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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18
12월28일[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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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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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nkLJuOGYSI
[서울대교구 구본석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행당동성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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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헤로데 가문은 BC 55년부터 AD 93년까지 팔레스타인과 인근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여러 왕들 가운데 대(大)헤롯이라고 불리는 헤로데 대왕(재위 기간 BC 37~4)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임명되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수많은 성채와 수로, 극장과 공공건축물을 건설하며 유다를 발전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음모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중심 인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헤로데 대왕은 당연히 로마에 충성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로마의 눈밖에 벗어나면 폐위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언제난 눈치를 봐야했습니다.
외교 정책도 로마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기에, 온전한 왕이라기보다 제한된 권한을 지닌 군주 정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에게는 10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14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 아들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 아니라 세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골고루 상속해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세명의 아들들은 모두 이복(異腹) 형제들이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이 어린 시절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무자비한 살상이요 불륜, 방종과 타락한 생활이었기에, 헤로데 왕조는 오래 가지 않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헤로데 아켈라오는 십년도 지나지 않아 로마로부터 파면당합니다. 북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헤로데 필립보는 AD 34년에 죽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역시 AD 39년에 파면되어, 모든 영지는 로마 총독 관할로 귀속되고 말았습니다.
잔악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났던 헤로데 가문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만, 헤로데 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순교한 세례자 요한이
대표적입니다.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것이 두려워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헤로데 대왕은 인류 역사 안에서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했습니다.
당시 자행되었던 대 학살 사건의 정황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환히 그려집니다. 당시 남성중심의 부계사회였던 유다 문화 안에서 사내아이들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사내아이들은 가문의 혈통을 잇는 보배요 가정의 미래요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동네 아기란 아기들이 모조리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마다 흘러나오던 아기들의 울음소리 대신 아기 잃고 슬퍼하는 부모들의 통곡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혹시나 해서 아기의 볼을 꼬집어보고 가슴에 귀를 대어 봐도 이미 상황은 되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불행한 예언이 헤로데 시절에 이르러 정확하게 실현된 것입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정권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정신 나간 지도자들,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야수 같은 지도자들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더 요구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희생자들을 치료하기, 통제불능인 자동차를 멈추게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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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0M_66xhZ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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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도 없이 죽임당한 아기들이 어떻게 순교자가 될까?>
아기가 태어나려면 엄마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피 흘림이 아기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어떤 생명이든 피의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 흘림은 본인들의 선택입니다. 반면 오늘 아기 순교자들은 본인들의 선택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본인들이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순교자로 인정될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구약의 모세가 파라오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일강에서 죽어야만 했던 아기들도 순교자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들은 모세의 길을 닦았습니다. 어떻게 본인의 선택이 아닌데도 하느님께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데도 그 피의 길이 필요 없었을까요? 가장 먼저 순교의 길을 가셨던 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다음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입니다. 그들은 헤로데가 메시아가 죽었다고 믿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엄마의 역할을 한 이들입니다.
누구나 하느님 참 생명의 길을 자기 피로 포장하는 이들은 구원받습니다. 단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칼뱅이 주장하는 대로 심판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은 없습니다.
‘터미네이터’(1984)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SF 영화입니다. 줄거리에서는 터미네이터로 알려진 사이보그 암살자가 사라 코너를 죽이기 위해 2029년부터 1984년까지 과거로 보내집니다. 사라는 미래의 아들인 존 코너가 종말 이후의 미래 기계에 대항하는 저항군을 이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목표가 됩니다.
한편, 인간 쪽에서도 존 코너는 자기 어머니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군인 카일 리스도 과거로 보냅니다. 영화는 터미네이터가 사라를 끈질기게 쫓는 동안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을 펼치고, 카일은 그녀를 보호하고 미래의 위험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카일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기 상관인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됩니다.
카일 리스는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터미네이터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 행동은 사라를 구할 뿐만 아니라 기계에 대한 저항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존 코너의 미래 탄생을 보장합니다.
