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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손교회 중고청년대학부 원문보기 글쓴이: 모황민
나라 |
통치자 / 연 대 |
특 징 |
관 련 구 절 |
앗수르 |
디글랏빌레셀3세 / 불 (B.C.745~727) |
우라르투 왕국을 복속. 중앙집권체제 강화. 유프라테스 강 서남쪽으로 영토 확장정책. B.C.738년 이스라엘 왕 므나헴에게 조공 받음. 바벨론 정벌. B.C.739년,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음(이후 그는 B.C.680년, 즉 므낫세에 의해 순교당하기 전까지 예언활동을 함). 이사야는 약 2세기 후 고레스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귀환이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함(사44:28~45:4). 유다 왕 아하스가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칭공 시 디글랏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하자 디글랏빌레셀이 북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을 공격하고 그 백성들을 (앗수르로) 사로잡아감(B.C.733~732). 이때부터 북이스라엘의 영토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함. |
왕하15:19~20 왕하15:29 왕하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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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에셀 5세 (B.C.727~722) |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살만에셀 5세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이후 이집트의 원조 약속을 믿고 반역을 하자, 살만에셀 5세가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 마침내 B.C.722년 함락시킴. |
왕하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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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곤2세 (B.C.722~705) |
새 수도인 드루샤루킨(코르사바드) 건설. 사마리아의 영유권 주장. B.C.720년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몇몇 도시들이 원조한 반란 진압 후 사마리아를 앗수르의 속주로 편입함. 이스라엘인 27,000명을 니느웨 부근의 하볼 강가에 정착시키는 한편,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에 바벨론 사람들을 이주시킴. B.C.713(또는 712년)에 이집트(25왕조의 샤바쿠)의 원조를 받아 아스돗, 유다, 에돔, 모압 등이 반란을 일으켜 레반트 지역에서 또 한 번의 정복 전쟁을 촉발함. 므로발라닥이 이끄는 갈대아-엘람 연합군의 지속적인 저항에 직면함. 우라르투와 전쟁을 벌여 마침내 복속시킴. B.C.705년 킴메리 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함. |
왕하17:23,24 사20장 | |
산헤립 (B.C.705~681) |
앗수르의 수도로 삼기 위해 니느웨를 재건함. 바벨론에서 일어난 갈대아의 반란을 진압함. B.C.701년 유다를 공격하여 46개의 유다 성읍을 파괴함.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 함락에는 실패함. |
왕하18~19장 사36~37장 대하32장 | |
에살핫돈 (B.C.681~669) |
B.C.669년 이집트를 공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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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르바니팔2세 (B.C.669~627) |
B.C.663년 터베를 정복함. 신 앗수르 제국의 절정기. B.C.652년 형 샴시 슘 우킨이 이끄는 바벨론의 반란을 진압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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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벨 론 |
나보폴라살/ 나보폴라사르 (B.C.626~605) |
626년 바벨론을 점령한 갈대아 족장 메대 왕 키악세레스와 동맹을 맺음 B.C.612년 니느웨를 정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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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 네부카드네자르 (B.C.605~562) |
B.C.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느고를 쳐부수고 그 동맹국이던 유다까지 완전히 점령, 그 왕 여호야김을 포로로 사로잡음(제1차 침공). 여호야김은 바벨론의 공세 중에서도 악정으로 일관함. 결국 그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이때 여호와의 전 기구 일부와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등 상류층 인사들이 많이 볼모로 끌려감). 이 사건 직후 느부갓네살은 부친인 나보폴라살의 뒤를 이어 바벨론의 왕이 되어 B.C.562년까지 43년간 통치했음. 다니엘은 B.C.605년부터 고레스 원년, 즉 B.C.538년까지 약 70년을 바벨론에서 지냈으며 그 후로도 몇 년을 더 살다가 죽었음(그는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3년간 교육을 마치고 지혜자의 반열에 오름). B.C.603년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몽 사건으로 다니엘은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이 되었으며, 그의 세 친구들은 (다니엘의 요청대로) 바벨론의 도를 다스리는 직분을 얻게 됨. B.C.597년 유다 왕 여호야긴 때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남유다를 두 번째로 침공. 이 때 유다의 대부분의 관리들과 함께 총 1만여 명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감(이 중에는 여호야긴 왕, 에스겔 선지자, 모르드개의 부친 등도 포함됨).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애굽에 사자를 보내서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바벨론을 배반하자 결국 느부갓네살 왕이 직접 남유다를 세 번째로 침공, 포위 끝에 B.C.586년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철저히 파괴함(성전의 기구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감). 이때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포로로 잡혀감. 