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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름길
출 13: 17-22
흔히 우리 인생을 가리켜 여행길로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어떤 길로 걸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로 가고 싶으십니까? 아마 쉽고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원하실 겁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슨 길입니까? 지름길(Shorter Road, Shortcut)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름길로 가면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지름길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지름길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때로는 지름길이 막힐 때도 있고, 엉뚱한 데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잠14:12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무슨 말씀인가요? 자기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길이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은 모두 초행길입니다. 직접 가보고 검증한 후에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바로 이 길이야!” 하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길을 미리 아시고 내다보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생각하는 지름길보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지름길이 정말 좋은 겁니다.
오늘 본문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지름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 생각에는 아닌데, 하나님이 인도하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가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혹시 ‘내가 생각하는 지름길’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그 길을 좋은 길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결코 후회 없는 승리의 인생을 살고 싶다면 ‘하나님의 지름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름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길을 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직선 코스로 빠르고 편한 지름길로 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엉뚱하게 다른 길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실수도 오류도 없으십니다.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미련하고 둔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55:8~9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이시므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엉뚱한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상한 길’이 아니라 가장 ‘이상적인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길이 얼마나 좋은 길입니까? 함께 살펴봅니다.
먼저 본문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막으신 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7절(상).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 ” 블레셋 사람의 길은 지중해 해변 길을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해변을 따라 여러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가사’(Gaza)입니다. 이스라엘에 출발한 고센 땅 라암셋에서 북동쪽 방향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 보면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직선 코스로 가장 빠르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이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길로 가는 것을 막으시고 정반대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18절 말씀 보시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 ” 이 길은 남동쪽 시내(Sinai) 광야 방향입니다. 사막을 통과하는 겁니다. 그리고 홍해 바다와 마주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정말 아니죠. 빙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뺑뺑이 돌리는 것 같고, 위험한 데로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악취미를 가지신 분이시라 그런가요? 이스라엘을 데리고 장난치는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돌아가는 길, 먼 길, 고달픈 길, 위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더 좋은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름길’이라고 부른 겁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인도하신 광야 홍해 길은 어떤 길일까요? 왜 좋은 길일까요?
[1] 안전한 길 : 적당한 고난이 있는 길
하나님이 인도하신 홍해의 광야 길은 얼른 생각하기에는 고난의 길 같은데, 오히려 적당한 고난이 있을 뿐 사실은 안전한 길이라는 겁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식으로 볼 때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블레셋 사람의 길로 인도하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 ...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무슨 말인가요? 그 길은 직선 코스이고 안전한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위험한 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호전적인 민족입니다. 군사력도 대단합니다. 분명히 싸움을 겁니다. 반면에 그 당시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갑자기 애굽에서 나왔는데 무슨 군사력이 있겠습니까? 장정들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노인들, 여자들, 아이들도 많습니다. 싸움을 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블레셋이 싸움을 걸어오면 혼비백산 겁을 먹도 뒤 돌아서 도망할 게 뻔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출애굽의 역사는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체질과 형편을 아시고 다른 길로 인도하신 겁니다. 그 길은 고달픈 광야 길이지만, 시간이 더 걸리는 먼 길이지만 그래도 안전한 길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0:13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시험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감당하지 못하고 망할 정도의 시험은 아니고, ‘적당한 시험’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길이 무조건 순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계속 직선 코스로 만들면 너무 단조로워서 방심하다 졸게 되고 자칫 대형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 적당하게 곡선 코스를 만들어 놓는다고 합니다. 건설 비용도 더 들고 운전하기도 어렵지만,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현재 나에게 있는 고난을 감사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고난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 그러다 보니까 더 안전한지도 모릅니다. 적당한 고난은 내 인생을 지켜주는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고난을 가리켜 ‘변장된 축복’이라 불렀습니다.
