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전에 형상화된 문(門)
신장벽전의 신장상과 귀졸(鬼卒)상은 윗부분이 아치 형태인 문틀 안에 조각됐다. 그래서 신장과 귀졸이 자리한 곳은 세 개의 나란한 터널처럼 보인다(도1). 보통 이 터널 형상은 불상 등을 안치하는 감실(龕室)로 인식되었지만, 사실 이것은 밀폐된 감굴(龕窟)이 아닌 ‘사천왕천’이라는 넓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통로’이다. 물리적으로는 막혀있는 듯하나 개념적으로는 그림의 여백처럼 막힌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오른손에 든 칼을 머리 뒤로 비스듬하게 세운 신장상을 보면 머리 위와 옆으로 흘러가는 구름 무늬가 3개 새겨져 있다. 이는 왼팔 옆으로 세차게 흩날리는 천의와 함께 문틀 안의 공간이 개방된 곳임을 암시하는 도안이다. 왼손에 칼을 든 신장상 주변의 꽃잎 식물이나 활과 화살을 든 신장상의 나부끼는 천의 역시 문틀 안이 열려 있는 공간임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신장벽전 문틀의 시작과 끝은 나가(Naga)와 마카라(Makara)의 벌린 입에서 비롯된다(도2, 3). 나가는 불교 세계관 속 욕계(欲界)의 꼭대기인 수미산 둘레를 날아다니는 괴수이고 마카라는 수미산 주변에 사는 바닷속 커다란 괴수이다.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는 마카라의 입은 악어처럼 크고 코는 코끼리처럼 길다. 이렇게 나가와 마카라가 문틀에 장식된 것만으로도 신장벽전의 화면은 형상 너머의 또 다른 상징성을 얻게 되었다.
마치 힌두 건축에서 키르티무카와 마카라가 함께 짝을 이루어 시바 신전의 입구를 지키듯이 용(나가)과 마갈어(마카라)도 경주 낭산 신유림(神遊林)에 세워진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는 도상으로 채택된 것이다. 신라인들에게 낭산은 수미산으로 인식되었다. 수미산은 인간계와 천계를 잇는 산이며, 불교 우주관의 중심 축이다. 사천왕사는 마치 중생이 수미산을 오르는 과정을 구현한 것처럼 입구의 돌다리를 건너 오르막길을 지나야만 탑과 금당이 있는 경내에 진입하도록 설계되었다.
에필로그
드디어 당나라의 군사가 물러났다. 수행군총관 설인귀(설방)는 겨우 목숨만 건져 귀국했다고 한다. 전장 수습에 동원된 사미승 들은 먼 이국땅에서 허망하게 전사한 당나라 군사의 극락왕생 을 기원했다. 이듬해(671년) 다시 당나라가 조헌을 수장으로 삼아 군사 5만을 보냈지만, 배가 또다시 모두 침몰했다. 이에 더는 전쟁이 없을 거란 기대에 들떴고, 왕실은 명랑 등 신묘한 문두루 비법을 설행했던 유가승들의 건의에 따라 신유림에 새로운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679년 8월, 낭산 남쪽 구릉에 완공된 사천왕사는 신라 왕실의 중요한 불교 의례를 도맡는 핵심적인 사찰이 되었다.
글, 사진. 한재원(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2-8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