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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은, 요동(遼東) 땅 4천 여리, 東·西는 海에 한계(限界)한다.
남(南)쪽은? 뭍(地)으로 왜(倭)와 접(接)해 있었다.
2021년 06월 24일
○ 삼한(三韓)! “우리들의 선조(先祖) 나라(國)였다.”고 가르치고, 배웠고,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어, 상식화(常識化)되어있다.
그런데 “삼한(三韓)은 누구며, 어디에서 시원(始原)하며, 그 땅(地)은 어딘가? 묻는다면 과연(果然) 몇 사람이나 제대로 답변(答辯)을 할 수 있을까?
삼한(三韓)이란 “세 한국(韓國)”을 말하는 것으로, 무려 “78개 나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한(馬韓)… 진한(辰韓)=진한(秦韓)…변한(弁韓)=변한(卞韓)』의 세 나라를 말하고 있는데, 각각(各各)의 여러 나라들이【78개 나라】모여서 ‘세 개의 한국(韓國)’을 이뤘다고 해서 “삼한(三韓)”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특히 『마한(馬韓)은 최대(最大) 국가(國家)로 “월지국(月支國)=월씨국(月氏國)”에서 ‘54개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필자(筆者)가 가장 중요(重要)하게 여기는 것은, “삼한(三韓)의 터전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이들 삼한(三韓)은 선대(先代)로 올라가보면, 결국(結局) ‘구이(九夷)’다.
● 근대(近代) 조선왕조(朝鮮王朝)때의 학자(學者)가 삼한(三韓)에 대해 설명(說明)한 것을 보면,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한(韓)을 정벌(征伐)하자, 한(韓)의 유민(遺民)들이 대거(大擧) 남(南)쪽으로 이주(移住)하여 삼한(三韓)이 되었다.”고 하는 설(說)도 있다.
그러나 명(明)나라 때나 청(淸)나라 초(初)의 역사학자(歷史學者)들에 의하면, 위와 같은 삼한(三韓)의 시원설(始原說)은 설득력(說得力)이 떨어진다. 즉(卽) ‘명(明) 말(末)과 청(淸) 초(初)’ 때의 학자(學者)였던 “고염무(顧炎武)”는, 삼한(三韓)에 대해 설명(說明)하기를,
➊〈삼한(三韓)은, 오늘의 요동(遼東)에 살고 있는 무리(者)들이다. 그 나라는 땅(地)이 합(合)하여 4천 여리(餘里)이고,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海)에 한계(限界)한다. 또한 그 북(北)쪽에는 낙랑(樂浪)과 맥(貊)이 접(接)해 있고, 남(南)쪽에는 왜(倭)와 접(接)하였다.〉고 하였으니,
삼한(三韓) 외(外) ‘낙랑(樂浪), 맥(貊)’등을 모두 합(合)하면 6천리(千里), 8천리(千里)가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➋ 또 ‘변진(弁辰)=병진(並辰)’은 진한(辰韓)의 남(南)쪽에 있는데, 또한 왜(倭)와 접(接)했다.〉고 하였다.
반복(反復) 설명(說明)하는 것이지만, 명(明)나라는 누구보다도 〈조선(朝鮮) 강토(疆土)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 훤하게 꿰뚫고 있었던 나라이다.〉이런 명(明)나라의 학자(學者)가 조선(朝鮮) 강토(疆土)에 대한 지리적(地理的) 설명(說明)을 어떻게 부정(否定)할 수 있겠는가!
※ 당시(當時)의 설명(說明)대로, 조선(朝鮮)영토(領土)의 지세(地勢)를 그려보자. 대략(大略) 윤곽(輪廓)이 그려질 것이다.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의 반도(半島)조선사(朝鮮史)는 도대체 뭐냐?” 하는 것이다.
