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율맥은 백제의 겸익으로부터 시작되어, 신라의 자장, 도선, 진표 등에 의해 흥성하였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그 맥이 쇠잔하였으나, 대은낭오 율사가 하동 칠불암에서 기도하며 이른바 ‘서상수계’하여 그 맥이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이 율맥은 금담보명, 초의의순, 범해각안, 재산정원으로 이어졌고, 다시 남해 용문사의 호은문성, 금해관영, 만암종헌, 묵담성우, 혜은법홍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를 해동율맥(海東律脈)이라 부르는데, 혜은법홍 율사로부터 율맥은 전수받은 이가 현재 전남 담양 용화사(龍華寺)에 주석하고 있는 제11대 율사 도월 수진(道月守眞, 1948~)이다. 수진율사 친견을 시작으로 '이학종의 발초참현'을 갑오년 새 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묵담 율사의 율맥을 이은 담양 용화사 수진 스님.
범계자 속출하는 수상한 시절, 해동율맥의 적자가 그리운 까닭은?
시절이 하 수상하여 승단에 범계자가 즐비하고, 온갖 추문이 승단은 물론 한국불교 전체를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아넣고 있으나, 그 책임 있는 당사자들은 가히 담판한을 무색하게 하고, 마땅히 이를 바로잡아야 할 승가는 자정의 동력을 잃어 수렁으로 빠져드는 불법을 방치하고 있던 차에, 담양에 해동율맥의 적자(대은낭오 해동율맥의 제11대 율사)가 주석하며 스스로 청정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적통 율사의 면모를 반드시 함은 물론, 율맥을 이어나갈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지섣달 좋은 날 홀연히 담양으로 달려갔다. 담양(潭陽). 햇볕을 담은 못과 같은 고을. 한 겨울의 볕인데도 담양은 포근했다. 태양으로부터 전해져온 빛을 온전히 모아 빛의 못을 이룬 고을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싶다. 담양의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에 당도하니, 아담한 사격의 청정가람이 눈앞에 펼쳐진다. 묵담 율사가 산문을 열고, 그의 율맥을 이은 손상좌 수진 율사가 중창을 한 절 용화사는 말 그대로 십선계를 닦으며 미륵부처님의 용화세계를 발원하는 율도량이었다. 율사, 계율도량이라고 하면 흔히 독신종단을 대표하는 조계종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수진 율사는 태고종 소속의 승려이다. 우리가 익히 취처종단으로 알고 있는 태고종에 해동율맥을 이은 청정비구 승려가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거니와,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성년이 되어 스님이 된 제자들 또한 하나 같이 스승을 따라 청정비구로 계율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실 기자의 발길을 담양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수진 율사의 마음에는 늘 묵담 노스님의 향훈이 맴돌고 있는 듯 했다.
묵담율사의 원력이 서린 담양 용화사에 묵담의 화신이…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일주문이 사격에 비해 거대해보였지만, 미륵의 용화세계를 대비하여 사찰이 더욱 흥성해질 때를 대비한 것이라면 결코 허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용화사를 창건한 노스님인 묵담 율사의 유지를 받들어 도량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미륵부처님이 조성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는 해동율맥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율맥의 흐름을 밝힌 석비(石碑)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서 있다. 초조대장경 1권 등 보물 한 점을 포함하여 묵담 스님이 남긴 진귀한 유물을 전시해놓은 전시관과 쌍봉사 진감국사의 사리탑을 본떠 조성한 묵담 율사의 부도가 눈길을 끌고 있다. 용화사는 묵담 스님이 창건한 절이기도 했지만, 수진 스님은 이곳에서 묵담 스님과의 인연으로 출가하여 그 슬하에서 시봉하며 살며, 묵담 스님의 삶 그 자체를 보면서 율을 공부하고 익혔다. 이를 입증이나 하듯이 묵담 스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잘 보관하고 있는 모습은 노스님의 율맥을 굳건히 이어가겠다는 수진 율사의 다짐에 다름 아니었다. 수진 율사는 대담을 나누기에 앞서 묵담 율사의 동상과 율맥의 전승을 기리는 비 앞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묵담 율사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이내 촉촉해졌다. 스승에 대한 그리움, 고마움, 그리고 율맥을 굳건히 이어가리라는 서원이 동시에 밀려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진 스님에게서는 대나무 냄새가 났다. 대나무의 특산지 담양에 주석한 것도 이유이겠으나, 대나무처럼 곧게 흐트러짐 없이 살아온 지계의 향일 터였다. 