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맵시 날렵한 수필과 만나다
文 熙 鳳
2024년 7월 15일 경기도 광주 경기도자 박물관에서 제25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생각한다.’와 ‘과학자 아무개, 수필가 아무개’라는 주제 발표가 있었고, 질의 및 토론이 이어졌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일신수필(馹迅隨筆)이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이 7월 15일이라서 이 날을 택해 세미나가 개최된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수필의 날을 언제로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날을 기해 어떤 수필을 써야 독자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들른 곳이 경기도자박물관, 여주 명성황후 생가, 황학산 수목원 등이다. 경기도자박물관은 조선시대 500년 간 왕실용 도자기를 생산했던 관요의 고장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도자전문 박물관이다. 찬사를 연발케 하는 도자기들을 보며 조상들의 장인정신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자(陶瓷)는 도기와 자기를 말한다. 변기, 세면대 등의 도(陶)와 백자, 청자 등의 자(瓷)가 합쳐진 말이다. 우리는 도기 없이 사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자기 없이도 역시 그렇다. 청자와 백자를 닮은 수필을 쓰고 싶다.
여주에 위치한 명성황후 생가지를 방문하니 금새 숙연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던 시기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명성황후는 뛰어난 인재를 두루 등용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외국의 침략 세력끼리 서로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론을 펼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한 분이시다. 그런 훌륭한 분을 대 러시아 외교관계가 급진전을 보이자 당황한 일본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러 4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셨다. 경내를 둘러보는 마음이 착잡하였다.
황학산 수목원은 여느 수목원과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는 수목원이다. 큰 나무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작은 나무와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만 숲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다. 1㏊의 숲이 생산하는 산소는 45명이 1년간 숨 쉴 수 있는 양이다. 마신 산소는 폐 속으로 들어가고, 7억 개나 되는 폐세포가 혈액으로 산소를 공급한다. 도심의 공기에는 1㎡ 당 10만 개 정도의 먼지 알갱이가 있으나, 숲속에서는 500∼2,000개에 불과한 데, 이는 숲이라는 필터가 먼지 알갱이를 걸러낸 덕분이다. 숲에서 깨끗한 산소를 공급 받는 것은 좋은 약이나 음식 섭취보다 건강에 유익하다. 그래서 숲의 깨끗한 공기는 암을 비롯한 여러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숲길 걷기는 돈 안들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다. 숲은 병원이고, 두 다리는 의사다. 지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핀다. 숲을 닮은 수필이라면 일급 수필이 아니겠는가.
도자, 명성황후, 황학산의 기를 받아 힘찬 율동의 나래를 펼쳐보고 싶다. 도자기의 중후한 멋과 명성황후의 애국혼과 황학산의 무한한 베풂의 기를 받아 수필혼을 불태우고 싶다. 수필은 느낌의 세계를 뛰어넘어 훨씬 높은 곳에 존재하는 깨달음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거기에 도달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며, 평생 동안 정진하여도 닿을 수 없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잘 삶아 건져놓은 면발같이 매끈하고 목에 술술 넘어가는 미려하고도 감칠 맛 나는 문장으로 직조된 수필이라면 오죽 좋으랴. 창작은 산고(産苦)와 같다고 했다. 수태(受胎)는 확실히 신비하고도 환희로운 일이다.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번득이는 기지가 있고, 그윽한 방향이 흐르는 수필이라면 일급이다. 재미는 수필의 향이요 맛이다. 그 재미는 지성을 추구하는 재미요 사랑을 느끼는 맛이다. 한 줄의 글을 쓰는 것이 피를 말리는 아픔이라면, 한 줄의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뼈를 깎는 아픔이란 말을 곱씹으며 스스로의 무능을 탓해 본다.
누구나 겪는 일상적인 사실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사상들에서 수필가는 인간 삶의 본질과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를 찾아낸다. 그래서 몸맵시 날렵한 수필과 만난다. 민첩하고 유연성을 자랑하는 수필과 상봉한다.
계절 따라 옷을 바꿔 입는 자연과 벗하며, 내가 쓰는 글도 계절 따라 옷을 바꿔 입히는 그런 수필이고 싶다. 힘찬 율동으로 포효하는 글, 백합의 그윽한 향기를 담은 글, 모시 한복처럼 깨끗하고 정갈한 글을 씀으로써 독자에게 뭉클하면서도 산뜻한 감동을 선사하는 그런 수필가이고 싶다. 높은 곳에 오르는데 연연하기보다는 깊은 곳도 간과하지 않는 그런 수필가이고 싶다. 아무리 아름다운 수필어라 할지라도 눈물에 적시지 않고 원고지에 파종하면 말라죽는다 하지 않는가.
경기도자박물관, 명성황후 생가, 황학산의 숲이 들려주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