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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의 이동(Migration Period, 서기 4세기∼6세기)
인도유럽어족 중에 게르만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총칭하며 오늘날의 스웨덴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 인, 잉글랜드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등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지금은 게르만족들이 역사를 거치며 섞여서 다양한 민족으로 호칭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에서 ‘게르만’이라고 하면 주로 4세기의 민족대이동 이전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원시 게르만 민족을 뜻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부족은 원시 씨족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최근의 연구 성과는 같은 부족으로 묶인 집단도 굉장히 다원화된 구성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부족의 이름은 주로 정치적인 주도권을 지닌 소수 집단에 의해 정해지는 편이었다.
사용 언어와 인종을 기준으로 비교적 넓게 나뉜 민족 개념은 ‘nation’보다는 ‘ethnic group’에 가까우며, 통일 국가와 절대왕정 체제를 이룩한 프랑스와 달리 작은 소국가로 분열이 이어졌던 독일이 게르만어파를 기준으로 ‘ethnic group’ 개념으로서의 게르만 민족을 내세우며 민족 국가의 틀을 잡는 데 이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흔히 게르만족 하면 금발을 떠올리지만, 우리가 자주 접하는 스테레오타입의 금발이나 적발은 오히려 켈트족이나 슬라브족 쪽에 가깝고, 실제로 게르만 인종의 모색은 굉장히 다양하다. 라틴 인과의 혼혈이 일어난 독일어권에서 암갈색이 나타나는 것은 빼더라도 네덜란드에서는 주홍색, 스웨덴에서는 진한 황금색, 노르웨이에서는 은색, 덴마크에서는 잿빛 회색이나 검은색이 나타난다. 즉 애초에 게르만족이라는 것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동일한 씨족 집단이 아니기에 모든 게르만 인이 금발이라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오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게르만 국가들의 경우 전투종족 대체로 체격이 큰 편이다. 남성의 경우 네덜란드의 평균 신장은 183cm,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3국의 평균신장은 181cm. 체중도 상당해서 성인 남성 평균 체중이 90kg에 육박하며. 성인 여성도 평균 167∼170cm에 평균 체중이 70kg 정도로 큼직하다. 하지만 잉글랜드 남성 평균신장은 177cm으로 라틴 족인 프랑스와 비슷하다. 미국과 호주도 백인 남성 평균 신장이 179cm으로 독일 남부와 비슷하다.
영화 등으로 게르만족은 일반적으로 야만인들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도 농경을 중시하는 정주민족이긴 매한가지였다. 다만 기후적, 토양적 요인 탓에 목축과 사냥의 비중이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건 사실이다.
개인차가 있긴 하나, 한국에서는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대체로 질서나 원리 원칙을 크게 강조하는 등 합리적인 걸 좋아하고,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널리 퍼졌다. 결벽증이 심해서 항상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는 고정관념도 있다.
종교는 역사적으로는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에서 개신교가 주류였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독일 남부에선 가톨릭이 주류였다. 대표적 개신교 교파는 북유럽 일대의 루터교회와 영국의 성공회, 감리회가 있으며 이 중 영국계 개신교단들인 성공회 등은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도 진출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도 교세가 크다. 다만 네덜란드 개신교가 19세기 후반부터 감소하고, 동독이 공산화되고, 개신교 측이 소폭 많았던 스위스의 개신교 역시 감소하면서 역사적 개신교 우위 지역은 줄어든 상태이다. 현대에는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모두 가톨릭 비율이 더 높다.
현대의 게르만 국가들을 생각하면 의외라 여겨질 수도 있는데 라틴계 민족들에 비해 게르만계 민족들은 전통적으로 부계 사회 성향이 강한 편이었고 이로 인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중세시대의 상속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살리카법이다. 다만 현대에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부계사회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편이다. 출산율의 경우, 과거에는 남동유럽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1960년대 이후로는 피임약이 빠르게 보급되고 기독교적 가치관이 많이 축소되면서 애들을 잘 안 낳는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만화에서도 이러한 1970년대의 시대상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2010년대에는 크레디트 스위스나 OECD의 조사 결과 때문에 받는 소득은 평등하지만 쌓아놓은 자산을 보면 빈부격차가 매우 심각한 나라들이란 인식도 생겨났다.
독일 지역이 이들의 주 영역이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 게르만족은 전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왔다. 기원전 700년 이전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안과 유틀란드 반도에서만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300년 사이 게르만족은 대거 발트해를 남하하여 발트해 남안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후 남하를 계속하여 켈트족을 몰아내고 중부유럽을 차지하여 정주하게 된다.