인간이 참 이상합니다. 너무 고난이 커도 문제지만 너무 고난이 없어도 문제입니다. 요즘 자살 문제로 시끄러운데, 자실하는 사람들이 두 부류입니다. 너무 고난이 커서 감당하지 못해서 죽기도 하지만, 반대로 너무 고난이 없어서 삶이 지루하고 공허해서 죽기도 합니다. 완벽한 복지제도가 있는 선진국이 오히려 자살률이 높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로 예를 들어 봐도 같은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맛이 언제 가장 좋을까요? 섭씨 13도 정도라고 합니다. 너무 더워도 너무 차도 좋지 않습니다. 마시기도 힘들고 물맛도 덜합니다. 적당하게 차가울 때 물맛이 최고라는 겁니다. 인생도 적당한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고난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이 잘 안 되시나요? 정말로 이 말씀은 “아멘!”입니다! 우리 인생길에 나름대로 다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이 이 정도 고난 주시는 것 오히려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바른 길 :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
하나님이 인도하신 홍해 광야 길은 ‘바른 길’입니다. 그 길은 가나안 땅을 분명한 목적지로 삼고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편한 길이나 ‘빠른 길’을 좋아하는데, 사실은 ‘바른 길’이 정말 좋은 길입니다. 빠른 길이 무조건 바른 길은 아닙니다. 아무리 빠르고 편해도 바른 길이 아니면 갈 수 없습니다. 아니, 가면 큰일 납니다. 때때로 운전하면서 길을 가다 보면 이런 경험을 종종하게 됩니다. 내가 가고 있는 쪽으로 길이 밀립니다. 어떤 때는 꼼짝도 못하고 한 시간을 서 있는 경우도 있고, 엉금엉금 기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짜증납니다. 약속 시간이라도 있으면 안절부절 못 합니다. 그런데 반대편을 보니까 차가 거의 없으면, 재빨리 U턴해서 가면 되나요? 절대 안 되죠. 막혀도 늦어도 그냥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만일 블레셋 길로 가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전쟁이 나서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름대로 발달된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이 가득한 우상 문화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생도 했지만 한편으로 애굽의 세속적인 우상 문화에 절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해 놓고 사는 것을 보면 눈이 뒤집힙니다. 다시 유혹을 받고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행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습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의 길은 얼른 보면 가나안 땅을 가는 가장 빠른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합니다. 중간에 주저앉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마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은 넓은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 길은 목적지가 틀립니다. 멸망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길이 좁고 험한 길이지만 그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좁은 길이라도 고달픈 길이라도 가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괴로운 일이 왜 없겠습니까? 핍박이 왜 없겠습니까? 외로움과 고독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 길이 바른 길이기에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가야 됩니다.
본문을 보면 특별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9절 보시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죠? ‘요셉의 유골’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갖고 갑니다. 옛적에 요셉이 임종 시에 유언을 합니다.(창50:24~25 참조) 어떤 유언이죠? 언젠가 하나님이 약속대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출애굽의 역사를 허락하실 텐데, 그때가 되면 유골을 꼭 가져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유골은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었나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반드시 들어간다는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로 가면 반드시 가나안 땅에 도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한눈팔지 말고 묵묵히 가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화려한 것, 안락한 것, 즐거운 것 등 유혹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편하다고 빠르다고 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천국 길로 가야 합니다. 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찰스 콜슨(Charles Colson 1931~ )을 아시나요? 그는 아이비리그 명문 브라운대를 졸업하고,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법학박사를 받은 엘리트입니다. 닉슨 대통령 보좌관으로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출세 가도를 달린 겁니다. 그런데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구속 수감됩니다. 재판 과정 중에 그는 친구의 전도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화려한 길을 달려왔지만 인생을 잘못 살았음을 깨닫게 된 겁니다. 만일 계속 그 길로 갔더라면 그 종착지는 멸망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정직하게 고백하고 복역합니다. 출소 후에는 완전히 인생길을 바꿉니다. 교도소 선교회를 창설하고, 기독교 저술가 겸 연설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다 1993년에는 종교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는 빠른 길을 접고 바른 길을 택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빠르고 화려한 세상 길보다 느리고 힘들어도 천국 길로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3] 복된 길 :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길
홍해 광야 길은 멀고 험한 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복된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누가 지나가도 모래 바람 한 번 불면 흔적조차 남지 않습니다.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릅니다.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 밤에는 살인적인 추위가 있습니다. 맹수의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동행하시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승리의 길이요 복된 길입니다.
