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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에서의 믿음과 행함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안 성 덕
바울서신에서의 믿음과 행함
指導 張興吉 敎授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1999년 2월 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安 聖 德
안성덕의 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主審 印
副審 印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9년 2월 일
감사의 글
본 論文을 작성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지도하여 주신 장흥길 교수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늘 아버지처럼 관심 가져 주시고, 신학의 방향성을 일깨워 주신 경건신학 연구소장 한인수 목사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고향 교회의 김동식 목사님, 사춘기 시절 양육 받았던 임은종 목사님, 고모부이시면서 목회 선배이신 이영화 목사님, 일산충신교회에서 첫 만남 이후 지금까지 좋은 목회의 본을 보여주시는 구영철 목사님께는 더 없는 은혜를 입었다고 밖에 말씀드릴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1999년 2월 일
안 성 덕
바
울
서
신
에
서
의
믿
음
과
행
함
안
성
덕
목 차
I. 서론 1
A. 연구의 의의1
B. 연구의 범위4
II. 바울의 “하나님의 의(義)” 이해6
A. 바울의 용어 사용6
B. ‘하나님의 의(義)’ 해석의 문제점7
C. ‘하나님의 의(義)’ 개념의 기원과 의미9
D. 바울의 ‘하나님의 의(義)’ 이해12
III. 바울서신에서의 직설법과 명령법 관계에 대한 연구사17
A. 베른레18
B. 불트만19
C. 보른캄20
D. 케제만22
IV. 바울 서신에서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24
A. 로마서24
1. 6장 12-23절24
2. 12장 1절36
B. 고린도전서 5장 7절41
C. 갈라디아서 5장42
D. 빌립보서 2장47
E. 데살로니가전서50
F. 골로새서, 에베소서52
1. 골로새서52
2. 에베소서55
G. 신학적 결론56
V. 바울서신에서의 믿음과 행함58
VI. 결론61
참고문헌64
I. 서론
A. 연구의 의의
21세기를 한 해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은 이른바 IMF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와 사회, 개인 모두가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연속적인 기업들의 도산(倒産)과 그로 인한 실직으로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사라지게 되었고, 준비되지 않은 가장들의 허무한 몰락은 가정의 파괴를 가져왔으며, 정부의 대책마련에도 불구하고 서울역에는 밤마다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우는 수많은 노숙자(露宿者)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은 여전히 파행을 거듭하고 있으며,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집중하여 민생들의 고충을 외면하고 있다.
한국 교회도 이러한 국가의 어려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문을 닫는 법이 없다는 듯이 개척과 교회 건축에 열을 올리면서 만족할만한 교회 성장을 가져왔던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추었고, ‘믿음으로’ 과도하게 빚을 내어 무리하게 건축하였던 교회들이 도산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IMF시대에 교인들도, 헌금도 줄어드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런 엄청난 사회 윤리적 제반 문제에 대한 신학적 답변과 교회의 입장 표명을 요구받는 압력까지 받고 있기에 이중적 압박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와 개인의 회개를 부르짖고 영적 위기를 추스리려는 교회의 각고(刻苦)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범죄율은 상승하고 있어 1998년 5월 26일 현재 전국 43개 구치소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미․기결수는 모두 7만 91명으로 해방 이후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교회는 사회 혼란을 저지하기에 역부족임을 느끼게 된다. 특별히 이러한 상황은 한국 기독교가 통계적으로는 가장 부흥의 시기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에 그 심각성은 더하다.
한국 교회는 선교 114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 엄청난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장의 이유에는 사회, 정치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한국인의 전도열과 교인들의 기도운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 외에 김인수 교수는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신앙과 생활을 양분시키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은 사람은 즉시 생활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정책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수난기에 민족과 더불어 고난의 과정을 경과하였고, 개화와 항일, 민주화에 앞장설 수 있었으며, 한국 교회는 더불어 성장할 수 있었음을 언급한바 있다. 고난과 핍박의 시대에 신앙과 생활은 양분되어질 수 없다. 핍박의 시대에 신앙을 선택하는 일은 신중하고 희생을 각오한 결단이 될 수밖에 없기에 그만큼 믿는 이의 생활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1970, 80년대의 대규모 전도 집회와 활발한 선교활동을 통해 교회의 급격한 성장을 이루면서 ‘이신칭의(以信稱義)’가 강조되었고,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심각한 행위의 결단 없이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천국행 주문(呪文) 정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국 교회 내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강조는 복음 안에 참 자유함이 있음과 많은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였고, 교회의 직접적인 성장을 이루는 놀라운 일을 이루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강조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단을 약화시켰고, 죄의 길에서 돌이켜 자신을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생활의 결단 없이 죄를 지어도 되는 면허증을 발부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방종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사회의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1998년 9월 14일에서 26일 전국(제주도 제외)의 18세 이상 남녀 1,61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제 3차 한국인의 종교실태와 종교의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79.6% 이상이 종교단체가 참 진리 추구보다는 교세 확장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응답하였다고 한다. 특별히 응답자의 16.2%는 이전 종교에서 개종한 사람이었는데, 개종 경험자 중에서 58.4%는 이전에 기독교에서 개종하였다고 응답하여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이미 기독교 내부에서도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문제와 위기를 진단하고 있다. 특별히 1990년대 들어와서 둔화된 교회 성장률, 교회의 사회 공신력의 추락,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교회의 사회봉사 결여 등 많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한국 사회와 기독교의 현주소를 살펴보았을 때, 한국 교회의 위기는 말씀과 기도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말씀을 왜곡하고, 말씀하고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음에 기인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국 교회 바울서신 읽기는 교리적 영역을 극대화 하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구원진술에 있어서 직설법(indicative)과 명령법(imperative)이 병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직설법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확언이고, 명령법은 그 같은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죄와 계속하여 투쟁할 것을 명령하는 윤리적 교훈이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바울은 과연 믿음과 행함을 양분하리만큼 서로 무관하게 여겼는지,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은 상호모순이거나, 혹은 단순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차라리 명령법은 바울의 사상과는 단절되어 있는 유대교로의 후퇴인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세상적이며 무익한 일인지를 생각해 보고,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상관관계를 살피는 것으로 바울서신에서의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
바울의 윤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성경 곳곳에 산재해 있는 바울의 윤리적 진술들을 각 서신의 맥락에서만 아니라 전체 바울서신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들이 밝혀져야 한다. 우리가 아는대로 로마서, 갈
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기의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그 구조가 전반부에 케리그마 내지는 교리, 후반부에 윤리를 취급하고 있으며, 그 밖의 바울서신에서도 교리적 진술과 윤리적 진술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진술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바울의 윤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바울서신에서의 교리적 진술과 윤리적 진술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해명하는 작업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본 논문은 바울서신에서의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함으로써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2장에서는 바울신학의 핵심인 “하나님의 의(義)”(δικαιοσύνη Θεού)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바울이 이해한 하나님의 의(義) 사상은 구약과 유대교적 전통 위에 있으면서, 단순히 믿음을 통하여 받는 은총의 선물(Gnadengabe)로서의 의(義)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세계를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갱신하는 구원의 동적 능력(Heilsmacht)으로서의 의(義)임을 밝히고자 한다.
3장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바울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硏究史)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이 문제를 최초로 들고 나온 베른레(Paul Wernle)로부터 시작하여, 불트만(Rudolf Bultmann), 보름캄(Günther Bornkamm), 케제만(Ernst Käsemann) 등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진 변천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4장에서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를 밝혀주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간략한 석의 작업을 하여, 바울에게 있어서의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5장에서는 앞의 석의 작업을 통해 믿음과 행함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겠고,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시켜 나갈 수 있을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II. 바울의 “하나님의 의(義)” 이해
A. 바울의 용어 사용
‘하나님의 의(義)’(δικαιοσύνη Θεού)는 바울신학의 핵심 개념이다. 이 사실은 신약 성서에 나타난 ‘δικαιοσύνη’의 사용 빈도수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 지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여성명사 ‘δικαιοσύνη’는 신약성서에 총 91회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 57회는 바울서신에 등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신학적으로 가장 무게 있는 로마서에만 집중적으로 33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도, 이 주제가 얼마나 바울이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신학적 중심 개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단어는 그밖에도 마태복음에서 7회나 등장하고 있으며, 17회는 형용사 ‘δίκαιος’로 나타난다. 그리고 목회서신에 5회, 히브리서에 6회, 야고보서에 3회, 그리고 ‘δικαιούν’ 형태로 3회가 나오며, ‘δίκαιος’로 2회가 추가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요한 1서에도 3회 등장하고 있으며, 형용사 ‘δίκαιος’ 형태로 6회 등장한다.
이 여성명사는 신약성서에서 동사 ‘δικαιόω’, 형용사 ‘δίκαιος’ 및 부사 ‘δικαίως’와 함께 바울과 복음서 신학의 주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의 본래적 헬라어 뜻은 ‘정의’, ‘적합성’, ‘정당성’, ‘공평성’, ‘덕(德)으로서의 의(義)’, ‘분배의 정의’(iustitia distributiva) 및 ‘심판자적 정의’를 의미한다.
