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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베르나르도(8.20)
베르나르도(8.20)
성인명 베르나르도 (Bernard)
축일 8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수도원장, 교회학자
활동지역 클레르보(Clairvaux)
활동연도 1090?-1153년
같은이름 버나드, 베르나르, 베르나르두스, 베른하르트, 벨라도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는 1090년경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디종의 퐁텐레디종(Fontaines-les-Dijon)에 있는 가족성에서 귀족 가문 출신인 테슬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Montbard) 영주의 딸인 복녀 알레타(Aletha, 4월 4일)의 6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신심 깊은 어머니에게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란 그의 형제 중에는 복자 제라르도(Gerardus, 6월 13일)와 복녀 훔벨리나(Humbelina, 2월 12)가 있다. 복녀 알레타는 성 베르나르도가 태어나기 전에 붉은 등을 가진 하얀 개가 크게 짖는 꿈을 꿨는데, 이를 장차 자기 아들이 위대한 설교자가 되어 하느님의 집을 지키고 교회의 적들과 맞설 것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성 베르나르도는 아홉 살 때 샤티용쉬르센(Chatillon-sur-Seine)에 있는 생보르(Saint-Vorles) 수도원 학교에서 중세 시기의 삼학(三學)인 문법 · 논리학 · 수사학을 포함한 교육을 받으며 청운의 꿈을 꾸었다. 그런데 1105년경 어머니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아 스스로 언급하였듯이 ‘완전한 회심을 향한 먼 길’을 시작하였다.
성 베르나르도는 한동안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힘들어하다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수도 생활에 들어가려는 마음을 굳혔다. 그는 1112년 4월 부활절 무렵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형제와 친척과 다른 귀족을 포함해 30명의 동료와 함께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의 수도 규칙을 엄격히 해석하고 철저히 따르기 위해 1098년경 몰렘(Molesme)의 성 로베르토(Robertus, 4월 17일)가 새로 설립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당시 시토회의 세 번째 수도원장이었던 성 스테파노 하딩(Stephanus Harding, 3월 28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수년 동안 수련자를 받지 못해 수도원 폐쇄까지 고민하던 성 스테파노 하딩은 성 베르나르도 일행의 입회로 새로운 자매 수도원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성 베르나르도는 3년 동안 당시 가장 엄격했던 시토회의 규율에 따라 영적 · 신학적 교육을 받았는데 건강 문제로 큰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1115년에 그는 성 스테파노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승과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Champagne)의 경계 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성 베르나르도는 그해에 샬롱쉬르마른(Chalons-sur-Marne)의 주교인 샹포의 기욤(Guillaume de Champeaux)에게 사제품을 받고 새로 설립한 클레르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새 수도원은 젊은 수도원장인 성 베르나르도의 지도하에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극도의 가난한 생활 속에서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 적용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는 경험 부족으로 인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침묵과 겸손 속에 조금씩 개선하며 놀라운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면서 수도원의 이름도 본래 ‘쓴 약초 계곡’을 뜻하는 발레 답생트(Vallee d’Absinthe)에서 ‘빛의 계곡’을 뜻하는 클레르 발레(Claire Vallee) 또는 클레르보(Clairvaux)로 바꿨다. 그렇게 새로운 수도원으로 몰려온 제자 중에는 성 베르나르도의 아버지와 형제들도 있었다. 그는 새로운 수도승들을 위해 새로운 수도원을 계속 설립해야 했다. 클레르보에서 시작해 프랑스 다른 지역과 네덜란드,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 무려 68개의 자매 수도원이 생겼고, 성 베르나르도는 이 모든 수도원을 방문했다.