수진 스님은 먼저 해동율맥을 이은 자신이 조계종이 아닌 태고종 소속 승려라는 것에 대한 연유부터 설명했다. 율사이면서 취처를 허용하는 종단의 소속 승려라는 이율배반적 현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긴 듯 보였다. 그러나 해동율맥을 이은 만암 스님이나 묵담 스님 등이 이른바 비구·대처 분규(조계종에서는 ‘정화’라고 부름) 과정에서 대처승 쪽에 설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잘 알고 있는 터라, 자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는 기자의 말에 스님은 겸연쩍은 미소로 화제를 돌렸다. 다만 당시 만암·묵담스님의 뜻을 따라 점진적으로 비구·대처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오늘날 한국불교가 겪는 것과 같은 혼란이나 문제는 없었을 것이라며, 못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태고종은 태고종대로, 조계종은 조계종대로 상처를 입고 한국불교는 분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수진 스님은 분규가 물리적 완력으로 마무리되면서, 조계종은 네 가지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그 첫째가 한국불교의 전통가사인 홍(紅)가사, 둘째가 종조(태고보우), 셋째가 무형문화재(영산작법, 단청, 탱화 등), 넷째가 율맥이라는 것이다. 절 뺏기에 총력을 기울이다보니 미처 이 네 가지를 챙기지 못함으로써, 조계종은 비록 대부분의 절을 차지했지만 전통 종단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예리한’ 지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조계종은 가사의 색도 양명하지 못하고, 종조 문제가 여전히 어정쩡하며, 불교의식에도 한계를 보이고 있고, 율맥에서도 당당할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용화사 경내에는 해동계맥을 이은 묵담 율사(사진 왼쪽)의 동상과 해동율맥의 계맥을 총 정리해놓은 비(사진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태고종 종도지만 정화의 당위성은 인정…그러나 그 방법은 틀렸다
“내 생각에도 당시 정화는 있어야 했다고 봅니다. 당시 큰스님들이었던 만암, 묵담 스님도 다 정화에 동조를 했던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방법론에서 차이가 난 것이지요. 만암·묵담 스님들께서는 정화를 하는 기간을 30년, 즉 한 세대 정도로 보셨습니다. 30년 지나 1980년대가 되면 자연스럽게 교단의 정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신 것입니다. 당시 만암·묵담 스님께서 제시한 정화의 큰 뼈대는 ‘상좌는 비구승에만 두도록 하고, 행정이나 사무는 대처승이 두도록 하자’는 것이었어요. 당시에는 승려의 대부분이 대처승이니까 그런 정화의 방안이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양사의 비구승은 묵담, 만암, 서옹 스님 정도였으니까요. 만암 스님께서는 백양사에서 정법승(비구) 호법승(대처)으로 나눠 예불도 올리셨을 정도로 독신승 제도로의 교단 정화를 염원하셨던 분입니다. 그런 큰스님들의 생각을 상당수 대처승들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과격한 스님들이 이승만의 유시를 등에 업고서 물리력을 동원해 마구 밀어붙이는 것으로 정화를 추진하다 보니, 정화가 아닌 분규가 엄청나게 큰 부작용을 낳으며 일어난 것입니다. 정화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만암·묵담 스님 등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하신 고승들께서는 자연스럽게 대처 쪽에 남게 되신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아무튼 당시 과격한 방법의 정화를 추진한 결과가 어떻습니까. 과연 그분들이 주장한 청정승단이 이루어졌습니까. 결과적으로 비구·대처 싸우면서 불교는 깊은 상처를 입고, 외도(外道)만 키운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수진 스님은 당시의 정황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현재 스님이 소속된 종단(태고종)은 당시 만암·묵담 스님께서 주창한 점진적인 정화의 방법이 여전히 유효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양구(良久), 즉 잠시 말문을 닫았다.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취처를 허용하는 종단에서 독신승으로 살아가는 현실이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수진 스님은 잠시 후 “그렇습니다. 여전히 유효하지요”라고 힘겹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당시 절에서 내쫓긴 스님들이 저마다 사설사암을 만들었고, 사설사암이 중심이 된 종단에서 당시 만암·묵담 스님들이 제시했던 정화의 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출가대중이 독신의 청정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고 불변의 당위라고 잘라 말했다.