이 ‘δικαιοσύνη’는 바울서신에서 다른 단어와 결합하면서 독자적인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어떤 때는 ‘믿음의 의(義)’(δικαιοσύνη τής π-ίστεως)(롬 4:11, 13)로 쓰이기도 하며, 혹은 ‘믿음으로부터의 의(義)’(δικα-ιοσύνη ἐκ πίστεως) 내지 ‘믿음을 통한 의(義)’(δικαιοσύνη διὰ πίστεως)에 대해서 말한다(롬 9:30; 10:6). 또한 이 여성명사가 소유격으로 다른 명사와 결합하여 ‘의(義)의 선물’(δωρεά δικαιοσύνης, 롬 5:17), ‘의(義)의 율법’(νόμος δικαιοσύνης, 롬 9:31), ‘의(義)의 소망’(ἐλπιδα δικαιοσύνης, 갈 5:5), ‘의(義)의 봉사’(διακονία δικαιοσύνης, 고후 3:9), ‘의(義)의 열매’(γέ-νημα δικαιοσύνης, 고후 9:10) 등으로도 쓰이지만,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결합하여 쓰인 ‘하나님의 의(義)’(δικαιοσύνη Θεού)가 가장 무게 있는 결합일 것이다.
B. ‘하나님의 의(義)’ 해석의 문제점
우리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의(義)’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에 주어지는 하나의 ‘선물’로 여기면서, 자연스럽게 인의(認義)와 성화(聖化)를 분리하여 생각해 왔다. 루터가 살던 시대는 죄인 각자가 공격받고 있는 양심을 위한 위로를 찾고 있던 중세기의 암흑기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에게 다가온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義)는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로 계시된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유효한 의”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불트만 역시 의(義)의 기본적 의미는 유대적 개념과 바울의 개념에서 모두 법적이며, 종말론적임을 지적한다. 바울의 사상에서 의(義)는 신앙인에게 현재적인 실재로 경험되는 것이다. 불트만은 바울에게 있어서 의란 인간의 성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에 근거한 점을 명백히 한다. 의(義)는 신앙인의 새로운 도덕적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케제만(Ernst Käsemann)과 슈툴마허(Peter Stuhlmacher)는 하나님의 의(義)를 이해할 때, 전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갱신하는 구원의 동적 능력(Heilsmacht)으로서 전 우주를 향해 뻗어 나가는 종말론적인 신의 권리로 보았다. 즉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으로 여겨졌고,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의(義)의 우주적, 새 창조적 성격이 중요시 여겨졌다. 의(義)는 인간 개개인이 소유하고 확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해 나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케제만과 슈툴마허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義)의 미래적, 우주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의(義)’ 사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우리의 어려움은 즉각적으로 속격 구문인 “하나님의 의(義)”(δικαιοσύνη θεού)를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해야할 지, 아니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해야할 지에 대한 문제로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의(義)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목전(目前)에서 받아들여지고, 그 분이 우리에게 전가하신 의(義)로 이해해야할 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 주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의 일반적 취지는 종교개혁의 전통처럼 목적격적 속격을 선호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빌립보서 3장 9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義)’(δικαιοσύνη ἐκ Θεού)와 바울이 가진 의(義)를 대립시키고 있다. 또한 로마서 2장 13절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παρὰ τῷ Θεῷ)의 우리의 지위는 의롭게 되는 것에 의해(δικαιούσθαι), 그리고 같은 어원의 말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로마서 5장 17절에서도 하나님의 의(義)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쉽게 단정적으로 하나님의 의(義)를 법정적이고, 종말론적 성격의 하나님의 선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로마서 1장 17절, 10장 3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능력이라는 인격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여 나타나며,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구속된 공동체의 실체로 묘사되고 있다. 또 로마서 3장 5절, 25절 이하에서는 그것이 확실히 하나님 자신의 활동과 본성을 특징짓고 있다.
C. ‘하나님의 의(義)’ 개념의 기원과 의미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義)’의 의미를 파악하기에 앞서, 이 개념의 기원과 원래의 용례를 살펴봄으로써 바울이 말하는 의(義)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의(義)’ 용어의 기원을 고려해볼 때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義)’의 개념은 바울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단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표현은 앞서 구약시대와 초기 유대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약 문서에서 ‘여호와의 의’는 언약에 관한 여호와의 행위를 말한다. ‘언약’ 가운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의’를 그 존재의 조건으로서, 즉 자신을 백성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솔선(率先)으로서 경험한다. 이 때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의 의를 표명”하심으로 백성들에게 확신을 주신다(삿 5:11; 삼상 12:7; 미 6:5; 시 103:6; 단 9:16). 또한 시편은 ‘여호와의 의(義)’를 찬송한다(시 22:32; 50:6; 71:24). 그것은 생활의 필요 속에 온전한 도움이 되심으로(시 40:11; 51:16; 112:9), 법적 권리를 상실 당한 자들과 억압받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옹호로서 나타난다(시 35:24; 5:9; 7:9; 9:5).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 행위의 일치성이 지적된다. 심판 속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을 증거하고 구원을 가져온다. 이러한 행위는 벌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포함한다(시 7:9, 12). 제2이사야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의(義)’는 선취된 구원의 도래의 포괄적인 표현이다(사 45:8; 46:13; 51:5, 6, 8). 여기서 하나님의 의(義)는 구원과 복리의 질서를 창조하는 순전한 하나님의 활동으로서 찬양되고 있다. 그러나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義) 역시 구원을 베푸는 것으로 명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그럴 권리가 없는 자에게 의를 얻게 하며, 회개하는 자에게 새롭다 인정받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렇듯 구약에 다양한 용례로 쓰이고 있다는 점은 ‘하나님의 의(義)’가 상당히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요약하면 구약에서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義)’는 때로는 그의 언약의 신실성을 나타내며, 때로는 그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행위로, 언약 안에 주어진 삶의 질서로,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 거주 장소로, 그의 구원하시는 중재(仲裁)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여호와가 그의 “의(義)” 속에 자기를 계시하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의(義)와 모든 ‘불경건’을 배격하여 하나님과 일치하는 올바른 행위를 요청한다(시 1, 15, 24, 112편).
구약 이후의 유대교는 부분적으로 구약의 용례를 보존하였다. 쿰란 문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구원의 입증’ 안에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선포하시는데, 죄의 소거와 그의 ‘언약’의 성취를 통하여 하신다(I QS 1:21; 10:23, 25; 11:3, 5, 12, 14; 1 QH 7:19 등). 또한 종말론적 경향의 종파들은 ‘하나님의 의(義)’를 이해할 때, 신실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과 ‘불의한 자’들을 정죄하시고 보응하시는 두 가지 결과로 이해함으로써 종말론적 심판의 특성을 가진다.
또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최고의 인식은 구약과 초기 유대교 회개 기도문들에 나타난다(단 9:16, 18; 에스라 4서 8:36). 게다가 기도문들은 쿰란의 엣세네파에게서도 발견되는데, 바울 자신의 개념 사용과 상당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구약과 초기 유대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특별히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창조사역과 지상의 상황이나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 속에 복리(福利)와 구원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의 의(義)’ 이해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맺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태어나면서 유대인이었던 신약성서의 증인들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언어 전통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의 도움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다가오는 심판으로부터 구원받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을 통해 구원 베푸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고백하며 높여드렸다.
이러한 구약적 전통과 유대교적 전통을 다 고려할 때, 바울은 ‘하나님의 의(義)’를 처음으로 말한 원시 기독교의 증인이 아니다. 같은 표현은 이미 바울 이전에 존재하였던 기독교 전통 속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활동’(롬 3:25)으로, 그리고 동시에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의의 형식으로서의 ‘하나님 행위의 결과’로(고후 5:21) 이해되었다. 하나의 동일한 단어에 있어서 이런 이중 의미의 가능성은 일단 이미 제2이사야 속에 ‘하나님 자신의 의(義)’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의(義)’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고려할 때 설명될 수 있다(사 54:17). 그러므로 구약과 초기 유대교 전통과 신약 속에 ‘하나님의 의(義)’는 의(義)와 복리에 관여된 자들을 위해 창조하시는 창조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시는 활동을 의미한다.
D. 바울의 ‘하나님의 의(義)’ 이해
고린도후서 5장 21절과 로마서 3장 25절에 나오듯이 바울 이전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과 유대교와 일치하는 언약 사상에 영향받았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그 이전과 동시대의 그리스도인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악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義)를 엄격히 믿음과 관련시킨다는 점에서 바울 역시 ‘하나님의 의(義)’ 사상을 복음의 중심에 두고 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 개개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와 모든 피조물에게 평화와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주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행위 속에 긍정적인 분깃을 얻게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완전한 세상의 마지막 심판은 곧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義) 안에 분깃을 얻는다는 것은 곧 모든 죄를 사면 받고, 그 곳에서는 죽음이 극복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 받아들여진다는 의미를 가진다(롬 8:18 이하, 고전 15:50 이하). 그러나 바울의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義)는 심판의 날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이며, 믿는 자에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義)’를 빌립보서 3장 9절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선물’, ‘믿음의 의(義)’ 혹은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유효한 의(義)’(루터)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법적 구원 활동’에 강조점을 두어야 하는지(롬 3:5, 25; 10:3)에 대해서는 바울 주석가들 사이에 오랫동안 논쟁 중에 있다. 앞에서 숙고한 ‘하나님의 의(義)’ 개념의 역사와 의미를 고려할 때, 잘못된 양자택일로 가서는 안된다. 이 표현은 둘을 통합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울이 강조점을 두는 구절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당연히 ‘믿음을 통한 의’와 ‘행위를 통한 의’가 날카롭게 대립된다면, 모든 강조점을 선물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구약과 유대교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의(義)를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의론(認義論)은 명백히 반대되는 입장에서 전개해 나가고 있다. 바울이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인간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할 때, 그의 논쟁의 강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고 말하고 있으며,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이미 이 세상에 뚫고 들어왔다는 바울의 주장은 명백히 당시 유대교와 결정적인 결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 역시 은혜의 선물(롬 4:4)로 인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어서,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근거는 없어진다고(롬 3:27)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어진 선물은 절대로 선물 수여자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 활동의 장(場)에 들어오셔서 선물과 함께 그 활동의 장(場)에 머물러 계신다는 점에서 ‘능력’의 특징을 가진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태도, 의무, 섬김은 확고하게 선물과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활동의 장(場)으로 들어오실 때, 우리들은 그가 선물을 주심에서조차 그의 통치권(lordship)을 유지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義)의 개념은 이미 1장 16-17절의 주제적 진술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도록 하는 수단”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義)와 그분의 능력을 결합시키고 있는 점은 하나님의 의(義)가 계시되어진 것(ἀποκαλύπτε- ται)이라는 언급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묵시문학적 범주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의(義)’란 그 분이 자기 백성과 더불어 맺으신 계약을 성실히 지키신다는 사실을 바울이 믿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3장 3절 이하에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을 “충실히 지키지 못한 것”(ἀπιστία)과 하나님은 그 계약을 “충실히 지키셨다는 것”(πίστις)이 대조되고 있다(3절). 하지만 이스라엘의 변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참되신”(ἀληθής, 4절) 모습을 변치 않으셨으며, 그에 따라 그분의 의(義)는 확증되고 있다(5절). 바울은 하나님의 의(義)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계약관계를 맺으시고 그 계약을 존속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그 분의 신실하심과 진실하심에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도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즉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이 주셨던 계약은 끊임없이 충실히 지키신 그 분의 신실하심과 동일시되고 있다. 또한 로마서 10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하나님의 의(義)를 “복종치” 않는 이스라엘의 특성이 묘사되고 있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신실성과 이스라엘의 불성실이 대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義)를 계약을 지키는 데서 보여주신 “신실성”과 “진실성”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견해 속에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개념이 암시되어 있다.
