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서 애 취 유가 있습니다. 이때 유를 한자로는 "있을 유"를 씁니다.
그래서 한자로만 연기를 공부하게 되면. 그 뜻이 잘못 이해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있을 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요?
"있기는 있는데 어떤 상태로 있다. 그 순간에는 이런 상태로 있다"라고 이해하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TV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 마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계속 TV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그것에 집착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TV를 켜고 공부는 하지 않고 TV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학생은.
지금 이 순간에는 공부를 하지 않고 TV를 보는. 그 상태로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있을 유"를.
" 지금 그 순간에는 그 상태로 있다. 또는 어떤 상태로 있다"라고 이해해도 유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까요?
일상에서 아는 친구나 가족에게.
연기의 "노사 - 생"을 말해주는 것은 그럭저럭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를 설명할 때에는 아주 설명해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유를 이렇게.
말해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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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그 부분에서 제가 부족했군요,
지금 답변해주신 내용은 참으로 제가 가족 이나 아는 분들에게 알려 주기로는 참으로 좋은 내용입니다.
그동안 저는 대체로 이렇게 해 왔습니다.
자 우리가 태어났는데 과연 이 태어남의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원인은 조건은 무엇일까라고 했을 때 불교에서는 존재라고. 말해 여기서 존재는 한자 있을 유를 우리말로 번역한 거야. 그런데 보통 우리는 저기에 강아지나 송아지나 아기나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존재라고 부르잖아. 그런데 연기에서 존재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물론 그런 뜻도 있겠지만 대체로 아마 이런 뜻일 거야
여기에 어떤 사람이 늘 착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우리가 예상할 수 있고.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늘 악 행만 일삼아서 평생을 살아왔다면. 저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거야라고 말하기도 하잖아 물론 당사자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말은 할 수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해. 바로 이렇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것이 바로 연기에서 말하는. 있을 유, 존재와 많은 관련이 있어.
저는 대체로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말해주었는데 이제는 오늘 답변들었는 그 내용으로 말해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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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대체로 그다음에 저는 이렇게 또 말하곤 했습니다.
그럼 유의 원인,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할 때, 즉 유를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원인이랄까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할 때, 불교에서는 취라고 대답해.
취는 취착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붙잡아서 딱 붙어버리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일상 용어에서는 집착해서 이제.
떨어질 수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취착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
이렇게 들려주다가 보면 왜 착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취착이라고 말하느냐라고 제게 질문하면.
저는 대체로 궁색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착한 일 하고 좋게 살아가려는 그 마음을 그 사람은 놓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바로 그렇게 착하고 남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삶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스스로 견해를 가지고 그 견해에서 벗어난 일을 하게 되면.
괴로움에 빠지게 돼.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가장 행복을 가져다주는. 착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아.
그렇게 굳게 믿으면서. 착하고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가는 그때가 그 사람에게는 가장 행복 할 것 같아 그래서 그 사람은 계속해서 그쪽 방향으로 행위 하면서 그런 상태로 있게 되어 그런 존재로 굳어지는 것 같아.
대체로 저는 이렇게.
어물쩍하게 답변 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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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답변해주신 말씀을 듣고 보니, 그동안 제가 "착하고 베푸는 삶"과 "그 착하고 베푸는 삶에 '집착(취착)'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고, 그래서 제 스스로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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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갈애에 대해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초전법륜 경(S56.11)에 보면 갈애에 대해서 나옵니다.
6.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 남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 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1.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2.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란 무슨 뜻입니까?
3. 저는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갈애에는 즐거움이라는 느낌도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1) 그러니까 우리가 갈애를 일으킬 때에는 즐거운 것을 더 즐기려고. 갈애를 일으킨다면, 거기에 즐거움이라는 느낌도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2) 그러나 지금 괴로워서 지금 괴로우니까 다른 즐거움을 찾으려고 할 때에는, 이것은 갈애입니까? 아니면 '갈애에 대한 욕구나 욕망'(욕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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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취 유에서, 애와 취의 구분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를 들어 여기 꿀단지가 있습니다.
꿀단지 꿀을 한 숟가락 떼어먹습니다.
맛이 아주 달콤합니다. 그래서 또 떼먹습니다.