용화사 경내에 있는 묵담 율사의 사리탑과 유물전시관. 먹여주고 공부시키고 구경시켜준다는 말에 16세 때 출가
수진 스님은 지난 1966년 16세 때 묵담 스님이 주석했던 전주의 관음사로 출가했다. 전주 출신이어서 묵담 스님이 전주 관음사 계셨을 때 인연을 맺었다. 묵담 스님은 도도 높고 고명한 율사이셨지만, 재주도 많았던 분이었다. 명필은 물론 민화도 잘 그리셨고, 이야기도 솜씨 있게 잘 해주셨다. 소년 수진은 당시 증조할머니나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묵담 스님을 찾아뵙곤 했다. 그때 글씨도 많이 받아왔다. 한번은 묵담 스님이 증조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디 중이 될 만한 아이가 있으면 소개하라고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증조할아버지가 어느 날 소년 수진에게 “묵담 스님이 좋은 사람 있으면, 중 만들게 소개하라고 하셨는데, 네가 한번 해 볼래” 하시는 것이었다. 수진은 “중이 되면 뭐가 좋습니까?”라고 물었다. 수진은 쌀이 부족해 밀기울밥을 먹던 가난했던 시절, 중이 되면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고, 마음대로 구경 다닐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서 증조할아버지를 따라 관음사에 갔다. 절에 갔더니 과연 쌀밥을 해주고 과일도 주고 하는 것이었다. 수진은 그것이 좋아 그해 겨울방학(고1) 때 묵담 스님에게로 갔다. 묵담 스님은 “중노릇만 한다면 한 달에 학비로 쌀 두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어려운 절 살림에도 그 약속을 지키셨다. 수진 스님은 출가를 한 1966년부터 1981년 묵담 스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해인사 강원(13기)에서 공부할 때만 빼놓고는 줄곧 묵담 스님을 시봉했다. 출가 후 처음에는 백양사 강원으로 갔는데, 당시 백양사에서 강사 스님을 대처승이라는 이유로 쫓아내 공부를 가르쳐줄 스님이 없어서 해인사로 간 것이다. 해인사 강원을 마치게 되었고 그곳에서 중강을 지냈다. 해인강원 동기 중에는 조계종의 이름남 강사인 무관 스님이 있고 지금까지도 깊은 교유를 하고 있기도 하다. 태고종 소속 승려이었는데도 해인사 강원을 나올 수 있었고 그곳에서 중강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제일 마지막까지 조계종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백양사의 승적을 가지고 있던 ‘덕’이었다. 수진 스님은 강원을 마친 후 1972년에 해인사에서 동안거를, 다음해엔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 회상에서 한 철을, 이어 서울 상도동 백운암에서 서옹 스님을 지도를 받으며 또 한 철을 보냈다. 그렇게 선방을 다니며 정진하다가 1973년도에 묵담 스님을 시봉하기 위해 이곳 담양의 용화사로 돌아왔다. 당시 묵담 스님의 상좌들은 다 대처승이라서, 부득이 손상좌인 수진 스님이 모실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묵담 스님은 수진 스님이 없는 장소에서는 손상좌 수진의 칭찬을 많이 하셨다. 특히 “저놈이 해인사에서 중강도 하고 그랬단 말이다”라며 뿌듯해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수진 스님에게는 늘 야단만 치셨다. 그러나 수진 스님은 그것이 자신을 엄격히 율사로 성장시키려는 노스님의 배려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용화사에 설치되어 있는 아일다율원. 미래의 율사 양성소이다.
