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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통령이 세계에서 화제의 인물이 된 듯합니다. 글쎄 좋은 의미에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그 나라에서는 대신하여 까뭉개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앞서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 국민마저 그런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지요. ‘검찰총장’의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대통령과도 맞서보는 자리 아니던가요? 하물며 국민 정도야 우스울 수도 있습니다. 걱정됩니다. 국민만 보고 나아가겠다고 하였는데 그만큼 만만하다는 생각이 아닌지 말입니다.
9월도 한 주 남았네요. 정말 좋은 시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마스크도 벗어던지고 어디든 갈 수 있나봅니다. 그런데 여기저기 모두 비싸졌으니 좀 겁이 나기도 합니다. 있을 때는 막히고, 이제 열리니 돈이 막네요. ㅋㅋ 그런데 세금 회피자들 숨겨둔 돈과 금을 보니 눈이 커집니다. 세상에, 저거 다 언제 쓰고 죽으려나, 하기야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미납세금 차압한 액수가 1조 원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대단! 대신 서민들 감면해주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적자 정부에 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더 남아있다니 징수원들 분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계절입니다. 건강하면 돈 덜 들어갑니다. 우리 모두 건강하여 장수하기를 빕니다. 예, 복된 주말입니다. ^)^
2022년 9월 24일 김종우 목사 드림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찌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찌니” (레위기 24 : 20 - 21)
<공조2 - 인터내셔날>
기다릴게요. 뭘? 당신을? 3편을? 물론 북한 형사 ‘림철령’을 기다리겠다는 뜻인데 가능한 일입니까?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림철영이 사랑 때문에 탈북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의 사상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기야 이제 조금 사랑에 눈이 떠진 느낌도 들기는 합니다. 미국 FBI ‘잭’ 덕분일 것입니다. 엉뚱한 이방인이 껴들어서 질투를 생성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이 그것을 짐작하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다시 3편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때는 좀 더 진전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지요. 그런데 무엇을 빌미로 다시 남한으로 입국할까요?
그리고 이 세 사람의 공조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 사실 지금 현 상황도 미묘한데 말입니다. 미국이 그러지요? 저 놈들은 어차피 한 민족이라고. 언제 붙어먹을지도 몰라. 그러니 우리만 잘 하면 되는 거야. 북한이 그럽니다. 저 놈들은 어차피 한 통속이야. 그러니 다 제끼고 우리 것만 찾아오면 돼. 그렇다면 우리 입장은 어떤가요? 묘하지요. 이러자니 그렇고 저러자니 그렇고, 그렇게 보면 어정쩡하지만 둥글둥글한 우리 형사가 제법 잘 하는 편입니다. 지금의 처지에서 우리가 전개하고 있는 외교와도 같다고나 할까요? 현실에서는 그만한 외교관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출발합니다. 가능하다면 넓은 땅에서, 보다 자유로운(?) 땅에서, 마음 놓고 돈놀이 할 수 있는 곳에서,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 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달러야말로 온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화폐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돈 이야기지만 그 뭉칫돈을 해먹으려고 사정없이 휘갈기며 갖고 튀는 겁니다. 그 정보를 파악한 FBI가 가로채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돈과 마약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속대상은 돈이 아니라 사실 마약입니다. 그러나 만만하게 넘어갈 상대가 아닙니다. 일단 잡기는 하였지만 국가간 무슨 협약 같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렵게 잡았지만 넘겨줍니다. 그리고 그 두목은 한국으로 침투합니다. 정보가 우리에게도 넘어옵니다. 미국과 협력하라는 것이지요.
북한에서는 반드시 이 두목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림철영이 남으로 파견됩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이 사건에 껴들려하지 않습니다. 밑져야 본전도 아니고 해봐야 본전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자칫 구설과 징계나 받겠지요. 림철영과 공조하여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FBI까지 껴들었습니다. 문제는 각자가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공적과 자존심까지 혼합된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문제 해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수사와 추적을 해야 하는데 서로 경쟁하는 꼴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한 마디로 진흙탕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칫 사건의 해결보다는 도적에게 좋은 결과를 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외교적 기술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지식과 지혜도 필요하지만 인간적인 유대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특히 외교관은 모난 사람보다는 아무데서나 누구에게라도 접근과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유리합니다. 조금 모자라 보이지만 사실은 고도의 대인관계 기술이기도 하고 때로는 천성에 맞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한없이 야들야들하지만 일단 업무에 임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측 형사 ‘강진태’는 그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합니다. 동료들에게도 유하지만 적들에게는 강하게 대처합니다. 그리고 조금은 삐딱하지만 강진태 형사와 함께 지낸 경험으로 이제는 다소 부드러워지기도 한 림철령이 제법 잘 어울려 일합니다.
