을 죄에 해당하는 죄를 범(犯)한 자라도 만약 동(銅)50만전(錢)을 국고(國庫)에 납입(納入)할 때는 그 죄를 면죄(免罪)한다.」라는 법률(法律)이 있었다. 사마천은 어떻게 해서든 전(錢)을 납부해서 사형을 면하려고 해 보았다. 「내 집은 빈핍(貧乏)했고 아무리 해봐도 50만전이라는 속죄금(贖罪金)을 모을 수가 없었다. 평소 사귄 친구들도 모두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뿐. 50만전이라는 큰 돈을 유통해 줄 만한 배경 좋은 녀석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가까운 친척도 완전히 빈털터리였고 돈을 모으기 위해 힘 써 주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나는 무정한 옥지기에게 끌려가 감옥 깊숙이 감금되었고 어느 누구도 내 억울함을 호소해 주지 않았다. 나와 같은 경험을 이 번엔 소경, 네 녀석이 직접 겪고 있다. 내 심정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거라고 생각하네.」 한대에는 사형(死刑)을 궁형(宮刑)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형을 면하기 위해 궁형을 받겠다고 해 어둑어둑한 잠실(蠶室-누에 치는 방)에서 거세(去勢) 수술을 받았고 이를 일생동안 평생의 수치로 여긴 것이다. 「아아! 한심하다, 한심해. 이 부아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세간(世間)의 속인(俗人)들에게 천번만번 말한다 해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걸세. 소경, 자네라면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지.」 사마천은 붓을 드는 게 점점 답답해졌다. ------그 때 내 기분은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난 왜 하필이면 사마씨(氏)같은 이름 없고 빈핍한 집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빈핍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50만전을 납부하면 사형을 피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 했다.그러나 자신의 이런 운명을 마음대로 저주할 수도 없었다. 살아있는 동안 어떠한 수모를 당하더라도 살아가야 한다고 조상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여기서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계속 써 내려갔다. 「나의 선조(先祖)는 칼 한 자루로 한 성(城)의 주인이 되었지만 나는 기록과 천문(天文曆法)을 살피는 하찮은 신분이었고 내가 하는 일은 점장이나 신주(神主)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폐하가 여흥을 즐기실 때 불렀던 배우(俳優)들과 마찬가지로 내 직업은 완전히 세간(世間)의 경멸(輕蔑)의 대상이었다. 그런 신분이었던 내가 억울하게 죄를 입고 법률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황제에겐 벌레 한 마리 죽는 것과 차이가 없이 느껴질 것이고 세간 사람들도 내가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고는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단지 지혜(智慧)가 부족해 죄가 중해질 때까지 멍하니 있다가 사형에 처해졌다고 밖에 생각치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을 것도 없다. 전부 나의 부덕(不德)이 초래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한 번은 죽게 돼 있다. 죽음 중에는 태산(泰山)보다도 무거운 것이 있는가 하면 홍모(鴻毛)보다도 가벼운 것도 있는데 죽음에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떤 목적(目的)을 위해서 죽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최선(最善)의 죽음은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죽는 것이다. 차선(次善)은 자기 몸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3번째는 나의 면목(面目)을 지키기 위해서, 4번째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못한 자는 몸이 줄로 묶여져 모욕을 받고 수의(囚衣)를 입고 욕(辱)을 받고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추초(箠楚)의 욕을 받고 머리카락에 휘어지고 단단한 틀이 끼워지는 욕을 받고 의(劓), 이(刵), 빈(臏), 경(黥)의 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가장 하등(下等)한 것은 분명히 부형(腐刑=宮刑)이다. 