남은 백성은 그달리야(그다랴)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으나 후일 왕족 이스마엘에 의해 피살됨. 느부갓네살은 재위 제18년, 즉 예루살렘 함락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고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세우고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그 앞에 절하게 함. 이 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절하다가 풀무불 속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나왔음. B.C.593년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음. 이후 그는 570년까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을 대상으로 예언사역을 수행함. B.C.673년, 에스겔이 ‘새로운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됨(겔 40장 이후). 느부갓네살은 통치 후반부에 (다니엘의 해몽처럼) 7년 반 동안 정신질환을 앓아 들짐승과 같이 생활하다가 회개하고 회복된 후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그와 같은 내용을 조서를 통해 반포함. |
왕하24:1 대하35:30 사10:9 렘46:2 단1장~4장 | |
아멜말둑/ 아멜 마르두크/ 에월므로닥 (B.C.562~560) |
느부갓네살의 아들. 즉위 원년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석방함(포로생활 37년 만에 석방, 환대했는데 이는 70년 만에 귀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함을 의미). |
왕하25:27~30 | |
네르갈사레셀/ 네리글리사르 (B.C.560~556) |
느부갓네살의 사위 예루살렘의 마지막 포위 공격에 참여했었으며 그 당시 선지자 예레미야를 석방한 바 있음. |
렘39:3 | |
라바시말둑/ 라바시 마르두크 (B.C.556년) |
니리글리사르의 아들 3개월간 재위. 나보니두스에게 제거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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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니더스 (B.C.556~539) |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바벨론 밖에서 지냄. 그는 B.C.550년경 중앙 아라비아의 테이마로 원정가면서 아들 벨사살(벨사루슬)을 섭정 왕으로 임명했음(나보니더스는 후에 아들 벨사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했지만 계속해서 섭정왕으로 남아 있었음). 벨사살 원년, 다니엘이 ‘네 짐승의 환상’을 봄. 벨사살 제위 3년, 다니엘이 ‘수양과 수염소의 환상’을 봄. 벨사살은 메대 왕 다리오에 의해 바벨론성이 포위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의 거룩한 기명들을 가지고 술을 마시며 각종 우상들을 찬양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음(사람의 손가락 같이 것이 나타나 왕궁 촛대 맞은 편 분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르바신’이라고 적음/ 이는 ‘세어 보고 세어 보고 저울로 달아보니 부족하여 나눈다’는 뜻임). 벨사살은 선지자 다니엘을 불러 이를 해석하게 함. 결국 바벨론 제국은 왕 벨사살과 모든 관리들과 함께 연회를 열고 정신없이 먹고 마시는 동안 야습으로 적에게 점령을 당함(B.C.539년 고레스/키루스 대왕에게 항복함). |
단5장 단7:1~28 단8:1~27 | |
바사
/ 페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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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오 / 키악세레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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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대의 마지막 왕이자 고레스의 장인으로 추정(메대의 역대 왕은 데이오세스, 프라오로데스, 키악세레스 1세, 아스투아게스, 키악사레스 2세로 이어졌음). 메대의 아스투아게스(또는 아하수에로) 왕은 아들 키악세레스 2세와 딸 만데인을 두었는데 딸을 바사인 캄비세스에게 시집 보내면서 그로 바사 왕을 삼았음. 이 둘 사이에서 고레스가 태어났으며 키악사레스 2세는 슬하에 외동딸만 두었음. 후에 고레스는 키악세레스 2세의 명에 의해 메대-바사 제국의 군대 사령관이 되어 그로수스와 앗수르 군대를 멸하고 마침내 바벨론 제국까지 함락시키게 되었음. 그러자 키악세레스 2세는 자신의 외동딸을 고레스의 아내로 주면서 메대 나라도 함께 물려주었으며 이후 그는 62세 때 고레스가 준비해 놓은 바벨론으로 가서 그곳에서 2년간 통치하다가 죽었음. 다리오 왕은 전국을 120도로 나눠 120명의 방백들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고 그 위에 (다니엘을 포함한) 세 명의 총리를 두어 총괄하게 했음. 이후 다니엘은 대적들의 참소로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인 구원을 얻은 반면, 다니엘을 참소하던 자들은 사자 굴에 던져져 비참한 최후를 맞음. 다리오 원년, 다니엘이 유대 민족의 포로 생활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예레미야의 예언서에서 발견하게 됨. 그 내용은 유대 민족이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한 후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라는 것임. 또한 이 때 ‘70이레의 환상’을 봄.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 왕의 시대에서도 형통했음. |
단5:31~6:27 단9:1~ |
고레스 2세 (B.C.539~529) |
페르시아 제국의 건국자. 그의 부친은 옛 바사지역의 왕 캄비세스 1세, 모친은 메대 왕 아스투아게스의 딸 만데인임.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바사 지역의 왕이 된 후(B.C.559). 외삼촌인 메대 왕 키악사레스 2세와 연합하여 그로수스와 앗수르를 멸하고 바벨론제국까지 함락시킴. 이후 제국에 대한 실권을 장악, 외삼촌 키악사레스 2세의 외동딸과 결혼하면서 메대 나라를 물려 받아 메데-바사 제국의 왕으로 취임하였다(B.C.539). 약 2세기 전,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예언된 바 있음(사45:1). B.C.538년 조서를 통해 유대인 포로의 귀환 및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허락함(고레스는 이 귀환대열에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에게만 한정시키지 않고 그 옛날 시리아에 포로로 잡혀왔던 이스라엘 열 지파의 후손들도 포함시켰음. 당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경험한 지는 이미 200여 년이 흐른 상황이었음). 다윗 왕의 직계후손인 스룹바벨(세스바살)과 대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 등의 주도 하에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짐(총 귀환자 수 49,897명/ 이때 고레스는 옛날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하나님의 성전 기구들을 가지고 돌아가게 했음./ B.C.605년 유대인들이 1차로 바벨론에 잡혀갔고, B.C.536년 1차 귀환이 이루어졌으므로 포로생활 기간은 70년이 됨). 재위 3년(B.C.536년), 다니엘이 ‘큰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보았으며 또한 ‘이스라엘과 열국에 대한 예언’, ‘마지막 환난에 대한 예언’ 등을 듣게 됨. B.C.536년 귀환민들이 예루살렘 성전건축을 시작했으나 대적들의 방해로 B.C.534~520년까지 중단됨. |