본문 21절~22절을 봅니다.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 하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둘로 생각하기 쉬운데, 본래는 하나입니다. 구름기둥이 밤에는 야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분명 그들과 함께 해 주신다는 증표입니다. 요즘 내비게이션이 나와서 편리한데, 사실은 구름기둥 불기둥이 ‘원조 내비게이션’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길로 나아갔지만 막막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결코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불순종해서 문제이지, 순종만 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승리케 하신 분은 ‘시속 4 km/h의 하나님’이라고. 보통 사람들의 걸음으로 한 시간에 4 km 가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없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길을 가르쳐 준다는 겁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님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내주(內住)하십니다. 내주하시면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시고 깨달음을 주십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기도할 때 성령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확신이 바로 성령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욕심에 미혹되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할 뿐이지,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밤중에 시골길을 운전하며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지 앞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안했지만, 가만히 보니까 옆에 차선이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희미하지만 저 멀리 앞에 가는 자동차의 미등 불빛이 보이는 겁니다. 아무리 어둡고 희미해도 이 두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래서 차선을 보면서 불빛을 보면서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 길에도 말씀과 성령의 확실한 인도가 있기에 우리는 방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인생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장애물이 있어도 거뜬히 돌파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홍해를 건넌 기적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다보니까 홍해 바다가 딱 가로막습니다.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고불고 난리를 칩니다. 모세에게 항의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끌고 나왔느냐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동행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가만히 있어 보라! 하나님이 하신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큰 동풍이 불어와 바닷물이 벽처럼 양쪽으로 갈라섭니다. 그래서 마치 육지처럼 통과합니다. 출14: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이 멀고 험한 것 같아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해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절대 보호의 축복이 있습니다.
사43:1~2 “1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래서 결국 이런 고난 저런 고난 많은 것 같지만 지나 놓고 보면 결국 승리를 주십니다!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세상의 지름길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진정한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직해 보여도 하나님의 지름길 찾아가십시오. 멀어도 느려도 험해도 하나님의 지름길로 가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이 안전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천국 가는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승리하는 복된 길로 인도해 해실 줄로 믿습니다. 부디 한눈팔지 말고 하나님의 지름길로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구름
출 13: 17-22
아랍인 Ali Hafed는 자기 집 앞마당에 Diamond 밭을 두고 부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
Hafed의 농장을 산 이가 Hafed가 가축들에게 물을 먹이던 시냇가에서 이상하게 생긴 조약돌을 발견했다.
그것이 Diamond였다.
그곳이 세계적인 Diamond 광산인 Persia의 Golconda 광산이었다.
거기서 유럽 대부분의 왕관에 박인 Diamond가 나왔다.
오늘날 우리는 구름을 시의 한 구절을 연상할 정도로 무시한다.
그러나 그 구름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고 보호했다.
구름이 가진 특성과 신구역 성경에 58회나 언급되었기 때문에 다이아몬드를 무시하고 다른 곳에서 부를 찾던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아야 한다.
이스라엘 출애굽시 구름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처음 나타났다.
애굽 군대의 추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광야길로 인도하기 위해 구름이 나타났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13:21-22)
모세5경, 솔로몬 성전 봉헌식, 예수님의 변화산상, 승천 시에도 구름이 덮였다.
이 같은 구름이 주는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I. 독특하고 진기한 현상 (A unique phenomenon)이다
광야의 구름은 우리가 늘 보는 구름과는 다른 것이다.
히브리 말로는 단지 구름이라는 말 밖에 다른 표현을 할 수 없었다.
버섯구름(mushroom cloud)도 실은 구름이 아니다.
출애굽한 첫날부터 앞서 인도하던 구름기둥 같은 것이 추격하는 애굽 군대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백성들 뒤로 옮겨졌다(출14:19-20)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처럼 보였다.
홍해를 건넌 후에는 구름기둥이 백성들 앞에서 인도했다(출40:36-38)
홍해를 건너던 밤엔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진영 뒤에 있어 애굽인들은 흑암으로 뒤덮였고 이스라엘은 불기둥으로 비췸을 받으매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에게 가까이 하지 못했다.
