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소성 덕분에 부르는 게 값인 흰 해삼
- 2018년 우리나라가 사상 최초로 수출액 6천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작년에 이어 세계 6위 자리를 고수했다. 중국-미국-독일-일본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항상 우리보다 앞서는 5위 네덜란드(인구 1700만 명), 참으로 대단한 나라다. -
선조 22년(1589) 10월 1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용인 등 4명의 연명으로 정여립(1546~1589)이 모반을 도모하고 있다는 비밀장계가 올라왔다. 비밀장계란 왕만이 볼 수 있는 장계로서 국가적 중대사가 있을 때 관리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올리는 것이다. 정여립은 홍문관 수찬직에서 파직당하여 향리인 전주에 머물고 있었는데, 초야에 묻혀 있는 전국 각지의 인사들과 대동계를 조직하여 모반을 도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지혜롭고 용맹한데다 친화력이 뛰어나 그가 조직한 대동계에는 다양한 인사들이 가입하여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정이 독단적이고 난폭하여 적도 많았다.
정여립은 대대로 벼슬을 지낸 전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정이 잔인하여 참새를 죽인 사실을 부친에게 고변한 여종을 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형제들과도 불화가 잦았으며, 친척들 중에도 앙숙이 많았다. 그러나 워낙 영민하여 22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25세에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이후 성혼과 율곡 이이를 사사하면서 촉망받는 인재로 성장했다. 관직에 입문할 때 당색이 없던 정여립은 율곡의 문하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율곡 사후 정여립은 서인 영수 정철과 견해차를 보여 경연 자리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이때 동인 영수인 대사간 이발이 정여립의 견해를 적극 지지하자 다음날로 서인에서 탈당하여 동인에 가담했다.

선조 17년(1584) 정여립은 예조좌랑으로 있다가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다. 얼마 뒤 정여립은 경연 자리에서 이미 고인이 된 스승 율곡을 맹공했다. 이때 동석해 있던 정철에게도 면전 공격을 퍼부었는데, 내용이 워낙 과격하여 정철이 선조의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정도였다. 소식이 퍼지자 서익을 비롯하여 여러 신하들이 정여립을 성토했다. 율곡의 조카 이경진은 정여립이 서인으로 있을 때 동인 영수 유성룡을 비난하며 율곡에게 보낸 서신을 공개하기도 했다. 선조는 격노하여 정여립을 파직했다. 이후 서인 영수 정철이 유배되고 동인이 정권을 잡자 정여립 복직상소가 여러 번 올라왔지만, 선조는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여립은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전직 관료‧선비‧무사‧중‧공노비‧사노비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각지의 인사들을 두루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뜻이 맞는 자들끼리 대동계를 조직했다. 매월 보름에는 전국에서 계원들이 모여 활쏘기 대회도 열고 시문도 지으며 술을 마셨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 보니 조정에 대한 불만도 더러 섞이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오해를 받게 된 데는 대동계원 지함두의 탓이 컸다. 그는 정여립과 친해진 뒤 그의 사신(私信)을 품고 이곳저곳 고을 수령들을 찾아다니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정여립의 영민함이 그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조도 지함두가 내민 정여립의 사신을 보고 푸짐한 주안상을 내주었다. 대동계의 중심인물 가운데는 의연이란 중도 있었는데, 그 또한 전주 남문에 왕기가 서려 있다느니 하는 요사스러운 변설로 고을 수령들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전주 남문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은 정여립이 왕이 될 것이라는 뜻이니, 어리숙한 수령으로서는 보험이라도 들어두자는 심산으로 의연을 대접했던 것이다.
정여립도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일어날 것이라는 「정감록」의 예언을 널리 퍼뜨리고 다녔다. 유시민처럼 재주는 비상하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던 정여립은 초야에 묻혀 있으려니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했던 것이다. 흉흉한 소문이 어지러이 떠돌자 대동계 중진들이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정여립은 앉아 죽으나 서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여겨 모반을 계획했다. 대동계원들을 무장하여 초겨울쯤에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사한 뒤, 한강이 얼면 곧장 한양으로 쳐들어가 도성을 점령할 작정이었다. 도성을 점령하면 무기고를 습격하여 대동계원들을 무장시킨 뒤, 자객을 보내 어영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죽이고 대궐을 점령하여 보위를 차지하겠다는 탁상공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엉성한 계획이 황해도에 살고 있던 한 대동계원의 입을 통해 관찰사의 귀에 들어가자 즉각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비밀장계를 올린 것이다.

선조는 금부도사 유담을 전주로 내려보냈다. 첩보를 전해들은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몇몇 심복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했다. 선조 22년 10월 12일, 정여립은 포위망이 좁혀져오자 숨어 지내던 진안현 서재에서 자결했다. 사태는 정여립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때를 만난 서인들은 연일 동인들을 탄핵했고, 선조는 이를 모조리 받아들여 3년 동안 1천여 명에 이르는 동인들을 죽이거나 유배했다. 이를 역사에서는 기축옥사라고 한다. 길고 잔인한 피바람의 내용은 생략한다. 정여립의 난은 구체적으로 거사계획을 세우거나 군대를 조직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선조와 서인들이 공모하여 동인들을 대거 학살한 조작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첫댓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또 한 번 챙겨볼 수 있었네.
감사 감사...
네델란드에 살러간 연주인 후배가 다니러와서 하는말인디....
그나라서 수출 태반이 생선가공품이라고 꽃은 생각보다 마이수출 안하고서리
품종 로얄티만 엄치 받는다카네~
그라고 흰해삼은 2년전에 포항 양포라 카는데 방파제에서 해녀 아점씨가 몇마리 잡았는디...
모도 오염되서 그렀타고 아무도 안사먹는데 내가 선뜻나서 2마넌에 시마리 나 먹었지러^^
약간 붉은빛이 돌믄서 허옇튼데,....아닌가!? 그거묵고 이틀만에 설사 항거썩 했지러....ㅋㅋ
당사자만 알겠지
하기야 전통이 없는 왕조니 모반이 일어난다는 말만 나와도 사건을 만들겠지
정감록도 한몫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