대하36:22,23 스1:1~4 스6:3~5 사44:28~45:4 단10장~12장 | |
캄비세스 2세 (B.C.529~523) |
고레스 대왕의 아들. B.C.525년에 이집트를 정복함. B.C.522 그의 사후 2년간의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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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디스 (B.C.523~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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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오 1세/ 다리우스 1세/ 히스타스페스 (B.C.522~486) |
방계 왕족 출신. 캄비세스 사후의 혼란을 종식시킨 후 즉위함. 페르시아 영토를 인도로부터 이디오피아에 이르기까지 확장했음. 제국을 20개의 메디나로 분할해서 총독들에 의해 다스리게 함(20개의 메디나는 다시 127도로 세분화하여 방백들로 하여금 관할하게 함. 우편 제도를 확립함. 페르세폴리스 건설 시작. 재위 2년(B.C.520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권고로 (약 15년간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 공사가 재개되어 마침내 B.C.515년 완공, 하나님께 봉헌됨. B.C.480년부터 470년 사이, (성전 재건이 완료된 후) 선지자 스가랴가 ‘미래의 일들에 관한 환상들’을 봄(슥9~14장). B.C.485년 애굽이 반란을 일으키던 해에, 다리오 왕이 죽자, 그의 아들 아하수에로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했었음. |
스6:13~15 학1:1 학2:1,10,20 슥1:1,7 슥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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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수에로/ 크세르크세스1세 (B.C.485~464) |
다리우스 1세의 아들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 왕과 동일 인물임. 즉위 원년에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이 ‘성전건축에 대한 방해공작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고소함(스4:6). 페르세폴리스의 건설을 지속함. 즉위초기에 이집트, 바벨론 등서 반란을 겪음. B.C.480년 그리스를 침략하여 아테네를 노략했으나 살라미 해전(B.C.480년)과 플라타이아와 미칼레 전투(B.C.479년)에서 그리스 군에게 연이은 패배를 당함. 그리스를 침략했으나 B.C.490년 마라톤에서 패배함.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남. B.C.483년 왕후 와스디(아메스트리스)를 폐위(이 시기를 전후로 그녀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가 태어남). 이후 그녀는 그녀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가 즉위하자 섭정했다고 전해짐. B.C.479년 경 에스더(하닷사)가 폐위된 와스디 대신 왕후로 간택됨. 이후 그녀는 사촌 모르드개와 함께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음모로부터 동족을 구함. 여기에서 ‘부림절’이 제정됨. 아하수에로는 이후 사이프러스, 아라더스, 두로의 섬 프라테아 등 페르시아 영토를 확장하기도 함. 유다인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함. B.C.465년에 왕실 반란으로 살해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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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닥사스다1세 /아르타크세르 크세스 1세 /롱기마누스 (B.C.46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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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7년째(B.C.457년/스룹바벨의 포로귀환이 있은 지 81년 후)에 학사 에스라의 주도 하에 2천여 명이 채 안 되는 무리들이 고토로 귀환(2차 포로귀환).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남. 페르세스폴리스의 주요 건물들을 완성함. B.C.449년 그리스와 화친 조약, 즉 칼이아스 평화조약을 맺음. B.C.444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의 술 관원 느헤미야가 귀환자들의 안녕과 복리를 위해 고심하던 중 (에스라의 귀환 13년 후, 스룹바벨의 귀환 94년 후) 총독으로 유다에 옴(3차 귀환). 그는 사마리아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2일만에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함. B.C. 456년 초 에스라가 페르시아 궁전으로 소환되었다가 B.C.444년 여름 느헤미야를 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느헤미야와 함께 영적각성운동을 주도함. 초막절을 거행함. 학사 에스라 시대에 이르러 ‘시편’의 최종적인 완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임(에스라와 느헤미야 등에 의해 제4,5권이 편집됨). 또한 에스라는 ‘역대상 ․ 하’, ‘에스라’를 저술함. 느헤미야는 B.C.432년경 12년간의 유다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잠시 떠나 페르시아 궁으로 돌아감. 이후 그는 431년 약 1년 만에 다시 왕으로부터 유다 재통치의 임무를 받고 다시 돌아옴. 이 사이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말라기서’를 기록한 듯함(포로 귀환 이후 100년가량의 시간이 흘렀을 때). 선지자 말라기는 엘리야와 유사한 심령과 능력을 가졌던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언했음. 말라기 이후 (선지자 세례 요한이 출현하기까지) 400년 동안 ‘신구약 중간기’가 진행됨. |
느2:1 느13:6 스7:7 말4:5 | |
크레르크세스2세 (B.C.423년) |
