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중한담(茶中閑談) 6- 본편과 문답편
-박현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 여섯 번째
(2023년 11월 19일 14:00, 지유명차 청담점)
우리 삶에서 육체적 진화의 과정으로 보자면, 원숭이까지의 과정과 사람으로의 출발 사이에 외형적으로 보면은 약간의 진보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의식 작용으로 보자면 거대한 강이 그 사이에 있는 점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삶을 이끌어간다는 게 참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훈련되어서 주어진 대로, 설계된 대로 살아가는 것 하고, 즉 설계된 데에 따라서 훈련만 더 받아서 익혀서 살아가는 것 하고, 설계 자체가 불확정적으로 이루어진 생명하고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인간이 좀 더 스스로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사실 거기 있지 않을까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확정성과 불확정성
이렇게 살면은 차이가 생겨요. 사람이 훈련되고 설계된 삶의 방식 즉, DNA에 의해서 규정된 방식에 의해서만 살아간다면, 물론 인간도 DNA에서 규정된 대로 살지만 (인간에게는) 그 규정이 규정이 아닌 불확정이에요. 근데 규정된 것에 의해서만 살면은 예측이 가능해져요.
굳이 바람직한 비유는 아니고 좀 우악스럽게 비교를 하면은, 잘못된 비유인 걸 알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학교를 갔는데 법대를 갔어요. 법대를 갔는데 열심히 공부하고, 대충 덜 열심히 공부하고, 아주 대충 공부해도 그 차이는 우등생과 좀 공부 못한 학생의 차이예요. 법대라는 프로그램은 불확정성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확정돼 있는 그런 커리큘럼이거든요.
그런데 어떤 학생이 철학과를 갔어요. 철학과도 물론 철학과로서 주어져 있는 커리큘럼이 있죠. 하지만 철학과의 근본은 자기의 사고를 자기 마음대로 넓힐 불확정성이 많은 과죠. 그래서 나중에 그 학과를 졸업할 때는 스승과 제자가 되어서 나와요.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아무튼 비유를 위해서 드린 말씀이고, 정말 부적절한 비유라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게 되면 예측이 어쨌든 쉬워요. 법대를 간 사람이 예외적으로는 있을 수 있겠지만, 아까 제가 부적절한 비유라고 했으니까요. 느닷없이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돼서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죠.
동물은 그런 면에서 설계된 대로 예측이 정말 가능해요. 이런 것도 가능해요. 사람이 순수하게 동물로서 주어진 DNA가 불확정성 즉 가소성이 아니고 확정성으로 살아간다면, 물을 3일만 안 먹으면 죽게 돼요. 그리고 음식을 3주일만 안 먹게 되면 죽게 돼요. 근데 그렇게 해서 음식을 3주 안 먹었다고 죽었으면 고래(古來)에 면벽 수행하던 사람 중에서 일찌감치 죽은 사람이 많아야겠죠. 그리고 물도 끊고 곡기도 끊고 했으니까, 물을 3일 안 마시고도 죽는 사람은 수두룩해야겠죠. 인간은 잘 안 죽어요.
그런데 훈련된 삶을 살아왔고 거기에 의해서 자기네 동물적 DNA에 의해서 규정된 삶을 살아왔다면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있기 때문에 그런 기초 하에서 성립을 시킬 수밖에 없는 학문들이 있죠. 의학도 사실은 그런 학문인 거고, 우리가 쓸 수 있는 다양한 노동과 관련된 생활,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학문들이 그런 전제 하에서 성립이 돼 있죠.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을 가소성 있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대부분의 공개된 삶의 형태는 동물적인 패턴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죠. 그 모순 속에서 살고 있는 거죠.
동물적이라는 전제에서 보는 몸
그렇게 살고 있는 상황 속, 즉 동물적이라는 전제하에서 일단 사람 몸으로 한번 들어가 봅니다.. 어쨌든 가소성적인 삶을 살아도 동물은 동물이니까요. 동물로 들어가면 우리가 일단 물이라든가 흙이라든가 공기라든가 하는 데서 에너지원을 안에 투입을 하죠.
에너지원을 투입 하면, 그것을 다른 다양한 기관들이 받지만 공기를 제외하고는 대개 위(胃)가 받아내죠. 위가 받아내서 아래로 내보낼 수 있는 정도만 다듬어가지고, 그 아래의 ‘밸’로, 즉 ‘허벌’로 내려보내죠. 즉 소장과 대장으로 내려 보내죠. 그러면 이미 위에서 어느 정도 다듬어 놔서 준비가 돼 있지만, 소장과 대장을 거치면서 이제 많은 에너지들, 대개 거친 에너지들을 만들어내죠. 그 들이 주축이 돼서 에너지가 생산이 된 거죠.
그리고 에너지를 다 얻고 나서 남는 찌꺼기는 내보내죠. 남는 찌꺼기라고 하지만 각각의 동물에게 주어진 남는 찌꺼기인 것이지, 우주적으로 남는 찌꺼기는 없죠. 그렇게 내보내죠. 그렇게 해서 그 에너지를 그대로 소비하면 좋겠는데, 인간의 생명은 상당히 정밀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기관들을 가지고 있죠.
정밀하게 봐야 되는 눈이라든가 코라든가 귀라든가 입도 있지만, 더 정밀하게 의식 작용도 이루어지죠. 그리고 그 정밀한 의식 작용을 통해서 신경 작용이 이루어지죠. (신경과 관련) 우리가 자율과 비(非)자율을 나누기도 하지만, 사실은 안 움직여서 비자율이지 엄밀하게 못 움직여서 비자율은 아닐 수 있어요. 안 움직이는 걸 전제로 했을 때 비자율이지 움직이려고 하면 못 움직이는 신경은 아니에요.
아무튼 그렇게 신경을 통해서 사지와 다른 부분들을 작동 시켜서 소비를 하죠. 그러니까 에너지가 생산되고 그리고 에너지가 소비되는데, 실제로는 소비되는 게 100% 뇌인지도 몰라요. 한 40년 전에 영국에서 어떤 대학생이 머리 아파가지고 병원에 갔더니, 머리가 막 부풀어오른 느낌에서 병원에 갔더니 엑스레이를 찍었겠죠. 뇌가 없었죠. 근데 IQ가 127이에요. 그런 예가 많지는 않지만 심지어 심장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일반 평균성에서 봤을 때는 다양해요. 어쨌든 의식 작용을 주로 담당하는 신체적인 부여 기관이 주로 머리라고 보고 소비를 하죠.
그리고 소비가 될 수 있도록 에너지들을 정밀하게 전환시켜주는 장치들이 가슴에 있죠. 피로 만들고 체액으로 만들고, 그래서 어떤 것들은 다시 거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데 쓰이기도 하고 노동을 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자체로서 두뇌를 움직여서 의식 작용에 써먹기도 하고, 다양하게 써먹죠. 그러므로 크게 보면 에너지를 만들고,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전환시키고 하죠. 여기서 엄밀하게 말하면 거친 에너지는 열량으로밖에 계산이 안 되죠. 정밀한 에너지가 되어야 이제 열량 이상의 것으로 측정이 되겠죠.
아무튼 그게 전환되고 쓰는 거죠. 이렇게 쓰는 특징이 동물의 특징이죠. 모든 동물이 거의 그런 것 같아요. 대다수의 동물이 그런 것 같은데, 특히 인간의 경우에는 더 해요. 늘 습관적으로 과소비를 해요. 유전적으로 과소비 패턴을 가지고 있어요.
과소비 패턴 속의 몸
생산된 에너지를 기초로 해서 처음에는 조금밖에 못 쓰죠. 어릴 때는 완성체가 되어가기 즉, 성인 개체가 되어 가기 전까지는 다 쓰라고 해도 다 못 쓰죠. 다 쓰거나 고갈되면은 그냥 뻗어 자버리죠. 그러면 또 생산이 되죠. 그 사이에 그러면 또 쓰고 하죠. 그래서 어릴 때는 더 쓰지 못해서 안달이 날 정도의 상황이에요. 에너지는 충분히 생산이 되는데 그 에너지를 주체 못하고 쓰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에너지를 점점 더 많이 쓰는 훈련이 이루어지죠.
이 훈련이 바로 성체가 되어가는 과정이죠.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 이게 관성에 걸려요. 에너지를 과용으로 쓰게 되는 훈련이 성장 과정이라는 거예요. 성장 과정을 거치지 않는 인간이 없고 동물이 없기 때문에, 성장 과정의 길이라든가 훈련이라든가 그런 거에 따라서 에너지를 과용하게 되는 관성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언젠가 성체가 되고 나면은 에너지 생산량이 더 늘어나지는 않죠. 어릴 때는 에너지의 생산량은 계속 늘어나죠. 일정 정도까지 성장이 완료될 때까지는, 아직까지 의식 작용이라고 하는 소비 작용으로는 덜 쓰게 되죠. 그래서 그만큼 쓰기 위해서 계속 의식의 소비 작용은 늘어나죠.
근데 어느 순간, 에너지의 생산이 멈춰버린 거예요. 더 먹지도 못해요. 더 소화도 못 시켜요. 사람의 경우 심지어 20대 후반이 되면,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에너지 생산이 줄어들기 시작해요. 그리고 40대 후반, 50대로 가면 아주 독특하게 급격하게 에너지 생산이 줄어들죠. (앞에 앉아 계신)우리 이선생님 같으신 분은, “나는 50이 넘어서 더 많이 먹게 되더라!” 할지는 몰라도, 생산이 더 되지는 않아요.