존 코너가 자신을 과거로 보낼 때 카일 리스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이력을 알고 있는 존은 자신의 존재도 보장하는 임무를 위해 리스를 선택합니다. 이는 리스의 과거 여행이 미래의 존 코너 탄생에 필수적이라는 역설을 형성합니다. 존 코너는 카일 리스를 보며 이미 과거에 자기 어머니를 위해 희생할 존재로 여기고 그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 눈엔 잠깐 나타났다가 죽는 존재들일지라도 하느님은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 무언가가 있어서 선택받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자비를 입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모르고 한 일이라면 용서받기 쉽습니다. 그래도 바오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1티모 1,15-16)
분명히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죄인인 줄 알기에 부르심을 받았고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려는 목적으로 선택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1티모 1,12)
바로 ‘성실성’입니다. 이 단어는 ‘믿을만한’이란 뜻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여지려는, 옳은 일이면 목숨을 바치려는 충실성을 보고 주님께서 바오로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미리 정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심판받는다면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가’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러한 ‘착한 뜻’을 가진 이들에게 평화가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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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 때 처음 접한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은 ‘태백산맥’입니다. 대하소설이었고, 감동과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 조정래 선생님의 장편 ‘한강과 아리랑’을 읽었습니다. 세 작품의 권수는 32권입니다. 시대 순으로 하면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의 흐름이지만 저는 태백산맥, 아리랑 그리고 한강을 읽었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단편인 ‘정글만리, 천년의 질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82세의 조정래 선생님은 신작 ‘황금종이’를 발표하였습니다. 지구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와 신은 점차 쇠태의 길을 가고 있는데 여전히 막강한 권능과 힘을 자랑하는 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돈’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에서 ‘돈’ 때문에 망가지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등단 60년이 되는 2030년에 인간의 존재와 영혼을 주제로 ‘신화(神話)’의 세상을 전하며 은퇴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점에서 황금종이를 사오면서 제게 스스로 ‘성탄선물’을 했다고 여겼습니다. 연말연시입니다. 저무는 한해와 다가오는 한해를 책과 함께 보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리랑에서는 나라를 빼앗기고 먼 타국에서 살아야 하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서럽고, 아프고, 고난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배신과 모함으로 일본 형사에게 잡혀서 고문을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념의 갈등으로 갈라서야 했던 형제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념의 이름으로 죄 없는 이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군인에게 고통을 받고, 밤에는 빨치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서러운 민중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기대어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는 가난 때문에, 연좌제의 그물에 갇혀 꼼짝 못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져야 했던 슬픈 청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력과 능력이 있어도 꿈을 펼칠 수 없는 젊은이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우리 민족의 슬픔과 고난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한과 아픔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바라보며 모든 설움과 아픔을 견디어가는 민중의 힘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아이가 메시아가 되어 자신의 권력과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두려움이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를 만들어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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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18: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마태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크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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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의 넷째 날,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일어난 참상 하나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헤로데 임금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이 아기가 커서 자기 왕권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광기 서린 끔찍한 일입니다. 한 아기의 탄생으로 밝게 비추는 빛, 그리고 많은 아기의 죽음으로 드리워진 어두움.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는 이처럼 명과 암이 공존합니다. 구원하러 오신 분의 탄생이 그토록 많은 이의 죽음을 불러일으킨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무런 죄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하였던 그 아기들의 희생이 구원 역사에 정말 필요한 일이었는지 묻게 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구원의 때가 오자 이 아기들은 자기들 희생의 피로 그 역사에 기꺼이 동참하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구원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헤로데의 광기는 잠잠하여졌고, 임금은 더 이상 그 아기를 찾아다니지 않게 됩니다. 베들레헴의 죄 없는 아기들이 한 아기의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덕택으로 살아난 아기는 자라나서 모든 이의 죽음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가 모두 누릴 영원한 생명의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생각하여 보니, 교회는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봉헌한 순교자들의 피로 더욱 굳건하여질 수 있었습니다. 꼭 순교의 형태는 아닐지라도,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도록 초대됩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복음을 모르면서도 그 초대에 응하였는데, 복음을 잘 아는 우리야 얼마나 더 깊이 그분의 뜻에 동참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루하루 봉헌하는 우리의 작은 희생이 하느님 나라 건설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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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베들레헴의 아기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3-18)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나셨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마태 2,2)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다인들의 임금, 메시아’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즉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킬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헤로데의 입장에서는 메시아 탄생 소식을 두려워했을 텐데, 그는 로마 황제가 임명한 왕이었고,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족 후손이어서 백성들의 지지를 못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을까? 헤로데는 갓난아기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 아기를 메시아로(임금으로) 모시고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 반란을 미리 막으려면 메시아로 태어나셨다는 아기를 죽이면 된다는 것이 헤로데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는 말만 있고,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동방박사들의 말을 안 믿었던 것 같습니다.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고을이 베들레헴이라고 말했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도, 동방박사들의 말을 안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어쩌면 그런 소식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먹고사는 문제만 신경 쓰느라고 그랬는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을까 봐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메시아 탄생 소식에 관심을 두고,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인 사람은 헤로데뿐이었다는 것은,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렸으면서도, 진짜로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는 반기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순된 모습, 또는 어리석은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죽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순교자로 생각하면서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아기들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나?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천사가 미리 알려주고 피신시켰기 때문이지 베들레헴의 아기들 ‘덕분’은 아닙니다.