재위기간이 채 2개월이 안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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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2세 /노투스 (B.C.423~404) |
B.C.407년경 이집트(엘레판티네)의 유대인들이 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성전 재건을 도와줄 것을 촉구함.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을 통해 페르시아가 소아시아에서 몇몇 그리스 도시 회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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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크세르 크세스 2세 /므네몬 (B.C.404~359) |
어떤 학자들은 에스라의 사역 시기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재위 7년째인 B.C.398년으로 보기도 함. 이집트가 잠시 동안 페르시아에서 독립함. 사트랍의 반란(B.C.366~3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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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크세르 크레스 3세 /오쿠스 (B.C.359~338) |
B.C.359년 무렵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권좌에 오름. B.C.356년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남. B.C.342년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수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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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세스 |
알려진 사실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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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3세 /코도만누스 (B.C.338~336, 336~330) |
B.C.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침략함. 다리우스 3세가 이수스(B.C.333년), 가우가멜라(B.C.331년)에서 알렉산더에게 패배함. B.C.330년에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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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을 막아라(페르시아 왕비 에스더).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의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4:13,14)
에스더의 소명은 한 마디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중인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의 핍박과 압제, 특히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와 함께 말입니까? 그녀의 사촌오빠 모르드개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에스더의 멘토 ‘모르드개’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에2:5,6)
여기서는 모르드개가 여호야긴(여고냐)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에2:5,6) 만일 모르드개가 여호야긴 왕과 더불어 포로로 잡혀왔다고 하면 그 때에 갓 난 아이였다 해도, 아하수에로 당시에는 이미 백 살이 넘는 나이가 되었을 것이고, 그의 사촌 여동생인 에스더 역시 6,70세는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르드개가 BC. 586년 당시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모르드개는 그의 삼촌 아비하일 내외가 세상을 일찍 떠나자 그들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하닷사 곧 에스더를 자신의 딸처럼 양육합니다. “그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에2:7) 사실 에스더가 신앙적, 인격적인 면에서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사왕국의 왕후가 될 수 있도록 그녀를 준비시킨 것도, 자칫하면 자신의 영달에 탐닉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수 있었던 그녀를 설득시켜 거룩한 일에 동참케 한 사람도 바로 다 그를 친 딸처럼 양육했던 사촌 오라비 모르드개 덕뿐입니다. 한 마디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있어서 멘토(Mentor)와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포로로 사로잡혀 온 이스라엘 민족 앞에 곧 들이닥치게 될 위기를 미리 아시고, ‘믿음의 사람’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요셉을 그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105:1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하나님은 인류를 위한 구속사를 성취해나가시기 위해 반드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중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보존하셔야만 했는데 모르드개와 에스더 등이 그 일의 도구로 준비된 것입니다.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왕의 조서와 명령이 반포되매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여 헤개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더도 왕궁으로 이끌려 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의 수하에 속하니 헤개가 이 처녀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하게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으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에2:8,9)