그 밖에도 바울은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의(義)를 다른 유사한 표현들과 병행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마치 의(義)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롬 10:6), 하나님의 의(義)를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나타나심으로 묘사하며(고전 1:30), 다른 곳에서는 구속된 공동체의 나타남으로 묘사한다(고후 5:21). 로마서 5장 21절에는 의(義)로 말미암은 은혜의 ‘지배’(βασιλεύειν)를 논하며, 로마서 6장 13절과 고린도후서 6장 7절은 의(義)의 무기들을, 로마서 6장 18절 이하는 의(義)의 종살이(δουλεία)를, 고린도후서 3장 9절은 의(義)의 섬김(διακονία)을 논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義)는 믿는 개개인에게 ‘구원의 선물’(Heilsgabe)로서, 그리고 죄 아래 떨어진 전 피조세계를 향해 창조주의 ‘구원의 능력’(Heilsmacht)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의(義)가 십자가의 복음에서 계시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義)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새 역사를 이루며, 칭의와 은총 아래 선 자들을 종말론적 의(義)의 삶으로 초대한다. 용서와 화해로 다가온 하나님의 의(義)를 체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의의 역사에 화해와 평화의 정신으로 동참할 것을 촉구 받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해할 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들은 이제 그들의 지체를 ‘의(義)의 무기’로 사용하도록 ‘의(義)의 봉사’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며(롬 6:12-14),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롬 8:14-17; 갈 4:6-7) 하나님의 세상 갱신의 역사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성숙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의(義)는 개개들의 믿음을 통하여 은총의 선물(Gnadengabe)로 받는 의요, 또한 동시에 전세계를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갱신하는 구원의 동적 능력(Heilsmacht)으로써 전 우주를 향해 뻗어 나가는 종말론적인 신의 권리이다.
III. 바울서신에서의 직설법과 명령법 관계에 대한 연구사
바울서신 곳곳에 직설법적 기술(the indicative statement)과 명령법적 기술(the imperative statement)이 병행하여 나타난다.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적 기술이란 그리스도인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언하는 선언이며, 명령법적 기술은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죄에 대하여 계속 투쟁하고 의의 행동을 요구하고 명령하는 윤리적 권면이다. 바울서신 곳곳에서 이러한 직설법과 명령법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4-6절에서는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직설법)는 말과 함께 “깨어 근신할지라”(명령법)는 말을 동시에 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직설법)과 “성령으로 행할지니”(명령법)가 병행하고 있는 등, 직설법과 명령법이 한 문장에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믿음과 행함, 구원과 윤리, 직설법(indicative)과 명령법(imperative)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해석사를 검토해볼 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은 서로 무관하며, 어떤 논리적 연관성도 가지지 않으며,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은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바울서신에 외견상 모순된 듯이 공존하고 있는 구원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 해명을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신약학자들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A. 베른레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성에 대한 문제를 가장 먼저 들고 나온 학자는 스위스 바젤(Basel)의 신학자 베른레(Paul Wernle, 1872-1939)였다. 베른레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과 죄』에서,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의미,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베른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으로 이해함으로써 바울사상의 윤리적 차원을 부정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원 사건 이후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울 서신에서 구원진술의 직설법적 요소와 명령법적 요소가 분명히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베른레는 갈라디아서 5장 25절(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개역 개정판)을 인용하여,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윤리’와 ‘의지의 윤리’가 돌연히 하나로 결합하는 현상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베른레는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모순적인 관계를 해결하려는 시도로써, 바울의 의(義)의 사상과 일치되지 않는 바울의 윤리적 진술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주장을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죄의 가능성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고, 자연발생적으로 새로운 삶을 영위한다고 본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적 교훈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베른레가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공존을 처음으로 문제삼았다는 점에서는 양자의 관계 이해 연구사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일어난 구원 약속인 직설법과 사도 바울의 권고인 명령법의 관계를 너무 쉽게 ‘모순’으로 규정해 버렸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B. 불트만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바울의 직설법과 명령법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학자이다. 그는 베른레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가 모순되며 일치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부인하고 있다. 불트만은 “영을 따라 살라”(περιπατείτε κατὰ πνεύμα)는 명령법이 믿는 자가 의롭게 되었다는 직설법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직설법의 결과로 보았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너희는 씻음과 거룩함을 얻었다”(고전 6:11)는 직설법은 선행하는 권면을 위한 동기가 되며, 직설법은 명령법을 위한 근거가 된다.
불트만은 직설법과 명령법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공속(共屬)관계에서 해명을 시도하였다. 불트만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내용적으로 불가피한 ‘이율배반’(Antinomie) 혹은 역설로 규정하였고, 직설법과 명령법은 형식적으로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나, 내용적으로는 빌립보서 2장 12절 이하에서와 같이 서로 공속되어 있다고 본 점은 훌륭하다.
그러나 문제는 불트만이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실존주의적인 인간론적 관점에서 본다는 점이다. 그는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불트만에게 있어서 바울의 종말론은 결코 마지막 날에 대한 교리로 국한되지 않았다. 불트만의 종말론 이해는 결코 유대적 묵시문학 사상의 우주적 드라마나 또한 역사의 최종적 목적과는 무관하며, 오직 인간의 실존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불트만은 바울의 직설법을 주로 인간의 가능성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직설법이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와 인간의 복종의 노력의 역동적 관계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명령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선물 다음에 주어진 새로운 단계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복종은 구원을 실현하는 인간의 노력처럼 이해된다. 또 불트만은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를 “된 자가 되어라”(Become what thou art)로 이해함으로써 실존주의적인 인간론적 관점 이외의 우주적 차원의 종말론이나 기독론적 관점을 간과하고 있다.
C. 보른캄
보른캄(Günther Bornkamm, 1905-1990)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세례와 새로운 삶의 관계와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보른캄은 세례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양도되는 것(übereignet)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심의 ἐφάπαξ는 죽음 통치의 οὐκέτι(nicht mehr)를 포함하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 있어서도 유효한 것은 그들의 세례의 유일회성으로써 그들의 죄의 종됨에서 해방됨의 유일회성이 확증되었다.
보른캄은 로마서 6장 12-23절의 권면이 6장의 첫부분(6:1-11)인 바울의 세례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믿는 자는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에 참여하였으며 그래서 이로써 이미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결정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의롭다 함을 얻고 세례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가 곧 더 이상 죄에 대한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보른캄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는 직설법적인 동사 후에 명령법이 뒤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권면은 세례 그 자체에서 이미 일어났던 것을 단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법은 선한 의지를 호소하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있는 선한 능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는 위로”(aufrufender Trost)요, “위로적인 요구”(tröstlicher Aufruf)인 신적권고(παράκλησις)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는 ‘과오(過誤)’(Verfehlung)가 아니라 어떤 ‘세력’(Macht)을 의미하고, 죄의 권세 박탈이 믿는 자들의 새 생활이 실행되는 새로운 시계(視界)가 된다. 그래서 수세자의 새로운 삶은 어떤 새로운 긴박성으로써 그 특징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명령법의 긴급성은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며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하나님의 의의 거룩함 아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직설법으로 말미암아 세워져있다.
보른캄은 불트만의 입장을 드러나게 비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보른캄은 권면의 당위성이 세례 받을 때 선물로 주어진 새 생명의 잠재성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만, 그 잠재성은 인간론적인 관점보다 더 큰 관점 안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옛 시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하기는 하였지만, 새 시대가 아직 보편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이율배반은 인간론뿐만 아니라, 결국 기독론과 성령론을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변증법 위에 세워져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현존하는 주님일 뿐 아니라 기다려지는 분이며, 성령은 마지막 때의 선물인 동시에 ‘보증’ (ἀρραβών)이고,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아직도 기다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D. 케제만
케제만은 보른캄과 다른 관점에서 불트만의 답이 부적절하고 인간적으로 제한되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직설법이 선물의 수여자로부터 쉽게 분리된 선물로 한쪽으로 치우쳐 오해될 수 있다고 경계하였다. 그래서 케제만은 불트만이 온전하게 관념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케제만은 하나님의 요구는 선물 그 자체의 일부가 되는 반면, 불트만의 “된 자가 되어라(Become what thou art)”는 말은 원칙적으로 주어진 것을 실현하는 것이 각 개인 그리스도인에게 달려있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케제만은 바울의 명령법을 단순히 직설법 뒤에 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명령법은 직설법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직설법을 단순히 명령법을 정당화시키는 것으로만 여기는 것은 명령법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주신 가능성을 깨닫거나 실현하는 것만 요구하는 것으로 제안할 수 있다. 그래서 케제만은 명령법은 “직설법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고 말한다.