이런 형들을 받는 죄수들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소경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진(秦)의 재상(宰相) 이사(李斯), 한(漢)의 명장(名將) 한신(韓信), 맹장(猛將) 팽월(彭越), 공신(功臣) 주발(周勃), 명상(名相) 전분(田蚡)같은 사람들이 옥(獄)에 들어가서 하찮은 옥리(獄吏)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하급관리나 천민(賤民)들과 만나서도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보는 모습을 상상해 봤는가. 명성(名聲)이 옆 나라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자결(自決)도 하지 못하고 먼지투성이가 되어 최후를 맞이하는 일은 고금(古今)에 그 예(例)가 적지 않다. 정말로 이상한 이야기지만 일단 자결할 기회를 놓치고 죄인의 몸이 돼 버리면 모두 그렇게 돼 버린다. 세상일이란 것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대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생(生)을 탐(貪)하고 사(死)를 미워하며 부모(父母)를 생각하고 처자(妻子)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인정(人情)인 것으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인정을 감히 끊는 자는 의리(義理)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밖에 없다. 나는 불행히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형제와 가족도 없고 단지 처자가 있을 뿐, 우리 가정(家庭)은 의지할 친척이 없는 고독(孤獨)한 가정이다. 소경, 자네는 내가 처자 때문에 생명을 아까워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계속 들어 주게. 용기 있는 남자가 언제나 절의(節義)를 지키고 죽는다고는 할 수 없고 겁쟁이가 때로는 의리(義理)를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일이 있다. 내가 비겁자(卑怯者)라서 어떻게 해서든 생명만은 보존할려고 생각했다 해도 나는 일을 함에 항상 분별이 있어야함을 알고 있네. 어째서 터무니없는 이유로 오랏줄에 묶여 모욕을 받는 것일까. 자유를 빼앗긴 노비(奴婢)조차도 책임을 지고 자살하는데 내가 그런 일을 못 할 것 같은가. 은인(隱忍)을 거듭하고 생명만 보존하는 것은 더럽고 불결한 것임을 알고도 내가 그것을 개의치 않고 살아간 것은 내 마음 속에 생각한 둔 것을 아직 충분히 발표(發表)하지 못한 것이 억울했고 훌륭한 저술(著述)을 후세(後世)에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것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부유하고 귀한 사람이 죽은 뒤 성명(姓名)이 마멸(磨滅)되어 역사(歷史)에서 사라져 버린 예는 일일이 열거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다수(多數)에 이르고 있다. 이것에 비해 보통 사람들 중에서 뛰어났던 특별한 인물들의 이름만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정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주(周)의 문왕(文王)이 은(殷)의 주(紂) 때문에 붙잡힌 몸이 됐을 때 『주역(周易)』을 저술했고 공자가 자기의 도(道)의 나아갈 바를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춘추(春秋)』를 만들었고 굴원(屈原)이 초왕(楚王)에게 추방당하면서 『이소(離騷)의 시(詩)』를 노래했고 좌구(左丘)가 장님이 된 후 『국어(國語)』를 만들었고 손자(孫子)가 다리가 잘리는 형(形)을 받고서 병법(兵法)을 편집(編集)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촉(蜀)에 흘러 들어가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전했고 한비자(韓非子)는 진시황제에게 죄인으로 붙들리고 난 후 『설난(說難)』,『고분(孤憤)』을 썼다. 삼백편(篇)으로 된 아름다운 『詩』조차 그 내용은 시세(時勢)를 한탄하면서 읊은 것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이상(以上)의 실례(實例)만 봐도 인간이란 마음이 우울해져 그 배출구가 없을 때에 과거를 기록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명저(名著)를 써 내는 것이다. 좌구가 장님이 되어 손자가 다리를 잘려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불구(不具)가 되어 사회(社會)의 표면(表面)에서 활동(活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세상을 멀리 하고 저술에 전념(專念)해 강개(慷慨)한 마음을 문장으로 써서 나타냈던 것이다. 