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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묵상글 ( 연중 제23주일. - 예수님 제자의 3가지 조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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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예수님 제자의 3가지 조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셨는데, 가족을 미워하라니요….
그런데 ‘미워하다’라는 히브리 말의 뜻이 ‘덜 사랑하다.’, 혹은‘둘째 자리에 두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족관계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가족 사랑’을 ‘하느님 사랑’보다 더 상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니 어떻게 가진 것을 ‘다’ 버리란 말입니까?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내가 거기에 얽매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소유(재물, 명예, 권력, 가족 등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고 내적으로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당신을 진실로 따를 수 없다고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는 없기에, 그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조건으로 또 제시하신 것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루카 14,27)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몸소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당신도 그대로 모범으로 보여주신 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요구사항 즉, 자기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분을 따르며, 자기 소유를 다 버리라는 숙제는 아직 다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가족을 상대하고 사랑하는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힘겹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내하는 것도 쉽지 않으며, 온갖 소유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탑을 세우려는 사람의 비유’(28절-30절)와 ‘전쟁에 나서려는 임금의 비유’(31절-32절)처럼, 주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버리며 살아가야 할지를 매일같이 ‘앉아서 계산해보고 헤아려보는’ 지혜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있겠습니까?”(지혜 9,17)
그러니 우리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분별하고 실행할 지혜를 주십사고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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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실패하는 자와 성공하는 자
우리 인간에게는 세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
주님을 따르다가 실패하는 자
주님을 끝까지 잘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왜 따라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르다가 실패하는 자는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모르고 출발했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인데 그렇다면
끝까지 잘 따르는 자는 왜 그리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다 알고 따른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 길을 가는 것으로 얘기가 시작되는데
그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둘째는 자신마저 미워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셋째는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고.
이것은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따르는 것.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작은 형제들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과 정결 안에 소유 없이 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은 ‘Sequela Christi’,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느님께 가는 삶인데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느님께로 가고,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떠나가는 것이기 때문이고, 떠나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버리지 않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고서 갈 수 없잖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따르겠다고 하면 나서지도 못하겠지만,
설사 따라나섰다고 해도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날 것입니다.
전부터 산티아고 걷기가 유행인데 그것을 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짐을 많이 줄인다고 줄여서 갔는데도 걷다 보면 너무 무거워서
하나씩 하나씩 거의 다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을 갖고 걷게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고, 헤아려 보라’고 하십니다.
‘앉아서’라는 말씀은 무턱대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이고,
꽃길이 아니라 십자가 길을 갈 각오가 설 때 떠나라는 말씀이지요.
여기서 품게 되는 의문이 당연히 있습니다.
십자가 길을 갈 각오가 서지 않으면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은 따라도 되고 안 따라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수도자가 되는 것은 돼도 되고 안 돼도 되며,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는 것은 돼도 되고 안 돼도 되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은 따라도 되고 안 따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니 따를 수도, 안 따를 수도 있지만,
안 따르면 자기 손해이고 그것은 그저 돈 몇 푼 손해가 아니라
‘행복 손해’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는 엄청난 불행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라고 한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그도 주님을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주님 친히 회개를 시작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출세 곧 세상을 향해 나아가던 그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아시시로 돌아가면 당신 뜻을 알려주시겠다는 말에 따라 아시시로 돌아간 그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은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줬지만, 나병환자를 사랑하는 것,
곧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을 그렇게 보낸 그에게 주님께서는 용기를 주셨고 껴안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그는 고통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를 각오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도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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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란 통상적으로 자기 스스로 한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그와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서적 전승의 발전으로써 후기 유다 사상에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안에서도 이 단어를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단어는 예수께서 부여하신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지혜의 원천이기 때문에 제자의 이상은 한 인간을 스승으로 따르는데 있지 않고 하느님 자신의 제자가 되는 데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모세(요한 9,28), 세례자 요한(참조: 마르 2,18; 요한 1,35; 사도 19,1-3) 그리고 바리사이 사람들(마태 22,16)의 제자들에 관해 몇가지 언급을 빼놓고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스승으로 인정한 사람들에 한정하여 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열두 사도들을 제자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특히 주님께서 선교하도록 파견한 72인을 제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루카 10,1). 아마도 이러한 제자들은 많이 있었지만(루카 6,17; 19,37; 요한 6,60),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요한 6,66).