또 케제만에게 있어서 직설법을 나타내는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의는 배타적으로 단순한 하나의 ‘선물’로만 이해될 수 없었으며, 어떤 ‘능력’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선물 수여자와 분리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성령의 수여자이신 주님은 곧 그의 통치권(lordship)을 수립하는 ‘능력’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봉사로, 늘 열려진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케제만에게 있어서 직설법의 논리적인 함축이며 실증인 명령법은 다음의 공식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당신에게 주어진 주와 함께 그리고 그의 주권 안에 머물러라(Stay with the Lord who has been given you and in his kingdom).” 주로서의 그리스도는 주시는 동시에 요구하신다.
결국 케제만에게 있어서 직설법은 단순하게 명령법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명령법은 직설법 안에 통합되어 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마지막 때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데 뛰어들어(롬 6:12ff) “의의 열매”(빌 1:11)를 맺을 수 있다. 이로써 케제만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변증법을 인간론적으로 보지 않고 기독론의 관점으로부터 올바르게 이해하였다.
IV. 바울 서신에서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
바울 윤리의 핵심적인 문제인 직설법과 명령법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로는 로마서 6장 12-23절, 12장 1-2절, 13장 14절, 고린도전서 5장 6-7절 6장 9-11절, 갈라디아서 5장 1, 13, 25절, 빌립보서 2장 12-13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4-6절, 4장 1절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후기 바울서신인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도 두 관계를 다루는 구절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중심으로 석의하여 본문의 뜻을 밝힌 후에 신학적인 결론을 내리기로 하겠다.
A. 로마서
1. 6장 12-23절
전통적인 견해는 믿음과 행함을 시간적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고, 두 관계를 인과관계로 이해해왔다. 수세기에 걸쳐서 개신교에서조차 인의(認義)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으로 생각하였으며, 인의(認義) 뒤에는 필연적으로 성화(聖化)가 뒤따라와서 전자를 확증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인의(認義)의 사건 뒤의 당연한 귀결로 주어지지 않음을 경험하게 되며, 경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사건은 은총의 사건과 쉽게 분리되지 않음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정말 인의(認義)사건을 시간적으로 제한하였으며, 은총의 사건은 새로운 변화의 사건과 분리되어 있었는가? 세례 받음으로 인해 새로운 삶으로 옮겨진 자들을 바울은 어떤 점에서 무죄하다고 여겼는가? 죄로부터의 자유를 단순히 죄과(罪過)로부터의 무죄성으로 여겨야 할 것인가? 그리고 도덕적 요청의 명령법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직설법을 전제로 해야하는가? 이런 질문은 바울서신의 직설법과 명령법 진술의 관계 조사에서 불가피하다.
로마서 6장의 핵심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이다. 1-11절은 그것에 대한 전제를 말하고 있으며, 12-23절은 그 자유가 구원 행위 안에 그리고 시대전환(Äonenwende)의 시작인 세례로써 증명되며, 오직 섬김의 실천 안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12-14절은 단순한 이행절이 아니라 오히려 주제상으로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6-8절에서처럼, 11절을 세례 권고문(Taufparänese)으로 받고 있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한 바 있다(2, 6절). 그러나 12절에서 다시 바울은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죽을 몸”(θνητὸν σώμα)은 “본래의 나”(essential I) 자신과 구별되는 “죄의 몸”(σώμα τής ἁμαρτίας)을 말하지 않는다(반대입장, R. Bultmann, Theology I, 192ff., 200).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세례 받을 때에 이미 그는 이 죄의 몸에 대해 죽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12절에서 다시 이미 죽었다고 선언한 죄의 몸에 대하여 권면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죄의 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기서 죄의 몸은 외부의 세상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육성(肉性)에 의해 위협받는 그리스도인의 실체(corporeality) 혹은 속됨(secularity)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세상성’(Weltlichkeit)의 문제이다.
12절에서의 “몸”(σώμα)은 인간을 다스리시는 주권이 교체되는 자리이다. 모든 사람은 몸을 입고 있는 존재이므로, 세례 받은 자는 아무런 어려움없이 자연스럽게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유혹을 받고 있는 존재요,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유혹과 자기 주장에 굴복하면 죄는 새로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고, 우리의 지체들로 하여금 죄를 섬기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몸은 육체의 부활을 선취(先取)하는 존재로서 몸의 순종을 요구받는다.
12절의 내용이 13절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여기서 “지체” (μέ- λη)는 일차적으로 몸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서처럼 지체는 기능적인 의미로서 능력을 의미한다. “너희 지체를 죄에게 내 주지 말고”가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면, “지체”(μέλη)는 곧바로 “자신”(ἑαυτούς)과 관련을 맺는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단순히 유기체로서의 우리의 몸이 아닌, 우리의 전인(全人)으로서의 자신(ἑαυτούς)이기에, 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죄에게 내어주게 되는 “지체”(μέλη) 역시 전인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지체는 우리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며, 동시에 능력을 말한다.
바울은 13a절에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μηδὲ παραστάνετε τὰ μέλη ὑμών ὅπλα ἀδικίας τῇ ἁμαρτίᾳ) 라고 말할 때, 죄는 복수로 쓰이지 않고 단수 여격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단수로 표현된 죄(ἁμαρτία)는 구체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죄과(罪過)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서 언급하는 “죄에게”(τῇ ἁμαρτίᾳ)는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께”(τῷ Θεῷ)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죄는 단순한 죄과(罪過) 이상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세력’(Sündenmacht)을 의미한다. 이런 견지에서 11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13절은 우리 지체를 죄의 세력에게 내어주지 않고,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주권교체’(Herrschaftswechsel)가 일어나는 장소가 되고 있으며, 우리가 처한 ‘장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내어 줌(παριστάνειν)”은 보통 제의적 용어였으며, “처분에 맡김”이란 뜻을 가진다. 폴리비우스는 그의 저서에서 군대적 용어 사용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짙은데, 왜냐하면 “병기(ὅπλα)”는 ‘도구’의 의미가 아니라 ‘무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로마서 13장 12절, 고린도후서 6장 7절, 10장 4절에서처럼 ‘그리스도의 군대’(militia Christi) 모티브가 나타난다.
한편, 13절에서 바울이 대립시키고 있는 것은 단순히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의 대립이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불의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반면에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의(認義)와 더불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은 육의 부활을 선취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며,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것에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13절의 “죽은 자 가운데서와 같이”(ὡσει ἐν νεκρών)는 4f절의 “죽은 자 가운데와 같이”(ὡσπερ ἐν νεκρών) 구절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순종’(nova oboedientia)의 방식으로만 그들의 주님의 부활에 잠정적으로 참여한다. 역으로 그들의 섬김은 부활의 능력이 이미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새로운 삶과 새로운 시대에 살게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동참한 자로서 이미 구원을 경험하였지만, 여전히 고통하고 한숨짓고, 기다리고, 소망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윤리”는 그의 종말론의 구성 요소이며, 바울의 윤리가 세례 권고로서 추종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한 그의 기독론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부활의 능력은 단순히 새롭고 더 나은 도덕성이나 다른 종파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지체들을 사로잡아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내면적으로 섬기게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종말론적 세력 다툼에 연루되어 있으며, 육신의 순종은 몸의 부활을 선취(先取)하는 것으로서 필요하다.
14절은 명령법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후에 죄는 세례 받은 자를 지배하던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에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 서있다. 그리스도인은 “법 아래”(ὑπὸ νόμον) 있는 존재로부터, “은혜 아래”(ὑπὸ χάριν) 있는 존재로의 전이(轉移)를 경험하게 된다. 14절의 후반부에서는 이 둘은 서로 대립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12-14a절의 세례 권면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순종의 변증법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결코 율법 아래에서의 순종이 아니다.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라는 구절에서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법 아래 매여 있는 포로자의 복종이 아닌, 은혜 아래 있는 자유자의 순종인 것이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자유는 기본적인 주제가 아니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자유는 인의론의 인간론적 결과이다. 그리고 만약 인의(認義)의 의미가 반역하는 피조물과 창조자가 화해하는 것, 새로운 창조물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틀림없다. 자유를 자율이나 해방의 관점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오해된 것이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는 존재라고 할 때,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능력이 된다. 은혜가 복종의 능력이 되는 것은 그것이 부활의 능력인 까닭이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부활의 미래 주체’(futurum resurrectionis)로서 인식하게 하는 그러한 인식의 능력인 까닭이다. 여기서 은혜는 단순한 인의(認義)를 말하거나, 하나님과의 화해,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경험을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은혜 아래 거하였음’은 ‘법 아래 있음’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법 아래 있다는 말은 죄 아래 있다는 말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죄의 세력 아래 거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14절에서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의 주권교체가 언급되고 있다. 죄의 능력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 다스리며, 그런 관점에서 육체적 존재 안에 있는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법 아래”의 존재가 아닌, “은혜 아래” 거하는 존재로서 주님께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세상 권세들로부터 자유 안에 두었다는 것이 여기에 전제되어 있다.