생산이 더 되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아무튼 생산은 더 안 됩니다. 근데 관성은 계속해서 작용해서 어느 순간에 에너지 소비 그래프의 소비도가 더 높아져 버려요. 그 격차가 딱 일어나는 게 서른 좌우간이에요. 서른 좌우간인데 그때부터는 과소비에요. 얼마나 생산하든 상관없이 써요. 쓰고 또 쓰고 써요. 계속 써요. 그래서 한계가 올 때까지 과용을 해요. 그 과소비가 일정한 괴리가 생길 정도로 일어나면 노화가 본격적으로 오는 거죠.
노화만 올 뿐 아니라 병도 오겠죠. 따라서 그러한 프로그램 상에서는 병이 곧 노화예요. 노화는 곧 병이에요. 과잉 소비에서 올 수밖에 없다는 거죠. 우리가 상성하허(上盛下虛)라고 한다면, 쓰는 것이 생산하는 것보다 크다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보면 성장 과정에서의 어찌할 수 없었던 관성 작용이라는 거예요.
이걸 안 멈춰주면은 막 빼 쓰죠. 막 빼 쓰는 게 언젠가는 한도에 다다르죠. 근데 어느 정도는 빼서 쓸 수 있는 건, 들어간 거친 에너지가 정밀 에너지로 전환됐을 때 그 에너지는 어느 정도 축적도를 가지고 있어요. 축적된 걸 빼먹죠.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에너지가 들어가주면 되는데 그러다 보면은 우리는 모순에 걸리게 돼요.
의식 작용을 열심히 해서 소비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먹는 일 이외에 다른 걸 하겠다는 뜻인데요. 근데 거기에 맞춰서 에너지를 계속 생산하려면 먹기만 하고 살아야 돼요. 자체 모순이 걸리는 거죠. 계속 먹었다고 해서 또 소화를 시킬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결국은 상성하허(上盛下虛)가 생겨요. 이 상성하허가 생기면 언젠가는 아까 말씀 드린 병이 오고 노화가 오죠.
제가 농담으로 그런 얘기하거든요. ‘나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왜 이렇게 잘 풀리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니라 다음 생에 나라를 구한 어음을 끊으시고 있는 거예요. 전생에 나라를 구한 대가를 지금 받는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고, 우리의 인생은 기본적으로 다음 생에 갚아야 될 어음을 지금 끊으면서 살고 있는 거예요. 어음이 잘 끊기는 걸 놓고,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하는데, 그러면 나라를 팔아먹었을 거예요. 나라를 팔아먹고 나서도 이렇게 나라를 구한 듯한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은 다음 생에 나라를 두 번 구해야 된다는 어음이 있는 겁니다. 절대로 내가 전생에 좋은 일을 해가지고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일단 기본적으로 위험하다는 거예요.
에너지 전환 체계에서 문제 발생
그렇게 되니까 이제 이 에너지를 전환시키는 데서도 급하게 고갈이 나요. 모든 에너지는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공간과 시간을 점유해야만 에너지다워져요. 시간과 공간을 일정하게 점유하지 못한 에너지는 양질의 에너지일 수가 없어요. 너무 묵히면 썩겠지마는 지나치게 묵히지 않는 생 에너지도 좋은 에너지는 아닐 수 있어요.
근데 묵은 에너지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아요. 즉 정제를 거듭한 에너지가 아니라 생 에너지가 계속 공급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위에서 소비를 하는 기관에 불량 에너지가 들어오는 거죠. 옥탄가 97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옥탄가 93짜리 저급 휘발유가 들어오는 거죠. 고급 휘발유가 올라오는 게 아닌 거죠.
그러니까 전환체가 더 이상 고급 휘발유를 생산하지 않는 전환체가 되는 거죠. 이게 점점 망가지는 거죠. 망가지니까 더욱더 격차는 지속이 되겠죠. 그래도 멈추지 않아요. 언제까지? 아파서 쓰러지거나 죽을 때까지 그러고 살죠. 그리고 아차! 하고 느꼈을 때는 상당히 많이 온 이후죠.
그래서 그런 에너지를 이제 소비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가 성하고 아래가 허한 이 습관성에 의해서 과용이 되고, 그래서 이 전환을 시켜주는 부분이 망가지죠. 망가지면 거친 에너지를 많이 생산해도 예전에 열(10)의 에너지가 올라갔다면 이제는 일곱의 에너지밖에 못 올라가는 거예요.
이 전환 기관도 망가지니까요. 그런데도 안 멈춰요. 그러면 나중에 어떤 순간이 오느냐? 잠을 자도 신통치 않죠. 위에다 다 쓰니까 그나마 있는 것마다 다 당겼으니까, 다른 데 가야 될 에너지까지 당겨쓰는 거죠.
일정 순간부터 손발 끝도 차가워지고 말도 잘 안 듣고 뻐덕뻐덕해지죠. 생생한 에너지가 가서 몰랑몰랑해야 되는데, 손톱이 굳어지고 갈라지죠. 젊은 분들 손톱이 갈라지고 굳어지는 것은 자꾸 네일 아트를 받아서 그런 겁니다. 연세 드신 분이 그렇게 갈라지고 하는 것은 네일 아트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상관없이 헷갈리고요. 아무튼 그렇게 되죠.
그래서 어느 순간에 오면은 손발 끝에서 조금만 냉기가 있어도 안 데워져요. 끝까지 자체적으로는 안 데워지니까 어떻게 해요? 안 식게 만들어야 되는 거죠. 수면양말 신어야 잠을 자요. 그리고 따뜻한 데 발을 집어넣어야 돼요. 왜? 다른 데 쓰느라고 이제 나한테 올 게 없는 거예요. 손발 끝으로 올 게 없는 거예요. 없는 걸 알고 나중에는 아예 자기가 자기 기억을 해요. 모든 세포는 자기 기억을 한다고 봐야 돼요.
이제는 기대도 안 해요. 안 올 거 알아요. 안 올 거 아니까, 심지어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미리 발끝이 시려요. 진짜 날씨가 추워져서 시린 게 아니라 미리 시려요. 아니까 그래요. 여기에도 이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가끔 있을 텐데요. 어느 해부터인가 겨울이 되면 이 정도 온도에 내가 뭘 입어야 될지에 대한 판단이 안 서는 상황이 딱 와요. 그러면 이제 많이 식은 거예요.
‘내가 예전에 5ºC 정도 이 정도에 어떤 옷을 입었던가?’ ‘올해는 그것을 입으면 왠지 안 될 것 같은데!’ 왜 웃으시죠? 실감이 팍팍 나시나 봐요. 60대 후반이 그렇습니다. 그것도 습관이 되면 나중에 안 시려요. 왜? 뻔한데! 대충 안 시리다고 생각하고 안 시릴 방법을 강구해서 살아요. 잔꾀는 많거든요.
상성하허로 인한 구체적인 질병의 증후들
아무튼 그렇게 해요. 근데 그렇게 해도 어느 순간 안 멈춰요. 여전히 분배해주지 않고 독점적으로 써요. 그렇게 노화가 되면 병이 다 들 수밖에 없죠. 여러 병이 듭니다. 당장 밑에 에너지를 생산 못하는데 위에서 가용해 쓰잖아요. 가용해 쓰면은 장(腸)도 에너지를 빨리 생산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어요. 이미 40대가 되기 시작하면 위의 작용이 느려지잖아요. 15분 만에 하는 소화가 30분으로 늘어나잖아요.
근데 이걸 어디서 해결하느냐? 위(胃)에서 해결이 안 되죠. 그러면 장에서 빨리 보내는 거죠. 장 과민성이 오는 거죠. 장 과민성이 오면은 변비 아니면 설사가 오는 거죠. 장 과민성이 오면서 변비 아니면 설사가 올 뿐만 아니라 그 장의 표피에 여러 가지 병이 생길 수밖에 없죠. 염증이 생기죠.
그러니까 에너지의 과잉으로 말미암아서 속도를 상실했을 때, 그때 인체에 생기는 게 염증이거든. 모든 염증은 인간의 몸에서 소비될 에너지를 과잉으로 생산할 때 생겨요. 왜 과잉으로 생산하느냐? 모자라니까! 쓰고 있는 것보다도 만들어 놓은 에너지가 모자랄 때는 어디서든 간에 그런 염증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염증 물건을 먹든 말든 간에요.
염증이 생기면 일단 몸은 알아요. 위험한 상황 같다는 것을! 그때부터는 몸을 지키기 위한 경찰력이 조직이 돼요. 그래서 염증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 그게 문제가 안 되도록 굳히기 작업에 들어가고 그러면 염증이 굳어지기 시작해요. 보호받기 시작해요. 즉 작용하지 않도록 보호받기 시작하고 그것이 굳어져요. 그 경찰력이 확장이 심하게 되면 그게 암이에요. 암의 기본 원리는 그래요. 여기 의사 선생님 계시지만 그냥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상성하허에 따르는 병들이 생기죠.
에너지 작용의 잘못으로 생기는 가슴의 병적 증후들
그 다음에 여기 (가슴에서)는 너무 다양한 병들이 생길 수밖에 없죠. 여기 가슴에서는 어떨 때 병이 생기느냐? 이 경우는 에너지를 왜 쓰느냐 즉 에너지를 쓰는 방향을 봐야 돼요. 사람의 정신 작용에서 에너지는 크게 세 가지 작용으로 쓰여요. 일반적으로 쓰이는 필수적인 작용 말고 대개 동물적일 때 어떻게 쓰이느냐?