기원전 120년 유틀란드 반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 등이 살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로마와 맞닥뜨리게 된다. 로마는 이들이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수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전멸하고 집정관이 연이어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로마는 기원전 105년 무려 12개 군단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명이 전사하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국가적 위기를 맞은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도하에 로마의 사회 체제를 뒤엎는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그런데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곧장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를 유랑하면서 선주민들과 전투를 치르며 전력을 소모하다가 급기야는 분열되고 말았다. 한편 로마군은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직업군인화 되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분열된 게르만족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탈리아로 접근해 오자 로마군은 기원전 102년 마르세유 인근에서 테우토니족을 격퇴했고, 이어 기원전 101년 알프스산맥을 넘어오느라 약화된 킴브리족을 밀라노 인근에서 섬멸했다. 킴브리 족과 테우토니 족은 전멸했고 여자들과 어린이는 자결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용병화되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킴브리 전쟁 참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과의 경계를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확장하기 위해 11개 군단을 투입하여 10여년에 걸친 대규모 게르마니아 정복 사업을 펼친다. 그러나 서기 9년에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면서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게 되고 로마와 게르만족의 국경은 라인강과 도나우 강으로 확정된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에도 게르만족과 로마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국경으로 마주하면서 수시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3세기에는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고트족, 프랑크족, 알레마니족이 로마를 공격하여 로마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 동시에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 조심스러운 교류가 진행되기 시작되어 게르만족은 로마 사회로 조심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범위는 굉장히 넓었고 그 속에 많은 부족들이 있었으므로 로마는 일부 게르만족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다른 일부 게르만족과는 동맹을 맺는 식의 정책을 쓰며 게르만족을 다루었다. 4세기에 들어설 무렵엔 게르만 족과 로마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진척되어 용병으로 당시 이미 상당히 와해되어버린 로마의 국방제도를 메워주기도 하고, 로마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한 변경지대에 대신 이주하여 그 땅을 경작하고 세금을 내기도 했다.
4세기 후반, 동방에서 갑자기 훈족이 나타나자 난리가 나버렸다. 갑자기 동쪽에서 훈족이 나타나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연맹왕국 비스무리한 것까지 형성하면서 게르만족 중 가장 잘나가던 동고트족을 휙 밀어버리자 이들이 서진하면서 주변의 여타 게르만족들을 도미노 쓰러뜨리듯 밀어버렸고, 그 결과 일어난 것이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로 인해 로마의 영토와 유럽, 아프리카 각지에 게르만족들이 각자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대표적인 왕국들은 아래와 같다.
로마는 여러모로 이들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게 잘 먹히지 않은 게, 로마도 인력 부족이라서 이들이라도 받아들여 머릿수를 채워야 했던 안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족째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전사를 군에 편입시켜 계속 인력을 충원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적, 물적 자원은 동로마 지역이 풍부한데 그 지역은 절반 이상이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치 전선에 그게 투입되어야 하는지라. 이때 로마 병사들이나 지휘관들이 게르만족이기 때문에 이들을 막지 않았다는 것은 전형적인 편견이라 하겠다. 실제로는 스틸리코 등의 게르만 혈통의 로마인들은 라틴계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해가며 분투하기도 했다. 애초에 게르만족은 단일 민족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며, 같은 게르만족이라도 전근대 시대에는 같은 부족이 아니면 그냥 남일 정도로 철저한 부족 사회였는데, 당연히 그 내부에서 친(親) 로마파 부족과 반(反) 로마파 부족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일례로, 고트족은 서로 같은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각각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갈리면서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동고트족은 훈족에게 정복당한 뒤로 뒷날 훈 제국이 붕괴된 뒤에 동고트 왕국을 세워 독립하기 전까지 그들과 함께 따라다녔다. 그 결과로 카탈라우눔 전투와 같이 로마 제국의 운명이 걸린 큰 전투에서 같은 고트족끼리 칼끝을 겨누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치와 퇴폐에 빠진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들을 쓰게 되어 차츰 군사력이 저하되어 기강이 빠져 결국 망했다는 것은, “기존의 해석”인 동시에 틀린 해석이다. “최근의 재평가”가 아니다. 수십 년 된 얘기가 최근의 재평가인가?