1119년에 그는 효율적인 시토회 운영을 위해 제도를 정비하고 회칙 마련을 위한 작업을 위해 성 스테파노 하딩이 소집한 제1차 수도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총회에서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성 베르나르도가 수도회 본래의 규칙과 열정을 되살리려는 생각을 펼칠 때 모두가 경청하였다. 그리고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수도회 회칙인 “사랑의 헌장”(Carta Caritatis)은 그해 12월 23일 교황 갈리스토 2세(Callistus II)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성 스테파노 하딩과 함께 시토회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시토회 본래의 규칙을 회복한 공로로 시토회 세 명의 공동 설립자(몰렘의 성 로베르토, 시토[Citeaux]의 성 알베리코[Albericus, 1월 26일], 성 스테파노 하딩) 가운데 한 명은 아니지만, 보통 시토회의 공동 설립자 가운데 한 명 또는 제2의 시토회 설립자로 불리게 되었다.
성 베르나르도는 교회에 대한 열렬한 애정으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였던 1130~1145년에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황과 군주, 주교와 학자들의 자문관으로 활약했다.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Honorius II)가 선종한 후 아나클레토 2세(Anacletus II)와 인노첸시오 2세(Innocentius II)가 교황 후보자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였다. 결국 인노첸시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아나클레토 2세가 대립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새 교황 선출의 합법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가톨릭 세력의 일치를 이끌어내 교회의 분열을 막는 데 힘썼다. 1145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출신자 그의 제자였던 피에트로 파가넬리(Pietro Paganelli)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복자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III, 7월 8일)가 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 로마 교황청의 권력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복자 에우제니오 3세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를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에 대항하여 설교하도록 했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도 임명하였다.
성 베르나르도는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토회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여러 문제에 관여하면서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논문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De diligendo Deo)는 중세 신비주의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외에도 수도 생활과 관련된 작품으로 “은총과 자유 의지에 관하여”(De gratia et libero arbitrio)와 “겸손과 교만의 등급”(De gradibus humilitatis et superbiae)이 있다. 또한 클레르보의 수도승들을 위해 행한 86편의 아가서 강론을 모은 “아가서에 대한 설교”(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에서 그는 유일한 지혜요 구원인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의 신비를 설명하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알 길이 없다.’라고 하였다. 성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경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는데, 그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저서와 신심은 현대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쉼 없는 활동과 고행으로 지병이 악화하여 급격히 체력이 떨어진 성 베르나르도는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 수도원에서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다. 그는 선종 20년 뒤인 1174년 1월 18일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830년 8월 20일 교황 비오 8세(Pius VIII)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수도원이 파괴된 후 그의 유해는 발굴되어 트루아(Troyes)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성 베르나르도 선종 800주년을 기념하여 1953년 5월 24일에 그에게 주어진 칭호인 ‘꿀처럼 단 박사’라는 의미의 회칙 “독토르 멜리풀루우스”(Doctor Mellifluus)를 발표하였다. 성 베르나르도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고 있다. 그의 상징은 별칭과 연관하여 벌집(꿀벌통)이며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벌집(통)과 함께 등장하거나 시토회의 흰 수도복을 입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된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20일 목록에서 프랑스 랑그르(Langres) 지역에서 클레르보의 초대 수도원장으로 덕행과 학식, 그리고 기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성 베르나르도가 선종했는데, 그는 교황 비오 8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이날은 30명의 동료와 함께 시토(Citeaux)의 새 수도원에 입회하여 클레르보 수도원의 설립자이자 초대 수도원장이 된 성 베르나르도 교회 학자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과 교리 그리고 모범을 통해 수도승들이 하느님 계명의 길을 따라 걷도록 지혜롭게 인도했고, 평화와 일치를 회복하기 위해 유럽 전역을 여행했으며, 프랑스 랑그르 지역에서 주님 안에 안식을 얻을 때까지 저술과 열정적인 설교로 보편 교회를 일깨웠다고 기록하였다. 성 베르나르도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오늘의 성인 사무엘(8.20)
사무엘(8.20)
성인명 사무엘 (Samuel)
축일 8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판관
활동지역
활동연도 +11세기BC
같은이름 사뮈엘, 새무얼, 싸무엘
성 사무엘은 히브리인들이 판관 시대의 느슨한 동맹 체제에서 중앙집권적 왕정 체제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기원전 11세기에 활약했다. 사무엘은 히브리어로 ‘쉬무엘’이고, ‘하느님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은 하느님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당시 유대인 남자가 맡을 수 있는 지도자 역할, 즉 제사장 · 판관 · 예언자 · 군대 지휘관 등을 모두 맡은 인물이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이자 예언자로서 그는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던 신정(神政)정치를 사람이 다스리는 왕정(王政) 체제로 바꾸는 역할을 맡았다.