억울한데 참아야 할 때 에너지가 많이 소모돼요. 억울한데 참아야 돼요. 시어머니가 구박을 하는데 억울하긴 하지만 그 집에 있으려면 참아야 돼요. 교장 선생님이 꼬투리를 심하게 잡고 구박을 하는데 학교에 있으려니까 참아야 돼요. 그렇게 참으면 하나의 에너지 소모가 과하게 일어나죠.
또 하나는 참는 게 일이에요. 인정이 돼요. 참아야 된다는 사실 자체가! 안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참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기가 인정하고 참을 수밖에 없어요.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요.
나머지 한 가지는 에너지가 언제 소모되느냐? 이걸 해 저걸 해! 때려치워 말아! 갈까, 가지 말까! 이렇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때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소모돼요. 근데 이 에너지 소모들은 각각 이 가슴 부위의 중심부와 아래 위 경계 부분에서 병을 만들어요. 엄청난 염증을 만들게 되고 그리고 그걸 굳히는 암 종류도 발생해요.
내가 억울한데 참아준다, 하고 참잖아요. 어느 날 목에 염증이 생기고, 목이 굵어지고 갑상선 같은 게 느껴지더니 갑자기 병원 갔더니 갑상선 암이래요. 그러니까 가슴의 상층부, 가슴의 경계 부분에 있는 것이 목이죠. 목은 가슴에 속하지 않지만 가슴에 붙어 있는 부분이죠. 그래서 갑상선은 목 꼭대기에 생기는 게 아니고, 가슴 부위에 붙은 뚜껑처럼 생긴 그 지역에서 발생해요.
‘내가 이걸 참긴 참는데 내가 참아야 되니까 참는 거지.’ ‘그래, 오늘도 잠복하자. 내가 직업이 형사니까’ 잠복하며 참는 거 엄청 힘들어요. 화장실을 언제 마음 놓고 갈 것이며, 뭐 하나 제대로 먹을 것이며,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기계가 알아서 잘 생산하는데 난 지켜보고 있어야 돼요. 어느 순간 저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킬지 모르니까, 화장실도 마음 놓고 못 가요. 성격에 따라서 에라 모르겠다 돌아가든 말든 간에 내 책임 이기만 하겠냐고 자빠지면 되는데요. 이제 그렇게 자빠지기 시작하는 시대가 우리 시대죠. 한도에 왔기 때문이죠. 사회적으로도 인정될 정도로 왔기 때문에 그런데요.
어쨌든 그런 분들의 그런 경우에는 가슴의 아랫부분 그리고 배의 윗부분인 위(胃), 위나 췌장이나 횡격막이나 아니면 신장에 문제가 발생을 해요. 얼핏 보면 저 사람 잠복하느라고 맨날 제대로 못 먹어서 위암 왔나 보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요즘은 연예인도 아니면서 더 길게, 일주일에 124시간 노동한다는 사람이 있던데요. 정치평론가들이 그런답니다. 워낙 일이 많아 불려 다니기 바빠서요. 그게 돈이니까. 그런 사람도 결국은 위나 신장 등에 문제가 생기겠죠.
아무튼 자기 돈 벌려고 인정하니까 참는 거죠. 그건 억울할 거 없잖아요. 통장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면서 밤샐 테니까. 그래서 나중에 보면 어떤 정치 평론가는 여기서 하는 소리와 저기서 하는 소리를 다르게 하고 그래요. 자기도 헷갈리는 거죠. 아무튼 연예인들도 그렇고, 그런 직업들의 사람들은 대개가 다 위에서 문제가 발생을 해요.
그 다음에 살다 보면은 나름대로 이런 데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이런 데서 문제가 발생하면 가슴이 한가운데서 문제가 연결돼서 발생해요. 내가 이걸 계속 해, 말아, 다른 걸 해버릴까 때려치우고 저 집구석 때려 치워버리고 다른 남자 찾아볼까, 시어머니 싫어서, 내가 여기서 밤새기 싫어서 다른 직장 한번 뭐, 월급 반밖에 안 줬다 가볼까?
근데 현실은 쉽지 않죠. 그럼 더러운 남편 하나 떼내 버리기도 쉽지도 않고. 시어머니 혹부터. 그리고 벌어 갖고 빌딩을 샀는데 참을 필요 없는 다른 일로 전환하기에는 연예인의 자리가 너무 또 매혹적이기도 하고. 자기는 힘들다고 하지만 범인 잡아 갖고 앞에 놓고 조서 꾸미면서 막 그 대장질 할 때 그 분위기. 또 거기다가 집에서 그만두면은 또 뭐라 할 테니까. 선택이 쉽지는 않아요. 선택이 지속적으로 오락가락하죠.
그럴 때는 가슴의 정 중앙에서 이 변전기의 정 중앙에서 문제가 발생해버려요. 간, 폐, 심장에서 문제가 발생해버려요. 병은 그렇게 해서 와요. 이제 못 쓰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건 탈난 거죠. 탈났지만 엄밀하게 보면은 병이 난 거죠. 병(病)과 질(疾)과 환(患)이라 그런다면은 질이지만은, 엄밀하게 보면은 원칙적인 원리에 의해서 생긴 병들이죠. 생긴 것은 간에 생겼고 심장에 생겼고 폐에 생겼을지 몰라도 거기에 생긴 이유는 선택의 문제일지 몰라도 근본은 에너지를 과용함으로써 생긴 거죠. 상성하허에서 온 거죠.
상성하허 탈출을 어렵게 하는 구조
이렇게 되니까 겉은 청춘인데 속은 점점 삭아가죠. 그게 우리 현실이고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도전을 해야 되는데 도전을 쉽게 못하죠. 도전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서 “이런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강요된 선택에 의해서 망설이느냐? 왜 망설이느냐? 왜 참느냐?”
거기에는 피라미드가 있어요. 제일 꼭대기에 돈 많고 권력 많은 사람, 그 다음, 그 다음, 그 다음, 밑바닥. 이런 피라미드가 존재해요. 피라미드가 있는 세상에서는 그 선택이 결코 쉽지 않아요. 입는 것도 명품이 있고, 저기 유니클로도 있잖아요. 아니 유니클로보다 더 싼 것도 많아요. 요즘 뭐 태무나 알리에 가면 7천 원짜리 8천 원짜리 자켓도 많아요. 근데 사실 품질도 비슷비슷해요. 바느질을 뒤집어 보면은 어디는 실도 제대로 안 해놓고 뭐 대충 원단도 이상한 거 쓰고 하지만 있는데 솔직히 그게 뭐 대수예요. 옷 끝에 마무리 오버로크(overlock) 안 쳐놨다고 해가지고 뭐 손 집어넣고 뺐다고 해서 그걸 다를 것 같아요? 어차피 비싼 옷도 그거 닳을 때까지 안 입을 거면서요.
어쨌든 그런 계급도가 존재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강요의 가능성, 과소비의 지속의 가능성 등이 계속 존재하죠. 거기에 대한 극단적인 현상이 한국에서는 ‘강남문화’라는 거예요. 여기 (청담동도) 강남이지만요. 강남문화란 뭐냐? 그런 데서 못 벗어나게끔 사람들을 선전 선동하는 하나의 간판이죠.
강남에서 학교 다녀야 되고, 강남에서 살아야 되고, 강남에서 약속하면서 차 마셔야 되고 그리고 강남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에 어울리는 옷 입어야 되고, 거기에 해당되는 소비 생활을 이어가야 되고, 거기에 어울리는 주거 생활을 해야 되고 등등 전부 다 인생을 소비하는 거죠.
그렇게 인생을 소비해서 얻은 것은 두 가지죠. 내가 놓고 가야 될 수많은 것들과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생긴 나의 병이죠. 얻은 것이 있으면 병이 있음을 싫어하면 안 돼요. 자기 결과물이에요. (청담) 점장님이 입고 계신 옷 상표를 제가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는데, 근데 요즘에 보면은 저런 문화가 생겨나요.
그래도 탈출하는 젊은이들
그러니까 저런 (옷을 만드는) 친구들은 아예 비싼 고가품이라는 것을 옷 취급을 안 해요. 옷으로 안 봐요. 그냥 그러니까 허영 소비품으로 봐요. 불필요한 소비품으로 봐요.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 필요한 대로 만들어서 필요한 대로 입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멋을 찾아요. 비싼 것을 입고 나온 데서 멋을 찾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스타일, 자기들이 입고 싶은 스타일에서 멋을 찾아요. 익어가죠. 그런 것이 조금 더 완성돼서 조금 더 크게 나오면은 저항문화가 되는 거죠.
홍대와 성수동은 처음에는 젊은 아이들의 사소한 저항의 문화였어요. 지금은 상당히 익은 새로운 문화예요. 어쩌면 거기서 옷 만들고 거기서 뭐 여러 가지 또 이것저것 얘기 하고 돌아 다니고 하는 친구들이 그래요.
제가 딴 얘기를 잠깐만 할게요. 제가 지난번에 이런 얘기를 했잖아요. 소통이라는 것은 꼭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영역에서, 조리 있게 말을 하고 말을 듣고, 정보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막 거침없이 하는 거라 그랬잖아요. 그러면서 상대방의 말 실수도 지적하면서 또 받아주고, 그러면서 말 없이 그냥 말 막 하는 거예요.