돈이란 참으로 요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쓰는 사람에 따라서 이야말로 최상의 선물이고 도구일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영향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악한 일만 만들어내게 합니다. 그 가장 주된 요인은 바로 탐욕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요. 이야기 속에서 드러납니다. 국가적 사업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결국은 거기든 저기든 모두 개인적인 욕심으로 비롯된 돈 챙기기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FBI 요원 잭도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전적으로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사실 그런 요소가 이야기를 만들어야 흥미도 배가되지요. 자신들 안의 못된 놈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소위 국제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하기야 미국에서의 장면이 잠깐 나오는 것이지만 그래도 잭이라는 FBI 요원이 끝까지 함께 하니 3국 공조입니다. 그런대로 잘 조합하였습니다. 그리고 악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마약사범 ‘장명준’도 잘 만들었다 싶습니다. 장비의 현대화가 애들 장난처럼 등장하지만 마지막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며 탄성을 자아냅니다. 1편에 못지않습니다. 감동이 아니라 재미지요. 영화 ‘공조2 - 인터내셔날’(Confidential Assignment2: International)을 보았습니다.
내가 왜 네 애비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계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해산이라는 과정이 없이 세상에 올 수는 없습니다. 그 해산의 과정을 만드는 사람이 곧 부모입니다. 물론 사생아인 경우도 있겠지만 부모를 알지 못하는 것이지 부모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라도 아이가 장성하면 자기 부모를 찾고 싶어 합니다. 갓난아기 때 먼 이국 땅으로 입양되어 간 아이가 다 자라서 고국에 돌아와 자기 생부모를 찾으려는 경우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 눈물겨운 상봉을 화면을 통해서 본 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 부모는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부모가 있습니다. 물론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고 아직 생존해 있는 분도 있습니다. 만약 생이별로 헤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보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찾고 싶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다, 하고 나타나기는 했는데 진짜 내 부모인지 아니면 내 자식인지 분간해내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옛날 같으면 이것을 판명해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가능하지요.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나 붙들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내 맘에 든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보다 인품이 훌륭하고 생기기도 잘 생기고 돈도 많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가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이름이 ‘김종우’입니다. 이름이야 그렇다 쳐도 성을 바꿀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화 제목 같지만 그것은 ‘나의 운명’입니다. 우리가 피를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AB형인데 맘에 안 든다고 O형으로 내 맘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 말로 운명이고 우리 식의 말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제가 김 씨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김 씨가 되었습니다. 박 씨 가문에 태어났다면 박 씨가 되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씨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또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막말로 부모는 혹 헤어질 수 있어도 부모 자식 간 관계는 헤어진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이혼 후에도 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관계를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씨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때마다 기도합니다. 누구를 부르며 기도하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며 그 분에게 기도합니다. 하루에 한 번도 아버지를 부르지 않고 지내는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럴지라도 알고는 있습니다. 현실 삶 속에서도 하루 한 번 아버지를 부르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아이가 자랄수록 아버지 부르는 횟수는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출가하면 한 달에 한 번도 어렵게 될 수 있습니다.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요. 아무튼 그 대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도 많이 부르면서 살면 좋겠다 싶습니다. 사실 클수록 육신의 아버지보다는 하늘의 아버지가 훨씬 기댈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육신의 아버지와 우리 영의 아버지와는 반대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어릴수록 자주 부르고 자라면 부르는 횟수가 드물게 됩니다. 영의 아버지는 그 반대입니다. 신앙이 어릴수록 부르는 횟수는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자랄수록 부르는 횟수가 많아지지요. 물론 신앙 연륜과는 다릅니다.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신앙이 깊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자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생이별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라면서 늘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영의 아버지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궁금하지 않습니까? 무슨 마음이 들지요? 영의 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생기셨을까? 우리만의 궁금증이 아닙니다. 오래 전 예수님의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 14 : 8을 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한심한지 모릅니다. 영의 아버지를 어떻게 본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보여달라고 합니다. 아마 육의 아버지처럼 불 수 있으려니 생각했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도 ‘아버지, 아버지’ 하니까요. 우리들은 어떤가요?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여깁니다. 하나님은 육안으로 뵐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듣고 배우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요청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요.