천사는 요셉에게만 알려 주고 다른 집에는 말을 안 했을까? 다른 집에도 알려 주었을 텐데, 어떤 집은 그 말을 믿고 피했을 것이고, 어떤 집은 안 믿고 가만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요셉 성인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마태 1,19), 혼자서만 알고 자기 식구들만 데리고 몰래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할 수 있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을 텐데, 그 말을 믿은 사람들은 피했을 것이고, 안 믿은 사람들은 비웃으면서 안 피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하느님의 뜻’이었나?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의 범죄’입니다. 우리는 아무 일에나 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몰랐으니까 안 믿었고,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 아기들의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 대신에’ 죽은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너무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해석입니다.>
오늘날에도 억울하게 죽는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많습니다. 세계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테러들, 독재자들의 인권탄압, 여러 가지 사건들과 사고들, 그런 일들 때문에 아무 죄 없이 죽는 아기들과 어린이들은 모두 ‘베들레헴의 아기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런 세상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실까? 구경하듯이 지켜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회개하기를, 그리고 인간들이 스스로 선한 길을 찾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심정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헤로데 같은 자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런 자들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모든 일에 전부 다 직접 개입하신다면, 그래서 어떤 죄를 지을 때마다 곧바로 천벌을 내리신다면 그 세상이 과연 인간 세상일까? 하느님 나라일까? 그 천벌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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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동방 박사들의 아기 예수님 방문 사건(2,1-12 참조)에 이어서 예수님 가족의 피신과 사내아이들의 학살 사건을 보도합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헤로데의 적개심과 화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사건의 원인은 앞선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이 전하는 예수님 이야기는 탈출기 1─2장이 전하는 모세의 어린 시절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으로 모세도 죽을 위험에 놓였지만, 그는 파라오의 딸에게 입양되어 죽음을 면하고, 뒤에 이스라엘의 탈출을 돕는 인도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경우와 조금 다릅니다. 헤로데 임금의 악의와 적개심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해치려는 적대자를 피하여 죽음을 모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하여, 곧 피를 흘려 ‘많은 이’를 구원하시려고 살게 되신 것입니다.(1,21; 26,26 참조)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음으로, 죄 없이도 죽어야 하셨던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으로 그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 이야기에서 하느님 약속이 완성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 약속은 모세의 탄생과 구출에 관한 이야기로 예고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2장은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이자 새로운 모세로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고난과 희망의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고, 예수님께서 맞으실 고난과 영광의 사건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었지만, 그 역사는 지금 우리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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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예수님 안에서 계속하시고 그것을 완성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중요한 체험들에 참여하시어 새로운 ‘모세’로 제시됩니다.
파라오가 히브리 사내아이를 죽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살리시고, 피신시키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시고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로 보내 주십니다.
이어서 복음사가는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로 말미암은 아픔과 비탄을 전합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예레 31,15) 라마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 유배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던 출발지로, 라헬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유배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을 대변합니다.