그런데 돌아 가잖아요. 제 이야기는 대부분의 남성들에게서 특히 나이 든 남성들에게서 다 사라집니다. 이제 정치 프로그램을 봅니다. 서로 다 바보면서 어떤 젊은 정치인이 나와가지고 막 시시덕거려요. 그거 보고 ‘아, 저 품위’하고 이래요. 그게 미래의 품위예요. 정제되게 얘기하는 게 품위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얘기 막 하고, 국가를 이끌어갈 정치 같은 거를 막 장난 같은 얘기로 막 하고, 이게 소통이에요. 그게 문화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제가 그 정치인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단 문화에서는 이준석은 새로운 정치 문화로 만들고 있어요. 그냥 시시덕거려요. 심지어 여의도 땅 건축주 이따위 소리 하고 있어요. 그리고 막 자기들 앉아가지고 뭐 ‘땅을 먹었네, 뺏었네, 먹혔네’ 이러고 있어요.
그게 소통이에요. 기존 정치인들이 멋지게 얘기하는 거, 그게 낡은 거예요. 그건 소통이 아니에요. 그건 장식이에요. 그 장식에 강남문화가 결합돼서 거기에 훈련이 되신, (꼭 강남은 아닙니다만) 연세든 분들이 볼 때는 품위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걸로 보이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품위에요. 젊은 친구들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막 해요. 어느 순간 보면 그게 말이 돼 있어요. 처음에 홍대 성수동 앞에 있는 친구들은 말도 안 되는 옷을 입고 다녔어요. 지금은 다 말이 되어 정제돼 있어요. 저 정도면 저것은 신한복 이에요. 개량 한복이 아니라, 자기들은 자기들 생각대로 만들었지만 결국 보니까 민족 문화까지 반영이 돼 있는 거예요. 그렇게 시시덕대다가 나온 것이 있는 거죠.
인간은 인간으로 시시덕대자
근데 사람 머리가 그렇게 시시덕대지를 못해요. 시시덕대야 되는데 그래야 세포들하고도 세포한테 문이 열려 있죠. 점잖게 자기 의식 훈련 받고 교육받은 대로, 교육에 의해서 설계 된 거죠. 교육적 동물이 된 거죠. 인간은 인간이지 사회적 동물도 아니며 경제적 동물도 아니며, 지식적 동물도 아니죠. 인간은 인간이죠.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동물인 겁니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짓는 순간부터 인간은 동물입니다. 인간은 그런 면에서 동물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고 그것이 일반화되어 있다면 그런 식으로 비유해서는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은 지식의 동물이고 정치의 동물이고 경제의 동물이고 그리고 교류의 동물이에요.
교육된 대로 동물로 살아요. 단 DNA에 의해서 가소성 없이 주어진 그런 동물의 삶이 아니라, 가소성 있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 사실상 교육에 의한 주어진 동물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시시덕댈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거부하고 시시덕대는 이 20대, 10대, 30대는 아주 진화한 세대예요. 교육에 의한 굳어져 있는 교육적 DNA의 한계를 뚫고 다시 가소성이 있는 의식 작용의 삶으로 넘어가겠다는 신호탄을 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이냐? 아까 얘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가소성 있는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은 21일 굶어도 안 죽습니다. 100일 굶어도 안 죽을 수 있습니다. 천일을 굶어도 안 죽을 수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까 뭐라 그랬죠? ‘에너지를 생산한다, 전환한다, 소비한다’ 그랬잖아요.
소비가 곧 생산인 삶을 살게 돼요. 의식의 소비가 생산이 되는 삶을 살게 돼요. 그래서 적어도 탈은 날 수 있어도 무병해요. 노화와 병적 현상이 분리가 일어나요. 외부적 충격에 다치거나 하지 않으면 내부의 과소비로 말미암은 병은 일어나지 않아요.
여기서 창조적이라는 것은 자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에요. 인간의 가소성적인 삶은 소비 기관이 곧 생산 기관으로 전환되게끔 해주는 거예요. 우리 김선생님이 지난번 시간에 제가 그렇게 (옷을 한번 밝게 입으시라고) 말씀을 진지하지만 농담같이 말씀을 드렸는데,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어느 순간 가소가 되시는 거예요. 그 순간 그 가소는 에너지를 만들어요. 에너지를 만들면서 몸에서 밑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쓰는 게 아니라, 그 에너지를 또 다른 데로 보내요. 소비 기관이 있고 생산 기관이 돼요.
소비가 생산으로 이어진다는
사회에서도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하죠. ‘분위기 전환해라, 그럼 뭔가 힘이 날 거다!’ 그 힘은 배에서 나는 힘이 아니에요. 가소적인 삶으로 말미암아서, 소비 기관이 생산기관으로 일부라도 전환되는 걸 말하는 거죠. 그거를 굳이 그냥 단말마적으로 얘기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기분 전환하자, 좀 쉬어주자 끊어주자!’ 이거죠. 요즘은 쉬는 게 더 노동이죠.
저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업무가 아니고 여행을 가도 그래요. 제 페이스북을 보면 저는 오늘 피렌치 아카데미아(Galleria dell'Accademia) 박물관에 있죠. 오랜만에 (페북에) 올렸는데, 2월의 모습입니다. 모두 다비드상을 보고 있죠. 그리고 제가 앉아 있는 뒤에 그림을 보고 있죠. 워낙 볼게 거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공간이에요. 그런 걸 보라고 특화된 공간이고 엄청나게 비싼 입장료를 내고 나가는 듯한 공간이에요. 그 밑에 앉아 있는 저는 그림자예요.
아무도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도 저를 보지 않아요. 저만 앉아가지고 다비드상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도 보고 제가 못 보는 건 제 뒤에 있는 그림이에요. 저는 없는 존재예요. 사진에 찍혔으니까 있지, 아무도 그 순간에 거기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게 보이지도 않아요. 바로 밑에 사람이 있지만 사람의 노동이 그려놓은 죽어 있는 그림만이 위에 보여요.
그런 것이 뭐냐? 가소성이 있지 않는 지식에 의해서, 훈련에 의해서 설계된 삶이라는 거예요. 물론 그때 제가 거기 앉아 있었던 게, 비도 오지게 맞고, 몸살도 나고 해서, 다비드상도 귀찮고 만사가 귀찮아 갖고 앉아가지고 사람이나 보고 있었던 거예요.
무슨 영광이 있으라고, 입장권 미리 끊어놨으면 10분 전에 가면 되지, 저희 아버님처럼 1시간 전에 가가지고요. 저희 아버님 시절에 제가 살던 고향에는 기차가 없었습니다. 버스는 완행버스죠. 버스가 최후의 교통수단인데, 버스 시간 2시간 전에 꼭 나가세요. 버스 타기 딱 10분 전 되면 안 보이세요. 화장실 가셨어요. 심경이 이해되시죠? 그런 사람의 자식으로 자라서 그런지, 저도 보면은 제가 흔히 이렇게 하는 걸 지유타임이라고 그러기도 하는데, 제 개인 성격이기도 해요.
아무튼 소비가 곧 생산이 된다면 이건 무서운 가능성이죠. 소비가 가소성 있는 창조의 영역, 창조적 의식의 영역은 하나하나가 전부 생산이에요. 하나하나가 생산이 되는 그 과정에서는, 생산되는 에너지들의 발생이 아래를 도와주고 보조해 주기도 하지만, 밖으로도 향해 있어요. 또 다른 소비가 일어나요. 생산이 또 소비가 돼요. 기존의 소비와 다른 새로운 생산이 소비 기관의 새로운 생산이 소비의 수준을 바꿔요.
의식과 의식으로 소통할 수 있어요. 자기가 자신의 꿈을, 그 꿈의 주인이 될 수 있어요. 자신이 자신의 아픈 것을 다스릴 수 있어요. 최소화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유체 이탈을 했네’, ‘텔레파시를 하네’ 등, 그 모든 영역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소성 있는 의식적 생활의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에너지 현상이에요.
근데 점점 현 시대는 그것이 더 멀어져 가죠. 멀어져 가죠. 그리고 멀어져 간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죠. 아예 그런 것은 있지 않는 것으로 치부가 되죠. 그럼 없는 거예요. 그럼 없는 거예요.
의학은 말합니다. 두뇌는 생산하지 않고 소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소비기관이야말로 새로운, 하나의 2단 연료의 새로운 생산 기관이에요. 1단 연료를 쓰고 1단 연료의 소비 기관으로서의 최정점이 아니라, 2단 연료의 생산의 시발점이기도 한 거예요. 그게 영혼이 있는 삶이에요.
상성하허는 내외불일치로
그래서 상성하허(上盛下虛)하고, 상하(上下)가 불교(不交)하고, 그러다 보니까 내부가 바깥으로도 일치가 안 되죠. 바깥으로도 일치가 안 되는데, 쉽게 얘기하면 이런 거죠. 애들 놀 때 부모들은 걱정이 돼가지고, “춥다. 빨리 들어와!” 그러는데, 애는 안 춥대요. 얘는 12도인데도 안 춥대요.
12도인데 그렇게 입고 뛰어 놀아요. 그러면서 막 하나도 추워하는 기색이 없고 손발도 따뜻하고 막 이래요. 애 추워 어떻게 될까 봐, 부르러 가는 부모만 파카 입고 나가요. “춥다 빨리 들어와라!” “뭐가 추워?” 자기가 추우니까 애도 추운 줄 알고, 얘는 12도까지 편안한 거예요. 부모는 17도만 떨어지면 불편한 거예요. 1도가 얼마나 무서워요.
사람의 열이 자기 체온보다 3도만 올라가서 그것이 3일만 유지되면 죽거든요. 그러니까 40도를 3일 이상 유지하고, 의사나 병원의 특별한 관리가 없고 집에만 두면 죽거든요. 딱 3일이에요. 40도 고열이 3일이면, 웬만하면 죽어요. 참을성이 대단히 뛰어나고 근력이 대단히 좋고 의지가 투철한 사람도 일주일은 못 넘겨요.