에스더의 소명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뜻밖의 사건을 통하여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바사의 왕후인 와스디 폐위 사건, 그리고 3년 후 새로운 왕후 간택 행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 점은 '이끌려 가서'(8절)로 변역된 히브리어에 ‘자발적인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강제로 이끌려 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더는 왜 이와 같은 왕후간택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일까요? 단지 왕후의 자리가 탐나서였을까요? 이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마음을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로로 사로잡혀 온 자신의 동족들 앞에 곧 들이닥치게 될 위기를 직감하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모르드개나 에스더가 처음부터 그와 같은 일들이 자신과 자신의 동족들에게 닥치리라는 점을 알았을 리 만무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에스더를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먼저, 궁녀를 주관하는 관원 헤개의 눈에 띄게 하셨습니다. “헤개가 이 처녀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하게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으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에2:9) 둘째, 그녀를 보는 모든 자에게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에2:15하) 셋째, 왕 앞에서 다른 여인들보다 더 사랑받게 하셨습니다.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에2:17)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에스더가 얻게 된 확신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왕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자신의 외모나 자질, 배경 등이 아닌 오히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또한 자신이 바사제국의 왕후의 지위에 오른 데에는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확신케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하나님께서 큰 구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존하고 그들을 세상에 두시려고...”(창45:7)
모르드개 역시 이 점을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에스더가 궁궐에 들어간 이후에도 매일같이 그녀의 처소로 왕래하면서 그녀의 안부를 묻는 것은 물론 장차 하나님께서 그녀를 어떻게 인도해가실지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이는 모르드개가 명령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지를 알고자 하였더라.”(에2:10,11)
한편, 모르드개는 처음부터 에스더에게 자신의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연유에서 그리했는지 알 순 없지만 직감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일은 후일 에스더가 하만의 궤계를 깨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탁월한 선견지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스더 역시 왕후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모르드개를 친 아비처럼 따르며 그에게 순종했던 것을 보면서 그녀의 신앙인격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흔히 높은 지위에 오르면, 자만해지기 쉬운 법인데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여전히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좇았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에2:20)
-왕후 에스더, 대학살의 위기로부터 자신의 동족을 구하다
아말렉 족속 아각 사람 하만이 바사제국의 명실상부한 2인자의 반열에 오르면서, 포로생활 중인 유다인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지만 말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인 유다인들 전부를 멸절시킬 궤계를 세우고, 왕의 명을 받아 12월 13일 일제히 바사 전국에 있는 유다인들을 멸하도록 했습니다. 이 때 망설이고 있던 에스더를 누가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습니까? 누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소명을 자각시켜 주었습니까?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4:13,14)
그 당시 누구든지, 설령 왕후라 할지라도, 왕이 있는 안뜰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규를 내밀어야 할 것이라...”(에4:11상) 어째서입니까? 암살을 비롯한 각종 위험요소로부터 왕의 신변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살 길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왕의 부름을 받든지 혹 왕이 금규를 내밀든지 입니다.
그런데 왕후 에스더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구명하기 위해) 왕께 나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4하)라는 모르드개의 이 한 마디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뒷걸음칠 수 없었습니다. 왜 입니까? 자신이 왕후의 자리를 얻은 이유가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왕후의 지위에 오른 진짜 연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한 채 안뜰로 나아가서 위기에 처한 자신의 동족 유다인들을 구원해냈습니다. 물론 그녀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바사제국의 제2인자가 되면서 더욱 공고히 되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쳤던 학자 에스라(스7:10)
성경은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어떻게 소명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의 결심과 사역 등을 통해서 그의 소명을 재조명해볼 뿐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마음에 결심한 바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잊고 있던 율법교육의 회복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80여 년 전 스룹바벨에 의해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졌고 성전건축 역시 58년 전에 이미 완공되었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은 아직도 멀기만 느껴졌습니다.