이 울부짖음은 하느님을 향한 외침이면서 아직 주어지지 않은 위로에 대한 요청입니다. ‘사실 하느님만이 이에 응답하실 수 있는데, 말을 능가하는 유일한 참된 위로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며,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 유년기』, 157-158면 참조)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죄한 이의, 한 아이의 죽음, 상처와 아픔 앞에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도대체 뭘 하셨나?’ 하고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묻다가 ‘사랑만이 전능하다고 믿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사람 곁에서 더 힘들어하시고, 더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풀어 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보다 더 아파하시면서 내 곁을 지켜 주시는 아름다운 분을 만났습니다. 그 아름다운 분을 외면한다면 인간이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처럼 아름다워지려고 발버둥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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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2,16)
무죄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죄 많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마태1,21) 위해 태어나신 기쁨과 평화의 성탄을 지내는 성탄 8일 축제 동안 스테파노의 순교와 함께 오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을 지내는 것이 무척 아이러니합니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며 생명의 고귀함의 무게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으로 자기 왕권에 위협을 느낀 헤로데는 예수께서 태어난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2,16) 어처구니없는 집단 살인, 학살을 범합니다. 무모하고 무자비한 폭군의 폭력성과 그로 말미암아 희생되어 죽은, 순교한 아이들의 주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후대가 비록 축일을 통해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고 해도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는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2,18) 는 예레미야의 절규가 가슴을 저미어 옵니다. 그 까닭은 억울한 죽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로 끝나지 않고 세상 곳곳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헤로데의 왕권수호를 위해, 피해망상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을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바로 그들의 죽음이 바로 예수님 때문에 죄 없는 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오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살해된 죄 없는 아기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따르며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며 영원히 외칩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오지 않았고, 왔더라도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2,2)라고 묻지 않았다면 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요셉도 꿈에 천사의 말을 듣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지 않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여러 퍼즐을 이렇게 저렇게 맞추어도 결국 예수님의 탄생과 “주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2,15) 피할 수 없는 비극은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인간과 함께하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 그리고 불신과 거부에 상관하지 않고 당신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가 되었기에 더 이상 지체하거나 변경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함께하시려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써 그 신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뜻하지 않은 인간의 거부와 저항의 표지인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구원을 미루지 않으시고 인간의 죄와 거부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무죄한 아이들의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하느님의 뜻은 아닐지라도 ‘사람들과 함께하시고 구원하시려는 뜻’에 대한 반발과 거부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마음에 되새기면서 오늘의 축제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라는 본기도의 말마디와 입당송의 “그리스도 때문에 살해된 죄 없는 아기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따르며 영원히 외치네. 주님 영광받으소서.” 라는 표현은 천상에서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크신 구원의 관점에서 그러하리라고 믿고 싶지만, 인간적인 시선에서 볼 때 참으로 이해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지 헤로데의 무지와 불신앙만이 아닌 빛을 두려워하는 인간 내면의 어두움이 빚은 죄이기에 역사를 통해서 무죄한 아이들이 지금도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가?’라는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이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자극해서 빚어진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는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죄와의 대립이 인간과 구원 역사의 현실이며 구원 과정인가 봅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자녀를 낳고 키우는 부모들의 많은 삶의 고통과 시련 중에 가장 큰 고통과 상실은 바로 오늘 축일처럼 철없고 힘없는 자녀의 죽음을 직면하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느낍니다. 자신의 가장 비참한 가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함의 순간은 아마도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이며 죽음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죽어간 자녀들의 고통과 그것을 받아들여만 하는 부모들의 고통의 무게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죽어가는 아이들의 불행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너무 일찍 찾아온 죽음이 아이들에겐 비참하고 참혹한 일이겠지만, 불행과 행복 그리고 이별과 죽음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죽어간 아이들보다 오히려 그럼에도 살아남은 부모가 받아야 할 고통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십니까?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죄책감의 무게를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피 흘림의 순교’를 당했다면, 부모는 ‘피 흘림 없는 순교’를 자기들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는 내적 고통과 상실감 그리고 무력감을 가진 채 살아야 합니다. 이는 또한 이후에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알게 될 마리아 역시도 자기 자녀인 예수로 말미암아 수많은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살면서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요. 