선례(先例)가 없는 이 미증유의 현상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 광휘 또는 구름이라 불렀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간섭하시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II. 하나님의 보호하심
구름이나 기적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구름은 그들을 인간의 적이었던 바로와 애굽군대로부터 보호해 주었고 사막의 자연적 기후의 위험에서 보호해 주었다.
200만이 넘는 노예들이 35도가 넘는 열도의 광야로 행진하고 밤에는 영하의 추위에 떨어야했다.
안내자, 피할 그늘, 물이 없는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광야에서 뜨거운 태양 빛에 타 죽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름으로 열사의 태양 빛을 가려주시고 보호하셨다.
밤에는 광야의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따뜻한 불기둥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니`(시105:38-39)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계속적으로 보호하신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오늘도 개인, 가정, 교회, 국가, 민족도 보호하신다.
III. 하나님의 임재하심
1.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을 구름이 보여 주었다
2.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다
가) 율법을 주실 때 시내산에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다 (출19:16-19, 24:16)
나) 모세가 성막 지성소에 들어갈 때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내려 말씀하셨다 (출33:7-11)
다) 하나님께 광야에서 반역할 때 하나님이 구름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진노하셨다 (민12:5-10)
3. 하나님의 임재는 구름의 이동에서도 나타난다
구름기둥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움직였다(민10:33-36)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듯 하나님은 나도 지켜주신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가)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게 된다
나) 하나님께 비밀이 없이 모든 것 털어놓게 된다
다) 성령의 감화로 마음을 청결케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라)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찬양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행하는 성도가 되자
IV. 하나님의 인도하심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임재하시는 상징으로 구름을 보이셨다
2. 실제로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고 절대 복종케 하시려고 훈련도구로 사용하셨다
3.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과 민수기 9장에서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행진했다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은 진쳤다 (10일, 1년)
구름이 떠오르면 다시 구름 따라 행진했다.
해질 무렵 저녁준비 하다가도 떠나야 한다.
구름 없이 나는 가겠노라 하면 그는 죽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싫어했다.
그러나 싫든 좋든 백성은 구름을 따라야 했다.
맺는 말
1. 이스라엘은 구름이 있었으나 우리에겐 성령님이 계신다
성령님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3)
2. 당신이 진정 크리스챤이라면 하나님께 순종할 의지가 있다면 성령님은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3. 성령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4.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 보호하심을 받으면서 인생광야길을 행군해 갈 수 있기를!
성령의 사람, 말씀의 사람되어 홍해를 가르고 마른땅처럼 걸어갈 수 있기를!
《광야로 이끄신 하나님의 본심,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함께 하시다》
: 광야 없는 신앙 길은 없다! by 박동근 목사
출애굽기 13:17-22
1. 고난에 찬, 험난한 길로 인도하신 이유
a. 연약함을 아시고 감당할 시험만 주시는 하나님
17-18절에서 모세는 가나안으로 가는 더 빠르고 편한 지름길을 나두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단하고 험난한 길로 인도하신 이유를 답하고 있습니다. 애굽 북방에서 가나안 남방으로 이르는 지름길은 3-4일 정도면 도달할 길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사는 땅, Gaza를 통하여 가는 지름길.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으로 도착하면 한 달이 소요되는 먼 길, 홍해의 광야길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름길을 나두시고 험난하고 먼 길로 인도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완악성 때문이었습니다. 연약함이란 이들이 전혀 훈련되지 않은 군사로 그들이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훈련되지 않아 잘 훈련된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되면 모두 혼돈 속에 빠지게 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애굽으로 귀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매우 호전적이고 강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칼에 익숙지 않은 노동만 경험했던 손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완악함이란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 잊는 족속이었습니다. 매우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성품을 지녀 조금 어려우면 하나님을 배반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연약하고 완악하여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치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기 보다는 낙심하고 두려움에 차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맞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여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블레셋을 무찔러주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블레셋을 피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초자연적 역사이든 자연의 이치나 사람의 이치를 사용하시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시고 인도하실 때도 있으시나 그분의 지혜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적이 아닌 인간적이고 자연적 이치를 따라 섭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자연적인 것이든 비상적인 것이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일이 성취되니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연약함을 염두에 두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불상사를 막으시기 위해 지름길을 나두시고 먼 길, 험난한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홍해란 장애물을 통해 애굽의 군사를 멸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목적,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여 겸손하게 만들고 열악한 환경에서 하나님만 의지할 분이심을 드러내시려, 아직 가나안 백성들의 죄악이 그 절정에 이르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을 지체시키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세심하게 아십니다. 