15절에서는 다시 한번 14b절이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윤리적인 질문을 강하게 받는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바울은 여기서 1절의 반대를 반복하면서, 15-18절과 19-23절 두 개의 논쟁을 통하여 논박하고 있다.
위의 질문에 대하여 단호히 “그럴 수 없다”(μὴ γένοιτο)고 말한 이유는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로마에서 경험한 지식에 호소하며, 이를 세례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시장을 보아 왔고 노예 제도를 경험하면서, 자신을 종으로 팔아 넘긴 사람은 그 주인에게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례를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에게 문제가 되는 두 “주인”은 “죄”(ἁμαρτία)와 “순종”(ὑπακοή), 혹은 “죄”(ἁμαρτία)와 “의”(δικαιοσύνη)”(18절), “죄”(ἁμαρτία)와 “하나님 (Θεός)”(22절)으로 불린다. 16절에서 바울은 “죄의”(ἁμαρτίας)와 “순종의”(ὑπακοής)를 대립시키고 있으며, 그로 인한 각각의 결과 또한 대립되어 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면 그 결과는 명백히 ‘사망’이다. 그러나 순종의 종의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결과는 ‘의’이다. 로마서 1장 5절과 15장 18절을 염두에 둘 때, 여기서 바울이 의미하는 “순종”은 믿음의 순종이다. 이 말은 유일하시고 참 신이신 하나님께로의 회심, 복음을 받아들임, 사랑의 순종적 행위를 다 포함한다. 성령을 통하여 복음으로 일깨워진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순종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다(고후 5:21; 롬3:26 참조). 여기서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주권교체’를 말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에서 이러한 주권교체는 일어난다. 그러므로 16절의 “순종”(ὑπακοή)은 일반적인 의존의 의미를 넘어선, 행동으로 증거 하는 신앙이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만이 늘 존재하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
17절에서는 이전에 죄의 종이었던 자가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님을 찬양하고 있다. 17a절과 18절의 날카로운 대립에서 감사의 말은 요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죄의 지배는 끝났다. 그러나 여기서 죄의 통치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불구속(Ungebundenheit)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섬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죄와 의의 양자택일은 열려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죄의 종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은 자유와 방종을 만끽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유함과 동시에 의를 섬기도록 구속되기 위함이다. 이러한 구속이 자발성을 상실한 복종이 아니라는 사실은 17절의 바울의 찬양으로부터 알 수 있다. 17절의 시작은 “찬양하리로다”(χάρις δὲ τῷ Θεῷ)이다. 특별히 17b절에서 보여주는 순종은 “마음으로”(ἐκ καρδίας)부터 우러난 믿음의 행위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성경적인 인간론의 견지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은 인간 본질의 밑바닥에서부터, 그들에게 화해와 인의(認義)를 가능하게 하는 교훈의 본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도덕적 행동 이상을 포함한다. 그 순종은 늘 ‘들음의 신앙’(fides ex auditu)을 향해 세워졌는데, 사람들은 세례 받을 때 그 신앙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동시에 그 신앙을 진심으로,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인은 죄 권세의 강요로부터 벗어나 자발적으로 새로운 섬김의 자리에 선다.
첫 번째 논쟁의 결론 부분인 1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의의 종이 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죄의 능력은 다시 종말론적으로 명시된 하나의 능력으로서 의와 맞선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분리될 수 없다. 13절에서는 죄와 하나님과 대립이 일어나고 있으며, 22절에서 역시 죄와 하나님과의 대립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의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병행을 이룬다. 의(義)는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현실을 은혜 가운데서 나타내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인의(認義)에서 실현된다. 결국 하나님께서 종국적으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로서 인간을 그의 의(義) 속으로 끌어들임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다. 인의론과 기독론을 분리할 수 없는 한 선물은 바로 주님 자신이시다. 인의(認義)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19절에서 23절 사이의 단락에는 “그 때”(τότε)와 “지금”(νύν)의 대립되어 있다. 이 대립 구조는 주권교체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이전에는 불법과 불의에 내주었던 지체를, 지금은 의에게 종으로 내 주었다. 이 구조는 21절과 22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그때에(τότε)- 이제는(νύν)”의 대조 양식문(Kontrastformel)은 수세자의 실존에 있어서의 시대 전환(Äonenwende)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19절은 또 한번의 주권교체를 선언하면서도, 여전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바울이 비(非)그리스도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전에는 그들의 죄의 종이었다가, 지금은 의에게 종으로 드려진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19절을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라고 시작하고 있으며, 그들이 전에 부정과 불법에 그들의 지체를 내어주어 불법에 있었다는 과거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비난하기 위해서 부끄러운 과거를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는 자들도 여전히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성화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붙어 있는 이런 연약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19절과 22절 사이에는 ‘인의’(認義)와 ‘성화’(聖化)의 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19절에서 23절의 중심단어는 “거룩함”(ἁγιασμός)이다. 과거의 해석은 이 주제가 얼마나 위험한 지를 이미 보여주었다. 여기서는 거룩함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것이다.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법정적으로 생각된 인의(認義)는 윤리적 인증의 근거가 된다. 이런 견해는 점진적인 완성 안에 표현된다.
그러나 먼저 필요한 것은 그 용어가 세례 용어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에 따르면 세례 받은 자는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으며, 종말론적인 세계에 속하였기에 “거룩한 자들”(ἅγιοι)이라고 불린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의 세례 양식문에서는 인의(認義)의 상태와 성화(聖化)의 상태를 병행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처럼 유대교에서는 원래 제의적 용어로 사용되었던 용어를 윤리적, 종말론적 언어로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원시 기독교에서는 종말론적 사용이 더 두드러진다. 본문에서 외견상 어떤 발전이 서술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이는 본문이 성화(聖化)를 영위되는 인의(認義)의 일상과제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체와 연관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12장 1절 이하에서 세상의 일상 생활 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규정될 몸의 순종이다. 우리는 15절에서 율법과 은혜, 18절에서 죄와 순종, 20절에서 죄와 의, 22절에서 죽음과 삶이 대립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대립구조에 19절에서의 “불법”(ἀνομία)과 “거룩함”(ἁγιασμός)이 포함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불법’에 내주어서는 안된다. 성화(聖化)는 세속적인 세상과 유혹에 직면하여 자신을 몸으로 나타내는 하나님을 위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를 그의 통치권 안에 두시며,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인의(認義)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관계 안에서, 즉 자신의 세상적 실체 안에서 온전한 인간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원하시고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성화(聖化)에서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본보기로 나타나는 인의(認義)의 이러한 의도와 차원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거룩함”(ἁγιασμός)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이며,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거룩함’의 개념에서 직설법과 명령법이 함께 만난다. 곧 ‘성화’(聖化)는 경험된 ‘인의’(認義)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인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 안에 있는 한 단위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 된 자를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한다.
20절에서는 우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의는 주권의 영역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당연히 속해 있어야 할 영역은 바로 이 의의 주권 영역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의 종이 되어 의의 주권 영역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21절에서 쓰인 “마지막”(τέλος)은 종말의 의미가 아니다. 이 의미는 성취, 결과, 세상의 종말, 목표, 사망 등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의 의미는 종국(終局)을 의미하기보다는 어떤 존재의 태도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열매”는 죄를 섬긴 결과이지, 마지막으로써 묘사된 목표가 아니다. 죄를 섬긴 결과로 주어지는 것은 사망이다. 여기서 사망은 단순한 종말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의 지배 아래서 사는 삶 자체가 죽은 것이요, 하나님의 통치권에 의해서, 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죄에 속박된 삶의 은밀한 종말을 말한다.
22절에서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통치 요구에서 해방되고, 다시 한번 의로우신 주님을 섬기게 된 이후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화를 위한 열매를 맺으며, 그 결과로 예수 옆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와 영생은 세례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윤리적 노력을 기울일지라도 확실히 성취되지 않는다.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에 있어서 완전한 성화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력의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인의(認義)의 판단, 혹은 의의 선물로도 제한될 수 없다. 은혜의 표적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regnum Dei)는 이 구절의 실질적 중심이며, 인의(認義)는 그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인데, 거기서 사람들은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통치’(regnum Christi)와 ‘새로운 순종’(nova oboedientia)에 놓이게 된다.
23절은 22절만이 아니라 앞서 언급된 전체 권고를 요약한다. 내용적으로 23a절은 21절과 관련이 있고, 23b절은 22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삯” (ὀψώνιον)은 보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의 급료를 의미한다. 따라오는 속격은 주어적 속격이다. 죄는 이미 죽음을 지불하고 있다. “은사” (χάρισμα)는 5장 15절에서처럼 특별한 구원의 선물이 아니라, 이미 언급된 것처럼 포괄적인 구원의 선물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모든 특별한 은사가 구체적인 은사로 나오게 된다.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선물인 은사가 주어진다.
2. 12장 1절
로마서를 나눌 때 교리적인 부분과 윤리적인 부분 혹은 신학적인 부분과 윤리적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에 나오는 명령법이 모두 42개가 되지만, 그 중의 31개는 12-15장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명백하게도 이 부분에 권면이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로마서를 교리적 주제들과 도덕적인 주제들로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바울은 12장 1절에서 아주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으로 주제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곧 1-11장에서 먼저 케리그마가 나온 후에 교훈적인 것이 뒤따랐든지, 혹은 신학적 부분이 먼저 나온 후에 윤리적 부분이 나왔다는 순서를 말한다든지 인과관계를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로마서 1-11장의 교리적인 부분 역시 실천적인 부분이 배제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론은 종교적 실천에 대한 이론이며, 이것은 윤리적 문제가 배제되어 고려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로마서 12장 이하에서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이 신학적 부분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롬 14:23). 그러나 바울이 진정으로 의도하고자 했던 것은 12장 1절 시작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 지를 말해줌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백하게 말하려 했던 것이다.