달콤한 맛을 잊을 수 없어 또 떠먹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일을 하러 갈 때도 꿀단지를 가지고 가고. 밤에 잠을 잘 때도 꿀단지를 머리맡에 두고 잡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꿀단지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여기에서 어디까지 애이고, 어디까지가 취입니까?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손에 달라붙는 끈끈이가 있습니다. 그 끈끈이에 살짝 손을 댔습니다. 손이 달라붙었는데, 조금 있다가 다시 손을 떼려고 힘을 주었다니까 손이 떼어졌ㅡ졌습니다. 그렇게
손을 대었다가 떼고 손을 대 었다가 떼고 그렇게 하기를.
얼마동안 했더니 이제부터는 손을 떼려고 해도 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졌습니다. 손이 그 끈끈이에 달라붙게 되었습니다. 앞에서는 손을 대었다가 힘을 주면 끈끈이에서 손을 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손을 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어떻게 나누어야 애와 취 를 구분하는 것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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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 수 - 애'에서 저는 수를 잘 모른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는 것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감정이고, 수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오은으로 보자면 행에 속하는 감정을 가지고 수에 속하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느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유해 보겠습니다.
길을 걷다가 보면 어느 순간 티비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동시에 즐거움이 일어나고 곧바로 고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TV를 보게 되면 그것이 시간 낭비가 되고 H 유로 넘어간다는 것을 평소에 배워왔기 때문에.
집에 가서 TV를 보게 되면. 또 그 과정이 진행되어서.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되겠다는 그런 자책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TV를 보고.
싶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그 티비를 보면서 생긴 즐거움이 생각으로 떠오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지금 말을 하다가 보니까 이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길 가다가 떠오른 것은 TV를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TV를 본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게 떠오른 것은. 즐거움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전에 티비를 보면서 생겼던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상황에서 한 번 느낌을 알게 되었다고 혹은 느낌을 한 번 알게 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즐거움이라는 느낌을 반연하여. 다른 감정들이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또 TV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재가신자로서 무엇인가 향상하려고 한다면 TV를 봐서는 안 되는데 하는 그런. 자책과 그것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정신적 고통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길을 걸으면서 일어났던 생각을 오늘은 비로소 이렇게 한 번 말로 말해 보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애 취 유 는 모두 업입니다.
예, 방문객님.
그 말씀의 뜻은 신구의 삼업이라고 할 때의 그 업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네요.
그렇다면 애 취 유를 마음의 영역에서만 보지 말고, 몸의 행위 영역에서도 말의 행위 영역에서도 보아야 한다는 뜻인지요?
저는 지금까지 보통 애 취는 마음의 영역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에서는 신구의 삼업 모두에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애 취 유 는 모두 마음의 영역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랜 세월, 가명님은 가명님의 경험에 스턱된 상태인데요. 그러니까 갇힌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경험이라는 것도 해석이 필요합니다. 해석이 수반되어 있습니다. 가명님 스스로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이러한 측면을 좀 주목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애 취 유 는 모두 업이다...이 말에서 업이란, 우리나라 사람들 기준으로는 동사라고 생각하면 되요. 명사가 아니란 말이죠.
위와 같은 전제에서, 과거 여러 차례 적은 바 있는데, 아는 분들은 그냥 복습한다고 생각합시다.
유 는 존재 표상과 관련된 겁니다. 존재 표상을 획득하는 업입니다. 관념이 좀 어렵죠? 존재 표상... 사람이라는 존재 표상은, 사람이라는 존재 표상을 유하는 업에 의해 발생합니다.
사람이라 이름하는 것이 어떤 단일한 존재 표상은 아닌데, 이게 그룹이단 말이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어려워지고... 그냥 편의적으로 합니다. 이해를 해야 합니다.
어쨌든 애 취 유 의 세가지를 함께 논함에는 항상 존재 표상이 따라와야 되요. 그런데 '유'를 알아차리거나 '유'가 알려진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모르는 거니까 이해가 더 어려워요. 좀 빡세게 해야 알아요.
비유를 합시다. 한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동굴 안에 있어요. 더듬거려요. 그런데 뭔가 만져져... 느낌이 좋아... 그래서 그거를 향해 가까이 간단 말이죠. 이 단계가 애 입니다.
그래서 그거를 완전히 손에 쥐었어. 너무 좋아... 꽉 끌어안아... 이 단계가 취 입니다. 쉽죠?
여기까지는 그냥 그런데, 이 다음은 엽기적입니다.
그러면 유 는 뭐냐? 너무 좋아서 그거를 삼켜버리는 거예요.