아까도 마찬가지로 물 안 먹으면 3일이면 죽는다고 하지만, 의지만으로도 일주일까지 안 먹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배운 습관적 의지만으로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이 가소적 사유와 상관없이 가능해요. 밥도 물론 한 1~2주 더 버티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가소성 있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배 비우려고 단식할 필요 없어요. 분명히 얘기합니다. 나중에 저 죽고 난 다음에 생각나실 거예요. 현생 인류들은 단식을 어쩔 수 없어서 한 단식이 아닌, 자기가 의식적으로 했던 단식에 의한 대가를 무섭게 치를 것이다! 무지막지하게 치를 것이다! 저는 그 얘기밖에 안 하고요. 구체적인 얘기는 안 하겠습니다. 뭐 (이 얘기가)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없는 얘기 할 수도 없으니까요. 잃는 게 100이면 얻는 건 둘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아무튼 그래요. 훈련에 의해서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우리 사회에서는 없다고 아주 그냥 선언을 하죠. 있다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건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온도에 적응 정도
그러기에는 지구라는 환경에서 사는, 숫자로서도 80억은 과하고 그리고 사회가 경쟁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경쟁은 비가소성을 확장시킵니다. 극대화시킵니다. 그래서 설계된 대로 훈련된 대로 열심히 사는 것만을 강요할 수밖에 없고, 그것도 심화되고 있죠. 그렇게 해서 그런 가소성 있는 삶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결과 사람의 몸이 아까 얘기를 했죠. 그러니까 내외가 온도부터 안 맞는 거예요. 아까 3도마다 죽는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열이 낮아지잖아요. 체온이 36.5도라고 치면요. 체온이 어떻게 36.5도 되겠습니까? 껍데기에 재니까 35도고, 사실상 37.3도 정도가 평균이죠. 잴 수 있는 것은 그 피를 직접 온도를 잴 수 없으니까, 몸 자체를 뚫어서 잴 수는 없으니까, 몸에 댈 수 있는 온도를 보여주는 최 근소치에 해당되는 데를 재니까 36.5도가 나오는 거죠.
그 36.5도였어요. 여기서 3도만 떨어지면 즉시 죽어요. 33.5도가 되는 순간 즉시 죽어요. 39.5도 40도가 되면 즉시 안 죽고 유언할 틈은 있는데, 33도가 되면 유언할 틈이 없어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훈련된 범위 내에 없거든요. 훈련된 범위에 없다는 것은, 곧 ‘내외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예요.
온도 차이가 몸에서 견디는 게 그 2~3도가 무서운데, 어린 아이들이 편한 온도를 보통 22도 정도를 얘기 많이들 하는데, 물론 훈련에 따라 다르죠. 그러나 대개 그렇게 얘기를 많이 하는데요. 즉, 체온보다 15도 낮을 때가 제일 편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옷을 입으니까요. 옷에 의해서 7도 정도 커버가 되니까, 엄밀하게 보면은 체온보다 한 8도 낮은 게 제일 편하다는 거죠. 28도가 제일 편하다는 거죠. 옷이 있기 때문에 21도 혹은 22도가 편한데, 21도와 22도를 전제로 해서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 폭이 엄청 좁아져요.
“송 선생님! 몇 도나 되실까요?” “한 24나 25도가 될 것 같습니다.” “플러스 마이너스요?” “아니요. 플러스 마이너스가 한 5도나 7도?” “5도나 7도 되면 아시죠?” 이 차이면 봄에 밖에 나갈 때는 히터를 틀고 나갔다가, 낮에 들어오실 때는 에어컨 켜고 들어오시죠. 그렇게 되는 거죠, 점점 그렇게 되죠.
애들은 플러스 마이너스가 한 10도씩 되거든요. 근데 이게 오래 되면은, 나중에 늦게라도 가소성 있는 삶을 살아도, 가소성 있는 삶이 새로운 소비로 이어지는 소비의 영역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루라도 일찍 고개를 돌리는 게 좋아요.
하루라도 빨리 가소성 있는 삶의 방향으로
그래서 고개를 돌렸을 때 최소한 소비를 하잖아요. 최소 소비를 해요. 그러면 에너지 생산된 게 거의 없고, 있는 제로 상태에서도 최대한 버티는 거죠. 100일도 편안하게 얼굴 광 나면서 버티는 거죠. 그러고도 편안하게 그냥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옛날에 어떤 분들은 앉아서 에너지는 최소화해 놓는 거죠. 쓰는 건 더 안 쓰니까요. 왜? 그러는 가운데 가소성 있게 자기를 조직하고 있는 거예요. 꿈의 세계에 살고 있는 거예요. 에너지가 거의 소비가 안 돼요. 최소화된 상태죠. 그러면 예를 들어 먹는 걸 한 5분의 1로 줄여요. 그러면 반대로 견딜 수 있는 길이도 21일에서 100일로 늘겠죠. 그렇게 삶이 가능해요.
사람들이 어떤 제3의 기관, 제6의 기관 등 이런 표현들을 하는데요. 소위 제3의 기관들처럼 드러나지 않는 기관들, 그것도 가소성 있게 했을 때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소비 영역이에요. 근데 그 중에 다양한 영역들이 있을 수가 있죠.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훈련된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는 능력을 벗어날 수도 있고요. 실질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을 달리할 수도 있고요. 시간을 점유하는 방식을 달리할 수도 있죠.
우리가 그런 것을 현대에 와서는 뭐라 그러느냐? 초능력이라고 불러요. 초능력이 아니죠. 인간에게는 다 잠재돼 있는, 창의적인 삶을 사는 순간 갖고 있는 거죠. 근데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은 반대로 도울 김용옥 선생이 참 좋아하는 중국의 철학자 있죠. 왕필(王弼)이라고 28살에 죽은 한 젊은 천재라고 그러죠. 그분은 훈련된 삶을 산 거예요. 그분은 너무 빼먹은 거예요.
어릴 때부터 훈련이 그렇게 잘 돼서 과소비를 하는데, 과소비를 하는데도 너무 과소비를 한 거예요. 천재 당대 또는 희대의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엄청난 과소비를 해버린 거예요. 어느 날 똑 떨어진 거예요. 깨끗하게 그냥 서른 못 넘기고 그냥 28살에 죽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흔히 그런 사람들 때문에 천재 요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과소비한 거예요. 배에서 생산되는 것은 왕필이나 일반 사람들이나 똑 같단 말이죠.
똑같죠. 그런데 당겨 쓴 거예요. 당겨쓰는 건 훈련을 통해 받았겠죠. 그런 교육을 시키는 것이 영재 교육이라면, 아이를 죽이는 교육이죠. 아이를 죽이는 교육이죠! (그렇게 하면) 아이는 천재가 될 거예요. 그렇게 교육시켜서 과소비를 시키면 분명히 빨리 깨서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발생하겠죠. 그뿐이에요. 역사서에 이름은 남을지 몰라도, 그가 한 것은 지식의 극치일 뿐이에요. 지혜의 극치거나 삶의 아름다운 모습의 한 단면일 수는 없어요.
왕필은 희생자예요. 자기가 자기를 희생했는지, 부모에게 희생됐는지, 주위의 기대가 그를 희생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훈련이 됐고 그렇게 해서 희생된 사람이에요. 그가 남긴 것은 지적으로는 우리 인류 문화의 정수일지 모르겠으나, 인류가 살아가야 되는 가소성 있는 삶의 방향에서는 참 보잘 것 없는 것이에요. 무가치한 것이죠. 왕필의 그 지혜가 인류를 단 한 걸음도, 지혜 있게 한 걸음도 진입을 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런 유사한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만 충분히 자극할 뿐이라는 거예요.
고려시대 역사 속 삶의 가소성
우리는 고려시대 역사를 잘 모르죠? 왜 모르실까요? 사극에서 고려시대를 안 해서 그래요. 역사를 전공한 저 같은 사람도 조선시대를 더 많이 알아요. 제가 조선시대 전공자도 아니에요. 저도 사극 보는데 재미있거든요. 잘못했든 잘했든, 대한민국 국민들의 98%의 역사 지식은 사극이에요. 서양사도 잘 몰라요. 왜? 서양사는 돈 들여가지고 번역해서 보거나 자막 따라서 보거나 하죠. 그것도 요즘 얘기죠. 방송된 게 거의 없거든요. 중국사는 조금 알아요. 삼국지도 하고,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도 하고 이러니까, 그런데 고려시대는 사실은 거의 안 해요.
고려시대를 몰라도 우리 상관없잖아요. 하지만 고려시대는 굉장히 우리 문화에서는 중요한 시대이고 우리가 살펴봐야 될 게 많은 시대예요. 우리가 그런 얘기하죠.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이미 나라 망했을 것이다. 틀림없죠. 나라를 뺏겼겠죠. 뺏긴 다음에 뭐 몇 십 년 후에 또는 몇 백 년 후에 다시 반환 운동을 해가지고 재건국을 했을 수는 있겠으나 어쨌든 뺏겼겠죠.
고구려를 뺏기고 다시 대진국(大眞國) 즉, 발해라고 불리는 나라를 세웠을지라도 시간이 좀 걸리죠. 뺏기긴 했죠. 고구려가 나라를 뺏길 뻔한 것을 두 번 막았죠. 첫 번째 을지문덕이 살수해서 막았죠. 안 막았으면 고구려 망했겠죠. 그때 평양이 넘어갔겠죠. 그래서 다시 부흥 운동을 하든 말든 간에 나라를 뺏겼겠죠. 그리고 그 뒤에 양만춘이 막았죠. 안시성에서 막았죠. 뚫렸으면 또 평양까지 바로 밀고 들어갔겠죠.