● 더불어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께서는, 뭐라고 말할까? 이런 이야기는 필자(筆者)의 가공망상(架空妄想)【터무니없는 망령(妄靈)된 생각】이 아니라, 명(明)나라 말기(末期) - 청(淸)나라 초기(初期)에 활약(活躍)했던 철학자(哲學者)이자 학자(學者)였던 ‘고염무(1,613-1,682)’의 ‘일지록(日知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記錄)이란 누구도 이를 부인(否認)할 수 없다. 수천(數千), 수백(數百)년 전(前)에 기록(記錄)되어 전(傳)해지는 고전(古典) 내용(內容)을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물론 후대(後代)에 그 내용(內容)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될 수는 있다. 기록(記錄)을 보는 당사자(當事者)가 이를 간파(看破)해야 되는 것이다. 고전(古典) 기록(記錄)을 무시(無視)한 조선사(朝鮮史) 연구(硏究)는, 비웃음만 받는다.
◆ 대중(大衆)은 증거(證據)를 원하고, 논거(論據)을 원하며, 고증(考證)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만 떠드는, 가정(假定) 화법(話法), 정황(情況), 추정(推定), 유추(類推)등은 미뤄 짐작(斟酌)하는 것일 뿐이다.”
● “고전(古典) 기록(記錄)”에 더하여, 여기에 “고고학(考古學)과 언어(言語)등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인 과학적(科學的) 기법(技法)이 가미(加味)된다.”면 이건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말할 수 있다.
○ 물론(勿論),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땅(地)은, 요동(遼東) 땅도 아니요, 오직 동(東)·서(西)·남(南)쪽에 모두 바다(海)에 한계(限界)하고 있는 “반도(半島)” 땅이다.
또한 ‘왜(倭)’와 함께 살고 있지도 않으며, ‘왜(倭)’는 수백(數百)리 파도(波濤)가 넘실대는 바다(海)를 건너, 사면(四面:四方), 동서남북(東西南北)이 모두 바다(海)에 둘러싸여있는 섬(島), ‘열도(列島)’ 땅에 있다.
명(明)나라 말기(末期)와 청(淸)나라 초(初)라면, 이제 겨우 350년 전(前)의 일이다. 그러면, ‘서력(西曆) 1,682년’, 고염무(顧炎武)가 죽고 난 뒤, 바다에서 땅이 솟아오르고, 또는 땅이 바다 속으로 꺼져버리는, 지진(地震)과 화산(火山)폭발(爆發)이 이어지는 ‘천지개벽(天地開闢)=개천벽지(開天闢地)’가 일어나 “하늘이 다시 열리고, 땅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그런 징후(徵候)조차 발견할 수 없다. 당시의 철학자(哲學者),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렸던 고염무(顧炎武)가 지은, 일지록(日知錄)속의 삼한(三韓)속으로 들어가 보자.
◎ 原抄本’日知錄’ 作者:顧炎武[明] / 日知錄卷二十九.論兵及外國事
[1] 《三韓今人謂遼東為三韓者、考之書,序成王既伐東夷.傳:海東諸夷駒麗,扶餘,●千,貊之屬. : 삼한(三韓), 지금 사람들이 말하기를 ‘요동(遼東)은 삼한(三韓)이다’라고 하였다. 상고해보면 서(書)의 서(序)에서 이르기를 : 성왕(成王)이 이미 동이(東夷)를 벌하였다. 전(傳)에 의하면 : 해동(海東)의 여러 이(夷)들은, 구려(駒麗)·부여(扶餘)·●千·맥(貊)이 속해 있다. 正義:漢書有高駒麗,扶餘,韓.無此·千,●千即韓也,音同而字異耳.: 정의(正義) : 한서(漢書)에 고구려(高駒麗)·부여(夫餘)·한(韓)·이 있다. ●千은, 천(千)은 곧 한(韓)이다. 음(音)이 같은데 글자가 다르다. 後漢光武紀:建武二十年,東夷韓國人率眾詣樂浪內附.東夷傳:韓有三種,一曰馬韓.二日辰韓.三日弁辰.書作弁韓. : 후한(後漢)광무기(光武紀) : 건무(建武)20년, 동이(東夷)한국인(韓國人)이 무리들을 인솔하여 낙랑(樂浪)에 이르러서 내부하였다.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 한(韓)에는 첫째 마한(馬韓), 둘째 진한(辰韓), 셋째 변진(弁辰)이 있다고 하였다. 서(書)에는 변한(弁韓)이다.》