마음이, 더듬으면서 가까이 가고, 한발 더 나아가 끌어안고, 급기야 삼키는 겁니다. 이것이 애 취 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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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님은 저항감이 있을 수 있는데요.
애 취 유 의 과정은, 실제로, 정말 실제로, 삼매 수행을 통해 전형적으로 알려집니다. 삼매가 바른 삼매, 삿된 삼매 가릴 거 없이 삼매는 모두 그래요... 차별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게 참... 하핫
삼매 표상의 획득이, 전형적으로 애 취 유 의 과정입니다.
삼매라는 것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하는 겁니다.
무엇이든간에... 뭐 파란색? 파란색을 대상으로 하려고 한다... 그럼 이제 색깔에서는 우리가 보통 보색을 보조수단으로 써요.
파란색의 보색... 주황색... 눈 뜨고 주황색을 봐요... 계속 봐... 그리고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파란색이 잔상으로 남아요. 색맹은 모르겠어요...
삼매 대상을 정할 때 생각은 하면 안되요. 그게 파란색이냐 아니냐 따질 필요도 없어요.
그냥 주황색을 보다가 눈을 감고 잔상으로 떠오른 색깔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이게 뭐죠? 애 입니다.
위와 같은 애 를 열심히 하다 보면, 안정적으로 파란색이 유지됩니다. 이게 뭐죠? 취 입니다. 붙잡은 거예요.
이제 계속 유지된 파란색에 집중을 강화시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행자가 파란색이 됩니다. 유 죠.
파란색이 유 는 아니예요. 파란색은 존재 표상이지... 삼매 표상요. 파란색을 취하다 그것이 되게 하는 힘... 그 존재 표상을 획득하게 한 힘, 그게 유입니다.
마음이 취 의 상태에서는 파란색과 분리되어 있어요. 그런데 유 의 상태에서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매 즉 합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 가명(나): 예, 방문객님. 오늘의 말씀은 참으로 제게 딱 와닿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그 당시에는 방문객님듸 말씀을 제가 이해할 수준이 안 되었네요. 그리고 이제 저의 과제는 들려주신 말씀들에서 얼마 만큼 의미를 찾아 내는가 이겠군요.
방문객님. 오늘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명(나): 제가 한글 문서에서 글을 쓰고 나서, 그 쓴 글을 붙여넣기를 하려고 하니 방문객님께서 더 많은 말씀을 들려 주셔서 제 댓글은 나중에 한꺼번에 올리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삼매를 닦지 못해서 개념에 머물고 있구나.’ 라고 그리고 나서 다시 글을 읽으니까 방문객님께서 그 부분을 설명해 주고 계시네요.
* 가명(나) : 예, 약간의 저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번 마음을 제어하여, 제어했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 마음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이 바쁜 와중에 말씀 들려주시는 것, 그것만으로도 제 마음에 잠깐 스쳐가는, 이런 잠시 머물다 사라질 저항감에 제 스스로 압도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삼매 부분, 책에서만 글로만 듣던 그 내용을 오늘 잘 들었습니다. 오늘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할 내용을 들었습니다
이제 은퇴하셨다니까, 여유도 있으실 거고... 가명님은 꾸준하시니까요, 저보다 빼어난 거 같아요. 하나 하나 확인하시면서, 슬로우 라이프~
저도 사실상 은퇴 상태이긴 한데요. 아직 조금 정리할 게 있어서요. 은퇴하면 취미로 게임이라도 해볼라고 하는데요, 게임용 노트북도 샀는데... 아이 참...
아, 제게 이렇게 격려해 주시다니, 너무 뜻밖의 말씀이십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 제가 그러하다니, 아닙니다. 방문객님의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그동안 제 글에 어떤 오류가 있을까 늘 긴장되고 걱정이 되곤 했습니다. ...
방문객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방문객님 설명 듣고보니 제가 미처 생각조차 해본적 없는 <존재 유>가 깊은 연기법칙을 품고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듯 해요.
그러니까 유는 존재 자체가 아니고, 상호작용이 강화되어 마치 무엇이 된 것처럼 동일시가 일어난 상태로 그러한 동일시 상태도 업력의 작용일 뿐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가명님이 늘 깊게 따져보시고 질문이 따라오시다보니
덕분에 저까지도 대단한 연기법의 이치. 힘 을 한 가지 얻어가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다나 에서도 그랬고, 흔히 그런 표현을 썼고 쓰는데요.