묵담 율사의 사전에는 ‘그냥 넘어가자~’는 없었다
수진 스님은 묵담 스님을 시봉하면서, 율사로서의 길을 자연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율사로 사신 노스님 덕에 저절로 율이 몸에 배었다. 묵담 스님은 경을 보실 때는 항상 법복을 깨끗이 손질해 단정하게 입었다. 그러다가 화장실에 가실 때에는 반드시 옷을 갈아입었다. 용변을 본 후에는 언제나 따듯한 물로 뒷물(수진 스님은 이를 비데라고 표현했다)을 하셨다. 그러다보니 노스님이 화장실에 갈 때면 수진 스님은 서둘러 물을 데워 그릇에 담아 해우소로 달려가는 게 일과 중의 하나가 되었다. 화장실 일을 다 보신 후에는, 노스님은 손을 깨끗이 씻고, 법복으로 다시 갈아입은 후 경을 읽거나 좌선 수행을 하셨다. 새벽예불을 마치면, 매일처럼 안마를 해드리고, 세숫물 떠 드렸다. 세수를 마치면 노스님은 수진에게 부처님 전의 촛불을 켜도록 하고, 당신께서 직접 종을 치면서 예불을 하셨다. 그 음성이 얼마나 청아하고 부드러웠던지 지금도 귓전에 선하다. 예불을 마치고 나면 수진 스님은 노스님이 드실 미음을 끓였다. 쌀을 미리 담가두었다가, 뜨물이 나올 때까지 문질러서 연탄불에 볶은 후 참기름을 섞어서 따뜻한 물에 섞어 끓인 후 체로 걸러서 미음을 만들었다. 그러나 수진 스님은 그 일이 즐거웠다. 귀찮거나 짜증 한 번 나지 않았다. 그저 묵담 노스님을 옆에서 모시면서 스님의 일상을 돕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던 것이다. 묵담 스님의 아침공양 시간은 7시쯤이었다. 노스님은 공양을 하시면서 언제나 법문을 하셨다. 일종의 소참법문이었다. 법문의 내용은 부처님이나 경·율·론에 관한 것도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관한 내용이 더 많았다. 잘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저렇게 해야 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이렇게 하야 한다는 식이었다. 노스님은 부처님 말씀뿐만 아니라 공자님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오전 10시까지는 늘 안마를 해드렸는데, 안마를 하다가 혹 졸기라도 하면 툭 치시다가, 그렇게 졸리면 내 옆에서 자라며 다독여주셨다. 그리고는 노스님은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하셨다. 이따금씩 제사를 지낼 때는 위패를 모신 영정을 들고 동구 밖까지 나가서 모시고 들어오도록 시키셨고, 제사가 끝나면 영정을 들고 배웅을 하도록 가르치셨다. 이런 소소한 일상 자체가 묵담 스님 스타일의 소참법문이자 율 수행이었다. 묵담 스님은 불사, 예수재, 수륙재, 가사불사, 초파일 행사 등 모든 의식에도 뛰어난 식견을 갖춘 분이었다. 재의식을 봉행할 때는 당시 대중이 부족하니까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주관하다시피 했다. 큰 불사를 할 때면 글을 쓰는 일이 참 많았는데, 노스님을 도와 편지글을 쓰다가 한 자라도 틀리면 엑스표를 하시고는 다시 쓰도록 시켰다. 노스님 법에는 원리원칙법만 있었지 ‘그냥’ 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냥 넘어가자, 대충 이쯤에서 그냥 접자는 등의 태도는 노스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복잡한 의식 중의 하나인 복장불사도 많이 하셨는데, 오늘날 수진 스님이 주요 사찰의 복장불사를 주관하고 증명하고 있는 것은 다 이 시기에 묵담 스님에게 배운 것이 바탕이 됐다. 그러다보니 율에 대한 교육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다 율 교육이었다. 특별한 것이라면 노스님은 틈틈이 율장을 다 베껴 쓰도록 했고, 보살계 수계시에는 수진에게 인례사를 맡기며 실습을 통해 가르치시곤 했다. 일종의 현장실습이자 산교육이었다. 노스님은 늘 율에 대해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사제지간이었던 금담, 대은 스님이 하동의 칠불에서 기도를 할 때 서상이 상좌인 대은에 내린 것을 알고, 은사인 금담이 상좌에게 대승계와 구족계를 받은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그래서 해동율맥은 상좌가 1대, 은사가 2대가 되었다며, 율맥이 스승, 제자의 족보보다 더 우선한다는 점을 각별히 강조하시곤 했다.
담양 용화사 전경. 이곳은 묵담 율사가 창전한 계율도량이자 미륵도량이다.