1절의 도입부에 “그러므로”(οὖν)의 의미를 정확하게 발견하는 것은 바울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내는데 필수적이다. 우리는 단순히 “그러므로”(οὖν)를 전환의 표시로만 여길 수는 없다. 이 말은 앞부분과 뒷부분 사이에 긴밀한 관련성과 중요한 논리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οὖν)가 12장 1절에 나오는 구절들이 앞의 11장까지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볼 때, 1절에 나오는 명령법은 앞의 직설법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명령법은 직설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1절에서는 다시 “내가 권하노니”(παρακαλώ)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단어 역시 명령법과 직설법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 주고 있다. 원래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어 “παρακαλώ”나 “παράκλησις”의 의미는 직설법과 명령법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 먼저는 “위로” 혹은 복음의 “격려”의 의미의 직설법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권고 혹은 도덕적 교훈으로서의 명령법적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παράκλησις” 단어 자체는 바울의 설교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측면과 그 결과로서 생기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의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이 사실은 바울 사상에 있어서 분명하게도 직설법과 명령법 사이에 친숙한 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본문의 “παρακαλώ”는 하나의 단순한 훈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훈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διά τών οἰκτιρμών τού θεού) 권고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διά”를 어떤 원인적인 뜻으로 “하나님의 자비의 기초 위에서”라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도구적인 뜻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라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헬레니즘적 희랍어 용법에 대한 고려들과 로마서 12장 3절, 15장 30절, 고린도전서 1장 16절, 고린도후서 10장 1절 속에 들어 있는 바울의 호소들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διά”구(句)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즉시 “자비”가 일반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호의와 보호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자비”는 바울이 로마서 1-11장까지 언급하였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를 말한다. 게다가 바울은 여기서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비가 스스로 말하게 하여서 바울의 권고(parenesis)를 통해서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윤리와 그리스도인 생활의 근거로 새롭게 제시하고, 선언하고, 전하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다.
바울은 지금 이 권고를 불신자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는 어떤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바울은 이미 회심한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기에, 이 의미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행로(行路)의 처음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행로 중에 계속되는 권면을 통하여 끊임없이 개입하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들의 척도요 근거이다. 권고(parenesis)를 포함하고 있는 그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자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σώμα)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요청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몸(σώμα)의 의미는 단순히 ‘육체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첫 번째 예에서 “몸”(σώμα)은 총괄적으로서의 전인(全人)을 말한다. 단순히 이것은 “몸”(σώμα)과 “지체”(μέλη)가 병행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롬 6:12-13). 그러므로 몸은 인간이 삶과 죽음, 병과 성욕을 경험하는 장소이다. 요컨대 몸은 본성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피조성과 지위를 경험하는 장소가 된다. 몸은 살아있고 숨쉬는 인격이다. 이 용어는 인칭대명사로 대치시킬 수도 있다(고전 6:13-15; 12:27). 이것은 “몸”(σώμα)이 간단히 자아 혹은 인격을 대치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 자아는 몸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 앞의 사람은 죄인인 동시에 죄 많은 몸이다(롬 6:6).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헬라인들처럼 몸으로부터 구속을 학수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온전한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롬 8:23; 빌3:21 참조).
그러므로 바울이 권고하는 “몸”(σώμα)의 드림은 단순히 몇 가지 행위를 수정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몸은 단순히 우리의 육신도, 지체도 아닌 전인(全人)이며, 주권이 교체되는 장소이며(롬 6:12),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바울이 요구하는 “산 제사” 역시 전인적 순종을 의미한다. 여기서 살아있으며,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기도와 찬양, 설교로 이뤄진 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예배를 넘어선 우리의 몸과 삶이 의(義)를 섬기도록 내어주는 것을 포함한다(롬 6:18, 22). 진정으로 하나님의 본성(本性)에 응답하는 예배는 육체적인 순종의 행위까지 포함한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이 언제 어디서든지 진실로 하나님을 영과 이성과 마음과 행위로 섬길 때, 그의 창조자이며 자비로운 하나님에게 정의를 행하는 것이 된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자유와 새로운 존재됨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건이요 근본적 변화요 변형이다(롬 12:2, 고후 3:18). 이제 더 이상 인간의 갈등(롬 7:14ff.), 자아의 분열과 분리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이제 근본적으로 갱신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때때로 혹은 어느 정도로만 자신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드리며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권고(parenesis)는 순종하는 특별한 행위나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산 제사를 “영적 예배”(λογική λατρεία)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아는 영적 예배는 성령의 은사와 기적이 나타나며,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예배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는 열광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은 극적이고 기적적이며, 이상하고 초자연적으로 역사 하는 성령이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삶과 외형적으로 중요한 구체적인 모든 일의 본질로서의 성령이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성령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넘겨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예배”(λογική λατρεία)이며, 새로운 세계가 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결국 12장 1절에서 시작되고 있는 로마서의 윤리적 부분은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바울의 사상에 이질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의 교리와 윤리, 신학과 윤리를 서로 대립적인 관계로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구경만 하고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시작과 마지막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행함은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도록 내어 드릴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B. 고린도전서 5장 7절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였다(고전 1:1-2).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서의 윤리는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윤리가 아니라, 믿는 자들을 위한 윤리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다루는 음행, 우상숭배, 이혼, 성만찬의 문제 역시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였다. 고린도전서 5장은 고린도교회의 음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7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직설법)라는 선언과 동시에 “묵은 누룩을 내 버리라”(명령법)는 권고를 하고 있다. 명령법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희생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누룩 없는 반죽”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누룩”(ζύμη)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할례 문제에 있어서 조그마한 일탈이 치명적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누룩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말한다.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5장 6절에서는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위의 묵인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 바울은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말한다. 이때 누룩을 제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하나님은 출애굽 이전에 모든 이집트의 죄악에서 해방을 의미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누룩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다(출 12:6, 15, 39; 13:6; 23:15; 34:18; 신 16:3). 그러나 누룩을 제거하는 것이 곧 출애굽의 조건이 아닌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누룩을 제거하는 일은 누룩 없는 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누룩 없는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의 옛 습관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완전히 새로운 실체로 만들어 져야 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역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다. “그리스도가 희생이 되심”(ἐτύθη Χριστός)이야말로 교회가 순전한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미리 희생의 어린양을 제공하였으며(창 22:8; 요1:29 참조.),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일을 뒤따라 행하는 일이 남아 있다. 결국 묵은 누룩을 제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관련되어 있으며, 명령법은 직설법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C. 갈라디아서 5장
갈라디아서는 1-4장까지 교리적 해설, 5-6장에서 윤리적 적용으로 자유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자유는 서신 전체를 통하여 바울의 주장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기본 개념이다. 5장 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유롭게”(τῇ ἐλευθερίᾳ)라는 의미로 여격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원인과 방편의 여격이 아니라 ‘운명’과 ‘목적’의 여격이다. 그러므로 1절의 “자유롭게”는 5장 13절에 있는 “자유를 위하여”(ἐπ’ ἐλευθερίᾳ)와 병행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순서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에 기초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자유를 주신 목적으로 앞의 것과 다른 “자유”(ἐλευθερία)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과제를 지니게 된다. 인간이 자유하게 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의 기회는 다시 자유로의 과제를 내포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인간에게 자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자유 안에서 존재할 수는 없음을 말하면서, 그 자유의 기회는 오로지 자유를 위한 과제로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된 인간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란 바로 자유를 보존하는 것이다.
이어서 1b절에서는 바울은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명령을 한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현 상태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일반적인 과제를 정의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의 부르심 이후에도 여전히 끊임없는 죄의 유혹 가운데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의 과제는 자유를 “보존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종의 멍에”를 메지 않고 우리의 주권을 성령에게 이양할 때 가능한 것이다. 바울 윤리에 있어서 자유와 성령은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존재가 “자유 안에서”의 존재인 것처럼, 그것은 “성령을 따라”(16절), “성령의 인도를 받는”(18절), “성령을 따르는”(25절) 존재와 동일하다. 이런 이유로 5장 1a절과 13a절, 25절은 서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 자유의 개념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기초이자 내용이다.
1b절은 ἐνέχω를 수동태로 써서 “종속되다,” “짐이 실리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두 의미는 주인 밑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참혹한 복종의 이미지와 노예 된 자가 견뎌야 하는 압박의 무거운 짐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어떤 구체적인 도덕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죄의 권세에게 종속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존재가 된다.
1a절과 13a절은 진술의 의도 면에서 동일하기에 의미상으로 큰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육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바울이 사용한 “기회”(ἀφορμή)는 원래 군사 용어로서 “작전 기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일반적으로 “기회, 구실”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기회가 주어져서는 안되는 적은 “육”(σάρξ)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보존하는 과제는 육체의 힘을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아는 과제로 기술된다. 여기서 바울은 “죄”(ἁμαρτία)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σάρξ)에 기회를 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체는 대단히 복잡하고 애매한 단어이다. 바울이 “육체”(σάρξ)를 말할 때, 이것은 단순히 각 개인의 육체적인 지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 17절에서는 육체를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인조차 피해야할 계속적인 위협으로 그리고 있다. 육체는 한 ‘시대’의 영향과 인간의 전통, 권력의 독점과 관련을 맺는다. 바울은 16절에서 육체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리 몸을 성령의 인도하신 데로 내어주든지, 아니면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다.
