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찬란해‘봄
김미숙
아차차 차차. 아쉽게도 놓쳤다. 하늘하늘 떨어져 날리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애들 장난 같아 믿지 않았지만 낱낱이 풀어져 곡예 하듯 눈앞에서 나풀나풀 희롱하는데 나도 모르게 폴짝 뛰었다. 두 손바닥이 저절로 마주치며 잡으려고 했지만 놓쳐 버렸다. 잡을 수 있었는데 아쉽다. 지는 벚꽃의 마력이다.
2월, 아주 가녀린 벚나무 새 가지에서 어린 촉이 솟아나려 할 때, 하늘을 바라보았던 사람은 느꼈을 것이다. 연보랏빛 하늘이 열리면서 이른 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가느다란 가지가 기지개할 때 잔가지가 벌려놓은 하늘은 온통 연보라색 수채화 물감을 문질러 놓은 느낌이란 걸. 그 연보라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틈을 타 앳된 꽃봉오리로 태어난다. 점점 빛깔이 차오르다 고운 햇살에 입 맞추고 환히 몸을 벌린다. 서서히 치밀하고도 비밀스러운 꽃봉오리를 키우고 영글어 꽃잎을 쟁반처럼 벌려놓았다. ‘봄’이다.
매화가 필 때부터 벚꽃 지는 계절까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꽃을 보러 모여든다. 평소에 쳐다보지 않았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고개를 들어 사진을 찍어대며 관심 두지 않았던 지난날을 보상이라도 하듯 셔터를 열심히 눌러 댄다. 하나같이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닮은꼴이다. 사진사가 ‘김치’라며 미소를 요청하지 않아도 얼굴은 이미 웃음기 가득하다. 사진을 확인하면 더욱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바람이 지나갔을까.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잘게 찢은 엷은 흰색 한지같은 꽃잎이 우르르 쏟아진다. ‘다시 바라 봄’ 이다.
해마다 피고 지는 벚꽃이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모양으로 똑같은 계절에 피어나건만 매번 열광하고 웃으며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마치 생전 처음 쳐다보는 꽃인 것 마냥. 처음처럼 ‘맞이해 봄’ 이다.
나무 촉처럼 새로 눈을 뜨는 마음에서 오는 반김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긴 회색빛 겨울 속에서 어떤 새로움에 목말라 있다. 나무는 칼날 같은 겨울바람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며 봄을 준비한다. 녹음이 사라졌던 때부터 앙상한 나뭇가지에 싹이 돋기를 기다리는 설렘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탓일 게다. 봄을 반기는 건 긴 겨울이 있어서다. 항상 꽃이 만발한다면 봄꽃을 특별히 반길 이유가 있을까. 새로 ‘눈떠 봄’ 이다.
아침에 창문을 여는 순간 완연한 봄이 시나브로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방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기운이 겨우내 굳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팠던 마음을 위로해준다. 봄 기상을 제일 먼저 알려 주는 것이 아주 작고 가녀린 풀잎의 용기다. 매서운 추위를 견뎌낸 기다림과 사무치게 간직한 그리움을 알고 ‘마주해 봄’ 이다.
인생의 겨울도 마찬가지다. 나는 상실의 겨울 한가운데에 있었다. 결코, 빛이 찾아들지 않는 지하 단칸방처럼 암담했다. 막차를 놓쳐버린 정류소에서 겪는 깊은 겨울 같은 냉기를 겪고 있어도 그들은 사무적이었다. 아무리 깊은 시름에 빠져있어도 세상 시계는 돌아가고 있었다. 영안실 옆방에선 배고픔을 느끼는 문상객이 있었다. 아직 아픔에서 헤매고 있는데 사용하던 그의 연구실 방을 빼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해는 되지만 서러움이 밀려왔다.
진행 중이던 거액의 사업이 멈춰버렸지만, 나머지 금액을 누군가는 가로채 입을 싹 닦고 모른 체했다. 이해타산 앞에 덕을 보는 그의 후배 동료들은 계산기처럼 냉정했다. 먹잇감을 낚아채는 맹수처럼 재빨랐다. 이득 앞에 배신이라는 단어가 그리 멀리 있는 용어가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경우의 수는 누구에게나 한 번이지만 사람들은 마치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사건으로 치부했다. 그가 떠나간 것이 내 탓이 아님에도 자꾸만 내 부족함으로 생각되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내 마음을 ‘다시 돌아봄’ 이다.
상처가 아물어 일상으로 돌아오려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삶의 무게에 힘겨워 그 누구도 남이 겪는 진통을 눈여겨 봐주지 않는다. 가끔 건성으로 안부를 가볍게 툭 던질 뿐이다. 그사이 밑바닥으로 쓰러졌던 자생력이 관절을 조금씩 끼워 맞추고 마음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일어나 봄’ 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다. 가치 없는 고난이 없고 의미 없는 통증은 없다. 시련 없는 인생은 설익은 과일과 같고 발효되지 못한 술과 같다. 작고 가녀린 튤립조차도 추운 겨울을 겪지 않고선 꽃을 맺지 못하는 법이다. 고난은 성공으로 인도하는 채찍이며 행복을 위한 전주곡이다. 아픔을 이겨 낸 사람은 시련 중인 다른 이에게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떠올리며 다정한 손을 내밀어 도움의 방책을 줄줄 아는 법이다. 어둡고 긴 겨울이 있었기에 봄꽃이 환영받는 것처럼 인생의 겨울도 치러볼 만한 가치가 있다. 다시 피는 봄꽃은 특별히 귀하고 곱게 보인다. 새로 ‘눈여겨봄’ 이다.
행복의 조건은 고통이 왔을 때 승화하는 것이다. 겨울과 대조되는 봄처럼 승화된 경험은 행복이란 덤도 주어진다. 새로운 기회가 있고 몰랐던 일상이 다시 보인다. 쥐고 있던 것을 놓치는 상실은 그 순간에는 아쉽긴 해도 다시 빈손에 새로운 것을 채울 기회가 있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행운의 순간도 찾아든다. 새로 ‘시작해 봄’ 이다.
꽃 피는 봄이다. 본래 모습으로 다시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면 자연의 섭리 앞에 저절로 고개를 숙인다. 눈부신 봄 햇살과 지천에 널린 봄꽃들의 향연. 암울했던 겨울에서 빠져나와 봄꽃나무가 되어보는 상상을 해본다. 스스로 변화를 자각하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간절한 새 소망을 기대해봄 직한 아침이다. 겨울을 겪은 우리는 모두 봄을 간절히 기다렸다. 다시 봄처럼 화사하게 살아 보자.
다시 ’찬란한 봄‘ 이다.
현대수필 「생명의 한 끼」등단
제9회 사하 모래톱 대상 수상
제31회 부산문학상 우수상, 수필집「아듀, 미세스 리 」
첫댓글 선생님의 찬란한 봄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