에스라는 무엇이 있어야만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했던 것 같습니까? 율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말씀에로의 복귀가 있어야.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그의 결심을 통해서입니다. 어떤 결심입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한 결심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7:10)
이와 같은 그의 결심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민족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던 간절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이 같은 소원을 품게 된 데에는 그의 가정적인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어떤 가문의 후손이었습니까? 대제사장 가문의 후손입니다.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손이요 아히둡의 육대손이요 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스라히아의 십대손이요 웃시엘의 십일 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 대 손이요 아비수아의 십삼 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 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 대 손이라.”(스7:1~5)
그렇다면 그의 결심(스7:10)은 언제부터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요? 그의 생 초년부터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입니까? 준비된 그의 모습을 통해서 말입니다. 성벽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진해서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 듣길 원했는데 이때 에스라는 ‘완전히 갖추어진 형태의 모세 오경’을 가지고 귀국, 거국적인 말씀운동을 주도했는데 이로써 우리는 평소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율법을 수집, 연구해왔는지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느8:1,2)
그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에스라 시대에 이르러 ‘시편’의 최종적인 완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에스라와 느헤미야 등에 의해 ‘시편’의 제4,5권이 편집됨) 어찌 성경의 시편뿐이겠습니까? ‘완전히 갖추어진 형태의 모세 오경’을 가지고 있었고, ‘역대상 ․ 하’를 직접 저술할 정도였다면(사실 역대기는 사무엘-열왕기서의 미완된 부분의 보충임), 구약 대부분의 성경을 수집, 연구하고 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상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던 디아스포라 1세대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뒤, 그들의 남겨진 후손들은 율법교육커녕 신앙 제대로 된 신앙교육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나서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가르쳐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일꾼이 없습니다.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누가 이 일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까? 학사 에스라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그가 고국으로의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미 그는 하나님과 사람 들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를 들어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스7:6)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스7:11)
심지어 바사의 왕까지도 그를 향해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스7:12)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 연구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이스라엘의 말씀회복 운동을 위해 일평생 얼마나 준비해왔는지 짐작케 하는 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에스라, 2차 귀환행렬을 이끌고 고토로 돌아가다.
마침내 에스라는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명령서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을까요? 원활한 성전예배 기능의 회복과 율법 준행에 필요한 원조 등입니다. 왜 바사 왕이 이 일에 에스라를 선택했던 것일까요? (앞서 살펴본 대로) 그는 이미 이 일에 준비된 자로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몇 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까? 4개월입니다. 얼마 정도의 거리를 지나왔습니까? 대략 1,500Km되는 거리를 지나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그가 한 일들은 무엇입니까? 성별된 백성으로의 순수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여인들을 끊어버리도록 했습니다. 이방인과의 통혼문제가 이스라엘 백성의 순수성 회복 문제에 막대한 걸림돌임을 알고 이 일부터 순차대로 풀어갔던 것입니다(여기까지가 에스라서의 내용입니다).
느헤미야 전반부까지 에스라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느헤미야가 주도한 3차 귀환행렬의 도착과 예루살렘 성벽재건 등의 현장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그는 바벨론으로 되돌아가 지금까지 해 온 하나님의 율법을 마무리 짓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느헤미야의 주도 하에 성벽재건 및 그 후속조치들이 원활하게 마무리된 가운데 백성들 사이에선 근래에 들어 보기 힘들었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갈급함’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무엇을 요청하게 되었습니까? 큰 절기의 달인 7월을 맞아(7월 1일 나팔절, 7월 10일 대속죄일, 7월 15일부터 한주간은 초막절, 그리고 초막절이 끝난 제8일에는 거룩한 대회로 모였음).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여호와의 율법을 듣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설명될 수 없음). 따라서 에스라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 즉 ‘완전히 갖추어진 형태의 모세 오경’을 가지고 와서 백성들 앞에서 그것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온전히 깨닫게 했습니다.
어떤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회개와 자복, 결단과 언약갱신 등은 물론 거국적인 초막절 준수행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로의 회복운동을 전개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에스라나 느헤미야가 주도했다기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준비된 사람과 준비된 상황들을 통해서 그리 되어갔음 알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이후 사역은 더 이상 알 길이 없으나, 그는 분명 자신의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에스라 7: 10절의 소명에 충실하고자 최선을 다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평생을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살았노라고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7:10)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다시 쌓은 자 느헤미야(사58:12;61:4)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58:12) /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사61:4)
이사야 선지자는 대략 250여년 뒤에 있을 사건을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예언했습니다. 어떤 내용을 말입니까?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먼 나라까지 포로로 잡혀가게 되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저버리지 않으시며, 때가 되면 반드시 그들을 가나안 땅, 즉 고토로 돌이키되 오랫동안 폐허가 된 곳들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다시 쌓게 될 그 날이 온다고 말입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포로민들의 생환 및 예루살렘 성의 재건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말입니까? ‘네게서 날 자들’(58:12상)에 의해서입니다. 그들을 장차 어떤 이름들로 일컬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또는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입니다. 즉, 후일 그들을 통해 오랫동안 황폐했던 성읍이 다시 건축되고, 예부터 무너진 곳들이 다시 세움을 받을 것이며,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이 중수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약 2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정말 느헤미야 등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황폐해진 채로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 성은 다시 중수된 것입니다(이사야서가 기록된 것은 BC.700-690년경이고, 느헤미야의 유대 총독재직 시기는 대략 B.C. 444-425년경이었음).
