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주님 따르기 더러운 영에 붙잡힌 사람이 회당에 있었다. 그가 회당에 제 발로 들어온 걸 보면 회당은 거룩한 장소가 아니었나 보다. 본래 그것들은 하느님이 계신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위 있는 설교를 듣고 두려워 떨고 큰 소동을 일으켰다. 자기가 지배하고 있는 그 사람을 소리 지르고 넘어지게 만들고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는 도망쳐 버렸다. 저승 것은 이승 것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다. 마귀는 우리를 꼬드겨 자신과 남을 해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죗값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예수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단지 놀라기만 했고 마귀는 그분이 하느님이 보내신 분임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하러 이곳에 오셨는지 잘못 알고 있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 예수님은 세상을 멸망시키러 오신 게 아니라 회복시키고 구원하시러 오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하느님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으니 하느님 마음을 알 턱이 없다. 하느님은 심판하고 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분이다.
21세기에 무슨 마귀 얘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그것의 장난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사이버 공간에서 친구와 지인들을 대놓고 능욕하고 그것을 즐기는 젊은이들, 그것도 명문대생과 청소년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 게다가 그 죄의식도 없다. 학교와 학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나. 문제 푸는 기술만 가르쳤나? 사람 사는 도리는 가르치지 않았나? 인성이나 윤리도 문제 풀이 중 하나 정도였나? 하지만 그 젊은이들을 비난만 할 수 없다. 그들은 부모가, 선생이, 사회가 시키는 대로 했을 테니 말이다. 마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그 영향력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마귀를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쫓아내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길은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거다. 맞서 싸우려고 했다간 그것의 잔꾀에 되레 걸려 넘어진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고, 그분과 우정을 나누고, 그분 말씀에 기꺼이 복종할 때 마귀는 그 더러운 손을 내게 뻗칠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 뒤를 따른다. 자신의 안위를 너무 걱정하지 않고, 설령 그것이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해도 자기가 바라는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거나 일이 잘 안돼도 그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리된 거라고 있는 힘을 다해 믿는다. 그리고 일상의 지루함과 삶이 얹어주는 무게와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잘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른다. 그분을 따름은 그분과 친해짐을 의미한다. 수시로 그분을 찾고 마음속으로 대화하고 필요한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청한다. 그렇게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을 따른다.
예수님, 오늘도 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곳곳에 지뢰가 있고, 여러 샛길이 나타납니다. 안전한 곳으로, 바른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과 더 친해지게 해주시고 그분의 마음속으로 저를 이끌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