애 는 당연히 '의도 내지 의지적 갈애 (작용)'이구요. 취 는 한발 더 나아가 '내부 결정( 작용)'이라고 종종 했구요, 유 는 정말 자주 사용했는데 '수용적 간주 (작용) 내지 수용적 동일시 (작용)'라고 좀 풀어 번역해서 적기도 했습니다. 그 자체가 모두 힘이잖아요? 복습하자면, 오온은 모두 작용입니다, 색온도 작용입니다.
수용적 간주는 정말 많이 쓴 거 같은데요. 동일시하는 힘 같은 표현들요. 기억나지 않나요?
애 취 유 로의 이행은, 소위 '식의 증장'의 대표적 유형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유'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거의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색온에 익숙한 우리에게 애 취 유 의 과정을 들자면, 쉽게는 밥을 먹는 과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끝도 없구요. 일상이 정말 미세한 것들이 결합하여 구성되거든요. 그러니 혀의 대상인 맛을 기준으로 한 단계만 전형적 예를 들겠습니다. 그러니 여섯 영역 별로 잘 이해를 잘해야 합니다.
음식을 입에 넣어요. 혀가 처음 맛을 봅니다. 이때 불쾌한 느낌이 너무 강하면 뱉어요. 상한 음식 같은 거를 생각하면 될 겁니다. 반면 유쾌한 느낌이 발생하죠? 끌린 거예요. 이게 애 입니다.
이제 계속 씹어서 맛을 봐요. 계속 씹으니까 맛이 좀 이상해? 불쾌한 느낌이 발생하죠? 예로, 아무래도 상한 거 같어. 그러면 뱉어요. 하지만 유쾌한 느낌이 강해집니다. 충분히 맛을 즐깁니다. 이게 취 입니다.
충분히 맛을 즐기면, 이제 삼킵니다. 이게 유 입니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계속 음식을 섭취하면서, 배부르지 않은 상태(또 다른 유 연 생)가 배부른 상태(또 또 다른 유 연 생)로 변합니다.
===
알아차림은 마음을 일으키는 만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고정값이 없거든요. 양자역학에선 뭔가 최소 단위를 상정하지만, 그런 거는 실참에서 생각할 필요 없어요. 분별력(업력)의 한도 내에서 분별(식)은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알아차림을 정밀하게 할수록, 일상생활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간이 너무 걸려요.
여기서 우리는 '기억'을 사용합니다. 어떤 구조로 이것이 발생하는지 기억합니다. 특히 인간계의 중생들, 아주 미세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인간계의 중생들(현재로서는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해당 특성이 두드러지기에 인간계라 칭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은, '기억으로 성취한다'에서 아주 유리한 중생군입니다.
어떻든 한번은 꼼꼼하게 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위에서 예를 든 밥을 먹을 때는요. 최소한 첫번째는 좀 미세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밥 먹는 중간이라도 상관 없고, 어쨌든 밥 먹는 중 한번쯤은 가능한한 미세하게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기억도 무상해서 흐려지거든요.
기억을 이용해서 이전에 살피지 않았던 것을 추가로 살펴 기억에 편입시키고 해서... 그러다 보면, 세계가 어떻다는 거를 점점 더 미세하게 알고 있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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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을 할 때, 흔히 발생하는 오류가요. 지금의 예에서요. 애 취 유 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안되요. 오온 등에 입각해 가급적 세세하게 파악하려고만 해야 합니다.
그 다음 세세하게 파악한 기억을 살펴서, 요것은 애 이고 저것은 취 이고 이것은 유 인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도 해야 하는 겁니다. 애초에 애 취 유 는 그 정도의 분별은 성립하도록 세부적으로 마음을 기울이면 좋지 않겠냐는 가이드라인입니다.
물론 다음과 같은 경우는 좀 다릅니다. 애 취 유 라는 가이드라인이 있는데, 애 란 무엇일까? 라고 해서 그 의문에 초점을 맞춰 우선 애 를 파악하려고 의도하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행하고 이것이 애 인가? 의문을 던지고, 다시 구체적으로 행하고 이것이 애 인가?하고 의문을 던지면서 애 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방식이리서 그렇습니다.
두가지 방법 모두 사용됩니다, 사용해야 하구요. 그래야 구체적인 앎 즉 이해가 성립합니다.
과거 적은 바 있지만, 알아차림으로 법을 알아간다는 것은 철저한 노가다입니다. 이보다 더한 노가다는 없어요. 자기 마음을 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행하는 노가다이고, 마음을 쓸 수 있는 힘도 마음을 개발할수록 증장합니다.