-느헤미야의 소명
느헤미야의 소명은 그의 출생보다 무려 250년이나 앞선 선지자 이사야의 활동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사58:12).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일찍부터 한 일을 계획하시고 때가 차매 한 사람, 곧 느헤미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바사의 관리로 있던 그를 그의 소명 한 가운데로 초대하셨습니까? 예루살렘에 다녀온 사람들에 의해 전해들은 비보를 듣게 함으로써 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1:3,4)
비록 고레스 칙령에 의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갔지만 그곳에서의 그들의 형편은 그리 녹록치 못했던 것입니다. 황폐한 예루살렘과 처참한 동족들의 삶에 대한 소식을 듣자 그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무려 4개월 동안이나 기도로 하나님께 매어 달리면서,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어디에 있는지 구했습니다.
혹 그러한 과정에서 느헤미야는 이사야서의 사58:12를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성경이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사야 선지자의 글, 특히 사58:12이나 사61:4를 읽었다면, 이를 통해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소명 말입니까? ‘예루살렘 성의 재건’ 말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느헤미야가 이 4개월간의 기도를 통해 '예루살렘 성의 재건'이 자신의 소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약 250년 전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기록되어진 예언대로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로 자신의 일생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4개월 후 그가 왕 앞에 제출한 주도면밀한 계획서를 통해서입니다.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느2:5,7,8)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느헤미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58:12)
느헤미야의 소명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였습니다. 이는 물론 단순히 예루살렘 성벽과 곽의 재건만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아가 귀환한 예루살렘 공동체의 영적 재건까지도 포함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달려가야 할 목표가 분명해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오른손이 그의 소명 위에 함께 하시길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하나님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예루살렘 재건에 관한 느헤미야의 계획’ 역시 승인케 하신 것입니다. 결국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재건에 필요한 재료와 군대장관과 마명의 도움을 받은 채 유대 땅에 도착, 다음과 같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외칩니다.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느2:17)
그런데 느2:17은 성경의 어느 부분과 자연스럽게 겹쳐집니까? 사58:12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주창하는 느헤미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 수 있습니까? 사58:12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는 아마도 선지자 이사야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250여년 후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주창하겔 될 느헤미야의 모습을 미리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느헤미야는 자신의 소명을 어찌 감당해나갔습니까? (숱한 방해와 난관 등에도 불구하고) 재건공사 시작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극적인 순간을 맞이했는가 하면, 성의 방비체제를 정비하고 예루살렘으로 주민들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는 등 신속한 후속조치를 단행했으며, 특히 학사 에스라와 함께 수문 앞 광장에서의 부흥운동을 주도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루살렘의 재건'까지도 이루었습니다.
*성을 쌓은 사람들(느3장)
-다른 사람의 일들까지도 돌아보았던 ‘드고아 거민들’(느3:5,27).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내민 큰 망대와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오벨 성벽까지 이르렀느니라.”
드고아 귀족들은 느헤미야가 할당해 준 일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뒤로 물러서 물끄러미 지켜볼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 거민들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두 번씩이나 성벽 중건 사역에 참여하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자기들이 중수한 곳 외에 또 일을 맡아서 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의 중요도를 따지거나 불평함 없이 늘 ‘하나님의 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먼저 끝내는 사람이며, 나아가 다른 이들의 일들까지 돌아보아 함께 이루어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4)
-실수한 것에 연연하지 말고 온전히 나아갔던 ‘말기야’(느3: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화덕 망대를 중수하였고.” 말기야는 이방여인을 취했다가 회개한 자(스10:31)로 성벽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20:16)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번 실수한 것에 마음과 생각을 빼앗겨 계속 그것에 연연해하거나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회개하고 주께 나아와 새로운 결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다시금 감당해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예외 없이 주의 일에 힘썼던 ‘살룸과 그의 딸들’(느3:12).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당시 성벽을 쌓는 일들이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룸의 딸들은 아버지를 따라서 함께 동참했음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살룸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딸들이 참여했던 것 같습니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주위에 많은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무능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도리어 요긴하며 없어서는 안 될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12:21,22)
-무려 500미터나 되는 넓은 성벽을 쌓았던 ‘하눈과 사노아 주민들’(느3:13).
