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가 낮아 마당엔 사철 이끼가 파르르하니 자릴 잡고 있고 민달팽이가 우물가를 게으르게 배회하던
지붕이 무지 낮았던 월세집 단칸방...솜이불을 어깨죽지까지 올려놔도 윗풍이 심해 콧등이 시리던 그 방안에서
전기 아끼라며 자정쯤이면 순찰을 돌던 주인 할매 밝은 귀를 피해가며
라디오를 들었던 여고시절이 뜬금없이 생각나는 밤.
시골 소읍내엔 초저녁이 지나면 금새 정적이 감돌만큼 고요가 가득해서 옆방의 숨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고
담 너머 누구네집 어르신 기침 하는 소리도 경계가 없었다...
Over Valley And Mountain.... 이 음악을 배경으로 하던 프로그램 이름이 뭐였더라??
이상하게 그 깊은 밤의 정적과 너무나 어울린단 착각이 들어서 왠지 모르게 쓸쓸해지다가 황량한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던
이 곡이 가슴에 마른 샘 하나를 조심조심 파고 있다가 이슬을 모아담듯 슬픔을 고여들게 만들곤 했었다
연탄아궁이 밑바닥에도 물이 고이던 그 집은 비가 조금만 내려도 부엌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어느해 새끼를 낳은 개가 밤새 내린 비로 방문턱까지 물이 차오를 지경인데도 깊은 잠에 빠져든
야속한 주인들 때문에 애간장을 태우며 밤 새 지 새끼들을 헛간 짚더미 위로 물어다 둔 적이 있었다
미물이지만...어찌나 미안하고 기특하던지 그 녀석과 정이 몽실몽실 들어 결혼 하고서도 사람처럼 자꾸 그리워지곤 했었는데
돈이 궁했던 울 엄니가 대구 이모네 다니러 가시는 차비 마련하시느라 팔았노란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저리도록 아픔이
느껴졌었다.
사람이란게 참 모질긴 하다
같이 이래저래 아는 척 눈마추고 살다가 죽으면 어느 땅 한 켠에 묻어줄 줄 알았었는데...그 때 또 한 번
가난이 죄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난이란 것은 가장 악랄한 폭력이다..'라고 했던 간디의 말이 한충 더 수긍이 되는 세상
문득문득 富와 가난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곤 한다
얼마나 가져야 부유하다고 할 것인가?
몰래 돕는 손
가진 것을 가진 줄 모르게 선용할 수 있는 능력
소리없이 깊고 편한 웃음처럼 넓은 거름용 참도구...그런 財를 가지고 싶다.
앞전 주 어느날 화장품 가게 앞을 지나다가 핸드크림을 사러 들어갔다.
문득,매 주일 언제나 맨손으로 설겆이를 아무 말 없이 하고 계신 집사님의 얼굴이 생각났다.
표정에 변함 한 번 없이 늘 가장 탁하고 흐린 찬 물쪽에서 설겆이를 하시다가 수백명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사야
국수 그릇 앞에 앉아 점심을 떼우는 그이의 모습이 떠올라 같은 것을 하나 더 샀었다.
주일날 아침 잊어버릴까봐 전날 기억났을 때 미리 가방 안에 챙겨넣어두고 예배를 마쳤는데
딸애가 갑자기 너무 아프다는 전화를 해서 놀라 아일 챙겨 병원엘 데리고 가려다가
그대로 가면 까맣게 잊을까 싶어 아일 잠시 의자에 앉혀놓고 식당에 들러 그이의 등 뒤에 서서
바지주머니에 쑤셔주고 올까 했는데 앞치마를 두른탓에 그리할 수 없어 손에 쥐어 주고 서둘러 나왔었다.
나 역시도 일하면서 장갑을 끼면 답답하고 둔해서 고무장갑 끼는 일에 익숙치도 않고 달가워 하질 않는다
해서 매양 핸드크림을 수시로 발라주지 않으면 손이 건조하여 거칠게 느껴지기 마련인지라
그이의 손 역시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아픈 마음을 살필 줄 아는 시선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시린 손을 잡아 뎁힐만한 체온을 가진 사람이였으면 좋겠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간 아들 녀석이 전화를 했다.
"엄마!, 매운탕에 설탕은 얼마나 넣는거야??"
헐..
설탕?? 매운탕 끓이는 중이냐? 설탕 넣었어?
"아니, 이제 끓이려고.."
포구근처 항에 가서 회를 뜨고 가져온 서더리로 매운탕을 끓일 모양.....
가진게 뭐있느냐 물어 끓이는 법을 대충 가르쳐 주고 전화를 끊었는데 문득
설탕 한 푸대쯤 넣으라고 할 걸 그랬나? 있는대로 다 넣어 달달하게.~
그렇게 골탕을 좀 먹여줄걸 싶은 가슴 근질거리게 만드는 장난기가 동했다.
4박5일 여정 이래서 그래 고맙다,너 없을 때 나 이사갈라고 집 알아보고 댕길란다 했더니
너죽 좋은 놈 하는 말,괜찮아~뭔 걱정이야 주변에 경찰들이 널널한데 물어서 알아봐달라고 하면 되지~
임마,니가 그럴 줄 알고 주소는 그대로 놓고 갈란다.긍께 그대로 쭈욱~놀다가 군대로 직행함 된다 알았제?
"아앙~엄마 내가 떡 하니 집에 있으니까 든든하잖아~엄마도 솔직히 말해봐 사실 든든하고 좋지? 남자가 있으니까
도둑도 안들어오잖아~"
무슨소리,난 들어와줬음 좋것다..엄마 훔쳐가도 괜찮거든~..
이젠 머리가 컸다고 느물거리기까지 할 땐 속웃음이 많이 난다.
어린 지동생이랑 웃고 까불다가 다툴땐 참 어처구니없기도 하지만
야한 유머를 같이 보며 마주하고 웃고 있는 나를 보면 난 또 뭐냐? 싶다
난 장가 빨리 가야지~
네 이놈, 니 엄마를 그래 빨리 늙게 하고 싶은거냐? 이런 불효자슥같으니라구..
...
지금 이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난 또 나의 궁핍을 잊었다.
딸 애 학원비에 한숨을 쉬다가 작은 혼자 웃음으로 마무릴 하고 있는 나...
인생이란 것이 짧은 것인지..
긴 여정인지 아니, 어쩌면 참 적당한 것 같기도 한 이 흐름 속에서 또 한 번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
이 겨울의 기억들이 희미해질 무렵 꽃냄새를 맡으며 또 다른 웃음을 웃고 있을지 모르겠다
올 봄엔 일부러라도 밤나들이 길에서 꽃비를 맞고 싶어진다.
딸애의 손을 잡고..아들과 함께.
모든 것이 서로의 길로 굽어 멀어졌다고 느끼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