엄마의 품에서 자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빠 없는 아픔을 안고 아이는 성장했습니다. 엄마가 홀로 키우느라 많이 고생하였지요. 아이가 청년이 되었을 무렵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아이 출생의 비밀을 가르쳐줍니다. 너의 아비는 어디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란다. 충격이지만 또 한편 반가움도 있지요. 엄마가 죽은 후 아이는 아빠를 찾아갑니다. 대단한 재력가입니다. 옛날 어쩌다 불장난한 결과로 잉태가 되었고 그 사람의 명예를 위해 모른 척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아기를 낳아 키운 것입니다. 이제는 장성하여 어엿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때 당신이 불장난으로 만들어낸 아들입니다, 하고 사실을 밝힌다면 믿을까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뭐라고 반응을 할까요? 어려운 문제지요. 우선 과연 자기 자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물론 생김새에 비슷한 점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라고 우긴다면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옛날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가능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유전자 검사를 하면 됩니다. 유전자 검사라는 것이 뭡니까? 간단히 말하면 그 사람의 씨가 있느냐 하는 것을 검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6 :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열매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지요? 예, 씨가 들어있습니다. 도사들이야 잘 알겠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은 씨만 가지고는 이것이 포도 씨인지 사과 씨인지 아니면 무화과 씨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땅에 심어서 싹이 나오게 하고 자라게 하고 그래서 열매를 맺게 하면 알까요, 모를까요? 그야 당연히 알지요.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다고요? 예, 열매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열 매 속에 씨가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포도나무가 되기도 하고 무화과나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씨가 다르면 나무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렇다, 그 말입니다. 김 씨가 박 씨로 될 수 없습니다. 여기 가도 김 씨는 김 씨고 저기 가도 이 씨는 이 씨입니다. 아이가 지나가는 아저씨가 잘 생겼다고 무작정 달려가서 ‘아빠!’하고 부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럴 일도 없거니와 그런다 한들 그 사람이 그 아이의 아비라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세상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슨 해괴한 일이냐고요? 아니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시며 또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아버지이심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도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가르쳐줍니다.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그 동안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늘 아버지라 부르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리아가 만났습니다. 그 때도 분명하게 이런 사실을 언급하여 주셨습니다. 요 20 :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문제는 엉뚱한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다는데 있습니다. 그런 해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걱정하는 것은 그런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자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만이 하나님께로 택함을 받은 백성, 소위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고 자기들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요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사건이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현장에서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께로 데려 옵니다. 그리고 판결할 것을 종용하지요.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압니다. 그 후 예수님은 당신을 책잡으려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요 8 :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유대인들이 반론을 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남의 종 된 적이 없는데 무슨 자유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2절에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예수님이 바로 진리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케 해주어야 비로소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천대하고 무시하고 당연히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고 진리와도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네가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지요. 38절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주 쉽게 설명한다면 예수님의 아버지와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이해했을까요? 하기야 예수님도 유대인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그럼에도 분리하십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자 그러면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이상하지요? 그들이 반항합니다. 41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내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을 은연 중 말씀하시니까 유대인들이 대뜸 반론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자기네 아버지가 누구라고요?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그러지요. 하나님이 자기네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기막힐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수긍하겠습니까? 이 무슨 미친 놈인가 하지 않겠습니까? 여태 조상 적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찾고 부르고 또 제사까지 드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웬 거지같은 젊은 녀석이 나타나서는 이제껏 섬겨왔던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집니까?
잘 생각해야 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불러도 전혀 다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예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함을 받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시내 광야에 들어와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씀을 받으려고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그 기간이 40일, 산 아래서 기다리다 지친 백성이 모세의 형인 아론을 졸라댑니다. 출 32 :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무엇입니까? 4 - 5절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그렇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을 만들어놓고는 하나님을 부르며 섬기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네 아버지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아비는 누구입니까?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의 아비가 누구라고요? 마귀랍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하십니다. 누구 말이 진실입니까?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한 마디로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네 아버지라고 우긴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바로 그겁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지요.
왜 유대인들의 지도자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실 수 없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씨 곧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없습니까? 오늘날처럼 성경이 흔한 때가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만이 성경을 가장 잘 알고 또 가장 성경대로 산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요 8 : 42 - 4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즉 깨닫지 못하고 들을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조금 비약한 점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당시에는 구약성경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읽고 때로는 암송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말씀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성경이 누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진리가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요 8 : 45 - 47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아멘! 예수님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들을 줄 모릅니다. 깨닫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안다고요? 그들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44), 즉 거짓말을 하고 자기가 지어낸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행여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하신다면 어쩌겠습니까? 큰일 날 일이지요. 앞에서 예를 들었지만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는데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갔습니다. 아버지가 쉽게 인정할까요?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겁니다. 과연 김 씨인가? 그 씨가 들어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은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씨가 무엇입니까? 눅 8 :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씨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8 : 31 - 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 즉 진리가 우리 안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아버지를 부를 수도 있고 아버지께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 15 :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고 다 하나님의 자녀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냥 배우려고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갖기 어려운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대로 산다고 발버둥도 쳤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왜요? 올바로 깨닫지를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데 깨닫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구약성경은 예수님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진리가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씨가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자기네 아버지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 말대로 될까요?
자 오늘날 우리는 구약이 아니라 신약의 약속을 가지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한다면 ‘다시 오마’ 하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도 시간에 대하여는 본인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무지하게 마냥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도 궁금하여 물어보았습니다.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재림 때의 징조를 물어본 것입니다. 그리고 4절 이하 길게 바로 그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마 24장의 말씀을 보다 많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정확한 시간과 날짜는 모르지만 그 날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셨습니다. 더구나 나중에 사도 요한을 통하여 계시해주셨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비유로 하신 계시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실제 상황이 일어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한다면 그냥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 때의 예언 곧 비유가 실제 상황으로 나타날 때가 올 것입니다. 2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목자가 등장하겠지요. 마 24 :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해줄 종이 등장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도 영으로 오시니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함께 하는 그 종은 보일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자만이 그 종을 알아볼 것입니다. 그러니 이 예언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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