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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미사 교구별 집전 순서 |
10월 22일 전국시국기도회/ 10월 29일 전주/ 11월 5일 의정부/
11월 12일 수도회/ 11월 19일 부산/ 11월 26일 상임위 |
*위 순서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10월 15일 월요미사에 함께하신 사제 |
주례 : 박동호 신부(서울교구 신정동) 강론 : 이강서 신부(서울교구 장위1동 선교본당) 서울교구 : 전종훈, 박동호, 이강서, 임용환, 이영우, 나승구, 이계호, 김도훈, 차경린 신부 청주교구 : 김인국 신부 의정부교구 : 맹제영 신부 수원교구 : 최재철 신부 광주교구 : 변찬석 신부 부산교구 : 고원일 신부 마산교구 : 하춘수 신부 예수회 : 이영찬, 김정대, 최영민 신부 작은형제회 : 유이규, 호명환 신부 골롬반 : 남승원, 함패트릭 신부 꼰벤뚜알 : 서영섭 신부 |
10월 15일 월요미사에 함께하신 수도회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서울 베네딕도회 성 바오로딸 수도회 성가소비녀회 예수 수도회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죄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위로의 성모 수녀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순교 복자 수도회 작은형제회 구속주회 글라렛 선교 수도회 |
정의의 출발점은 인간의 존엄성
강론 이강서 신부(서울교구 장위1동 선교본당)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한 주 한 주 모일 때마다 날씨가 급격하게 변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오늘 복음 첫마디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만 악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죠. 성경의 이야기는 인류의 시작 때부터 곧 아벨과 카인의 시대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악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었다고 증언하죠. 또 예수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세상의 악은 전승되고 세습되는 형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희가 목도하고 있는 오늘날 나라꼴 어떻습니까? 최근에 알려진 것이라 다 아실텐데, 검찰이 배임죄로 충분히 기소 가능한 내곡동 대통령 사저 관련 정보를 포착하고도 어떻게 했죠? 덮었습니다. 똑같은 혐의로 불충분한 증거로 정연주 전 KBS사장은 무리하게 기소를 했던 검찰의 처신은 우리 사회가 단적으로 어떻게 부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어느 모로 보나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암담한 정도가 아니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절망과 부패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 대한문 앞의 어둠처럼 상식의 빛이나 진실의 광채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저는 어려서부터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사실을 배워 왔고 여러분도 배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존엄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배웠는데 그 상식이 오늘날에는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는 현실처럼 모든 인간이 존엄한 것이 아니라 존엄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간주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었던 때가 1789년인가요? 그때 인간의 자유, 평등 이런 가치를 온 세상에 선포했던 그야말로 대혁명이었죠.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엄함이 무엇이었는지가 세상에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200년이 되지 않아서 1948년도 유엔은 세계인권선언문을 채택해서 전 세계에 선포하게 됩니다. 그 선포의 내용은 간단하죠. 모든 인간은 그리고 인간인 한 존엄하다, 이 선언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한국, 이 땅의 현실은 모든 사람이 존엄한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분의 사람만 존엄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시대는 산업문명의 혜택을 받은 세대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이룩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큰 힘과 능력을 지닌 사람을 숭상합니다. 바로 지체 높으신 분들, 학력이 높은 분들, 엄청난 부를 지닌 사람들, 건강과 미모가 출중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존엄한 부류의 인간으로 간주되고 우리 사회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언급하지 않은 그 밖의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잉여 인간입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우리 사회의 약한 이들, 낮은 곳에 있는 이들, 짓밟히고 빼앗긴 이들이 발부치고 살 곳 없는 사회, 인간으로서 존엄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나라, 이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신심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청하는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더 많은 금은재화와 건강과 미모와 재산을 표징으로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의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우리나라의 선풍을 일으켰던 책 한권이 있었죠. 하버드 교수였던 샌델이란 사람이 썼던 <정의란 무엇인가?> 저는 정의라는 것을 두툼한 책으로 쓴 것도 놀랐지만 사실은 정의는 상식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의의 근원이 무엇일까? 정의의 출발점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믿는 이들에게는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요청, 정의의 하느님이 기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또는 인간 이성이 동의하는 자명한 공리에서 정의가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간단히 본다면 정의의 출발점은 우리 인간의 존엄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두가 예외 없이 존엄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정의의 근본 요청인 것이다. 그 요청에는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노동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재산이 적다는 이유로, 학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존엄한 대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어떠한 이유도 성립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이 땅 이 나라에는 오직 1%의 사람만이 존엄한 인간으로 처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이렇게 물은 바가 있습니다. “왜 바다가 세상 모든 물의 왕이 되는가?” 왜 바다가 세상의 많은 샘물, 개울물, 강물 등 이런 물들의 왕이 될까? 노자는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바다가 가장 낮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낮은 자리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노자는 그 낮은 자리를 세상의 으뜸 자리로 보았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낮은 곳으로 모든 것이 향하고 있습니다. 소위 인력의 법칙이죠. 자연의 이치 못지않게 세상살이의 순리도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한 슈마허의 말처럼 이제는 ‘낮은 것이 으뜸이다’라고 선언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순리와 역행해서 더 높은 곳으로, 자기 혼자만 꼭대기에 서는 것이 승리고 성공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우리 사회의 약자들, 힘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 억눌리고 빼앗기고 짐승이나 물건처럼 소모품 취급당하는 사람들, 이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으뜸들이고 제일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존엄하다고 자처하는 지체 높은 이들, 힘 있는 이들, 위정자들, 학자들, 세도가들은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린 사람들입니다. 존엄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 이들은 오히려 약자들, 가난한 이들, 자기 홀로 살아가기 어려운 이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존엄한 처우를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 대한문에 나와 있을까?