로마군의 중추를 형성했던 게르만족들은 적어도 4세기까진 대부분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으로서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던 상비군이었고, 게르만족 출신 병사들과 장교들은 전반적으로 로마에 대단한 충성을 바쳤다. 용병이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건 로마 제국의 재정이 엄청나게 취약해져 로마군 중 부족 단위로 편제되어 싸우는 단위들이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지, 게르만족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제국에 인력을 공급해주고 제국을 경모했던 게르만족이 아니었더라면, 제국의 서부 경계는 이미 3세기에 붕괴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라틴족으로 구성된 군단병들이 라틴족에서 게르만족으로 변화되면서 엄격한 기강과 국가에 충성을 보이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는 건 “전통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냥 “틀린 얘기”다. 군단병의 구성 다수가 “이탈리아인”이 아니게 된 시기는 이미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부족 단위로 고용되는 게르만족이 무시할 수 없게 통제 불가능이 되는 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에서부터 일이다.
후기 로마군의 전술 변화는 게르만 족이 로마군의 주력취급을 받으면서 로마 인들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보이기가 어려운 게 결코 아니라, 역으로 “로마군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게르만 족이 보여줬고, 이에 대한 대응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게르만 족이 야만적이고 무식해서가 아니다.
사치에 퇴폐에 빠져 서로마가 게르만 족 용병들을 쓰다가 무너졌다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오류로, 역사와는 무관한 얘기다.
고대 로마 시절에 쓰여진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재미있는 게르만의 풍습이 하나 나오는데, 전사의 키와 힘이 동정을 유지하는 기간에 비례해서 커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일찍 잃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도 했고, 성경험이 늦을수록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들 사이에서는 가장 오래 동정을 지킨 자가 가장 큰 칭찬을 받았다. 토이토부르크 승리의 비결 대마법사, 대현자 무적의 동자공 연성
8세기와 11세기 사이에는 북유럽에서 온 게르만 족인 노르드인(바이킹)들이 전 유럽을 휘저었다.
잉글랜드에선 바이킹들이 지배시기인 데인로(Danelaw)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에는 바이킹 지배가 두 번 있었는데, 9세기에는 웨식스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바이킹에게 정복당하고, 11세기에는 크누트 대왕이 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덴마크, 노르웨이와 합하여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을 세웠다. 이 시기 영어는 같은 게르만계 언어라는 동질성 때문에 북게르만어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북게르만계 어휘가 영어에 남아있다.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롤로가 북쪽 해안에 정착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이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프랑스의 문화를 받아들여 프랑스화하였고, 노르만족이라 불렸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를 정복하는데, 노르만족까지 바이킹으로 친다면 잉글랜드는 총 3번에 걸쳐 바이킹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노르만 족 정복자인 로베르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에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더 나아가 노르만 족 기사들은 십자군 전쟁 때 안티오키아 공국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동쪽으로 간 바이킹들은 우크라이나 일대를 정복하였고, 정복자 류리크의 후손들은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바이킹들은 더 남하하여 동로마 제국에서 바랑인 친위대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노르망디 공국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에는 앵글로색슨족 출신 바랑인 친위대도 늘어났다.
옛날에는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있었지만, 후대에 프랑크 왕국 등 통일 국가가 생기면서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먼 타지에 왕국을 따로 차린 경우 현지인들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래도 프랑크 왕국과 독일 왕국에선 부족 공국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언어나 지명 측면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게르만 부족들은 아래를 들 수 있다.
중세가 끝나고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독일 북부,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서유럽 북부, 북유럽의 게르만 국가들이 각각 개신교 교파들을 국교 혹은 그에 준하는 문화적 기반으로 삼게 되었고 이후에도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게 되면서 (북부)게르만족 = 개신교라는 인식도 생기게 되었다. 한편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독일의 바이에른 주, 벨기에, 스위스의 아펜첼이너로덴 주 같은 경우 국왕이나 영주가 종교개혁 세력과 반목한 역사적 이유 등으로 인해 가톨릭이 주류인 편이다. 물론 현재는 유럽의 전체적인 추세가 그렇듯 세속화가 많이 진행된 데다가 전통적인 개신교 다수 지역인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비율이 역전되어 종교로 스테레오 타입을 적용하긴 여러모로 난점이 많다. 그러나 문화적인 부분에서는 여전히 구별이 가능한데, 개신교가 주류였던 지역은 전통의상이나 요리 등이 가톨릭 지역보다 대개 간소한 편이다.
‘German’이라는 영어 표기 때문에 게르만 족을 ‘독일 민족’과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영어가 국제 공용어로 되면서 이 오해는 거의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로는 독일(German)과 구분하여 게르만 족을 Germanic이라 부른다.