사무엘 상권 1-16장에 나타난 사무엘의 활동은 그래서 주로 사울(Saul) 왕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살던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 엘카나에게는 한나와 프닌나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한나는 주님께 간절히 빌어 아들을 얻고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1,1-20). 그리고 주님께서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나지르인으로 하느님께 바치겠다(1,11)고 서원한 대로 아이가 젖을 떼자 주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주님께 바쳤다(1,28). 어린 사무엘은 사제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었는데,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었다(3,1). 어느 날 밤 소년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이는 불경한 아들들을 둔 엘리 집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다. 이 부르심은 또한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로서 활동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3장).
4-6장은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해 계약의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가문이 멸망하고, 실로 성소가 파괴된 내용이다. 필리스티아인들에게서 계약의 궤를 돌려받은 후에 사무엘은 판관이 되어 미츠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였고, 필리스티아인들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였다(7장).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으로서 죽는 날까지 백성을 다스렸는데, 해마다 베텔과 길갈과 미츠파를 순회하며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판관으로 일하였다. 그런 다음 자기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와 거기에서도 판관으로 일하며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7,17). 사무엘은 나이가 많아지자 자신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판관으로 임명하고 브에르 세바를 다스리게 했다(8,1-2).
이어서 서로 다른 왕정 설립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사무엘이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9,1-10,16). 한편 또 다른 성경 구절(7,3-8,22; 10,17-27; 12,1-25)에서는 백성들이 직접 투표로 사울을 왕으로 선택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사무엘은 왕정 설립 요청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요 왕이신 주님을 배반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마지못해 왕정 설립에 동의하였다. 사무엘은 특히 고별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명령을 절대 거역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만일 여전히 악행을 일삼는다면 백성과 임금 모두 쫓겨날 것이라고 경고했다(12장).
15장에 보면 사무엘과 사울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갈라졌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고,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일을 후회하셨다(15,35). 이러한 내용은 앞선 성경 구절(13,13-14)에 이미 나와 있다. 16장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미래의 왕이 될 이사이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성별하고, 다윗과 함께 나욧으로 내려가 있던 사무엘을 찾아간 사울이 그 앞에서 예언 황홀경에 빠져 버린 이야기(19,23-24)를 비롯해 사무엘은 죽은 후(25,1)에도 혼백으로서 계속해서 사울의 왕정사에 등장하고 있다(28장). 사무엘은 많은 부족함에도 늘 자기 생각과 판단에 앞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노력했다. 후대에 사무엘이 모세와 함께 언급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자신이 전한 주님의 말씀에 끝까지 충실했기 때문이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20일 목록에서 유다 땅에 거룩한 예언자 사무엘이 있었는데,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성유물을 아르카디우스 황제(395~408년 재위)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옮겨 셉티무스(Septimus) 근처에 보관했다고 전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유해가 406년에 발견되어 팔레스티나에서 칼케돈(Chalcedon, 소아시아 북서부에 있던 고대 도시)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중 속에서 장엄하게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했고, 제4차 십자군 전쟁 당시 베네치아(Venezia)로 옮겨져 오늘날까지도 성 사무엘 성당에서 공경받고 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판관이 된 예언자 성 사무엘을 기념하는데, 그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울을 백성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웠고, 사울이 불신앙으로 주님께 버림받은 후에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그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고 기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