그런데 을지문덕은 장군이 아니죠. 재상이죠. 당신 이미 나이가 이미 70이 된 재상이죠. 양만춘도 그때 나이가 이미 많은 사람이었어요. 실질적인 장군은 아니에요. 무력이 뛰어난 장비, 관우, 여포 같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류 역사에서 관우, 장비, 마초나 여포 같은 사람이 역사를 바꾼 사례는 거의 없어요.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많이 있어요. 고려시대에는 그런 대단한 인물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의 삶을 깊이 들어가 보면은 가소성 있는 삶이라는 게 나타나요.
고려시대 때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지적이고 가장 무력이 뛰어났던 장군 하나를 꼽으라면, 고려시대 유금필(庾黔弼)이에요. 왕건의 의형제였던 유금필이요. 개인적 용맹이 일당백을 했고, 지혜가 주유(周瑜)에 맞먹었고, 정치력도 대단했던 사람이에요. 그랬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사람이 마음을 달리 먹으면 안 되니까, 나이가 더 많지만 의동생이었던 유금필의 딸을 취해서 왕건이 또 부인을 삼죠. 왕건이 하긴 부인이 29명이고 그 중에 성도, 이름도 안 전해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무튼 고려시대 때도 나라 위기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요즘 <고려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 하더라고요. 거기서 사실은 가장 눈 여겨 봐야 되는 사람은 양규(楊規)라는 사람이에요. 양규라는 사람은 유금필 뺨치는 사람이에요. 이순신과 같은 면이 있는 사람이에요. 을지문덕과 같은 면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여포와 같은 면도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서 제갈량 같은 모습도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애민(愛民)이라는 생각에서 이순신과 닮았고, 지혜라는 면에서 제갈량과 닮았고 무력이라는 면에서는 관우나 장비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에요. 근데 배우의 인지도를 딱 보니까 그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더라고요. 소위 말해서 좀 특급 배우를 안 쓰셨더라고요. 저도 특급이라는 표현으로 배우를 갈라서 죄송합니다. 어쨌든 지명도가 그렇게 높은 배우를 안 쓰셨더라고요. 32부작을 하는데 그 중에 10부 정도가 아마 전쟁 장면이겠죠. 귀주 전쟁은 워낙 고증이 많이 돼 있습니다. 한산대첩이나 명량대첩, 노량보다 더 고증이 많이 돼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재미있게 끌고 가겠죠. 그러다 보면 양규는 잘 안 나올 것 같아요.
아무튼 그 사람들을 계속 양산해냈던 교육 체계가 있습니다. 교육 아닌 교육 체계가 있어요. 교육이 아니라, 고려는 정말 고구려를 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체계가 있습니다. 그 체계가 무너지면서 고려는 일반 국가로 전환돼요. 현종 이후부터 일반 국가가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러한 체제에 집중을 못하고 국자감이나 이런 것만 보지만, 그 이외의 교육기관 아닌 교육기관들이 존재해요. 그들이 어떤 인간들을 만들었든 간에 고려 초기에 엄청나게 풍부한 인력자원을 보면 돼요. 인력자원이 엄청나게 풍부한 고려는 거란 따위가 먹을 수 없는 나라였어요. 먹어도 뱀으로 치면 삼켰다가 1초 만에 토해놓을 수밖에 없는 인력 자원이 그런 나라예요.
아무튼 그런 교육 기관이 있었는데 역사는 그런데 관심을 안 가져요. 어디에 관심을 가지죠? 고려 태조의 왕비가 29 명이고, 부인이 몇 명이어서 이름도 모르겠고, 그 중에 왕비들끼리 세력 싸움을 하고, 그 친형제들끼리 결혼을 하고, 사촌 형제끼리 결혼하고, 사촌 형제랑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친삼촌이랑 결혼을 하고, 뭐 이런 얘기들만 잔뜩 내 놓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 동생의 아버지가 작은 할아버지고, 내 동생이 어떻게 보니까 엄마는 같은데 작은 할아버지랑 나한테 오촌 숙부가 되기도 하고 뭐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 거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이제 권력 잡은 거기 현종은 사실상 목종의 오촌 숙부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엄마를 보면 친동생이 될 수도 있고, 이런 것에만 이제 사람이 집중하고 보게 되고, 그러면 고려시대 참 문란했구나! 호족 동맹이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결혼 동맹을 했구나 그러는데요.
그것 외에 그런 고려가 버티는 엄청난 힘이 있어요. 그 힘을 언젠가는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만요. 그 교육기관의 특징도 지금 제가 말씀 드리는 가속성 있는 삶을 통한 새로운 소비를 발견하고, 그 새로운 소비를 새로운 단계의 삶의 영향으로 전환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새로운 탈출구로서 새로운 소비의 삶
그렇게 우리가 안 살다 보니까 ‘설마 그게 되겠어’ 그러는데요. 제가 지난번에도 그런 얘기를 한 번 드린 것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기자촌이라는 데 사는데 기자촌 산다고 대외적으로 얘기하다 보면은 기지촌 사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간혹 있어가지고 참 난감했는데요. 그럼 기지촌이라는데 뭔 기지든 굳이 말을 안 해요.
아무튼 거기서 제가 아래로 쓱 내려올 때 모퉁이에 개가 하나 있었어요. 밤에 쓱 내려오다 보면 그 개가 좀 쿵쿵 짖어요. 근데 제가 미리 생각하고 내려와요. ‘저 녀석이 저기에 있겠네. 오늘 또 짖을까?’ 그러면 절대 안 짖어요. 자기도 느낀 거예요. 근데 딴 생각을 조금 이렇게 할 게 있어서 그 녀석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 내려오는 순간, 그 녀석이 담벼락 위에서 엉! 하고 짖어요.
자기도 모르게 그 친구랑 소통하고 있었던 거예요. 다만 자기의 능력이 그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못 들었을 뿐이에요. 자기가 그 친구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능력은 있으나 감각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기능하지 않는 게 아니며,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죠. 공기(空氣)라 그랬지, 그냥 공공(空空)이라고 안 했어요. 빈 빔이라고 안 하고, 비어 있는 듯하지만 기운이 있다고 그랬어요.
아무튼 그렇게 새로운 감각들도 어느 순간 알게 돼요. 그걸 언제 알게 되느냐? 훈련을 안 해도 원래 인간이었음을 확인시켜주면 언제 오느냐? 나이가 들면 이제 소비를 하고 싶어도 소비가 안 될 때가 와요. 아예 받침이 안 되니까 포기를 해요. 그 순간 두 가지 가능성이 오죠. 치매가 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그냥 외로움을 즐기는 삶으로 가버리거나!
현대인들은 이렇게 살면 살수록 치매는 필수 항목이 돼 가요. 과거에 치매는 선택이었어요. 지금 분들은 치매는 2분의 1로 필수 항목일 겁니다. 인간은 어쩌면은 더 빨리 올 거고요. 전쟁이 안 나고 자연 환경에 적응하더라도 인간은 앞으로 50대 이상 사람들의 치매들에 의해서, 세상은 멸종을 고할 수도 있습니다. 자체 멸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과용해 오고 있고, 그 어느 시대보다도 과용해 왔다는 얘기죠. 자기에게 만들어진 에너지를 과소비 해 왔다는 얘기죠. 그 과소비의 관성이 툭 끊기는 날, 의식도 함께 끊기거나 기력도 함께 끊기거나, 그렇게 될 거예요. 그나마 여기 연세 있는 분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우리가 더 고생한 것 같은데, 보릿고개가 있던 시대에 그래도 몸이 고생했지, 여기 (몸의 상하) 구조가 그렇게 훈련된 프로그램대로 강요 받아 살아오지는 않았고, 그렇게 바쁘게 살지 않았어요. 지금 현재 20대 30대들 중에서 일부 성수동이나 홍대 문화는 거기에 대한 감각적 본능적 반응이에요. 선각자들이에요. 그 친구들은 선각자들이에요.
그리고 제가 이준석이라는 친구 얘기했잖아요. 마음에 안 들지만 선각자에요. 지금 약아 빠진 얘기를 하고 있죠. 이게 말도 분명히 안 하고, 나온다는 건지 그냥 있겠다는 건지 제가 볼 때는 나온다예요. 단 그냥 나온다 그러면은 언론에서 멀어지잖아요. 언론에서 계속 키워 갖고 극대화시킨 다음에 튀어 나오겠다는 얘기예요. 아니면 들어갈 수도 있겠죠.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촐싹되고, 채신머리 없이 군다! 싸가지 없이 군다! 정말 너무 철없이 군다! 너무 품위 없다고 그러는데, 그 품위 없음이 아름다운 품위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렇게 품위를 따지는 그 프로그램 밖에 살겠다는 선언이에요. 그 친구 바보입니까? 자기가 그런 소리 듣는 거 모르겠어요? 철 없다는 소리 듣고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듣는 거 자기가 제일 잘 알겠죠. 심지어 옆에 있는 자기 동료들도 얘기해 주는데요. 싸가지 없다고! 잘 알겠죠. 근데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것도 어쩌면 이 사회의 하나의 본능의 발현 같아요. 저는 그 친구가 정치로 성공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더 아름다운 친구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도 시시덕대는 친구들 중에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성수동, 홍대에서 저런 벌룬 바지 입고 걸어다니면서 자신감 있게 돌아다닌 아이들 중에서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너무 단정한 아이들 속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재방송으로 싱어게인 3회, 4회를 봤어요. 두 명씩 나와서 겨루기 1편을 봤죠. 근데 잘하는데 어딘가 한 팀에서, 한 친구는 자유롭게 이렇게 놀고 한 친구는 모범생 같아요. 두 친구가 조를 이뤄서 했는데 떨어졌고 둘 다 구제를 못 받았는데요. 그 친구들이 먼저 노래를 부르고 나서 뒤에 앉아 있고 그 다음 친구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다음 친구들이 잘했어요. 그래서 거의 몰표가 가서 떨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모범생인 친구는 긴장해 있어요. 즐기지 못해요. 그리고 너무 모범적이고 옷도 입고 나온 게 모범적이고 그래요. 얼굴에 나 모범생하고 쓰였어요. 근데 옆에 있는 친구는 전혀 모범적이지 않는데 상대방 잘하는 거 보고 막 좋아하고 즐겨요.