만약 영어로 독일이 ‘Germany’가 아닌 ‘Teutony’나 ‘Teutonland’였다면 이런 오해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 표현과는 별개로 “게르만 족은 원래 현대의 독일 지역에서 살았으니 독일이 게르만 족을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위에서 서술했듯 원래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트 반도에서 기원하였다. 굳이 출신 지역으로 따지자면 북유럽의 노르드인들이 원조 게르만족에 가깝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일인들의 경우 게르만족 혈통만 있는 게 아니다. 게르만족 남하 이전에는 켈트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현 독일 중남부 지역은 로마의 라틴족도 많이 진출하였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또는 민족 대이동(民族大移動, 영어: Migration Period 또는 Barbarian Invasions, 독일어: Völkerwanderung)은 4세기경부터 6세기경에 걸쳐 게르만 민족 및 관련 여러 민족이 서유럽·남유럽 방면에 이동한 사실을 말하는데, 넓게는 노르만인의 이동도 포함시켜 11세기경까지를 보는 경우도 있다. 이동의 원인으로서는 일반적으로 인구의 증가, 경지의 부족, 타민족의 압박 등을 들고 있으나, 구체적인 대이동의 계기는 훈족의 서진(西進)이며, 게르만 여러 족속은 보다 좋은 기후와 비옥한 땅을 찾아서 당시 방위력이 약화되었던 로마 제국으로 대거 침입했다.
게르만 민족의 일부(수에비족 등)는 일찍이 기원전 2세기 말 부터 로마 영내에 침입하였는데,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로마의 장성(長城, 리메스)이나 방위군단에 저지되어 라인 강의 선에서 제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트족 등은 2세기 후반에 흑해(黑海) 연안 방면에 진출하고 있었으며, 라인 강 방면에서도 게르만인은 용병이나 콜로누스(토지를 가진 소작인)로서 영내에 조금씩 침입해 들어갔다.
침입한 게르만 민족은 동게르만·서게르만·북게르만 민족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동게르만 민족에는 반달족·부르군트족·고트족 등이 있으며, 훈족 이동의 영향을 받아서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아프리카 등의 여러 지방으로 이동했는데, 거의 대부분은 그 곳 민족과 동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앵글로 색슨족과 롬바르드족·프랑크족 등이 서게르만 민족으로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각지에서 건국했다. 북게르만 민족은 소위 노르만인으로서 10세기 이후에 남하했다. 유럽 각지에 침입한 게르만인의 수는 로마인 등 원주민의 약 3% 이하의 소수였다. 이 때문에 이주한 곳의 원주민에게 문화적으로 동화한다든지 가톨릭 교회와 대립한다든지 하여, 단명(短命)으로 끝나는 부족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 이동의 대세로서는 프랑크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 정교를 신봉하는 동로마제국에 대항하여 가톨릭교회와 제휴하는 중세 서유럽 세계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25. 훈족의 이동(Migration of Barbarian, 4세기∼6세기)
훈족의 확실한 정체를 알기는 매우 힘들다. 우선 훈족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로마인들 및 게르만인들의 기록에 의존해야 한다. 게다가 이동하면서 임시거처를 설치하고 철거하길 반복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훈족들이 세운 유적이라든지 문화적 흔적도 후대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후대에 알려진 훈족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게르만어인데, 이것은 훈족이 빠르게 게르만식 이름을 차용했기 때문으로 아틸라의 궁정에서도 고트어가 통용되었다.
훈족이 게르만 지도층으로 편입되었고, 이들을 부르는 통일된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이들 훈족이 게르만식으로 표현된 이름을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훈족의 왕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아틸라는 게르만식 이름이 아니며 이는 훈족 지도층들은 그들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이라서 언어를 통해서 훈족의 기원을 추정하는 것도 현재로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훈족의 계통에 관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주장은 흉노와의 관계다. 이 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훈족과 흉노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이론이다. 처음에는 둘 모두 유라시아 북부에서 활동한 기마문화권이라는 피상적인 이유에서 제기되었던 이론인데,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에는 소수설이 아니고 정황상의 근거들도 많은 상태.
다음은 흉노가 어떤 형태로든(혈통적 연관이든, 문화적 동질감이든, 정치적 계승이든) 훈과 관련이 있다는 설의 근거들이다.