불구가 된 나도 요즈음 나의 재능이 모자람을 개의치 않고 내 마음이 생각하는 바를 서투르지만 문장(文章)을 통해 세상에 전하기로 결심했다. 천하에 산일(散佚)하는 구문(舊聞)을 모두 망라(網羅)해 인간의 추구(追求)해야 할 행동을 빠짐없이 쓰고 왕조(王朝)의 흥망(興亡)을 대국적(大局的)으로 바라보고 왜 성공하고 실패했는가를 생각하면서 위로는 황제(黃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10표(表), 12본기(本紀), 8서(書), 30세가(世家), 70열전(列傳) 합쳐서 130편(篇)을 저술하는 데 전념(專念)하기로 했다. 그것은 천(天), 즉 자연(自然)과 인간의 미묘(微妙)한 감응(感應), 인간 역사의 고금(古今)에 걸친 변화를 연구해 독창적인 저술을 완성시키려고 한 것이다. 불행히 이 저작(著作) 중도(中途)에 형벌(刑罰)을 받는 화(禍)를 당한 것이다. 오직 이 저작을 성취(成就)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안타깝다는 일심(一心)이 있던 덕에 궁형이란 극형(極刑)을 받았어도 태연할 수 있었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내가 심혈(心血)을 기울인 이 저술이 끝나 이것을 명산(名山)에 속에 넣어 간직해 이것이 영원히 전해져 대도(大都)에 사는 학문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나의 커다란 치욕은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을 것이다. 만일 내가 사형된다 하더라도 무슨 억울함이 있을 것인가. 이 같은 생각은 유직자(有職者)들이라면 알아 줄 수도 있겠지만 속인(俗人)에게는 아무리 말해도 소 귀에 경 읽기일지도 모른다. 언론(言論)의 헐뜸음 때문에 궁형이라는 화를 입고 향리(鄕里)의 비웃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선조에게 큰 수치를 입힌 이상 나는 두 번 다시 돌아가신 부모(父母) 성묘도 할 수 없다. 백세(百世)가 지나도 이 수치는 결코 소멸(消滅)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생각하고 그(-누구를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를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방에 앉아 있어도 갑자기 머리가 멍해져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되거나 걷고 있어도 어디로 가는 건가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을 정도다. 그 수치를 생각해 내면 식은 땀이 주루룩 흘러 나와 속옷이 축축해져 버린다. 궁중(宮中)에서 당직(當直)하면서 후궁(後宮)을 시중드는 몸이 됐지만 하루라도 빨리 그만 두고 산중(山中)으로 깊이 숨고 싶은 생각이 들면 차라리 일 같은 건 팽개쳐 버리고 세속(世俗)과 함께 부침(浮沈)하며 시세(時勢)에 부앙(俯仰)하고 광혹(狂惑)한 패거리들과 어울려 버리자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참으로 나아갈 바를 모르는 상태(狀態)이다. 소경, 자네는 편지로 나에게 왜 현자를 추천(推薦)하지 않았냐고 비난했지만 지금 말한 내 심정과 자네가 내게 한 비난이 얼마나 엇갈려 있는지 알겠나. 좋은 말을 늘어놓아 내 잘못을 덮고 싶지만 속인에게는 이것이 통용(通用)되지 않아 역(逆)으로 치욕(恥辱)을 입을 것 같을 느낌이 들어서 못하겠네. 결국 내가 죽을 때가 오면 내가 한 일이 옳았던가 아니었던가가 결정되겠지. 아직도 쓰고 싶은 것이 산처럼 있지만 내 고루(固陋)한 생각은 대략(大略) 다 썼으니 이젠 자네의 고평(高評)을 기다리는 것이 순서인 것 같네. 敬白」 환관인 사마천이 집행(執行) 시기가 절박(切迫)한 사형수(死刑囚) 친구인 임안에게 보낸 서간(書簡)의 근본적(根本的)인 모티브는 궁형을 받은 자의 굴욕감이다. 우선 「몸이 상해 더러움에 처(處)하게 됐다.」로 시작해 「내 몸은 이미 결여되어」「행(行)은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 보다 더러운 것이 없고 수치는 궁형보다 큰 것이 없다.」「지금 나는 이제는 불구가 된 몸으로 걸레질 할 때 쓰는 노예가 돼서 무지(無知)한 패거리들과 같은 무리가 되 버리고 말았다.」「이릉은 가문(家門)의 명(名)을 떨어뜨렸고 나는 잠실에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인간으로 태어난 자가 받는 욕(辱)들, 그 중에서 최고로 열등(劣等)한 것이 부형이다.」등으로 궁형이 얼마나 심한 치욕(恥辱)인가 하는 것을 6번이나 반복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後)에 「이런 가장 그리고 더없이 잔혹(殘酷)한 궁형을 받았지만 이를 원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말한 이유는 단지 명(命)을 보존해 오로지 선인(先人)에게서 받은 유명(遺命)인 『사기(史記)』라는 대저술(大著述)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소경 자네도 이 책을 봐 준다면 분명 나의 심사(心思)를 잘 이해해 줄 것임이 틀림없네.」