세월이 흐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으로 용감하게 이방족속들과 전쟁을 치르는 훌륭한 군사로 성장했으나, 아직 훈련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려하시어 그들의 안전을 위한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그 백성들을 세심한 사랑과 관심으로 인도하십니다. 무엇보다 연약한 백성을 연약한 대로 용납하시어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안전히 지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되지 않은 그릇에 무리한 요구를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감당할 만큼 십자가를 지워주십니다. 신앙으로나 군사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연약함 안에서 지울 수 있는 짐을 지우시고 행군의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시어, 그분의 그 큰 지혜와 사랑으로 적절한 십자가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분량만큼 짐을 지우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어려움이 오면 다 이겨낼 만큼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주를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다 뜻이 있어 짐을 지우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견딜만한 힘을 주시고 견딜만한 아픔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러므로 불평 없이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그들의 역사와 인생 속에서 엄청난 일을 겪고 참으로 놀랍고 버거운 여정을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분량을 아시고 적절히 적들을 피해 가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b. 인간의 길, 사람의 길
우리는 이 본문에서 또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길이 옳다고 생각하며, 무엇이든지 빠르고 눈에 보이는 형세들만을 가지고 만사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은 다릅니다. 누가 보아도 3-4일 걸리는 짧은 지름길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돌아가는 길이 험악한 길을 택하셨습니다. 3-4일 걸리는 지름길은 인간에게 편리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들은 그 길을 택했다면, 큰 실패를 맛보고 애굽으로 도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적 성숙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는 연단의 장소, 하나님의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40년의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로 이스라엘이 가지 않았다면, 구속사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40년 동안 많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지름길이 편리한 길일지 몰라도, 하나님께 바른 길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하나님께는 바른 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릅니다. 인간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 7:13).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르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람들은 늘 편한 길, 빠른 길, 눈에 보이는 성과가 많은 길을 택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불편한 길, 인내가 필요한 지루하고 긴 길, 눈에 아무런 성과 없는 광야같이 척박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근시안, 외형만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시적인 안목과 외형 이면의 진정한 가치들을 그 백성이 보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길에만 있는 것입니다.
3. 17절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미 아신 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생각할 때, 출애굽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으신 것처럼, 그 과정과 종결이 오직 하나님께 달렸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출애굽한 백성들은 전혀 훈련되어 있지 않았고, 심성은 몹시 신앙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성도 안에 이런 연약함과 완악함이 존재합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동요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경험한 그 은혜는 작은 바람이 불어도 곧 망각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질병은 배은망덕이었습니다. 은혜를 이야기 하지만, 정작 현실 속에서 어떤 환경과 정황에 직면하면 새파랗게 질려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조금 전 전능한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환경에 떠밀려 사라지고 성도의 시야에는 환경만 가득 차보입니다. 성도들도 이런 상황에서 신뢰도 사랑도 까맣게 잊은 채, 앞에 놓인 장애물을 두려워합니다. 심지어 주신 은총은 잊고 주어진 상황만 원망하다 절망합니다. 그리고 옛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신앙이 아닌 세상을 동경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이고 완악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의 연약함이고 완악함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3)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 14: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나 이 이치가 진리인데,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의 길에 있어 스스로 한 발짝도 시작할 수 없으며, 또 진행할 수도 없고, 스스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구원받은 자들의 길을 지속적으로 이끄시는 길잡이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시작은 하나님께 그러나 과정과 끝은 인간에게라는 사상이야 말로 악하고 무지한 사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인 것입니다. 시작도 과정도 완성도 하나님께서 주도하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러므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고, 떠나가지 않으셔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앞서 가셨고, 2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백성들을 앞서 가시며 떠나가지 않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인간의 눈으로 포착되지 못하고, 그분의 무한한 역사를 인간이 헤아릴 수 없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란 가지적 표적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인도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실재는 그 영광과 능력에 있어 그 가시적 표적에 제한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사막의 뜨겁고 고통스러운 열기를 막아주셨습니다. 밤에는 어둠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참된 길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밤과 낮으로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알려주는 표적 이러한 신적인 위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심을 세키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계시록 10:1 참조.