• 최소한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선,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입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313년, 소그드 상인은 간수 회랑에서 사마르칸트로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의 남흉노 집단을 훈(Xwn)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이름은 유럽의 훈(Hun)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흉노(ʿχiʷongʿnuo)와 연관이 있을까? 이 연관성에 대해 중국어 음운학자들은 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흉노가 중앙아시아에 출연한 이후 언제나 이와 같이 불렸기에 다른 기원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대 소그드의 편지 이외에도, 둔황의 월지인인 축법호Dharmarakṣa는 280년에 『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Tathāgataguhya-sūtra)』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하며, 흉노를 후나Hūṇa로 옮겼으며(산스크리트어 판본은 현존하지 않으나, 티베트어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Hu-na라 적혀있다), 308년 번역한 『보요경(普曜經), Lalitavistara』에서도 똑같이 옮겼다(산스크리트어 판본이 현존하고 있다).
• 흉노는 튀르크계 언어를 썼으며, 훈족 또한 튀르크계 언어를 썼다. (튀르크어와 몽골어에 비슷한 단어가 있는 것은 언어동조대일 가능성이 높다) (어족의 일치는 곧 같은 계통의 민족임을 뜻한다). 유럽 사서에 남아있는 훈의 왕족의 이름은 튀르크 계통의 언어(아틸라 등), 아랍 지역에 남아있는 훈족 추장의 이름도 튀르크 계통의 언어(카프간 등)이다.
• 흉노와 훈은 중국과 유럽의 기록에서 동일한 민족으로 교차검증이 되는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 표시된 훈족의 거주 지역과 중국의 위서를 비롯한 역사서에서 언급하는 흉노의 출현 지역이 상당부분 일치한다. 소그드인(고대 실크로드를 지배하고 장사하던 이란계 민족)이 북위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는 “영가의 난(흉노족장 유연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훈족이 낙양을 함락하고 소그드족 상인들을 붙잡았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에 제작된 성(聖)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라틴어 지도에는 ‘후니스키타이’(Huniscite)란 이름이 ‘세레소피둠’(Seresoppidum, Sera Metropolis), 즉 중국의 부근에 기재되었는데, 이 지도는 기원전 7년 8월에 제작된 로마 지도와 아크리프의 세계지도(Orbis Pictus)를 인용 · 참고한 것이다. 이것은 기원전에 유럽인들이 이미 동아시아의 흉노를 훈으로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아래의 반론에서 말하듯, 유목집단이 활동무대가 겹치는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똑같은 이름을 쓰는 두 집단이 똑같은 활동 무대를 가진다면, 그것은 관련성을 결코 쉽게 부정할 수 없다.
• 흉노와 훈족이 남긴 동복(=구리 솥)의 유물 분포를 보면 시대적으로 동유럽 중동 우크라이나 (이때는 흉노가 아닌 스키타이족)-》중앙아시아-》 내몽고 -》 화북 -》서유럽의 순서로 이어진다.하지만 여기엔 이견이 많다. 구리 솥 양식의 일치는 곧 흉노와 훈족이 같은 양식으로 음식을 지어먹을 만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되며, 시대적으로도 흉노에서 훈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훈족이 흉노의 유민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 흉노족과 스키타이의 혼혈이 훈족이라는 DNA 연구 결과가 나와 혈연적인 관계성이 입증되었다.
• 흉노의 지도자는 선우. 선우는 스스로 '하늘의 아들'로 칭했다.흉노 선우가 하늘의 아들이라 칭했듯이, 아틸라도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중). 하늘의 아들이라 칭하는 문화는 몽골 계열 유목 민족 문화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흉노와 훈의 연관성을 알려준다.
• 어족이 일치하고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고 한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같은 민족임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실제 역사에선 같은 계통의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 민족의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같은 어족이라는 증거가 별로 없다.
• 훈족의 거주지역과 흉노의 거주지역이 일치한다고 해서 둘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선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에서 활동했던 유목민족이 한둘도 아니고, 활동지역이 일치한다고 같은 민족이면 역사에 존재했던 오만가지 유목민족 대부분이 다 같은 민족이란 소리다. 당장 중앙아시아 또는 몽골 고원 주위에서 발흥한 수많은 유목민족들도 다 따로 분류하는 판국에...
• 훈족과 흉노랑만 유물과 풍습이 비슷한 게 아니다. 몽골고원에서 우크라이나 평원까지 활동했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정말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이는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중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던 유목민들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지 훈과 흉노의 민족적 공통점을 말해주는 게 아니다.
• 북흉노가 중국 사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시기(기원후 93년)와, 훈족이 로마 제국 사료에서 최초로 언급된 시기(기원후 370년) 사이의 차가 너무 크다. 유라시아 대초원이 광활하긴 하지만 횡단에 있어서 그것도 유목민이 300년이 걸리진 않는다.