율맥은 전수받을 자격을 갖춘 청정계행 갖춘 율사에게 전하는 것
수진 스님은 묵담 율사의 율맥이 원효종 종정을 역임한 법홍스님에게 이어진 과정도 자세히 설명했다. 수진 스님에 따르면, 묵담 스님은 율맥의 전수는 율맥을 전수할 자격과 청정행을 갖춘 율사에게 전달되는 것이지, 사사롭게 자신의 상좌나 소속종단 승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갖고 계셨다. 당시 법홍 스님은 일본에서 수행을 했는데, 히예산(연력사) 70리 길을 매일 108처소를 거쳐 돌아오는 수행을 했다. 108처소마다 그곳에 들렀다는 기록을 갖고 70리 길을 돌아오면 12시간이 걸렸다. 법홍 스님은 이 수행을 무려 100일 간이나 하셨다. 법홍스님의 히예산 70리 길 100일 회봉 소식은 일본에서도 화제를 낳아 신문에 보도가 되었고, 일본불교계에서는 법홍 스님을 율사로 인정하며 존경했다. 이 소식을 그 당시 묵담 스님은 신문에서 읽었다. 그 후 어느 날 법홍 스님이 귀국해 묵담 스님을 찾아와 율맥을 잇겠다고 청했다. 묵담 스님은 흔쾌하게 당신의 율맥을 법홍 스님에게 전했다. 율맥을 전하는 자리에서 법홍 스님은 수진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율맥을 나에게 먼저 전하신 것이네. 그러니 부지런히 더 공부해 율사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면 나중에 내가 자네에게 율맥을 전하겠네.” 이후 법홍 스님은 수진 스님을 제자처럼 여겼고, 수진 스님 또한 법홍 스님과 함께 일본, 브라질 등을 함께 여행하며 율연(律緣)을 공고히 다졌다. 수진의 세납이 50을 넘어서면서 법홍 스님은 수진이 율맥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시험했다. 청정한 살림살이야 익히 알고 있던 것이지만, 율맥은 청정성만 갖고 전수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법홍 스님은 가지고 있는 듯했다. 법홍 스님은 수진에게 “자네의 능력을 알아봐야 하니까 어디 이 절(용화사)의 불사를 해보라”고 말했다. 율을 실천하고, 전수할 여법한 도량을 갖출 능력을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간파한 수진은 두 말 없이 법당 불사를 시작했다. 기도를 하며 스스로 불사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초라한 사격의 용화사가 지금의 중후한 사격을 갖춘 데에는 이런 인연사가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웅장한 자태로 이곳이 한국불교 해동율맥이 전승되는 곳임을 웅변하는 용화사 일주문.
율맥 전수받기 위해 전계사 법홍스님과 동시에 100일 묵언기도
법홍 스님은 비로소 수진이 율맥을 받을 만반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고는 당신이 95세가 되었을 때 전계를 할 뜻을 전해왔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수진 스님이 53세 되던 해였다. 법홍과 수진 두 율사들은 율맥 전수를 위해 각자 백일기도를 올렸다. 수진 스님은 용화사에서, 법홍 스님은 온양 보문사에서 각각 100기도에 들어갔다. 그 해 4월 15일 입재한 기도는 100일 후 전계식이 열린 9월 15일까지 지극한 정성과 원력으로 원만하게 진행됐다. 당시를 수진 율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율맥 전계를 위한 100기도 장소를 찾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 했지요. 율 강의가 있었던 파계사에서 기도에 들어가려 했으나 파계사의 사정으로 무산됐고, 다른 장소를 찾기 위해 절치부심했습니다.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아 용화사 법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묵담 노스님이 눈앞에 나타나 말없는 가운데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놈아, 법당 잘 지어놓고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묵담 스님께서 일구시고, 그동안 살아온 이곳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이곳에서 100일 묵언기도에 들어가자.” 100일 묵언기도를 원만회향한 후 수진 스님은 부산 금수사로 법홍 스님을 찾아가 백일기도를 잘 마쳤음을 알려드렸고, 법홍 스님은 그해 9월 15일, 이곳 용화사에서 여법한 의식 속에 율맥을 수진 율사에게 전했다. 수진 스님이 율맥을 전해 받던 날, 용화사에서는 태고종 구족계 수계식도 함께 열렸는데, 무려 150명의 비구·비구니가 이날 인천(人天)의 스승으로 거듭 났다.