이처럼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그렿게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적인 소질이나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께서 먼저 택하시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가 되기 위해서 특별히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 조건은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첫번째 요인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과거의 집착들을 끊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참된 제자가 되려면 완전히 과거와 결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말과 행동을 본받고 그분의 교훈을 깊이 새겨 들으며 그분의 삶에 자기의 삶을 일치시키는 철저한 자기 버림을 의미합니다. 유다교 학자의 제자들은 일단 율법에 규정된 교육을 끝낸 다음에는 스승을 떠나 독자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으나, 주님의 제자들은 그들과는 달리 하나의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의 전인적 인격을 본받고자 했기에 자기 부모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스승을 온전히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우리들의 스승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을 감추어 둔 생명의 책과 같습니다. 영원한 기원과 부패하지 않는 본질, 생명을 주는 지식과 지워 질 수 없는 글씨를 가진 이 책을 찾아 내야 합니다. 이책을 연구함도 바람직하고 이책의 가르침은 쉬우며 그 지식은 감미롭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 말씨는 이루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이 책을 찾아내는 이는 그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9월 영적 수련 성월 1주간 회개/겸손 ✝️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1-13장.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죽은 아버지가 비상적인 그의 아들의 첫영성체를 간청하다
어느 날 저녁에 나는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몸시 추운 밤이었다. 만월이 방안을 밝게 비추었다.
밤중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마을로부터 얼어붙은 눈 위를 바삐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다음 누군가 거리로부터 사제관 계단 위로 올라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현관 앞에서 장화에 묻은 흙을 털고 나서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를 들었다. 중병환자에게 불리워 가겠구나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대개 이런 경우에 사제관의 다른 쪽 방에서 자고 있는 노령에 접어든 식당 복사가 일어나서 현관문으로 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집안이 모두 조용했다. 나는 큰 빗장을 빼는 소리와 현관문 열쇠 돌리는 소리를 듣지 못쨌다. 그런데 그 즉시 내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를 감지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방문 옆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무뚝뚝하게 그 사람에게 말을 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오?’
그 남자가 대답했다.
‘신부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달빛 속에서 나는 그제서야 수수한 작업복을 입고 서 있는 이 농부가 내가 성찬식에 참례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조그만 소년의 아버지라는 것을 아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부탁입니까? 또 왜 이렇재 늦은 시간에 오셨읍니까?’
그 남자가 대답했다.