라고 결론짓고 있다. 의론(議論)은 이걸로 이미 끝났는데도 거듭 「내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그 수치를 생각해 내면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 나와 속옷이 축축해져 버린다.」라고 8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독자(讀者)들이 너무 지루하고 장황하다고 느낄 게 틀림없다. 나도 이 책을 집필(執筆)하기 위해 오랜만에 읽기 시작했을 때는 확실히 지긋지긋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2번, 3번 읽는 사이에 점점 사마천과 공명(共鳴)하게 됐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는 궁형을 받은 경험(經驗)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마천의 심리(心理)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마천이 그렇게도 궁형이라는 것에 얽매인 첫 번째 이유는 그 자신이 청원(請願)하여 궁형을 받았다는 것에 있다. 생식능력을 잃는 것이 궁형을 받는 자의 최대(最大)의 고통이었겠지 라고 상상(想像)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오해(誤解)다. 사마천은 당시 48세, 한대(漢代)에선 이미 상당히 노인측(側)에 들어가는 나이다. 생식능력을 잃는 것도 고통이었겠지만 그것보다는 남성의 상징이 형벌에 의해 제거된 채로 살아가야 되는 불구자가 됐다는 불명예(不名譽)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비중(比重)을 차지하고 있다.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반복하고 있는 자기의 형(形), 즉 육체가 불완전하게 된 것에 대한 비탄(悲嘆)스런 문구(文句)가 이를 십분(十分) 표현(表現)하고 있다. 고대중국에서 후천적(後天的) 불구자가 느끼는 비애(悲哀)는 근대인(近代人)과 느끼는 불행감(不幸感)과 공통(共通)하는 것 외에 다시 선조에 대한 불효라는 윤리관이 첨가되어 있다. 공자의 말씀을 편찬(編纂)했다고 전해지는 『孝經』에서는 「신체발부(身體髮膚). 이것을 부모에게 받아 감히 훼상(毁傷)시키지 않는 것은 효(孝)의 시작이리..」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보통은「태어나 부모에게 받은 유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행의 기초(基礎)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기에는 불충분한데 실은 좀 더 상세한 설명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 사후(死後)의 생활(生活)을 위해 미이라를 만든 것과 비슷한 신앙을 고대 중국인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육체에서 영혼이 떠난 상태이므로 죽은 사람의 육체를 완벽히 보존해 두면 언젠가 그 영혼이 돌아와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부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집트와 달라 건조지대(乾造地帶)가 아니기 때문에 미이라 같은 완전하게 시체를 보존할 방법은 발명되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를 완전한 형체 그대로 묻는 일은 중요히 취급하고 있었다. 육체가 불완전해서는 부활을 목적으로 한 이장(移葬)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쟁(戰爭)에 패해 목이 잘려지는 사태가 일어나면 고대 중국인은 대단히 곤혹(困惑)스러워 한 것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전설집(傳說集)에 있는 『좌전(左傳)』에는 「전쟁으로 죽은 자는 보통 묘(墓)에는 매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에 대해 한대 이후 후세(後世)의 주석(註釋)에서는 「전사(戰死)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에 묘에 매장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지만 명예스런 전사자도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설(說)이 잘못돼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結局) 목이 잘려져 있기 때문에 부활을 전제(前提)로 한 매장(埋葬)이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解釋)일 것이다. 불완전한 사체(死體)는 선조들과 같은 묘지(墓地)에 묻힐 수 없다는 것과 이는 선조에 대한 효가 아니다. 