“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주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처 규빗을 중수하였고.” 사노아는 베들레헴에서 약 20km나 떨어진 곳으로서 그곳 주민들은 하눈과 함께 무려 500m나 되는 넓은 성벽을 중수했습니다. 너무 가혹하고 혹독한 처사가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다시 쌓았던 곳은 비교적 성벽이 덜 파괴되었던 부분이었고, 사노아 주민들 수 또한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헌신을 요구하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처음부터 도무지 엄두도 못 낼 정도의 일들을 요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내게 너무 많은 짐들을 맡겨주신 것 같습니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만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가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최고령이면서도 성벽건설에 참여한 ‘스마야’(느3:29하).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본문의 스마야가 역대상 3장 22절의 스마야와 동일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그는 당시 아주 고령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아들 핫두스가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었기 때문입니다(스8:2,3). 또한 그는 당시 영예로운 직책에 속한 ‘동문지기’였습니다. 최고령이면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스마야, 설령 그가 성벽재건에 굳이 나서지 않더라고 아무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일 최일선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의 갈렙을 연상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수14:12)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에 참여한 ‘하눈’(느3:30상).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아마도 그의 윗 형 다섯은 이 일을 돕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눈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동참하는 고난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진리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가족들의 반대, 주위 사람들의 만류와 무관심 등을 등지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 38)
-아무도 자원하지 곳을 맡아 성벽을 쌓았던 금장색과 상인들(느3:31,32).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양문에서부터 공사가 시작되었으므로 이제 완전히 한 바퀴를 돈 셈입니다. 그런데 양문 바로 남쪽 성벽의 일부를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것을 맡아 하겠다고 자원하는 자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 일을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금장색 말기야 같은 사람들은 원래 자기 할당 부분 외에 다시 성벽 재건에 참여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각자 각자의 별개의 성을 쌓는 사람들이 아닌 하나의 커다란 성벽을 함께 쌓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벽은 제아무리 높고 튼튼하게 쌓는다 하더라도 한쪽이 무너져 있다면 그 전체가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각각 다른 사람들을 부지런히 돌아보아 우리 모두가 골고루 쌓아져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감동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학1:12~15).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학1:14)
-멈춰버린 프로젝트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중단되니라.”(스4:23,24)
바벨론의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 그러나 무려 16년 동안이나 성전 재건을 중단했던 그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16년 동안이나 성전 재건을 멈추게 했을까요? 주변 국가들의 시기와 방해 때문이었을까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단지 표면적인 원인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순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에게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정이 식고 대신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과 무기력감만 가득 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자단한 채 처음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을 때 보여 주었던 그 불타는 열정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우리는 어떠합니까?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시작되기까지...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스5:1,2)
그러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의 등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백성들의 영적 각성을 촉구했고 중단되었던 성전재건 공사를 재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수아의 마음과 모든 백성의 마음이 흥분(감동)되기 시작했고, 백성들 역시 열심을 되찾게 됨으로써 무려 16년 동안이나 멈춰버렸던 성전재건 공사를 재개. 다리오 왕 6년(B.C.516)에 완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동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누가 성전건축을 등한히 하는 백성을 꾸짖고 성전건축에 힘쓰라고 권면했습니까?(7~11절)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학개의 격려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성전개축 사업을 시작하게 했습니다(12~15절). 그러나 이는 표면적 사실일 뿐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격려하여 그 일을 하도록 마음을 돌리신 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빌2:13).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날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개역성경/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그때는 다리오 왕 제 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학1:13~15)
유다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남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분은 학개도 스가랴도 아닌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이셨던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감동하심으로... 여기에서 ‘감동시켰다’ 또는 ‘흥분시켰다’(stirred up/NIV)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 무관심, 무기력에 빠진 백성들을 각성시키셨다는 말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각각 깨우쳐 그들에게 올바른 지향점을 갖고 행동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말이며, 영적 무관심, 무기력에 빠진 백성들을 각성시키셨다는 말일 것입니다(stir[stə́ːr]은 ‘ ~을 움직이다, 골고루 뒤섞다; 뒤흔들다, 휘젓다; 일으키다, 야기시키다; 분기시키다; 선동하다’ 등의 의미).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 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stir up the waters/NIV)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 이러라.]”(요5:2~4)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영어식 표현이 ‘베데스다의 연못 기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물론 괄호 안에 넣은 구절들은 가장 오래된 사본에선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고대 필사자가 난외주 형식으로 당시의 소문을 설명해 놓은 것이 필사를 거듭하면서 본문 속에 들어간 듯합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단지 연못에 조그만 파문 하나를 일으켰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못의 물을 움직이되 아주 휘저어 놓았다는 말이며, 뒤흔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역동적인 말입니까? 얼마나 파워풀한 단어입니까?
그런데 이 단어가 어디에서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는 말입니까? 학개 1: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stirred up spirits/NIV)...”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케 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흥분케 하시는 그 역사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뒤섞고, 뒤흔들며, 휘저으며, 분기시키며, 선동케 하시는 그런 역사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