우리는 지금까지 그 앞에 긴장했던 그런 친구들을 사회의 표본으로 삼고, 그들을 이 사회의 얼굴로 만들려고 애써왔습니다. 이제는 아니죠. 더 이상 그러면 이 사회는 끝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그렇게 살면 이제는 치매밖에 기다리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이렇게 방향을 안 바꾸시고 있는 여러분들의 주변에서 여러분들께서 직접 보실 거예요. 지금 30대인 분들은 당신들의 친구가 60이 넘어서 기본적으로 치매가 50%라는 걸 보게 될 거예요.
그만큼 왔어요. 그만큼 패턴으로서 과소비가 정착돼 버렸어요. 그 끝은 급격한 멈춤이에요. 그 급격한 멈춤은 밑에 바위가 있을지, 물이 있을지, 흙이 있을지 뭐가 있을지 몰라요. 예를 들어서 바위에 떨어진다면 치매죠. 이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그거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감을 잡는 가소성 있는 인재들이 그들이에요. 그들이 대우를 못 받고 있어요. 근데 그들을 스스로 대우를 받도록 만들어 갈 거예요. 자기들이 할 거예요. 그 친구들 건드리면 그 친구들 또라이 돼요. 그 친구들은 스스로 헤쳐 갖고 스스로 만들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로 갈 수 있겠지만, 그건 시대의 이야기고 더 중요한 건 내 이야기잖아요. 자신의 이야기잖아요. ‘설마 의료가 더 발전하고 있는데 앞으로 치매도 고치겠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충족된 사람들만 고칠 수가 있습니다. 치매약은 곧 나옵니다. 멀지 않아 나옵니다. 그러나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사람은 그 약을 앞에 두고도 못 고칩니다.
아무튼 그런 점쟁이 같은 얘기를 오늘 좀 했습니다. 오늘 얘기를 드리면서 조금 부드럽게 끝내는 건요. 다음 주 한 주 제가 쉬려고요. 전주는 두 번 쉬는데 여기는 한 번 쉽니다. 아무튼 오늘 또 따뜻해서 좀 좋은 기분으로 이렇게 편하게 앉아 계실 수 있어서 좋을 것 같고요. 뭐 이런저런 질문을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우리 이선생님께서 이렇게 떡을 이렇게 준비해 오셨어요. 이렇게 정말 떡이 귀중해서가 아니라, 이 자리를 이렇게 잔치로 여겨주시는 마음이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가 모이는, 애기 돌 때 모여서 보는, 그 꿈 같은 자리라 생각하셔서 준비하신 것 같았어요. 마음이 참 따뜻합니다. 감사 한번 박수 한번 드리겠습니다.
아닌 말로 우리가 어디 가서 떡 하나 못 사 먹을 사람이 여기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떡은 달라요. 이런 떡이 진정으로 내 삶을 살찌게 하죠. 우리 선생님도 그렇게 무드가 바뀌면 생산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훈련이 되면 몸 고생 안 한다고 하죠. 머리가 나쁘면 몸 고생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훈련되어서 쉽게 일하면 머리 안 쓸 것 같죠? 더 씁니다. 현대 사회는 더 과소비합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프레스나 이런 데 손가락이 나가는 사람들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미싱을 하다가 손이 집히는 사람들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초보자가 아닙니다. 기술이 익은 사람들이 그렇게 됩니다. 하다가 보면서 딴 소비를 너무 하고 있는 거예요. 몸이 쉴수록 마음도 쉰다! 그게 쉬는 거죠. 근데 그렇게 안 쉬어요. 엄청 써요. 교통사고를 초보자들이 일으키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운전 좀 한다 싶을 때 사고 내죠. 왜냐하면 운전이 우습거든요.
그런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몸이 바쁘면 내 머리가 쉬겠지 하지만, 몸이 바쁠수록 머리는 더 딴 생각하고 더 소비를 해요. 더 엉뚱한 소비를 하고 그 소비가 심지어 나의 타락의 기초, 출발점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조심하라는 거에요.
문답편
질문: 첫 시간에 선생님 말씀해 주셨던 것 중에서 잠 자는 시간도 사실 내 시간인데 잘 못 만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잠자는 시간도 내 시간도 만들기 위해서 간절함 말고 뭔가 이렇게 쉽게 시작해 볼 수 있는 꿀팁 같은 게 있을까요?
선생님: 지금 오늘 그 기초 마당 깔았잖아요. 마당을 깔았는데 섬세한 기술이야 사실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내가 소비하는 것이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소비가 있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일단 반걸음은 실천적으로 나간 겁니다.
그 생각을 관념적으로 나간 게 아니라. 내 의식의 전환이에요. 어떻게 보면은 ‘내 의식이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것이 새로운 생산이면서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는구나!’ 이것을 느끼는 순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감각을 느끼게 돼요. 눈이 달라지고 보는 게 달라져요. 안 보이는 게 보입니다.
있는데 못 본 것이지 없어서 못 본 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늘, 옛날에 흔히 말해서 진법이라는 얘기를 하잖아요. 심지어 기문둔갑(奇門遁甲)이라는 얘기를 하잖아요. 기문둔갑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예측 가능한 패턴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 패턴을 이용하는 거죠.
진짜 없애는 게 아니죠. 제가 페이스북에서 어제 제가 8개월 만에 올렸는데요. 보면은 제가 앉아 있는 게 사실상 진법이에요. 사진 찍으신 분 말고는 아무도 제가 거기에 있는 줄 몰랐어요. 저는 거기 벤치도 아닌 벽에 조금 걸치고 앉아 있고요. 사람들은 그림 보랴, 다비드 보랴, 지나가는 사람 보랴, 자기 눈높이에 있는 사람 보랴 하죠. 저는 자기 눈높이보다, 그림보다는 아래에 있죠. 그림 보면 눈에 안 들어오는 범위에 있죠.
제가 저절로 그 진법 안에 있었던 거예요. 사진 찍어놓으니까 보이는 거죠. 거기다가 대충 흐릿하게 못보게 해놨으면 그거 저인 줄도 모를 수도 있어요. 근데 그렇게 돼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것도 패턴이죠. 그러니까 그 패턴을 읽어내고 그 패턴을 이용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패턴으로 살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읽은 사람의 기술이기도 하죠.
아무튼 그 패턴 속에 안 빠지면은, 있었는데 내가 못 보고 있었던 걸 볼 수 있고요. 있었는데 내가 못 들었던 게 들리고요, 냄새를 못 맡았는데 맡는 게 생기고요, 맛을 못 봤는데 맛이 느껴져요. 옛날 나오는 시대 문화가 아니면 맛보지 말고, 또 한편으로는 뭐 어디에 취하면은 맛을 모른다 그러잖아요. 꼭 코로나 걸려서 맛 모르고 냄새 모르는 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생각에 따라서 감각이 바뀐다는 이야기예요.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돼요.
공자가 어느 날 요순 때 음악을 들으시고 3개월인가 육미(肉味)를 몰랐다고 하셨어요. 고기 맛을 몰랐다고. 그러면 진짜 몰랐던 거예요. 있지만 없는 거예요. 이미 그건 딴 소비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가소성 있는 딴 소비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순간 그는 요임금 그 시대의 음악과 소통하고 있었던 거예요. 소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고민거리가 안 돼요.
우리가 혼자서 저와 소통하지 않고 혼자서 파악하려고 애를 쓸 때 고민이 되고 그리고 골머리를 앓고 소비가 되는 거예요. 그냥 내 육신 다른 부분과 세포가 시시덕거리는 순간, 내 옆에 사람과도 시시덕거릴 준비가 돼 있는 순간, 다른 게 느껴져요. 시시덕거리는 거 아주 아름다운 미덕이에요. 어쨌든 간에 그거 하려는 정치는 마음에 안 들어도 이준석이가 처음 내놨다는 거예요. 거기서 그 사람을 평가한다는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렇게 요상한 놈이 아니었으면 시시덕거리는 걸 감히 못했을 거예요. 시시덕거리는 순간 등신대고, 노인들로부터 품위가 없다는 소리 듣고,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듣고 버릇없다는 소리 듣고, 다 들을 거 뻔히 아는데요. 어쩌면 그 친구가 제일 잘 할 텐데 그렇게 하잖아요.
그게 자기도 모르게, 그 친구는 자기 영역을 만들다가 생긴 걸 수도 있어도, 어쨌든 자기들의 동료와 사귀는 데도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 가끔 보면 방송에 나와서 소위 자기들하고 편한 친구들하고 말할 때 보면은 그런 농담 따먹기 비슷하게 하고 있어요. 완전히 시시덕거리는 못한다는 게 단점이에요. 완전히 시시덕거리지 못하다 보니까 그들의 인생이 보이지 않아요. 그들의 정치적인 삶만 보여요. 그래도 소통 가능하게 보인다는 거죠. 더 시시덕대면 그의 인생까지 보이겠죠. 그러면은 분야를 나누지 않는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정치적 영역이 탄생하겠죠. 기대하기 어렵지만, 실천은 쉽게 곧 이어집니다.