이 사상은 사마천이 가지고 있던 궁형에 대한 사고방식에 깊게 영향(影響)을 주고 있다. 그는 「선조에 그 수치를 끼친 이상 나는 두 번 다시 돌아가신 부모 성묘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고대의 매장의례(埋葬儀禮)에 근거한 육체의 불구에 대한 관념(觀念)이 그의 의식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가 불구가 된다는 것은 선조에 대한 악(惡)이라는 종교적(宗敎的)죄악감(罪惡感)이 그에게 고통을 준 것이다. 사마천의 육체의 결손(缺損)에 대해 얽매인 두번째 이유는 전국(戰國)시대 이후의 개인의 각성(覺醒)에 기인(起因)한 인간의 육체의 완전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意識)과 관계(關係)가 있다. 한대사람은 남성의 육체․용모(容貌)의 아름다움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제왕, 재상, 장군, 고급관료 등 귀족적(貴族的)인 사람들이 우선 제일(第一),그리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용모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當時) 미(美)의 기준(基準)에는 남자는 얼굴 생김새가 좋아야 함은 물론 키가 크고 살이 뽀얗고 살쪄 있어야 했다. 즉 당당(堂堂)하게 생기고 미남자(美男子)가 아니면 고관(高官)으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제의 손자인 선제(宣帝)시대 일이긴 하지만 이런 일화(逸話)가 있다. 어느 빈핍(貧乏)한 학자가 추천(推薦)을 받아 대장군 곽(광霍光)의 식객(食客)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시경(詩經)을 아주 잘 하는 학자(學者)라는 것이 알려져 황제의 앞에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용자(容姿)가 나빴기 때문에 전혀 채용(採用)해 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의견을 폐하에게 말씀드렸다. 「저는 산동(山東)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사옵니다. 용모가 다른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비관(悲觀)하기도 했사옵니다. 그렇지만 저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공부해 왔사옵니다. 운좋게 선생(先生)에게 도(道)를 가르침 받았던 덕분에 경학(經學)에는 자신(自信)이 있사옵니다. 부디 한가하신 때는 이 몸을 어전(御前)에 불러 주셔서 저의 강의(講義)를 들어만 주신다면 광영이겠사옵니다.」 그래서 선제가 불러내서 시경에 대한 강의를 들어 본 바, 솜씨가 대단히 훌륭했기 때문에 관리로 등용하기로 했다. 인간의 용모에 대한 강한 관심(關心)은 인상학(人相學)과도 관계가 있어 전국시대가 되자 관상장이가 굉장히 만연하게 되었다. 전국시대 최후(最後)의 대학자(大學者) 순자(荀子)는 「非相篇」(『荀子』1篇)에서 관상장이를 비판(批判)하고 있다. 「요즘 매우 관장장이가 늘어났지만 옛날 이상적(理想的)인 세상에서는 그 같은 것은 없었다. 유교 학자는 인상(人相)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관상장이는 얼굴모양을 보면 그 사람 운명(運命)의 길흉(吉凶)을 전부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키가 큰 것이 좋다고 한다. 성인(聖人) 요(堯)는 키가 컸지만 순(舜)은 키가 작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상적인 군주이지 않은가. 주(周)의 문왕(文王)은 컸지만 성인(聖人)주공(周公)은 작았다. 공자(孔子)는 컸지만 그의 뒤를 이은 자궁(子弓)은 작았다. 키가 크거나 작다고 하여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라도 얼굴모양이 보기 흉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하(夏)의 걸왕(桀王), 은(殷)의 주왕(紂王)은 키가 크고 얼굴도 멋진 데다가 힘도 있었지만 대표적인 폭군(暴君)이었고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라고 인상학(人相學)을 비판하고 있다. 