이제 13b절에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명령법이 등장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기독교의 사랑의 율법에 스스로를 기꺼이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되며, 자유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을 사랑의 법에 메이게 한다. 이러한 자유의 자발적인 복종은 바울의 사회윤리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유는 기본적인 기독교적 가치이며, 새 시대의 표지이다. 옛 시대는 죄와 죽음, 율법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함이요, 역시 율법에서 자유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고 인정하는 해방으로서의 자유는 죄짓는 허가서(license)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선언도 아닌 사랑을 위한 사랑을 위한 자유이다. 기독교적 자유는 결코 유죄성에서의 자유가 아니고, 사랑을 향한 자유(갈 5:13ff.), 이웃을 섬기는 데와 모든 선행으로 향한 자유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주를 위해 산다. 곧 자유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서의 또는 은총 아래에서의 봉사하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지배는 구원을 줄 수 없는 율법 대신에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종이야말로 참된 자유인이다.
바울은 25a절에서 1a, 13a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설법을 다시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사는” 존재라는 직설법과 함께, “성령으로 행하라”는 명령법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 말씀은 앞서 말한 구절들에다가 명령법을 단순히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명령법은 오히려 직설법에 포함되어 있다. 21절에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육체의 일”(τὰ ἕργα τής σαρκός)의 목록을 나열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육체의 일에 반하는 구체적인 선행을 말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καρπὸς τού πνεύματός) 목록을 기록하고 있다. 육체의 일의 반대는 선행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일을 버리고 구체적인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25절이 말하려는 것은 구원의 조건으로 명령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은 사람들이 드러내는 명령법의 실행에 달려있는 것이라는 오해를 막기 위함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의(義)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바울은 성령으로 “행하라”는 의미로 “στοιχέω”를 사용한다. 이 동사는 군사용어로 “일렬로 정렬하다”, “따르다”의 뜻을 가진다. 이 말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단순히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우선권을 강조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에게 내어준 삶을 요청 받는다. 성령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질서요 규칙임을 보여준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바울은 직설법은 명령법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의 지위에 일치된 삶의 유일한 형태가 있음을 보여준다. 명령법과 직설법의 결합은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한 오직 하나의 선택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이 종의 멍에를 메면, 그들은 그들에게 자유를 사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직설법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선포하거나, 믿는 이들이 구원의 사건 속에 어떻게 참여하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직설법은 명령법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명령법이 필요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성령의 능력과 이끄심, 그리고 성령의 열매로서의 선물조차 행위의 요구를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행위의 요구를 강화한다.
D. 빌립보서 2장
빌립보서 2장 1-4절은 그리스도 찬가를 준비하며, 그리스도 찬가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12절의 권면의 근거를 부여한다. 12절에서 바울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τὴν ἑαυτών σωτηρίαν κατεργάζεσθε)는 명령법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명령법에 앞서 그리스도 찬가를 삽입한 바울의 의도는 찬가 안에서 찬양되는 구원이 권면의 전제가 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먼저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ύ) 품어야 할 마음을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ἐν Χριστῷ Ἰησού) 들어와 있는 존재를 암시해 준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존재로서의 확언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책임을 동시에 부여받고 있다.
여기서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그리스도 찬가를 삶의 표본으로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두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윤리의 ‘동기’(motivation)로 보아야 하는지는 중요한 논쟁점이 될 수 있다. 매스턴(T. B. Maston)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가 예수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4절의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는 권면은 그리스도가 직접 본으로 보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삶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적 본질을 비워서 종이 되었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은 당연히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겸손과 자기 겸허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그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뜬 겸손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높다고 생각해야 한다. 전체 교회가 사랑으로 채워지고 개개인은 자기의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남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빌 2:1ff.)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본’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5절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ύ) 품어야 할 마음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지, 삶의 표본으로서의 따라야 할 구체적인 행위를 언급하지 않는다.
빌립보서 2장 그리스도 찬가는 ‘동기’(motivation)로 해석해야 한다. 케제만은 확신 있게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의 본보기로서의 예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 부인을 보여주는 ‘윤리적 이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의 자기비하(自己卑下)는 그리스도인에게 순종과 자기 부정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기비하(自己卑下)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에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선재하는 그리스도가 신적 지위를 포기함에서 나타난다. 이는 인간의 어떤 모방도 불가능하게 한다. 결국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는 본보기로서의 예수의 지상적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선재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되어 가는’(becoming) 그리스도의 겸손, 성육신을 묘사하는 것이지, ‘되어진’(become)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되어지는’ 것 역시 바울에게서 제외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강조점은 그의 신적 지위와 위엄을 포기한 선재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있다(고후 8:9 비교).
12절은 접속사 “그러므로”(ὣστε)로 시작되고 있다. 12절의 명령법, “너희 구원을 이루라”(τὴν ἑαυτών σωτηρίαν κατεργάζεσθε)는 앞의 그리스도 찬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먼저 바울은 “순종”(ὑπακοή)을 강조한다. 12절의 순종은 당장 앞의 그리스도의 순종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복종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신 것은 곧바로 순종으로 이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역시 자신의 주권을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두렵고 떨림으로”(μετὰ φόβου καὶ τρόμου)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이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 가까이 간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역사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경악이다. 그 때문에 이 표현은 13절로 이어진다.
13절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행하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이는 12절과 상반된 의미로 보인다. 그러나 12절과 13절은 함께 연결된다. 12절의 “구원을 이루라”는 권고와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확언 사이의 긴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긴장은 인간의 활동 능력이 한계에 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며, 이를 넘어서 인간의 활동을 요구한다. 바울이 12-13절에서 요구하고 있는 믿는 자들의 순종은 그들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 되고 피할 수 없는 것이 되며(13절), 그 순종의 특징은 그리스도 자신의 순종에서 드러난 특징이어야 한다.
E.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는 서신의 격식을 뺀다면 명확하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째 부분(1-3장)은 과거에 대한 회상을 그 내용으로 하며, 둘째 부분(4-5장)은 충고와 가르침을 통해서 데살로니가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조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적”인 부분과 “윤리적”인 부분으로 명확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다. 첫째 부분을 살펴볼 때 여기에서 “교리”란 말을 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색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첫째 부분은 궁극적으로는 교리를 다루고 있다. 둘째 부분 역시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그러므로”(οὖν)로 시작된다. 구원의 직설법적 확언의 우선성은 당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직설법은 명령법을 포함하며 정당화한다. 명령법은 근거를 가지고 있는 직설법에 귀를 기울인다. 이것은 특별히 바울 서신에서의 권고 부분의 시작에서 논리적 접속사 “그러므로”를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다.
바울은 4장 1절에서 권고하면서 “주 예수 안에서”(ἐν κυρίῳ Ἰησού)라는 말을 덧붙인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를 “주 안에서”와 바꿔 사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바울은 자주 권고적 상황에서 “주 안에서”를 사용하고 있다(고전 7:39; 11:11; 빌 4:4). 바울이 사용하는 “주”(κύριος)라는 용어는 바울의 윤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κύριος)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가 예배 속에서 그렇게 인정되거나, 혹은 “주의 날”에 그가 오시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바울 이전 전승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근원이시며 능력이신 주(主)인 동시에, 역시 주께 종속적인 상태에서 펼쳐진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 앞에선 권위이다(고전 7:22, 32; 롬 16:18; 14:4). 물론 바울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주”(κύριος)라는 용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Χριστός)를 사용한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 역시 권고적 구절에 나타난다(롬 8:9-10; 고전 3:23). 주로 인해 자유케 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종이다(고전 7:22). 그리스도인은 그의 부름받은 자리에서 순종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월절 양인 그리스도가 희생되었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죄와 세상의 권세를 깨뜨렸기 때문에, 지나가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제거될 수 있으며, 제거되어야 한다. 시대착오적인 옛 시대의 관습은 포기될 수 있으며, 포기되어져야 한다(고전 5:7-8).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도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나타내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다. 5절에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는 직설법적 기술이 등장하면서, 동시에 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는 명령법이 나온다. 빛의 아들과 낮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할 강한 요구를 받고 있다. 8절에서도 역시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護心鏡)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말한다. 이러한 명령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죄의 유혹을 의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옛 세계의 한 가운데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이들은 낮에 속한 자들이기에 깨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를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깨어있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세워줄 때 가능하게 된다(9절).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결되어지고 있다(10절). 그리스도인은 결국 죄와 동행하던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10절)
F. 골로새서, 에베소서
큄멜(Werner Georg Kümmel)이나 메츠거(B. M. Metzger) 같은 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바울의 친서로 취급하고 있지만, 로제(Eduard Lohse)나 맑센(Will Marxsen) 같은 학자들은 바울 후기 서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윤리의 근거대기와 동기 부여에서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가 논의된다는 점에서 바울의 친서와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구조면에서도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같이 두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골로새서는 1-2장과 3-4장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에베소서 역시 1-3장, 4-6장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일단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적어도 바울의 친서가 아니라 해도 바울의 친서와 다르지 않은 구조와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두 서신에 나타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골로새서
당시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심각하게 이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별히 그들 중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여서 사람들은 그에게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천사 같은 권세들이 살고 있어서 이 존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그같은 주장들은 “헛된 속임수”이며,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일이라고 말해주고 있다(골 2:8).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치자와 권세들을 무력하게 하셨으며(골 2:15), 그리스도 안에만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신다”(골 1:19)고 말한다. 중재자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지혜와 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골 2:11), 세례 받을 때에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한 죄의 권세에 복종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강조점을 “이미”(already)에 두고 있다. 골로새 기자는 그리스도가 “이미” 죄의 권세에 대한 통치권을 얻었다고 강조한다. 그 권세는 “이미” 무너졌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 그의 승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골로새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자꾸 이 옛 시대의 권세에 복종하도록 유혹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서 2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직설법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안에서 행하라”는 명령법적 요청을 하고 있다.