[2]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貊接.: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는데, 54깨 나라가 있다. 그 북(北)쪽에는 낙랑(樂浪)이, 남(南)쪽은 왜(倭)와 접(接)했다. 진한(辰韓)은 동(東)쪽에 있는데, 12개 나라가 있으며, 북(北)쪽에는 맥(貊)과 접(接)하였다.》
[3] 《並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內亦與倭接.凡七十八國,百濟是其一國焉. : 병진(並辰)은 진한(辰韓)의 남(南)쪽에 있는데, 또한 12개 나라가 있으며, 그 안에 또한 왜(倭)와 함께 접(接)해 있다. 무릇 78개 나라이며, 백제(百濟) 역시 그 중의 한 나라였다.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合言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占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盡上三韓之地. : 그 가운데 큰 나라는 1만여 호(戶)쯤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쯤 되는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지방(地方)은 모두 합해서 4천여 리쯤 되고,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로 한계를 하는데,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 중에는 마한(馬韓)이 가장 큰데, 그들은 자기들의 종족(種族)을 진왕(辰王)으로 세워서, 모조리 삼한(三韓)의 지역에 군림(君臨)한다.》고 하였다.
➊ 〈삼한(三韓)은, 오늘의 요동(遼東)에 살고 있는 무리(者)들이다. 그 나라는 땅(地)이 합(合)하여 4천 여리(餘里)이고,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海)에 한계(限界)한다. 또한 그 북(北)쪽에는 낙랑(樂浪)과 맥(貊)이 접(接)해 있고, 남(南)쪽에는 왜(倭)와 접(接)하였다.〉고 하였으니,
삼한(三韓) 외(外) ‘낙랑(樂浪), 맥(貊)’등을 모두 합(合)하면 6천리(千里), 8천리(千里)가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➋ 또 ‘변진(弁辰)=병진(並辰)’은 진한(辰韓)의 남(南)쪽에 있는데, 또한 왜(倭)와 접(接)했다.〉고 하였다.
반복(反復) 설명(說明)하는 것이지만, 명(明)나라는 누구보다도 〈조선(朝鮮) 강토(疆土)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 훤하게 꿰뚫고 있었던 나라이다.〉이런 명(明)나라의 학자(學者)가 조선(朝鮮) 강토(疆土)에 대한 지리적(地理的) 설명(說明)을 어떻게 부정(否定)할 수 있겠는가!
㉮ 「마한(馬韓)의 남(南)쪽에도 ‘왜(倭)와 접(接)’하였고」,
㉯ 「진한(辰韓)의 남(南)쪽에는 변진(弁辰)이 있는데, 그 땅 안(內)에 또 ‘왜(倭)와 접(接)’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說明)대로라면,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의 남해(南海)는 모두(皆) 육지(陸地)였다.〉는 말이 된다.
그래야 전라도 땅, 마한(馬韓)의 남쪽에 왜(倭)와 접(接)했다는 것이 가능(可能)해지며, 또한 진한(辰韓)인 경상도(慶尙道) 남(南)쪽에 변진(弁辰)이 있고, 그 땅에는 또 왜(倭)와 접(接)해 있었다는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가 있다.
즉(卽) 반도(半島)의 남해(南海)는 없었으며, 이곳은 육지(陸地)였다는 말이 된다. 이게 가능(可能)한 것이냐? 하는 대답(對答)은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의 몫이다.”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의 반도(半島)조선사(朝鮮史)는 도대체 뭐냐?” 지금 유아원생(幼兒園生) 모아 놓고, 장난(玩 : 희롱할 완)하냐?
