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자광이 정국(靖國.나라를 다스려 태평하게 함)한 공을 녹훈하는 날 박원종 등에게 간청하기를, “나는 이미 선조(先朝) 때 녹훈이 되었으니, 오늘 공은 아들 방(房)에게 양보해 주고 이 몸은 받지 않겠다.” 하니, 박원종 등이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유자광이 바야흐로 스스로 붓을 들고 마감(磨勘.관리의 성적을 매김)하는데, 또 녹훈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부자가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박원종 등이 유자광의 꾀에 떨어졌다.” 하였다.
유자광이 일찍이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의 칭호를 갖고 동반(東班) 영의정의 윗자리에 앉았다.
● 유자광이 폐조(廢朝.연산조)에 있을 때 선비들을 얽어서 해쳐, 폐주(연산)로 하여금 살육을 맘대로 즐기게 한 것은 전적으로 자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때문에 선비들이 이를 갈고 있었는데, 반정(反正)한 뒤에 그가 반정 계획에 앞장서서 가담하므로 과거의 죄에 대해서 탄핵하는 공론이 미처 일어나지 못하였다. 하루는 유자광이 도총관으로서 입직하였는데, 소매 속에서 부채를 꺼내 부치다가 갑자기 얼굴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이 부채에 쓰인 글씨가 괴이하고 괴이하다.”고 하면서 좌우에 보이는데, ‘위태롭고 망할 일이 바로 닥친다[危亡立至]’는 네 자가 쓰여 있었다. 크게 놀라 두세 번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탄식하기를, “내가 예궐(詣闕.궁궐에 도착)할 때 처음으로 이 부채를 채롱 속에서 꺼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누가 썼단 말인가. 더할 수 없이 괴이하다.” 하였다.이때 갑자기 서리가 와서 고하기를, “대간에서 글을 올려 죄를 청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윤허를 받아 이에 관동(關東)으로 귀양가서 죽고, 자광의 아들 진(軫)과 방(房)도 모두 북도(北道)로 귀양가서 죽었다. 부채에 글이 쓰여진 이치를 밝힐 수 없으나 비록 사람의 손을 빌려 쓰여졌다 하더라도 어찌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 무진년(1508)에 유자광을 호남(湖南)으로 귀양보냈다. 유자광이 박원종으로 인연하여 다시 반정(중종반정)의 녹훈에 참예하고, 또 모함하고 해치는 버릇으로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히려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론이 크게 벌어져 삼사에서 그의 죄악을 탄핵하여 훈작(勳爵)을 삭탈하고 귀양갔다가 용서받지 못한 채 죽었다.
정묘년 여름에 조정이 유자광을 배척하자, 유자광이 박원종을 만나 충동하기를, “나와 공이 다같이 무인으로서 숭품(崇品)에 올랐으매 문사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많은데,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찬 법이라, 내가 배척당하고 나서 다음으로 공에게 미칠 것이오.” 하니, 박원종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공에게 이를 간 지 오래였으니, 공이 일찍 사퇴하지 않은 것이 한이다.” 하자, 유자광이 낙담하여 돌아갔다.
● 유씨는 본래 세족(世族)인데, 유자광에 이르러서 서얼로서 졸지에 일어나 시국에 어려움이 많음을 틈타 간특한 꾀를 써서 모략으로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착한 사람들을 모조리 없앴다. 반정할 때에는 성희안(成希顔)으로 인연해서 다시 훈렬(勳列)에 참여하고 또 기울어뜨리고 위태롭게 하는 습성으로써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게 하고자 하다가 화와 복이 증험이 있어, 마침내 바닷가에서 고생하다가 죽었다. 죽기 전에 두 눈이 모두 먼 지 두어 해가 되었으며, 죽자 조정에서 그의 자손에게 거두어 장사지내라고 허락했으나, 진(軫)은 슬픔을 잊고 여색에 빠져 마침내 가 보지도 않았고, 방(房)도 또한 병을 핑계대고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아비 장사를 보지 않았고 마침내 모조리 망해 버렸다.
● 계유년(1513) 9월에 조정에서 의논하여 유진의 온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진이 노모를 내쫓고 아우 방을 협박하여 죽게 하였으니 법으로 마땅히 죽여야 하나, 다만 불효하고 부제(不悌)한 것은 본래 법률에 정한 조문이 없었으므로 의금부에서 부모에게 욕한 형법 조문대로 다스리자고 하고 조정 의논도 또한 법률에 의하여 죽이자고 말하니, 임금이 온 집안을 변방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간원만은 유독 쟁집하며 옳지 않다고 하자, 상이 또 시종들에게 명하여 회의하라하니, 합의하여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였다.
반정 뒤로 형법이 행해지지 않아 간사한 신하가 나라를 그르치고, 당시의 풍속이 완고하여 부끄럼이 없이 오직 이익만을 취한 채 강상(綱常)을 돌보지 않아서 유진이 홀로 죽음을 면했으니, 실로 통분한 일이다.
● 유자광이 어렸을 때에 재주가 넘쳤다. 그의 아버지 유규(柳規)가 깎아지른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자광에게 글을 지으라고 하니 즉시 쓰기를,
뿌리는 구원(九原)에 서렸고 / 根盤九原
형세는 삼한(三韓)을 누르도다 / 勢壓三韓
하니, 유규가 크게 기특히 여겼다.
● 유자광이 죽은 후에 부관참시를 면치 못할 줄 미리 알고 자기와 모습이 같은 자를 구해다가 종을 삼아 길렀는데, 그 사람이 죽자 대부(大夫)의 예로 장사지내고 관곽(棺槨)과 석물(石物)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기가 죽게 되자 처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 묘는 평장(平葬)하고 봉분을 하지 말며, 만일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서 내 무덤을 묻거든 죽은 종 아무개의 무덤을 가리켜 주라.” 하였다. 그후 조정의 의논이 유자광은 죄가 마땅히 부관참시해야 한다 하여 의금부에서 벼슬아치를 보내 물으니, 집사람이 거짓으로 종의 무덤을 가리켜 주자 그 무덤을 파 시체를 베되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평토한 묘는 탈이 없었다.
● 계유년(1513) 11월에 우상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충후(忠厚)한 기풍은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유자광의 익대(翊戴.정성스럽게 받들어 추대함)한 공로는 고금에 없는 바이니, 그 죄 때문에 녹훈을 깎아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도로 녹훈하였다. 정광필이 힘써 유자광의 공로를 칭찬한 것은 오로지 임금이 정막개(鄭莫介)에게 상 주려는 뜻을 맞추고, 또 실직(失職)한 공신들을 위안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여론이 탄식하고 원망하였다.
● 이에 대간과 시종들이 번갈아 글을 올려 유자광의 죄를 논열하며 도로 삭탈할 것을 청하기를, “유자광이 서얼로서 시국에 일이 많음을 틈타서 간특한 꾀를 써서 음험한 모략으로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고 착한 사람들을 해치다가 중흥한 때에 다시 훈렬(勳列)에 참예하고, 또 기울어뜨리고 위태롭게 하는 습성으로 조정을 어지럽히다가 바닷가로 내쫓겼습니다.죽기 전에 두 눈이 모두 멀고, 죽어서 장사를 지낼 때에 진(軫)은 달려가지 않았고 방(房)도 장례에 가지 않다가 스스로 멸망했습니다. 또 진은 늙은 어미를 내쫓고 아우 방을 협박하여 죽게 하였으니 밝고 밝은 하늘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옥당에서 여러 달 동안 합문 밖에 엎드려 아뢰어서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