• 유럽에 나타난 훈족은 흉노족과 문화적 차이가 많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하나의 선우(=왕)가 있었던 흉노와는 달리 훈족에는 서열이 나뉘는 왕이 여럿 존재했고, 머리를 묶었던 흉노와 달리 훈족은 머리를 묶지 않았다. 하지만 왕에 관한 건 다소 맞지 않다. 훈족이 왕에 서열을 두고 있었듯이 흉노도 선우 밑에 좌도기왕과 우도기왕을 두는 등의 서열이 나뉘는 왕이 분명 존재했다.
정리를 하자면 흉노와 훈의 관계에 관한 정황적 근거들은 꽤 많이 쌓여있는 상태이지만, 결정적이고 확실한 근거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일치성이 존재하는 요소들이 상당수 있으나, 대부분 포괄적인 범주 내에서 일치한다. 즉 아직까지는 '유력한 가설' 정도의 영역이라,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정수일 편저 「실크로드 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렇게 종합해볼 때 동족론이 좀 더 설득력이 있고, 비동족론은 자체의 논리적 모순과 미흡으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동족론이 절대적 논거를 확보한 것은 아니고 비동족론도 전혀 재고의 가치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문헌 연구와 더불어 고고학적 조사를 심화시켜 과학적 고증이 확실할 때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확답을 얻게 될 것이다.
한국사를 예를 들면 옛 고려(고구려)가 멸망하고 몇 백년 뒤 신 고려가 등장했다. 시대가 지나 두 고려의 문화적 차이가 상당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고려가 가진 옛 고려의 계승의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즉 흉노의 한 일파가 서쪽으로 이동하며 주변의 다른 유목민들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혈통의 차이가 생겼고, 문화적 양식 또한 바뀌었지만 그들 자신의 뿌리를 흉노로 여겼기에 자신을 훈족으로 소개했다는 것이다.
4세기 중반 유라시아 대초원 서부에 나타나 흑해 북안의 게르만족들을 격파하고 복속시킨 것이 훈족의 첫 등장이다. 이 당시 로마 제국은 국경 저 멀리에서 야만족들끼리 치고 받는다는 정도로만 사태를 파악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는데, 훈족을 피해 서쪽으로, 남쪽으로 도망친 고트족이 도나우 강 국경에 나타나며 로마에서도 난리가 난다.
4세기에만 해도 훈족이 로마에 미친 영향은 간접적인 것이었다. 4세기 말까지도 훈족의 주력 집단은 카프카스 이북 지역에 남아 있었고, 이들의 무자비한 약탈에 시달리던 게르만족이 로마 국경에 침투하는 것이 로마 입장에서는 더 큰 문제였다.
스틸리코의 부상과 실각, 라다가이수스의 이탈리아 침공,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 히스파니아에서의 로마 지배권 붕괴→재확립→붕괴, 아프리카의 상실 같은 스펙타클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훈족이 로마 세계에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훈족은 로마와 동맹 관계를 맺고 게르만족이나 로마 반역자를 상대로 로마와 합동 전선을 펼친 경우도 있었다. 예외적인 사례로 408년에는 그간 로마의 동맹으로 행동해오던 훈족 왕 울딘이 동맹을 깨고 도나우 강을 건너 침략해온 일이 있었는데, 이후로도 동로마의 비장의 수단으로 자주 활약하는 매수 전략에 울딘의 부하 상당수가 그를 배신하여 제압되었다. 서로마 말기의 실권자 아에티우스는 훈족과의 친분을 십분 이용해 결정적인 순간에 훈족의 지원군을 활용하곤 하였다.
훈족과 로마 사이의 의외로 원만하던 관계는 아틸라의 시대에 끝장났다. 당시 훈족은 몇 세대에 걸쳐 조금씩 서진, 로마 국경 바로 건너편까지 진출해 있었다. 형 블레다와 함께 훈족을 통치했던 아틸라는 즉위 초기에는 근방의 게르만족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으나, 게르만족에 대한 정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자 그 기회를 활용, 440년 말 동로마를 침공했다. 동로마 역시 훈족의 준동을 틀어막기 위해 연공을 두 배로 올리는 조건을 제시한 상태였으나,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이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얼마 안 있어 사소한 트집을 잡아 협정을 깨버린다.
이 당시 동로마가 아프리카 수복 작전을 위해 서로마에 보낸 병력은 상당 부분 발칸 반도 야전군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동로마는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이는 동로마 입장에서도 상당한 타격이었지만, 서로마는 부유한 아프리카 속주를 반달족에게서 탈환할 절호의 기회에 동로마의 지원군이 철군해버렸기에 더욱 뼈아픈 일이었다.
