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청두 만불사 석조상 铁器时代 · 成都万佛寺石造像
출처: 고고학 중국 출처: 고고학 중국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 쓰촨성 청두시 서문 밖에 있는 만불사의 고운 모래 바위 조각 불교 조상은 남조 송, 양, 북주, 수, 당 등 역대 연대기 작품을 포함합니다. 쓰촨성 청두시 서문 밖 만불사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청나라 광서 8년(1882) 이래로 계속해서 출토되어 총 200개 이상의 신체가 발견되었으며 대부분이 파손되었습니다. 현재는 주로 쓰촨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국 남조와 쓰촨성 불교 조각 연구에 중요한 물리적 자료입니다.
▲ 쓰촨성 청두시 서문 밖 만불사에서 출토된 남조 배병식 조상 앞면에는 1불 2보살 2제자 2역사 2사자, 앞면에는 2승 2승을 부조하였는데, 양측에는 조각이 없고 뒷면에는 설법과 명문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만불사는 동한(東漢) 연희(延熙) 연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양나라 때 안포사(安浦寺)라 불렸으며, 양무제자(梁武帝子)였던 파양왕(鄱陽王) 소회(萧恢)가 석가상을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은 정중사, 송은 정인사, 명성은 정인사, 죽림사, 만불사, 만복사 등으로 불렸습니다. 명말사는 중건되지 않았습니다. 북송 초 황휴(黃休)가 《익주명화록(益州名畵錄)》을 복저한 바에 따르면, 이 절은 당 무종 회창(會昌) 5년(845)에 폐불(废佛)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 때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출토된 석상은 대부분 머리가 적고 팔이 부러졌거나 몸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유년자는 당 선종 대중 원년(847)에 존승당(尊勝幢)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회창 5년 전에 이 석상이 소실되었음을 설명하고, 그 이후에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 쓰촨성 청두시 서문 밖 만불사에서 출토된 남조 조상비 앞면에는 수미산과 화개(華盖)가 부조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버섯 모양의 수미산이 높게 부조되어 있으며, 수미산 아랫부분은 기둥 모양을 하고 있으며, 반룡을 휘감아 조형물을 소재로 삼은 사례는 많지 않으며, 기존 자료에 따르면 그 소재 변화는 크게 송-량과 북주-당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송원가 2년(427) 정토변조상은 남조기 최초의 사례이지만 이미 해외로 유출되었습니다. 양무제의 연대가 있는 석조상은 총 5점으로 연조상 중 1위를 차지합니다.
▲ 쓰촨성 청두시 만불사에서 출토된 당나라 관음보살 두상의 높이는 41cm. 그중 보통 4년(522) 불제자 강승 석가문 석상 한구의 발원제기(發願題記)에는 '지금 권속들이 항상 편안하고 몸을 사리고 불문법을 흔히 볼 수 있으며, 7대 부모가 일체 유형(有形)을 합친다는 등 진(晋)이 뜻을 같이하여 일찍 성불(成佛)하여 모든 것을 널리 베풀기를 빕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2대 양진(梁陳)은 사신귀불(死身歸佛) 사상이 성행했고, 사재 양무제(梁武帝)는 4번이나 사신입사했습니다. 사신사상이 민간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입니다. 중대통 원년(529) 파양왕세자 조석상과 중대통 5년 상관 □ 광조석상, 대동 3년(537) 후랑 조불상 1구는 모두 석가상입니다
▲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서문 밖 만불사 출토 남조쌍관음조상비(南朝雙觀音造像碑) 높이 120.6·폭 64.3㎝ 중대동(中大同) 3년(548) 조상제기는 '경조관(觀)세보살일(世菩一·몸)□□유신정토□도솔공양불현(兜率供养養佛現)'으로 관세음보살과 도솔정토신앙을 결합한 것으로 매우 이례적입니다.
공양 주상의 소재는 단순하고 북방에서 유행하는 석가 다보, 유마 문수, 교각 미륵보살 등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제량 조형물의 조합은 더 복잡합니다. 보통 4년조상조합은 일립불, 사제자, 사보살, 이천왕이고, 중대동 3년 관세음보살의 협시조합은 사제자, 사보살, 이역사도 있습니다. 이 현상은 같은 기간 중원 지역에서는 보기 드뭅니다.
북주 이후 만불사에서 출토된 석조상은 북주 천화 2년(576), 당 개원 25년(737) 보살상 등 관음보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단일 관음보살상은 일부 하층민의 신앙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 쓰촨성 청두시 서문 밖 만불사 출토 양중대통 원년 불입상 길이 57.9cm
조형 스타일은 제량 석조상으로 네모난 얼굴, 소탈하고 수려한 장식, 여러 개의 주름이 있는 어깨 옷, 오른쪽 어깨 옷이 없는 지역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4년 석가입상은 두광과 몸광에 각각 1~2주 연꽃무늬가 있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감실측 보살은 신발을 신고 신발을 신으며 턱 아래에 수염이 있습니다. 감하각육기악. 감실 뒷면에는 시종들이 옹립한 제후, 침대 장막과 손에 누운 먼지 등을 든 인물 등의 공양군상이 새겨져 있는데, 인물들은 모두 남조에서 유행하던 포의박대식 면복을 입고 있습니다
▲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서문 밖 만불사에서 출토된 당나라 보살좌상의 높이 139cm 복식은 쓰촨(四川)박물관 장무(藏茂)현에서 출토된 남제(南齊) 융밍(永明) 원년(483) '무량수당래(無量壽唐來) 성불(成佛) 2세 존상'으로 북위 효문제 태화 10년(486) 복제 개혁에 앞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대동3년 석가입상은 북조조상의 영향이 커진 것을 반영하고 있는데, 불의를 가슴에 띠를 매고 아랫도리를 불좌 전체에 걸쳐서 북위 말기 용문석굴의 조상과 매우 가깝습니다.
▲ 쓰촨성 청두시 서문 밖 만불사에서 출토된 양보통4년배병식조상은 전면에 일불사보살의 네 제자인 이천왕을 부조하고, 아래 줄에 있는 기락(伎樂)의 보살상 역시 천의(天衣)를 양 어깨에서 내려 복부에 교차시킨 뒤 팔꿈치에 거꾸로 매달아 올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북주 이후의 조형물은 북방의 모던하고 소박한 스타일과 지역 전통을 결합하여 둥글고 풍성한 모양과 우아한 새로운 스타일을 형성했습니다.
▲ 쓰촨성 마오현 동문 밖 비교장댐 중촌마을에서 출토된 난치융밍무량수불조상비는 높이 116.5, 폭 50.8cm로 쓰촨박물관에 당나라 역사상을 소장하고 있으며 상체를 드러내고 가슴에 목줄을 차고 치마를 입고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힘이 있습니다.
또 다른 관장은 관음보살상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머리는 네 가닥으로 땋은 머리에 삼주관을 얹고, 영락은 굵고 화려하며, 허리를 묶은 높은 방좌에 앉아 있고, 좌하에는 연화족답(蓮花足踏)을 두어 전체적인 풍격이 광원의 황택사 대불굴 당나라 조상과 비슷하여 남북의 조형양식의 교류와 융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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