‘신부님, 부탁입니다. 제 아들 펠틴이 부활절 후 첫일요일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첫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 아이는 곧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논 깜짝 놀랐다. 밝은 달빛 속에 서 있는 그가 그림자를 던지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또 나는 이 농부의 형체가 문과 서적 진열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단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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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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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순교자 성월의 첫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로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지혜 9,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의 <필레몬서>에서는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바오로 사도의 신자로서의 삶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지혜가 오늘 <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십자가의 지혜로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그 길을 함께 가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지혜를 세 가지 조건으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는 것이요, 둘째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는 것이요, 셋째는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 개의 동사입니다. 동사는 행동하는 것을 표현해줍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 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9장 13절의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를 미워했다’라고 기록된 성경말씀대로이다.”라는 표현이 그렇고, <루카복음> 16장 13절의 “어느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과 가족들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두고 앞세워 흠숭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 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분을 따르기 위한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두 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곧 탑을 세우는 건축가가 소요경비를 미리 계산하는 것과 같으며, 또 자기보다 더 강한 임금과 전쟁을 할 것인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인지 미리 따져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곧 자신의 처지와 실상을 알고 자의로 소중히 책임을 지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친다.’, ‘가납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쓸 데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요, 돌려드리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소유자가 아니라, 속해 있는 자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자임을 깨달을 때라야 바쳐지고 비워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8-19).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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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양다리 걸치기 신앙은 없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참된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나 자신을 버림으로써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굳건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위로와 평화, 희망과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접하면서 긴장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누구든지 나에게 오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시며 자기 소유를 송두리째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면 마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성당에 나가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영 딴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보장받는다고 했는데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약속에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사실, “집안식구가 원수인 까닭은 ‘사랑’의 이름으로 ‘집착’에 빠질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출가’ 라는 말을 씁니다. 속세의 가정을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불문에 드는 일을 말합니다. 뜻을 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덕을 닦는 일을 들어 말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부모님 품을 떠나갈 때도 ‘출가’라는 말을 합니다. ‘출가’는 소위 가족과의 불화나 갈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집에서 나가는 ‘가출’하고는 다릅니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떠나는 것입니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소중한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선택하였으면 거기에 투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혼을 예로 들면,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따르기 때문에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한 가정의 주체가 되었다면 이제 부모에게 기대거나 무엇을 바라지 말고 홀로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뒷받침해 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칭 마마보이나 마마걸이 되어 성숙한 인격체로 설 수가 없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부모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켜보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남모르게 돕는 것이지 사사건건 이래라저래라하거나 기대하면 실망이 커집니다. 내가 신경을 안 써주면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온갖 일에 ‘간섭과 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야 하고 또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출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좋은 것임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다른 사람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선택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요한1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하느님을 선택하면 바로 그 선택을 통해서 다시 더 큰 것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합니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이 앞세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뜻을 품었으면 그에 걸맞은 투신을 해야 합니다. 탑을 세우려면 공사를 잘 마칠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 임금이 싸움을 해도 먼저 지금 군대의 수로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계산하면서 왜 그 좋은 머리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에는 쓰지 않느냐? 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한 투신과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세상에 나왔으면 탯줄을 끊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따라서 천상을 위해서 유익하다면 나의 집착과 소유의 마음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죄악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못된 습성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을 소신 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고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그것도 그냥 고집이 아니라 똥고집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느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쓸데없는 고집불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소신 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면, 또 이쪽도 저쪽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면,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여러분, 하느님 앞에 적당한 타협이나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의 심성을 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로는 거미 같은 사람입니다. 거미는 처마 밑과 으슥한 곳에 끈끈한 거미줄을 쳐 놓고서 그 덫에 걸리는 타 곤충들을 잡아먹으며 심지어 동료까지 해치는 무지막지한 해악(害惡)한 놈이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돼! 라는 심보의 소유자입니다.
두 번째로는 : 개미같은 사람입니다. 근면한 사람이라고 비유하기도 하는데 자기만 살겠다고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만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입니다. 남을 도울 필요도 없고 손 벌일 일도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는: 꿀벌 같은 사람입니다.벌은 이 꽃과 저 꽃을 날아다니면서 꿀을 따면서도 꽃가루 수정을 하여 씨가 잘 맺도록 도와줍니다. 꿀을 모아놓으면 사람이 먹어요. 이웃과 서로 돕고 사는 공생관계를 맺고 산다. 이타주의 적인 사람입니다. 고달프고 힘들지만 보람이 있어요.