그리고 훗날 무죄한 아드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바라보면서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부모들의 고통을 당신도 겪으면서 모든 어머니의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품에 앉고 계시는 피에타상을 통해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이제 그 고통에 동참하고 함께 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순교는 단지 어제의 순교가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구원의 신비이며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신앙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이별은 재회로, 죽음은 생명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믿고 희망하기에 오늘 축일의 어둡고 슬픈 속에서 기쁨으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은 먼저 헤로데의 음흉하고 사악한 생각을 미리 알아차린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2,13)하게 하시고, 헤로데가 죽을 때 또다시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15)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복음은 그 피할 수 없는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의 배경을 구세사적인 관점에서 전해 주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자신을 무시한 박사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에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2,16) 고 오늘 축일의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에 대한 처절한 묘사를 복음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전해 주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2.18) 이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단지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2,14)라는 예언처럼 새로운 희망이, 구원이 시작되기 위해 선행 조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결코 정적인 흐름이 아니라 때론 지나칠 정도로 동적이고, 암울한 절망 속에서도 역동적인 희망을 성취한다는 것을 믿고, 오늘 복음과 축일이 가져다주는 슬픈 기쁨, 어둔 광명을 수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곡선도 직선으로, 절망도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잉태하실 수 있는 자비와 사랑의 구원자이십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알렐루야.” (복음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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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무엇인가를 적절한 대가나 노력 없이 거저 얻으려는 사람을 향해 우리는 ‘도둑놈 심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우수한 성적 맞기를 바라는 것은 어떨까요? 근면 절약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벼락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또 어떨까요? 그렇다면 100의 노력을 했는데, 결과는 20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불평불만을 가져야 할까요?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있는 본당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성경 특강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준비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까요? 아닙니다. 한 번의 강의를 위해 10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고 나면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으면서, 더 좋은 강의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매번 깨닫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과만 나오길 바라는 모든 것이 ‘도둑놈 심보’입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한한 존재 앞에서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완벽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노력만으로는 그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또 함께하시기에 그래도 이만큼의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도둑놈 심보에서 벗어나 겸손함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는 오늘입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은 뒤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없애려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 갓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자기 왕위를 지키기 위해 이런 엄청난 짓을 한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의 아픔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역사에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왕으로 기록되게 했습니다. 특히 자기는 중요하고 어린아이의 생명은 별것 없다고 생각하는 헤로데 왕의 모습이 ‘도둑놈 심보’를 가진 못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려야 하는 의무는 잊어버리고, 자기가 누릴 것만 찾고 있음은 그가 진짜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남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저 자기만 편하고 많은 것을 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헤로데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며,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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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죽이는 이에게 말하노니>
마태오 2,13-18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죽이는 이에게 말하노니>
“그때에 헤로데는 …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오 2,16)
내가 있어
비로소
너 있거늘
내가 없어야
그나마
너 있을 수 있다면
너는
있어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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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고, 또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친 사람은 다리를 오그리고 자고, 맞은 사람은 다리를 펴고 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뒷일이 걱정되어 늘 불안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살해했습니다.(마태2,16) 그는 권력에 집착하여 간교하고 잔인하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이라고 단정하고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 하려는 욕심과 불안함이 잔인한 죄를 저지르고 무거운 짐에 눌려 지내야 하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습니다.
이런 어둠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리 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죄와 탐욕에 눌려 사는 것보다 손해 보고 버리며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요즘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맞바꾸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아도 인간입니다. 그들의 생명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합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며 지체 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든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역경 안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 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세상의 불의는 의인의 탄생을 싫어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면 우리 사회 안에 거짓과 불의에 어떻게 다가서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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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역사는 반복되는가>
-날마다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삽시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시편121,1-2)
답답할 때 저절로 나오는 시편 성구입니다. 요즘 자주 “길은 어디에? 빛은 어디에? 과연 인류에게 희망은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는가?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묻게 됩니다. 오늘 복음중 이집트로 피신하는 요셉의 가정을 통해서, 또 헤로데의 무죄한 아기들의 학살을 통해서도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계속 뇌리에 남아있는 두가지 내용들입니다.
“전두광의 ‘절대적 악마화’가 우리를 구원할까. ‘서울의 봄’은 절대적 악마의 현존, 혹은 재림을 경고하고, 그 절멸을 다시 염원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영화 속 이태신이 절대적 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이태신에게서 그 어떤 씻김의 느낌도 갖지 못했다. 그 역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키워줬을 뿐이다.”