● “병진(並辰)은 변진(弁辰)” 즉(卽) 변한(弁韓)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를 인용(引用)하기를,
[4] 《三國·魏志:齊王正始七年,幽州刺史毋丘儉破高句驪·貊·●·韓·那奚等數十國,各率種落降.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 제왕(齊王) 정시(正始)7년에, 유주(幽州)자사(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高句驪)·맥(貊)·●·한(韓)·나해(那奚)등 수십(數十)개 나라를 깨뜨리니, 여러 종류(種類)들이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수십(數十)개 나라를 깨뜨렸다”고 하였으니, 당시(當時)에 고구려(高駒驪)와 함께 수십(數十)개 나라(國)가 관구검(毌丘儉)에 의해 짓밟혔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반도(半島) 고구려(高駒驪) 땅, 어디에 수십(數十)개 나라가 있었다는 말일까?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영겁(永劫)의 세월(歲月)을 끊임없이 달려왔다. 후위(後魏) 때 사람 “양고(陽固)”의 “연색부(演賾賦)”에서 이르기를 : 《“覩 三 韓 之 累 累 兮: 저 끊임없이 이어가는 삼한(三韓)을 보며, 見 卉 服 之 悠 悠: 저 수많은 만이(蠻夷:卉服)를 보노라” 하였는데, 이는 그 풍토(風土)를 말한 것이다.[後魏陽固,演賾賦.覩三韓之累累兮.見卉服之悠悠,此其風土也.]》라고 하였다.
‘삼한(三韓)을 만이(蠻夷)’라고 비하(卑下)했던 ‘후위(後魏)’【북위(北魏):북로(北虜):색로(索虜)라고도 한다.】는 바로 백제(百濟)를 여러 차례에 걸쳐 토벌(討伐)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궤멸(潰滅)된 나라다.
조선사(朝鮮史) 입장(立場)에서 이를 보면, 「‘북위(北魏)=북로(北虜)’는 고구려(高駒驪)의 속국(屬國)으로 조그마한 제후(諸侯)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妥當)하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수많은 백성들 역시(亦是) 끊임없이 이어져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2021년 06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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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 조선왕조의 강토는,
'오늘날의 반도 땅이 아니었다'는 것은, 옛 고전을 보면, 확연하게 들어난다.반도 땅은, 옛 조선에서 요충지 땅이 아닌 변두리 땅으로 크게 주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곳이라고 추측이 된다.
왜(倭) 역시 조선의 서남, 남쪽 변두리에서 번국으로 울타리 노릇을 했던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모두는 남겨진 기록으로 알 수 있은 것이다. 똑같은 기록(옛 고전)을 보면서, 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바로 사고(思考)의 차이와 사관(史觀)의 다름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지형지세와 방위, 토산물등의 자연환경적 요소를 생각치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비록 조선사의 진실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여 할 땅이요, 우리들의 후손들이 또 살아야 할 땅이기 때문이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
조선사를 왜곡하고 조작한 당사자들인 '일본과 중국'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사실은 '내부의 적이 이들보다 휠 씬 파괴적이며, 무서운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가 넘치고 넘쳐서, 범람할 지경에 이르렀다.
몇 언론들은, 조선사를 왜곡하고, 조작한 자들보다 더 무섭고, 파괴적인 자들이다.
이들을 개혁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분열과 사회혼란과 조선사 진실찾기는 요원할 뿐이다.
보수우익과 함께 이들은 결코 조선사의 진실찾기를 그대로 놔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사'에서는 '지중해'를 '서발해(西渤海)'라고 하였는데,
청대에 편찬된 '해국도지'에서도 이를 인용하여, '지중해를 서발해'라고 하였다.
<서발해가 있었다면, 동발해도 있어야 당연한 것이다>
해동(海東)이란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니, '우리나라'란 '조선'을 뜻한다.
이 말은 곧 해동(海東)이란 지중해 동쪽 또는 흑해의 동쪽을 뜻하는 말이다.
발해가 자이산호(제상박) 또는 발하슈호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는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