천하(天下)의 대학자가 관상장이를 비판하고 있는 걸로 봐서 인상술(人相術)이 꽤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자는 인상술을 비판은 했지만 그는 원래 예(禮)를 중히 여겼기 때문에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몸에 걸치는 의관(衣冠)이 신분과 때에 걸맞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군자(君子)는 아버지로서 형으로서 동생으로서 자식으로서 각각 정해진 의관을 걸치고 그에 어울리는 태도(態度)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학자에게 있어 중요한 수양(修養)이 되었고 가령 얼굴모양이 나쁘더라도 태도는 당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순자에게 있어서 자명(自明)한 이치(理致)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유교의 윤리학(倫理學)은 인간의 외관(外觀)․의복(衣服)․동작(動作)등과는 관계없이 성립(成立)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이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도덕(道德)이라는 것은 하나로 된 미적조화(美績調和)가 있는 생활(生活)이 가져오는 규율(規律)을 이상(理想)으로 하는 것이어서 현대의 도덕관념(道德觀念)과는 다른 것이다. 중국의 고등문관(高等文官)시험(試驗)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科擧)제도는 한의 무제 때 그 원형(原型)이 만들어 졌지만 이 시험의 최종단계(最終段階)에는 천자와 알현(謁見)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때 용모․태도가 중대(重大)한 요소(要素)로 채점(採點)되었고 이러한 것은 청대(淸代)까지 계속되었다. 무제는 화려한 것을 좋아해 그가 직접 임명(任命)한 재상, 장군, 고급관료들 중엔 당당한 호남자(好男者)가 많았었다. 흉노정벌의 임무를 맡은 장군 위청(衛靑)은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띠는 호남자였다. 일찌기 서구열강(西歐列强)의 군인을 살펴보면 귀족출신이 많고 모두 키가 크며 귀족적인 교양을 가진 상류 사교계(社交界)의 스타들이었다. 일본의 군벌정치(軍閥政治)하(下)의 군인들만이 예외(例外)였던 것은 오히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現象)이다. 사마천은 용자(容姿)에 관한 기술(記述)은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지만 빈핍(貧乏)한 집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리 볼품이 좋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서구(西歐)의 르네상스시대 같이 육체의 미(美)가 가치를 가졌던 한대에 태어나 궁형이란 끔찍한 일을 당한 사마천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자기의 결손(缺損)된 육체에 대해 비참한 기분이 생겨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적 죄악감과 불구(不具)에 대한 추악감(醜惡感)이 더해져 사마천은 이중삼중으로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궁형을 받은 인간은 단순히 추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인간악(惡)이라고 의식(意識)했었다. 그러나 『史記』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생명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 때문에 궁형을 받았던 것이지만 그것은 사마천에게 있어 얼마나 괴로운 치욕(恥辱)이었던 것일까.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 저작(著作)을 성취(成就)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안타까워 참을 수 없다는 일심(一心)이 있던 덕에 궁형이란 극형을 받고도 태연할 수 있었고 남을 원망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마천은 자기의 이 불행한 운명을 얼마나 슬프게 생각했겠는가. 인생을 절망감(絶望感)에 젖게 한 이 통렬(痛烈)한 체험(體驗), 혹은 시련(試鍊)이라고 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과 부닥친 사마천의 머리 속에 「천도(天道)란 시(是)인가 비(非)인가」라는 의문이 일어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운명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선인(善人)이 반드시 흥하지 않고 악인(惡人)이 반드시 망하지 않는 현실(現實)의 운명을 긍정(肯定)할 것인가 부정(否定)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몰두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사마천의 역사철학의 중심문제가 되어 이 물음에 대한 해답(解答)으로 사기 130권(卷)의 대 저술이 전개(展開)된 것이었다. * 이상 貝塚茂樹, 史記, 中央公論社, 1963. pp. 2-44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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