오늘 많은 분들이 대한문 앞 미사에 참례하고 계신데, 우리는 왜 이 대한문에 나와 있을까? 되돌아보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약한 믿음 때문에 여기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배우고 알고 있고 고백하고 있는 하느님은 박제된 하느님, 감시 속에서 숨어 계시는 하느님, 또 성당 밖을 나오시지 않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당신께서 친히 역사에 개입하시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 가운데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보고 배우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증거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 이 자리 왔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깨진 이들, 짓밟힌 이들, 부서진 이들 가운데 함께 계시는 분이고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 알려주시는 분임을 증거하라고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월요일 미사인가요? 그때 복음도 똑똑한 척하던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하고 물었던 대목을 우리가 기억할 것입니다. 또 어제 주일 복음에서도 부자 청년이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선하신 스승님” 이렇게 물었던 대목 기억하시죠?
우리는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10 계명과 많은 종교적 권고들을 다 준수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 시대,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그리고 교회는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모든 제도와 정책에 항거하고, 존엄성 회복을 위한 활동에 투신하며 존엄성이 훼손된 사람들과 더 긴밀히 연대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 가장 큰 고통이자 아픔인 용산 참사 유가족, 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그리고 혼신을 다해 저항하는 제주 강정주민들과 함께 하는 이유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밤,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 앞에 들린 촛불 하나하나를 보면서 저는 우리가 들고 있는 것은 초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손에 담고 있는 것은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다는 물방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물은 세상을 바꾸는 주인이 됩니다. 미사에 함께 해주신 여러분, 모두가 세상을 바꾸는 물, 세상의 주인이 되는 힘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23번째 희생자에서 끝나고
쌍용차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
곡기를 끊고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단식투쟁 6일째
김정우 쌍용차 지부장
죄송합니다. 지난 4월 5일 이곳 대한문에 와서 23번째 희생자만큼은 없는 상태에서 쌍용자동차 사태를 해결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쫓겨난 동료들은 골방에 갇혀서 아니면 질병에 시달리면서 고통 속에 시달리며 끝내는 23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시련 속에서 우리 동료들이 추운 겨울과 봄을 지나 여름을 거쳐서 가을이 오기까지 구속도 되고 연행도 되고 많이 다치기도 했습니다. 흩어져 있는 가족들을 보듬어 안으며 동지들과 끝끝내 같이 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8월 8일 새누리당 당사를 저희들의 주 거점으로 잡았습니다.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진을 친지가 두 달이 훨씬 넘었습니다. 아직까지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는 정치적 쇼에 불가한 행동만 하고 있고, 당사 앞에서 저희들이 쌍차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국정조사를 요구했지만,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농성장에 와서 인사를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싸워오면서 저희들은 쌍용차 문제가 단순히 쌍용차만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이 땅의 정리해고 사업장으로서 국가 권력이 자행했든 치 떨리는 만행을 겪은 그 진실을 올곧게 알려 내고 싶은 것이 저희들의 작은 바람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온전하게 밝혀지면 아마도 이 땅의 정리해고는 거짓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든 정리해고 사업장들은 모두가 자본의 수탈을 위한, 더 많은 이익 확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긴박한 경영상 이유나 어려움 때문에 정리해고를 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과연 회사 경영이 어려워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8년을 넘게 싸우고 있는 코오롱의 동지도 그렇습니다. 과연 코오롱이 망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맞은편에 있는 재능교육 특수 노동자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재능이 망해서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본이 무한 착취와 수탈을 하고자 하는 이 정리해고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짤려 나가는 이런 회사, 이런 사회를 우리는 없애야겠습니다.
이명박의 기나긴 5년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 쫓겼습니다. 다가오는 미래에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는 저희는 돌아버릴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이 자리에 계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함께 믿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많이 걱정하고 계실 것이라 봅니다.
해고된 노동자의 한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억압하고 착취하는 저들과 싸우는 우리들이 끝내 승리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이 고민됩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과연 지금의 구조에서 조금은 변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래저래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거리로 쫓겨나 있는 노동자들은 빨리 공장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일자리를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따뜻한 밥상 앞에서 미소를 짓는 그런 일상을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23번째 희생자에서 끝나고 쌍용차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위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에서 곡기를 끊고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처음 끊어보는 곡기입니다. 몹시 힘듭니다. 하지만 죽어간 동지들과 살아서 열심히 투쟁하는 동지들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들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그 끝장을 내야겠습니다. 힘들지만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모두가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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