아틸라는 442년까지 발칸 반도 북부의 주요 군사거점들을 여럿 함락했다. 이전 세기 말에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패배를 당한 뒤에도, 요새화된 거점들은 고트족이 공성전을 할 능력이 없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으나,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고트족과는 다르게 공성전에도 능숙했다.
동로마 정부는 442년에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조약은 연공으로 황금 1,400 파운드를 지급하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틸라가 처음에 씹어버린 연공 조건이 700 파운드였으며, 이것이 그전 해의 350 파운드를 두 배로 늘린 조건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3년 만에 연공이 네 배로 늘어난 것이다. 또한 로마는 훈족 사이의 내분에서 패배하여 로마로 망명해있던 훈족의 망명자들을 다시 훈족에 인도하기도 했다.
물론 로마가 아틸라에게 계속 굽히고 있을 계획은 아니었다. 동로마는 시칠리아까지 진출해 있던 아프리카 원정군이 복귀한 직후인 443년 즈음부터 훈족에 대한 연공 지급을 중단해버린다. 때마침 444년 혹은 445년에 형이자 공동지배자인 블레다가 사망하고 아틸라가 단독 통치자 자리에 오르자 훈족 내부의 정치 상황이 어수선해졌고, 이 시기에 동로마는 반격을 준비했다.
447년 동로마와 아틸라의 훈족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아틸라는 이 전쟁에서 압승을 거뒀고, 그리스 남부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발칸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 이 시기에 로마령 발칸 반도가 입은 타격은 참혹한 수준으로, 유적 발굴 사례를 보면 고트 전쟁에서 회복했던 도시가 아틸라 전쟁 시기에 완전히 파괴된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궁지에 몰린 동로마는 이전까지 지급을 거부한 연공을 포함해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동로마는 449년에 아틸라의 측근을 매수해 아틸라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돈을 먹은 아틸라의 측근이 곧바로 아틸라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치며 계획이 들통났다. 아틸라는 영악하게도 로마가 암살자들에게 지급하려고 보낸 금을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내며, 황제 접견실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째서 명예로운 가문의 후계자가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가?’라고 조롱했다.
동로마로부터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뜯어낸 아틸라는 공격의 방향을 서로마로 돌린다. 아틸라는 서로마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얻기위해 서로마를 침공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보낸 청혼(이 여자가 딱히 정치적인 수를 쓴 게 아니라, 스캔들 때문에 유폐되자 그냥 막 질러본 미친 짓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과 둘째, 게르만족을 상대로 훈족의 지배력이 유지되려면 군사적 위용을 보이면서 동시에 게르만족 귀족층에 정복의 성과를 분배하는 채찍과 당근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도나우 유역의 무덤을 발굴해보면 훈족 귀족층과 훈족에 예속된 게르만족 최상층의 귀족에서 대량의 부장품이 나오곤 하는데, 이것은 대부분 당시 로마에게 삥 뜯거나 약탈해온 금으로, 훈족이 전쟁으로 얻은 부를 (상당히 불균등하게나마) 재분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당시의 아틸라는 몇 년간 동로마를 털어먹으면서 발칸을 초토화시킨 결과 더 이상 약탈을 하기에도 마땅찮았고, 더 궁지에 몰린 동로마가 사생결단으로 나올 시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로마가 비록 아틸라와 벌인 두 차례(440, 447) 전쟁에서 참패하긴 했으나, 동로마의 주력군은 언제나 페르시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음을 동로마 측도, 아틸라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털어먹을 수 있는 게르만족은 거의 다 털어먹고 예속시켰으며, 아틸라 역시 즉위 초기에는 여러 게르만 부족을 공격한 바 있었다. 즉 아틸라는 본인의 권력 유지와 훈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야 했던 상황에서, 서로마를 제외하면 더 이상 공격할 대상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을 인용하자면, 아틸라의 훈족은 '패배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전쟁기계'였다.
하지만 갈리아를 침공한 훈족은 카탈라우눔 전투(451)에서 서로마군에게 저지 당하고, 이듬해 개시한 이탈리아 침공은 야전에서는 패배하지 않았으나 보급난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교황의 중재를 받아들여 철수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아틸라는 새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식의 첫날 밤에 의문사하는데, 사망 원인은 암살, 복상사, 과음 등 참으로 다양한 설들이 제시된다.