이었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두 개의 기둥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이 낮에는 태양 빛과 대조되어 어두운 구름으로 나타나고, 밤에는 구름이 불 모양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합니다. 꼭 구름 자체가 아니라 구름처럼 보이는 어떤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피해 지름길을 선회하여 인도하신 곳은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구덩이의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척박한 땅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렘 2:6). 광야의 특징이 있습니다. 광야나 사막엔 길이 없습니다. 그곳은 모래 땅이고 심한 바람이 불어 늘 지형이 바뀝니다. 사막은 길이 없는 땅입니다. 그곳엔 먹을 것, 마실 물도 희귀한 곳입니다. 그리고 맹수와 해충과 도적의 무리 강도의 무리가 도사리는 곳입니다. 연약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땅은 스스로의 힘으로 지날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인도자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이 되어주시고,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곳에서 음식과 물을 제공해주시고, 맹수와 해충과 도적들과 강도들로부터 백성을 지켜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들을 해방하시고 해방한 날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역을 끝마치셨다면, 이스라엘은 광야에 내던져진 고아처럼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고, 소명으로 부르신 이가 소명을 이루도록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앞서 가시고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표적,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였던 것처럼,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함께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죄로부터의 십자가 구원의 모형입니다. 출애굽을 주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로부터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험한 세상에서 죄성과 싸우며 신앙의 길을 걸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하셨 듯, 떠나지 아니하시고 앞서 행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말씀과 성령을 통해 성화시키시고 끝내 부활의 영광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밤낮 보호하고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므로,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나아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성도들에게 낮의 사막의 열기와 밤의 어둠이 엄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시므로 성도들의 마음을 지켜주시고 생명의 길, 복의 길로 성도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위험과 역경 속에서 말씀으로 확신을 주시고 위로를 주셔서 성도로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시험과 혼돈 속에서 말씀으로 무엇이 하나님의 길이고 무엇이 사망의 길인지 분별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성도가 광야 길을 걸을 때, 또 성도가 낮의 열기와 밤의 어둠을 만날 때,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가 길이 없는 땅인 것처럼, 우리 안에는 걸어야 할 길을 우리 안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길이 되시고, 안내자가 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인간은 혼돈과 방황에 접어듭니다. 인생의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을 잃어버리고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표적인 구름 기둥과 불 기둥같은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연약하고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앞서 행하시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기에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숙곳에서 에담으로 또 진일보 합니다. 21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진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심으로 진행하게 하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때로는 생이 고단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무서워질 때가 있습니다. 고단하고 무력한 내 자신을 바라보며 절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떠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우리에게 구름 기둥과 불기둥과 같은 성경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구름 기둥을 보아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 불 기둥을 보아야 합니다. 망막하고 혼돈스러운 상황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를 안전한 길로 정도로 인도하는 성경의 진행을 좇아 우리도 진행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있는 한, 성령은 말씀 안에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므로, 우리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 그들에게 더 이상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없었으나,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구약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으며 이렇게 감사하며 노래했습니다.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21: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121: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121: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작하신 이는 진행하게 하시고 완결되게 하십니다. 즉, 그의 뜻은 성취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도 영원하고 그의 능력도 영원하고 그분의 의지도 영원합니다. 흔들리는 것은 우리이지 그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확고하고 든든한 반석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 중심으로 생활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감정을 말씀에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세상의 낮이 내뿜는 살인적인 열기를 막아주고, 캄캄하여 좌우를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빛이 되고 길이 되어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주야로 받은 말씀을 묵상하므로 붙드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 길을 걷게 되는지를 성도들은 경험해야 합니다. 절대로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그리고 연약하고 완악한 자신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절망하며 답이 없는 세상이라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앞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을 인도 하셨 듯, 하나님 말씀에 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니 정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믿고 순종할 때 알게 됩니다. 단지 사변으로 성경의 진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고 순종함을 통해 더욱 온전히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아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변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알 뿐 아니라 알게 된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