특별히 골로새서 3장 1절은 권고의 서두에 직설법적인 구원 진술이 강조되고 있다. 직설법적 기술인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선언과 동시에 “위의 것을 찾으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때 접속사 “그러므로”(οὖν)는 직설법과 명령법을 결합시켜 준다. 이러한 결합을 보면서 샌더스(J. T. Sanders)는 직설법 안의 명령법은 인위적으로 결합되었다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골로새서에서 신학과 윤리 사이에는 아무런 내면적 일치를 찾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러므로”는 명백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근거가 됨을 말해준다. 여기서 구원의 선언으로서의 직설법은 윤리적 결단을 요청하는 명령법의 근거가 되고 있다.
바울이 1b절에서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지상의 공동체가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1c절)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2절에서도 동일하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세상을 버리는 금욕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것”(τὰ ἄνω)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위’에 속한 사람이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선물을 수여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요청을 받는다.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너희가 죽었다”라고 확언하면서, 동시에 5절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만약 옛 본성이 죽었다면 그 지체 역시 죽어야 한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골 3:3)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의무를 수반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옛 본성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성”으로 갈아입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이전에 옛 본성을 가졌던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구원의 직설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 본성”에 합당한 삶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법으로도 볼 수 있다. 골로새서에는 이렇게 직설법과 명령법이 통합되어 나타나며, 직설법은 명령법의 근거로서 먼저 제시되어지고 있다.
2. 에베소서
에베소서의 여러 구절에서도 역시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5)라는 직설법적 기술은 곧바로 교회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는 권고의 명령법과 연결된다. 또 앞에서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마찬가지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는 직설법과 명령법이 “그러므로”(οὖν)로 결합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1절은 이론적인 면에서 보다 실제적인 문제로 전화되고 있는 로마서 12장 1절과 매우 비슷한 구절이다. 여기서 “그러므로”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교리적인 부분과 실제적인 부분을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미는 교리와 윤리, 신학과 윤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에베소서 2장 8절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철저히 행위와 관련이 없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수 없다(엡 2:9). 그러나 곧바로 10절은 우리가 지음 받은 이유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행함이 철저히 구원에 있어서 배제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행함은 철저히 구원의 열매가 되고 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8절에서는 “너희는 빛의 자녀라”는 선언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권고가 한 구절에 등장한다. 여기서 에베소서 기자는 “주 안에서”(ἐν κυρίῳ)를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엡 5:8-9).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행동 자체는 그리스도인의 응답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스도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한 사람”(엡 3:17)은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사랑해야 할 윤리적 과제를 가진다(엡 4:2; 5:2). 여기서 그리스도는 행함의 동기(motivation)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예에서는 동기를 주는 관계가 아니라 일치의 관계를 함축한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요구되어지는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이다. 32절에서 에베소서 기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권고한다.
G. 신학적 결론
믿음과 행함을 시간적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두 관계를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원래 사상과 크게 다르다. 인의(認義)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며, 인의 뒤에는 필연적으로 성화(聖化)가 뒤따라와서 전자를 확증해 준다고 쉽게 결론을 내려서도 안된다. 인의는 단순히 성화의 전제도 아니며, 성화는 인의의 결과도 아니다. 인의와 성화는 따로 분리할 수 없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여기서 인의는 의롭다 여김을 받아 구원받은 사건인 동시에,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에게로의 주권교체가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은 인의를 통하여 구원받은 존재가 됨으로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여기서 ‘죄로부터의 자유함’은 인간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의미한다. 이는 결코 방종을 위한 자유함이 아니라, 또 다른 순종을 위한 자유함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면서, 동시에 전인(全人)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새로운 종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주권을 이양하고 새로운 종살이를 경험하면서 늘 새로운 인의를 다시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인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원의 선언으로서의 직설법은 여기 명령법과 분리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말하는 직설법은 단순하게 명령법의 전제가 아니요, 명령법은 단지 직설법에서 유래되어 나온 것이 아니다. 명령법은 선물 받은 자에게 그에 대한 확증으로 순종을 요구하게 되며, 직설법과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직설법과 명령법은 분명히 구분되어지나 분리되어질 수 없는 것이며, 서로 통합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義) 역시 단순히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Heilsgabe)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선물’인 동시에 죄 아래 떨어진 전 피조세계를 구원하시는 창조주의 ‘구원의 능력’(Heilsmacht)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새 역사를 이루며, 칭의와 은총 아래 선 자들을 종말론적 의(義)의 삶으로 초대한다. 용서와 화해로 다가온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다시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의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러므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들은 이제 그들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사용하도록 ‘의의 봉사’로 부름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역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받는 은총의 선물(Gnadengabe)이면서, 전세계를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갱신하는 구원의 동적 능력(Heilsmacht)이다.
V. 바울서신에서의 믿음과 행함
바울에게 있어서 결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직설법과 윤리적 요청으로서의 명령법이 서로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 역시 서로 구분되어질 수 있지만, 분리될 수 없다. 물론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함 중에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행함을 약화시켰다고 보기는 힘들다. 바울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롬 5:1)라고 말한 것은 행함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바울이 염려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는”(롬 10:3) 사람들의 태도였다. 그러기에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 의를 위한 행위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순종적인 행함은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바울이 결코 행함을 약화시키지 않았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일반적으로 ‘믿음의 의’를 강조하는 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서신들에서조차 적지 않은 분량을 윤리적 교훈에 할애하고 있다. 이 윤리적 교훈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 교훈들을 무시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윤리적 교훈은 바울의 사상이 아니라는 전제와 만약 바울의 것이라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이 전제가 성립되지 않고서 함부로 바울서신에서의 윤리적 교훈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전제 모두 거부될 수밖에 없다. 결국 바울의 윤리적 교훈들은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함부로 무시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윤리적 교훈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인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인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바울의 윤리는 철저히 믿는 자들을 위한 윤리이다. 바울서신이 주어진 자리는 일단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롬 1:7)들이 모여있는 공동체이다. 빌레몬 서는 가장 사적인 서신인 것은 사실이지만, 수신자는 빌레몬 개인이 아니라 가정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서신임이 분명하다(몬 1:1-2 참조). 그러므로 모든 바울의 서신은 공동체에 주여졌으며, 특별히 믿는 자에게 주어졌다. 바울은 결코 믿음 없이 구원으로의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믿음을 “마지막 완성”으로 보지 않았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하며, 순종은 더 큰 믿음을 가져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성장하도록 한다. 결국 행함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요구되어진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의 행함은 더 큰 교만으로 나아가게 하는 “자기의 의(義)”를 세우는 길이지만, 믿는 자들의 행함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며, 온전한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행함은 믿음으로 인해 아무런 장애없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코 행함은 인과관계(因果關係)적으로 믿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갈 5:16, 18, 25) 행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바울이 명령법으로 요구한 것은 구체적인 도덕률 이전에 주권을 성령에게 이양하도록 요청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은 인의 이후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죄의 권세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여전히 연약한 본성을 가지고 사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는 무엇을 하고, 하지 않음으로 인해 궁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죄와 성령의 다툼의 장(場)이 되는 “몸”(σώμα)을 의에게 드림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요컨대,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함을 결코 배제하지 않으며, 바울이 말하는 행함 역시 믿음을 배제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행함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믿음과 행함, 인의와 성화, 직설법과 명령법을 결코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으며, 둘을 서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VI. 결론
한국교회는 지난 선교 114년 동안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히 신학적 강조는 믿음에 놓이게 되었고, 이것은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믿음에 따른 행함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못하였다. 더구나 7, 80년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과격한 시위와 신학의 좌경화(左傾化)는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로 하여금 행함보다 믿음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하였고, 행함은 더욱 소외되어져 왔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교회는 사회의 아픔을 잊게 하는 도피성(逃避城)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는 모르나, 사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119 구조대(救助袋)’의 역할은 잘 감당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80년대 이후에 한국교회가 별다른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바울의 신학과 윤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교회에서 깊은 신앙 훈련과 함께 올바른 생활 훈련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한국교회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에 단호히 대처해야 함과 동시에 믿기만 하면 된다는 행함 없는 “믿음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바른 신학적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어질 수 없듯이 신학과 신앙, 신학과 목회, 신학과 삶은 분리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행함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믿음의 교육을 수행할 책임이 있으며, 교인들로 하여금 효과적인 전도자가 되게 하는 기술에만 관심을 기울여 재생산을 위한 기계적인 교육을 탈피하고, 죄의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신앙훈련을 감당할 책임이 있다.
둘째, 한국교회는 바울서신에서만 아니라 공관복음,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요청되고 있는 사랑과 섬김의 실천의 장(場)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번 IMF는 한국교회가 이제껏 행함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음을 깊이 반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주신 기회이다. 어려운 사회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곳은 증가하고 있으며, 한국교회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라는 주님의 명령에 적절히 응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이는 자연히 교회로 하여금 이전까지 한국교회의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회개하도록 하며, 잘못을 수정하여 좀더 성숙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 기회를 선용하여 한국 사회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하며,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지 않은 주님의 섬김의 공동체로 새롭게 세워져야할 과제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바른 행함의 본보기로서 섬김의 종,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 섬김의 종으로서 본(本)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삶 전체를 모방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요, 신이시면서 하늘을 버리고, 지상에 오셔서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셨던 것은 하나님께 철저히 “복종”하는 삶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는 말로 자신의 삶의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고난, 섬김, 수난과 부활, 영광 받으시는 모든 행위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다. 섬김의 종으로 오셔서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죽기까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오늘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의 촉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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