네 다 배웠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인데
스스로 행하지 않은 이론적 이해는 내것이 될 수 없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정리하다보니
2016년 이렇게 깨알같이 노트해놓았네요. 그리고는 중요해서 사진까지 찍어놨다능
공부는 열심히도 했는데 스스로 살피지 않아 완전한 내것으로는 만들지 못했죠
아... 같은 단어가 여러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이해를 해야 의미 파악을 그르치지 않습니다.
수온은 마음이라는 감각긱관에서 발생하는 질감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체험상도 그렇고, 이론적으로도 가장 무난한 이해입니다. 마음의 대상이 마음이라는 감각기관과 접촉하면서 생기는 질감입니다.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이 대상과 부딪혀 발생하는 질감'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전달하려다 보니까 나온 건데, 사실 어렵죠? 머리 그러니까 개념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당장에 우리가 일상에서 호불호를 얼마나 많이 느낍니까? 유쾌함과 불쾌함을 얼마나 많이 느껴요? 자기 경험을 바르게 보는 것... 이것이 지식이나 개념의 목적이거든요. 불교에선 그래요.
어쨌든 불교에서는, 체험에 입각하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구체적 이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체험에 입각해야 잘 망각하지도 않구요. 늘 체험 즉 경험하니까...
뭐... 그냥 말로만 하는 거가 아닌 다음에야 위와 같습니다. 말로만 하는 것도 그냥 하는 거는 아니고, 불교에선 문턱을 못넘은 사람의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 정치적 목적? 정치... 대중 수용성...
유일한 예외는 (불교적)추론입니다. 추론은 체험에 준해요
왜 그러냐 하면요. '체험할 수 없는 것을 이치로 아는 것'을 '추론'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치는 당연히 '연기'입니다. 즉 애초에 경험 즉 체험할 수 없는 것이므로, 체험으로는 당최 알 수 없는 거니까요. 당연한 거예요, 그렇죠?
불교, 우리가 아는 인간에게 설해진 불교는요. 우리에게 인간이기를 요구합니다. 인간에게 설해졌으니까... 인간은 의심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즉 탐구하는 중생입니다.
탐구하는 자는, 의심도 제대로 합니다. 의문을 제기해도 유익한 경우가 많습니다. 해로운 의문을 만들지 않아...탐구하면 그런 짓을 절로 안하게 됩니다. 특히 배우는 초창기에 유익한 의문을 무자게 만듭니다. 적절한 의문이 쏟아지는 시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아직 초창기에 진입하지 못한 겁니다. 문턱도 못넘은 거.
제 말을 볼 때도요. "저놈아가 뭔 말하노? 맞기나 하나? 저넘 말대로라면, 이거는 또 어떻다는 건데? ... ..."와 같은 자세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파고들어서 말이죠... 급기야 "함 손봐주까!"하는 겁니다. 인간의 본질은 반역자입니다. 탐구하면 반역하게 돼... 반역자이기에, 역류문에 들어서고, 해탈도 하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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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말을 왜 했는가?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이 대상과 부딪혀 발생하는 질감이라는 표현을 정말 많이 써도, 다음과 같은 유형의 지적을 받은 적이 없어요.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의 질감? 그러면 눈 등의 감각기관에서 발생하는 질감은 뭔데?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서만 질감이 발생하고, 다른 감각기관에서는 질감이 발생하지 않나?
위와 같은 유형의 의문이 생기지 않아요? 의심이 생기지 않아요? 탐구심이 생기지 않아요? 파고들고 싶지 않아요? 마음에서만 그렇다면, 왜 눈에서는 그렇지 않은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질감'이라는게 도대체 뭘까? '감각기관에서의 질감'이라는 거... 그게 도대체 뭐야? 경험에서 그게 뭐야? 우리가 체험하는 거에서 그게 도대체 뭐냐고... 그런 의문들이 생기지 않습니까?
위와 같은 의문들이 생기지 않는데,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의 질감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어요? 불가능해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해는 의문 즉 의심 곧 탐구에서 발생합니다. 의문과 대답, 여기서 대답이 이해입니다. 스스로 찾은 이해, 스스로 찾은 답...
눈 등의 감각기관에서 발생하는 질감이 뭔가? 쉽습니다. 늘 경험하는 거예요. 형상 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