수진 율사가 늘 가슴이 한 구석이 답답한 까닭은?
수진 율사는 그러나 늘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하다. 소속 종단이 태고종이 청정한 종단으로 거듭나는 불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태고종 모습이 태고 스님의 뜻이겠습니까? 명칭은 태고종인데 사는 모습에서 태고 스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태고스님의 뜻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종도들이 기울여야 합니다. 말로만 태고 적손이니, 적자 종단이니 해서는 설득력이 부족하지요.” 수진 스님은 지금이라도 태고종에서 앞으로 배출하는 스님은 가능한 독신승으로 하려는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먼저 제대로 된 교육을 올바로 시키는 교육관의 설립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종단차원의 인재양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인재가 없으니 적자종단을 주장하기 어렵게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작은 아들(조계종)이 한국불교의 큰 아들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작은 아들이라도 정화의 뜻을 잘 받들고 있어야 하겠는데, 과연 그런가라고 수진 스님은 되물었다. 어쩌면 작금의 한국불교의 모습은 옛날 대처승 시절보다 더 못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조계종 스님들 자체에서 정화가 실패했다는 자평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한 수진 스님은 “이제부터라도 태고종이 과거 만암·묵담·대륜 스님들의 율맥을 계승하고, 청정·적통·전통 종단으로 거듭나는 혁명적 노력을 시작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종단적 여건이 이루지지 않아 안타까워해온 수진 스님은 우선 용화사에서부터 청정승가를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고가 없는 아이들을 받아 동자승을 삼아, 학교를 보내며, 미래의 율사로 성장하도록 뒷받침하며 공부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구족계 받은 스님만 5명에 이르고 있고, 대학생 둘은 사미계를 받았다. 현재 고등학생이 셋, 중학생이 하나, 초등학생이 세명이 용화사에서 살며 정진하고 있다. 이들 스님과 동자들은 수진 스님의 율맥을 이을 후보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진 스님은 당신의 제자나 상좌에 연연하지 않고 율맥을 전할 생각이다. 율맥이란 사적 친분이나 정으로 오고가는 것이 아니며, 오직 청정이 제일 문제이고, 원력이라든가, 역량 등을 종합적으로 봐서 전하는 것이기에, 설사 상좌라고 하더라도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수진 스님은 율맥을 전하게 되면 율맥 전수자의 종단을 가리지 않고, 오직 청정성과 역량, 원력 등의 크기 등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태고종 스님들도 없지 않다고 밝힌 수진 스님은 “종도들 가운데 비구 전통을 이어갈 필요성을 절감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며 “우선 구족계를 내릴 종단의 계단설치가 시급하며, 벼슬아치가 3사7증을 하고 있는 관행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율사의 일과? “매순간 청정성 잃지 않고 중선봉행하는 것”
수진 스님의 하루 일과는 묵담 스님이 생전에 보이신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율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매 순간, 순간 청정성을 잃지 않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는 것이니 특별히 드러내 선전할 것도 없는 것이다. 4시에 일어나 도량석과 예불을 하고, 정진과 간경, 율과 관련한 소참법문, 사시기도, 도량 안의 텃밭에 파종하고 김매는 농사일을 하면서 도량 전체를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도량내에 ‘아일다율원(阿逸多律院)’을 설치해 율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동자각(童子閣)에서는 용화사와 인연을 맺은 미래의 율사들이 정진하고 있다. 이런 일과 속에 수진 스님은 화두는 전 해인사 방장 성철 스님께 받은 ‘여하시제불출신처(如何是諸佛出身處)?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라는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 해인사에서 지내던 시절, 장경각에서 8시간 동안 3000배를 한 후 받은 “무엇이 여러 부처의 출신처인가? 