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5일 부르심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난 곳은 호숫가였다. 성당이 아니었다. 어부인 그에게 호수는 일터였다. 그 만남으로 사도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세리 마태오가 주님을 만난 곳도 그의 일터 세관이었다(마태 9,9). 성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느님을 체험하는 곳은 성당이 아니라 우리 일상이고 또 일터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고 당신 백성과 동행하시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도는 밤새 애썼는데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루카 5,4)” 하셨다. 어부가 목수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했다. 일반적으로 전문가가 비전문가의 말을 따라 그 즉시 실행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자기 배 안에서 바로 옆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설교를 들었기 때문일 거다.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폰소 성인도 변호사로서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변론을 잘 준비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소했다. 판사가 뇌물을 받아 매수됐었다. 판결은 이미 나 있었던 거다. 그의 일터인 재판정에서 성인은 세상의 실체를 본 거다. 그 즉시 법정을,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거기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영적인 여정이 시작됐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일상과 일터고, 또 성공보다는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느님 목소리를 듣는 거 같다.
예수님이 당신의 그 능력을 세속적으로 발휘했다면 정말 큰 부자가 되고 엄청난 권력을 잡았을 거다. 그 능력에 매료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 당시 권력자들도 그분을 경계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다 아셨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1코린 3,20).”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1코린 3,19).”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 물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았다. 사도는 거기서 예수님의 신성을 접했다. 그리고 말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4,8).”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다. 하느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만남으로 마치 진실의 거울이나 투시경 앞에 선 거처럼 자신의 죄스러움이 드러나고 알아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은 하느님의 영 안에 있고,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지만 모두가 똑같은 응답을 하는 게 아니다. 누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다. 그가 예수님이 기르는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당 벽에 조용히 하라고 적어 놓지 않아도, 보는 이가 없어도 그 안에서는 떠들거나 하지 않는다. 의인들의 거룩한 삶 앞에서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느낀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반응이다. 부르심을 받는다고 다 수도원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삶이 바뀐다. 겉모양은 바뀌지 않아도 속마음은 바뀐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고 증명할 수 없어도,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불의한데도 그런다. 그에게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거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영적인 여행이 시작됐다.
예수님, 주님은 세상 모든 것을 통해서 저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오시고 부르십니다. 주님과 친교는 오로지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는 하느님, 그런데도 주님은 저와 함께 계십니다.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제게 나타나시지 않는 것은 제 믿음을 더 굳건하고 깊고 순수하게 하시려는 것임을 압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교만한 체념이 아니라 순수한 신뢰로 주님을 믿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