질문: 벙어리라는 말이 있고 벙어리 장갑이라는 말도 있는데, 벙어리란 말이 장애인에 대한 비하를 뜻하기 때문에 벙어리 장갑을 또 다른 말로 써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실제로 벙어리라는 말이 벙어리를 비하하는 말인지요?
선생님: 아닙니다. 벙어리는 원래 ‘버버리’라 그러죠. 그거 상표 이름 같은데요. 정말 성수동이나 홍대 친구들이 아주 눈 밖에 내놔버린 상표 같은데, 버버리라 그럽니다. 원래 벙어리가 표준말이 된 건 최근이고요. 버버리의 번역어가 여러 개 있지만요. 또 반대로 눈 먼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장님이라 그러죠. 장(杖)자도 한자에서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만, 장님을 다른 표현으로 소경이라 그러잖아요. 봉사라고 그러고요.
봉사나 소경은 벼슬 이름이죠. 장애가 있다고 판단되는 물론 그분들이 장애가 있으면 다른 능력도 있지만요. 그분들을 사회에서 존중해서 최소한의 대접을 해주기 위한 장치죠. 사회적 장치죠. 그래서 작은 경(炅), 작을 소(小) 또는 이제 낮은 벼슬이라도 봉사, 봉사는 전9품 아닙니까? 종8품인가? 마찬가지로 소경이라는 뜻입니다. 작은 경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백제시대 때의 제일 하등은 아니고 비교적 아래에 있는 벼슬 이름입니다. 그렇게 벼슬 이름으로 불러준 거예요. 오히려 하늘이 저분에게 뭔가 시킬 게 있어서 하늘이 내린 벼슬을 타고 왔다고 이야기 해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비하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근데 뭐 사회에서는 이미 그걸 비하로 쓰고 있으니까 안타깝지만 바꿀 방법은 없죠.
우리 개념들을 보면, 말 못하시고 또 눈으로 보지 못하시고, 때로는 듣지 못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전부 사회적으로 준 최소한의 대우에 해당되는 개념들이죠. 임금이 그 벼슬을 준 적이 없잖아요. 임금이 소경을 준 적이 없잖아요. 봉사를 준 적이 없잖아요. 근데 다 봉사라고 그러잖아요. 그거 누가 준 벼슬이겠습니까? 하늘이 준 벼슬이라는 것이죠. 그분은 오히려 독특한 능력을 타고났을 것이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무시하는 개념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어느 정도 열려 있는 개념이었어요.
소경 봉사 이런 표현들에 해당되는, 버버리 이런 표현들이 벼슬임에도 불구하고 천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게 조선시대부터예요. 성리학이 그렇게 만들어지죠. 주희(朱熹)라는 사람은 자신의 창의적인 가소성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내놓은 모습이 성리학으로 내놨는데, 성리학을 받아들여서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패턴화된 프로그램, 압축 프로그램으로 이용해버린 거죠. 프로그램을 이용해버린 거죠. 그래서 성리학을 만든 사람에게는 그가 살았던 창조적인 삶의 귀결이었는데, 그걸 이용하는 사람과 그 후대에게는 그것을 누군가를 묶는 수갑이 되고 족쇄가 돼버린 거죠.
아무튼 그랬던 조선시대에는 그런 개념이 약해요. 고려시대 후기까지만 하더라도 무신 정권이 욕을 먹으면서도 한편 많은 지지를 받고, 그 다음 대몽 항전을 하면서 삼별초가 쫓겨갔을 때도 지역마다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그런 문화를 유지하는 집단이어서 그래요. 삼별초 집단도 우리가 대몽 항쟁 집단으로만 볼 게 아니라, 그런 것에 뭔가가 있는 집단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 가는 데마다 눈물을 뿌리게 만든 그 감동적인 고사가 나오는 거죠.
아까 양규를 얘기했잖아요. 양규라는 사람은 2차 거란 침입이 있을 때 제일 북쪽에 있던 흥화진이라는 데를 지키던 장수입니다. 근데 그때 지키고 있던 병력이 3천밖에 안 됐어요. 3천으로 40만 대군을 막아냅니다. 양만춘하고 비교가 안 됩니다. 40만 대군을 막아내고 열흘이 돼도 안 무너집니다. 거란 성종이 직접 왔거든요. 소손녕(蕭遜寧)과 소배압(蕭排押) 같은 명장들을 직접 왔거든요. 그래도 할 수 없어서 20만을 거기에 둘러싸게 해놓고 20만 갖고 남하합니다.
20만 정도 안 뒀다가는 뭔가 뒤 탈날 것 같아서요. 찝찝해서 20만을 뒀는데, 양규라는 사람은 그 20만을 돌파하고 7백 결사대를 조직해 나가가지고 이미 뺏겼던 성을 되찾습니다. 거란군 6천 명이 지키던 통주성(通州城)을 7백 결사대로 기습적으로 되찾습니다. 근데 거기서 문제가 끝나면 다행인데 거기서 천 명의 사람을 갖다가 되찾아요. 포로들을 수습을 해요. 천 명이 다시 순식간에 이틀 만에 결사대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거는 그냥 훈련에 의해서 이 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에요. 1700 결사대가 돼요. 1700 결사대가 돼서 심지어 서경을 칩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란 성종이 못 견디고 올라옵니다. 그 위에 있던 20만은 작살 나버렸고요. 올라와가지고 마지막에 급하게 도망가죠. 도망가는데 이순신처럼 끝까지 추격해서 그냥 박살을 내요. 왜? 그때 자기가 귀환시켰던 포로가 3만 명이 넘어요. 고려 백성 그들이 안전한 지역까지 갈 때까지 철저하게 거란군을 공격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렬하게 전사해요. 그 1700 결사대가 한 명도 안 남게 전사해요. 역사에 안 남아요.
질문: 그 결사대 이야기가 왜 안 남았을까요?
선생님: 일단 사극을 안 만들어놨고요. 지금은 그런 사극 쓸 작가들도 거의 없고요. 아무튼 700명이 1700명이 됐을 그 과정, 그들이 어떻게 이틀 만에 결사대가 될 수 있느냐? 그냥 포로였던 1000명이 700명 결사대와 공감대를 이루어서 동시에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거는 특수한 상황을 특수하게 소통해놨기 때문에 가능한 거거든요.
특수한 상황에서 일반 능력자도 특수하게 소통해 내면 그런 결과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가 간단하게만 얘기했지, 양규는 그런 일을 무려 30번을 하고 30번 다 이겨요.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 것 빼고요.
아무튼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무장을 들라면, 양규입니다. 그리고 강감찬은 장군이 아니죠. 강감찬이 장군일 때는 이미 60대였죠. 그리고 그는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인 문하시중이었죠. 그러니까 지휘만 했죠. 물론 지휘만 해서도 천 명만 남기고 20만 대병을 다 깼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사실은 기병대를 빼고 나면 한 7만 됐어요. 그런데 강감찬이 이끌고 있던 군대가 20만이었어요. 사실 3차 대전은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어요. 근데 거기도 아마 그런 구절에도 나와요. 강감찬이 어떻게 그 당시에 병사들을 소통해서 독특한 상황으로 인지하게끔 공통 분모를 만들었는지가 나와요. 고려가 그런 시대예요. 우리는 그 전통을 잃어버린 거죠.
제가 지난번에 제사(祭祀)와 지사(祗祀)를 얘기했잖아요. 우리는 지사를 다 제사라 그러고 있다고. 자기 조상 제사는 지사고 제사가 아닌데, 제사는 공동체 차원에서 벌이는 잔치인데 그 집구석으로 끌고 가버린 조선시대부터는 달라지죠. 그리고 성리학에 의해서 사람들을 패턴화된 인간을 만들기 시작하죠. 그래서 남자들은 다 찌질이 만들고요. 여자들은 전부 다 쫄보 만들고요. 여자들은 나가서 자유롭게 그네도 마음대로 못 타요. 맨날 장옷 입고 돌아다니게 만들고 그걸 타당하게 여긴다니까요.
그리고 심지어 시아버지나 남편이 은장도 안 줘도 자기가 찔러요. 왜 찔러요?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남자들 찌질이 만들고 여자들 쫄보 만들고 조선은 그래 왔는데, 우리가 그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얼마나 좋았어요. 그게 이 자본주의에서 모든 사업을 패턴화시켜서 한 곳으로 우르르 끌고 가서 발전시키는 하나의 동력도 됐어요.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그게 망하는 동력이다!
그냥 제가 어떤 부분은 과격하게 말씀 드립니다. 그래서 저도 과격한 줄 알고 말씀 드리지만, 저도 최대한 이준석이처럼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예전처럼 안 하는 거예요. 근데 버릇이 남아서 빨리는 안 해요. 오늘 우리 점장님께서 입고 있는 옷이 참 예쁜데 큰일 날 뻔했어요. 제가 저렇게 입고 올 뻔했어요. 윗도리는 팔목이 주렁주렁 접혀서 더 할 뻔했었어요. 그러고 오면 여러분들께서 너무 놀라실까 봐 못하고요. 저는 그렇게 즐겨 입어요.
아무튼 오늘도 이렇게 뵙게 돼서 즐거웠고요. 다음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