예수님을 닮은 삶은 어느 삶인가요? 꿀벌 같은 삶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지향을 잘 두어야 하고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철저히 따라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이타주의적인 삶을 충직히 살아야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자기 가족과 맺는 관계보다 더 강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소중한 것보다도 예수님을 우선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이 없이는 기초가 없이 탑을 짓는 것과 같고 군대 없이 전투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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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애잔한 음성과 멜로디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가을을 시작하면서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공, 명예, 권력’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 길을 찾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것도 모자라 학원까지 다니면서 우리는 성공의 길, 명예의 길, 권력의 길을 알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도 있었고,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적지를 알고 가는 배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끝을 생각하면서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중한 것을 먼저 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모두가 이기는 길을 찾았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혁신과 개혁을 통해서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먼저 경청하고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정신적인 것들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밤을 새우면서 그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한국을 떠나 이민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성공’은 모두가 선망하는 삶의 길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인 종교는 대부분 ‘지혜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대부분 고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치 않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의지와 다르게 행동하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 고통은 집착에 있다고 합니다. 그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가 열린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각으로 몸과 마음을 가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유교에서는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마음, 잘못을 겸허하게 뉘우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 의, 예, 지’의 마음입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한양의 4대문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숭례문, 흥인지문, 홍지문, 돈의문으로 정했습니다. ‘인, 의, 예, 지’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한양의 중심에 ‘보신각’을 설치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을 이야기합니다. 천년도 하느님 앞에서는 마치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과 같다고 합니다. 덧없고 허무한 인생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참된 진리를 찾는 것이 지혜의 길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경쟁에서 이겨 성공하는 이들이 얻을 수도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욕심을 버리고 ‘인, 의, 예, 지, 신’의 마음을 가지면서 시작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지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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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복음을 읽다 보면,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자렛 사람’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노쯔리’와 아람어 ‘나즈란’로 쓰는데, 사실 이 단어는 예수님을 비하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나자렛 것’, ‘나자렛 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비하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에 예수님께서 활동을 멈추셨을까요? 이런 비판이 늘어남에 따라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의 정치인들도 자기의 지지도가 떨어지게 되면, 활동에 제약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전혀 멈추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위협까지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님의 ‘북한교회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 죽음의 위험에서도 신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피난 가지 않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순교자들이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고백했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의 지금 삶 안에서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답지 않게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랑스럽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입니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제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고,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다음에야 돌아올 영광이었습니다. 즉,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어렵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지요.
사실 자기 부모,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그리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 정말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유교 사회 뿌리가 깊은 우리만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 효도는 중요한 사상이었습니다.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뒤로 돌리다, 2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결국 극한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탑과 전쟁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맡은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심사숙고를 요구하는 진지함과 어떤 난관도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인내심이 요구됨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데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지혜로움과 주님께 대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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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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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중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느 한순간 충동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오래동안 숙고하고 답을 찾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거대한 탑을 세우는 일이며 원수와 대적하는 일과 같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만에 거대한 탑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오랜 시간 정진하며 목표를 잃지않고 지루한 그 길을 가야만 완성할 수 있는 거대한 일입니다. 원수와 대적하는 일 또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평생의 과업이며, 운명을 좌우하는 일이기에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지 아주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들을, 아끼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더욱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호기심으로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상황에 따라 의지를 바꾸어서도 안됩니다. 일생 동안 주님을 따른다는 결심과,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주님처럼 행동하겠다는 굳건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언제나 그리스도교의 주인이신 주님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주인이신 주님 한 분만을 모시려면 자신은 물론 가족과 다른 사람의 의지를 버리고 오직 주님 한분만을 모시고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버리라고 하시기 전에, 예수님 스스로 먼저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고귀한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고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까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 엄청난 고통의 순간에도 당신의 뜻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당신의 뜻을 포기하고 끝까지 고통과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완수하셨기에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 험한 길을 가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 속에 단 한분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모시는 데 방해가 되는 다른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자신까지도 완전히 포기했을 때 비로소 주님과 하나로 일치되어 주님과 함께 인간을 구원하는 소명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2.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나 자신을 버릴 수 있습니까? 3.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 그래야하는지요?