동쪽 산이 물위로 걸어간다”는 화두를 들고 틈틈이 좌복을 깔고 앉아 정진하고 있다. 화두 참구와 함께 “모든 업장(業障)을 녹이려면 선송대비주(先誦大悲呪)라”하는 해인사 용탑에 걸린 백용성 스님 가르침을 읽고 마음에 담은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 수행을 빠지지 않고 하고 있기도 하다. 경전은 주로 <금강경>을 오후 2시부터 읽고, 초이레 정기법회에서 신도들을 상대로, 매주 토요일에는 학생들에게 법회를 하고 있다. 특히 ‘동자각’에 살고 있는 어린 제자(상좌)들에게는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친다. 주석사찰인 용화사가 깊은 산속에 있는 절이 아닌데도 수진 스님은 전혀 청정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스님은 이 모든 것이 노스님, 즉 묵담 스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모든 것은 묵담 스님의 덕이고, 묵담 스님의 사상에 입각해서 살다보니까 아무런 생각도 낼 일이 없다”는 수진 스님은 묵담 스님이 입적하면서 남긴 “너(수진)는 이 정도로 공부를 했으니까, 앞으로 용화사만 잘 지키면 금쪼각이 될 때가 돌아온다”는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수진 스님은 묵담 스님의 모든 것을 다 잘 보존해 ‘묵담유물관’에 잘 보관전시하고 있다. 특히 율사는 당래미륵부처님을 잘 신봉해야 한다는 노스님의 당부에 따라 경내에 거대한 미륵부처님 석상을 모셨다. 묵담 스님은 금산사의 미륵부처님 복장불사를 주관하셨고, 법주사의 미륵대불 복장, 전주 관음사와 선인사 등의 미륵부처님 복장불사를 주관하거나 관장해 모셨다. 그만큼 미륵사상이 강했던 스승이셨다. “부처님 중에서도 아주 복이 많으신 부처님이 미륵부처님”이시라고 늘 말씀하셨다며 묵담 스님을 회고한 수진 스님은 “열심히 정진하고 계행을 청정히 하다보니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공덕도 많이 경험한다”고 소개했다.
상좌 5명 모두 청정비구…경내 동자각은 미래의 율사들 양성소
용화사 경내지 안에 미륵부처님상과 ‘묵담유물관’, ‘궁현당’, ‘칠성각’, ‘봉향각’, ‘설법전 1, 2층’. 향적전(공양간), 일주문에 이르기까지 도량을 정비해 면모를 일신시킨 수진 스님은 하드웨어가 어느 정도 갖춰진 만큼 향후에는 소프트웨어 즉, ‘지역사회 기여’, ‘아이들 가르치는 교육시설’, ‘그룹홈(공동생활 가정)’에도 힘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조계종의 갈마아사리 무관 스님, 백양사 강주 응각 스님, 나주 녹야원 원진 스님 등 종단의 벽을 넘어 폭넓은 교유를 갖고 있는 수진 스님은 올해 66세로 출가 50년을 맞았다. 금년은 또 용화사가 개창한지 8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개창 80년을 맞아 500명이 사부대중이 모여 이상 보살계 수계식을 성대히 봉행하기도 했다. 율이 성해야 불교가 성한다는 것은 역사의 경험이기도 하다. 자장·진표 율사가 활약했던 시기의 신라가 그랬고, 도선 율사가 활약했던 고려가 그랬다. 이제 한국불교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서는 율이 살아야 한다. 율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율맥의 적통이 분명해야 하고, 율을 숭상하는 흐름이 교단 내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범계를 저지르고도 증거를 가져오라는 ‘철면피 현상’의 만연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는 없다. 이는 율맥의 전통과 적통을 온전히 지키고 선양하려는 담양 용화사의 수진 율사의 삶이 더욱 소중하고 향기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햇볕 정겨운 담양을 떠나며, 오늘 하루 청정한 기운으로 심신을 세척했다는 상쾌한 행복을 만끽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킨다는 의미의 이름을 지닌 율사 수진(守眞) 스님이 내뿜는 청정향에 놀란 듯 겨울 하늘의 새털구름이 하늘 높이 스미고 있다.
율로써 정법을 지키리라는 굳은 맹서 침묵의 못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네.
칠불의 서상 화개를 넘어 담양에 서리니 미륵용화정토엔 청정한 기운 완연하구나.
삿된 무리 빛을 가려 일순 어두워졌으나 진리의 길 지키는 이 있어 한 줄기 숨통.
뉘라 3회 설법 발원에 고개를 치켜드는가 중선봉행 수진율향 천지에 진동하는데… <졸시> |
첫댓글 수진율사스님!
청정함의 기운이 한겨울 서릿발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태고종의 미래를 담보하는 수진스님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