비록 두 번의 서로마 원정에서 실패했다곤 해도, 아틸라는 뛰어난 장악력과 군사적 능력을 갖춘, 불안한 구조의 훈족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후 세 아들 엘라크, 뎅기지크, 에르나크가 왕위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는데, 이 틈을 타 게피다이족이 훈족에게 반기를 들자 엘라크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전사했다.
처절한 전투 끝에 게피다이족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다른 게르만 부족들도 반란을 일으키며 훈족의 게르만 지배는 무너져갔다.
훈족 지배하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한 정도에 따라 독자세력화에 걸린 시간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로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킨 게피다이족은 세력을 결집한 데 걸린 시간으로 보아 훈족 통치하에서도 나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오도아케르의 출신 부족으로 유명한 스키리족의 경우 독립 과정에서 내세운 왕이 스키리족 혈통조차 아니었던 것으로 보아 아틸라 사후의 혼란기에 내부를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헝가리 지역의 상황은 훈족 잔당과 아직까지 독립하지 못한 게르만족 + 독립한 여러 게르만족이 투쟁을 벌이고, 독립을 얻은, 혹은 시도하는 게르만족 내에서도 대대적인 정치적 격변이 벌어지는 난세 그 자체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자세하게 남지 않아 완벽한 전말은 알 수 없다.
아틸라의 살아남은 두 아들 뎅기지크, 에르나크가 이끄는 훈족 잔당은 한동안 여전히 일정 수준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떨어져나간 게르만족들과 치고받고 싸웠지만, 패권을 잡은 동고트족에게 참패한 끝에 동로마 영토로 도망쳤다. 이들은 훈족이 전성기에 동로마와 맺은 조약을 근거로 교역권 등을 요구했으나 동로마는 이를 거부했다.
뎅기지크는 469년에 끝내 동로마군과 충돌한 끝에 대패하여 목숨을 잃었고 에르나크는 다뉴브 강변에 정착하여 로마가 제공한 작은 영토에서 조용히 살았다는 것이 마지막 기록으로, 이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남은 기록이 없다. 이렇게 허망하게 훈족 제국이 멸망한 것이다.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서의 훈족은 소멸했지만, 그 밑 복속된 유목 민족들이 완전히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서방으로 파견된 동로마군의 일원으로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받았다.
확실친 않지만 훈족 멸망 후에 나뉘었다고 추정되는 반 유목민 불가르족 중 하나인 우티구르족이 동로마 영토에 이주하여 그 불가리아인들을 혈연적으로 남아있는 훈족의 후예라고 볼 수도 있다만 직계라고 보긴 힘들며 문화적 언어적 관련성도 그다지 나타나질 않는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인들은 독일 제국군을 훈족이라 불렀다. 구체적으로는, 대전 초기에 독일 제국군이 슐리펜 계획의 일환으로 당시의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를 침공했는데 예상 외로 벨기에군이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독일 제국군의 피해가 컸고 점령했던 벨기에의 도시 루뱅에서 정체모를 우발적인 총격으로 독일 제국군 소부대가 전멸하자 벨기에의 민간인들이 게릴라 전투을 펼친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과 노동력에 대한 강제 징용을 종전까지 시행했고, 이 사건을 들은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프로파간다의 소재로 써먹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영국은 본래 참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독일이 벨기에를 침략하고 전범 행위를 저지른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망설임 없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 독일이 벨기에 침공을 개시한 게 8월 3일이고 그 다음 날인 8월 4일에 영국도 바로 참전했기 때문에 아직 국경 요새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독일군이 전쟁범죄를 저지를 수도 없고, 영국이 그 소식을 들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물론 영국 의회가 참전을 반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가 독일의 벨기에 침공 때문에 참전한 건 맞지만, 벨기에에 독립보장을 해놓은 이상 참전하지 않으면 자국의 외교적 위신이 추락하기 때문에 참전한 것이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전범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연합군에 유리한 도덕적 명분을 부여하여, 몇 년 후 미국이 대전에 참전하면서 역시 프로파간다로 활용하여 훈족을 쳐부수자!의 포스터로 수많은 청년층의 자원입대를 유도한다.
정작 독일의 민족인 게르만족이 훈족에게 쫓겨서 유럽으로 왔다는 것을 연상하면 묘하다. 1900년에 빌헬름 2세가 의화단의 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으로 원정 나가려던 병사들에게 ‘아틸라의 훈족처럼 악귀같이 싸워라’라는 연설을 했던 것이 기원으로 보인다. 헬싱에서 월터 쿰 도르네즈가 나치 잔당들을 훈족이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인들은 독일 영토까지 반격해온 소련군을 보고 훈족의 재림이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