말씀의 실천
1. 우리의 소명은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로 주님의 작은 사랑, 마음과 나눔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한 걸음 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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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연중 제2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답게
-사랑,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 버림-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시편90;14,17)
시공을 초월하여 아주 오래 전, 오늘 제1독서의 지혜서 말씀에 공감합니다. 인간 누구나의 깊이에서의 실존적 체험일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 것 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합니다.“
흡사 “헛되고 헛되다”로 시작하는 코헬렛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불확실해 보이는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입니다. 물음만 있고 하느님 답을 모르기에, 인정하지 않기에 끝없는 방황이요 비극적 불행한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주님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는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기에 우리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우리가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모든 인간 문제의 결정적 답이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우리의 주님이요 스승이요 영원한 도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인간답게 산다” 막연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산다, 구체적으로 분명합니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은 가르침을 주시며 성령을 통해 부단히 깨달음을 선사하시어 끊임없는 자아초월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이르면서 점차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다음 어제 새벽 산책중 떠오른 “천복(天福)일세”란 고백시도 성령의 선물입니다.
“푸른 하늘은 바다
흰 구름은 섬
산(山)속에 살면서도
날마다
바라보는
바다와 섬
무수히 빛나는 바다의 별들
천복(天福)일세!”-2022.9.3.
마침 새벽 일찍 일어난, 피정 온 한 젊은 자매는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이게 인간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인간 신비의 비밀을 찾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과연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솜씨에 경이감驚異感을 체험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문득 아주 오래 전 써놓은 “정주(定住)”란 시도 생각납니다. 제 시는 한결같이 고백시에 속합니다.
“산(山)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背景)이 되어 주신다”-1997.8.12.
무려 25년전 오늘 지금 여기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서 쓴 시라는 생각이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으로 천복을 누리는 삶임을 알게 됩니다. 고맙게도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당신의 제자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사랑하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중심의 삶을 뜻합니다. 그 아무것도 주님 사랑보다 앞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해, 갈림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에 대한 집착 없는, 자유롭게 하는, 생명을 주는 아가페 사랑이 가능하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깊은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글자 그대로 친지나 자신을 미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히브리어 문법상 “누구든 주님이신 당신보다 친지나 자신을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로 바꿔 읽어야 합니다. 제 행복기도중 한연이 떠오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타적 순수한 아기페 사랑도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경지의 바오로 사도를 우리는 제2독서에서 만납니다.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필레몬에게 보내는 바오로의 간곡한 편지에서 그의 형제애가 빛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아가페 형제애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가 잠시 그대에게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얼마나 정중한 사랑의 편지인지요! 바오로의 순수한 사랑, 형제애가 빛납니다. 바오로 사도가 누굽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기 삶의 전부라 고백한 분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때 이런 아가페 형제애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구원의 둘째 원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남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입니다.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누구의 십자가를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어차피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 가야 합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라틴어 이며, 운명에運命愛라 칭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두 라틴어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살라”입니다.
천국의 열쇠와도 같은,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야 주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생명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제 십자가를 가볍게 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사,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해 주십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래야 제 십자가는 무거운 짐이 아닌 가벼운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모두를 버려라!”
역시 평생 버림의 여정입니다. 불암산 요셉 수도원에 34년 정주하다 보니 쌓이는 것들이, 모아지는 것들이, 채워지는 것들이 점차 많아집니다. 반대로 하루하루 날마다 내 소유를, 소유욕, 명예욕등 온갖 끝없는 탐욕을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또 이웃과 소유물은 나눠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의 인생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역시 예외없이 “누구든지”입니다. 과연 날로 무거운 짐이 되는 인생입니까? 날로 가벼워지는 홀가분한 자유로운 인생입니까? 이 또한 똑같은 원리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포기와 버림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포기와 버림이 뒤따를 때 삶의 무게는 저절로 가벼워지고 자유로워 질것입니다.
참 보물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때 날로 깊어지는 주님맛에 세상맛은 시들해 질 것입니다. 세상 것들이 시시해져 버려 저절로 이탈의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바로 이 셋이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구원의 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되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말마디에서 보는 바처럼 예외없이 인간 누구에나 적용되는 구원의 세 원리입니다. 참으로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삶,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제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으며 날마다 제 소유를 버리고 나누고 비우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자유로워질 때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시편90,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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