양극단의 분노와 증오, 대결만 있지 구원의 빛은 없습니다. 이러면 악순환의 반복에서 못 벗어납니다. 저절로 구원은 어디에? 묻게 되는 내용입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습니다. 양쪽 다 상대적일 뿐이요 이를 깨닫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내가 절대 선인양 착각하여 절대 악의 괴물과 싸우다가는 본의 아니게 나도 모르는 사이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가 되어 싸워야 합니다. 어제 “네번째 잔의 비밀”이란 책 마지막 부분도 잊지 못합니다.
“회심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회심은 계속되며 더욱 깊어진다. 베드로 사도도, 바오로 사도도 그러했다. 오직 죽음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파스카가 이루어진다. 바로 그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말마디는 저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답은 단 하나 사랑이자 생명이요 빛이신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며,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전사가 되어 회심의 여정에, 파스카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알 수 없는 원인 불명, 정체 불명의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곧장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회심의 여정, 탈출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내적혁명, 자아초월(自我超越)의 겸손한 비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오늘 여기이지 내일도 어제도 아닙니다. 이래야 어두운 과거와 결별합니다.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다”-2022.6.9.
오늘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도 각별한 느낌입니다. 폭군 헤로데에 의한 살해된 정말 무죄한 아기들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입니다.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는 1000명 정도에 약 20명의 아기들이 살해됐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헤로데는 말 그대로 악의 화신같은 폭군입니다. 자기 권좌를 지키기 위해 아내와 자식들은 물론 일체의 의심되는 정적들은 가차없이 제거했습니다. 권력욕이 인간을 악마로 만든 것이지요. 그러니 장차 자기의 안위를 위해 의심되는 아기들의 살해는 헤로데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을 떠날 때, 주님을 잊을 때 누구나 괴물이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악의 화신인 헤로데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면, 과거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또 출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현실에서도 겪지 않습니까? 모세로 인해 파라오에 의해 살해됐던 탈출기의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한 헤로데의 무죄한 아기들의 살해가 반복되며 이는 빌라도에 의한 예수님의 죽음으로 또 반복됩니다. 아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후로도 지금까지 반복되는 폭력과 전쟁의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정말 인류에게 구원은 가능한지, 희망은 있는지 묻게 됩니다. 새삼 인간의 무지의 죄가 악이, 얼마나 고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믿음의 시련이자 위기입니다.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에 대해, 반복되는 악순환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파스카의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 성무일도중 1.초대송 후렴이, 2.시편 후렴이, 3.찬미가가 답을 줍니다.
-1.“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2.“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
3..“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 죽음, 주님을 위하여서 빛을 발하니 천사는 두 살아래 모든 아기를,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 갔도다.-
아. 궁극의 희망은, 궁극의 위로와 구원은 하느님과 파스카의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의 삶은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 은총의 빛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셉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흡사 요셉과 헤로데의 싸움같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하느님과 헤로데의 싸움입니다. 빛이신 주님의 인도따라 빛속의 삶을 살아간 주님의 전사, 빛의 전사 요셉은 성가정을 안전하게 이끕니다. 결코 악의 화신인 헤로데도 요셉을 다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악마의 준동도 멈춥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유비무환입니다. 처방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지난 과거에 아파하는 것은 하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빛의 전사가 되어 주님과 함께 회심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 1서 말씀이 위로와 구원의 답을 줍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악순환의 반복에서의 유일한 구원의 탈출구는 바로 주님의 빛 안에서 날마다 영적혁명의 회심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을 다해 파스카의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늘 새로운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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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해는 하나 받아들이기 힘든>
“헤로데는 예루살렘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오늘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받아들이기는 더 힘든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죄도 없는 아기들이 살해된 이 참혹한 사건을 순교라고 찬미하는 축일을 지내니 말입니다.
이것을 순교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포장이 아닙니까? 예수님 때문에 죽은 것을 예수님을 위해 죽은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참사라고 해야지 순교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의문과 반박에 대해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안 죽는 것이 선이고 구원이라면 아기들의 죽음은 악이고 비 구원입니다. 죽더라도 오래 살다가 늙어 죽는 것이 선이고 구원이라면 두 살도 안 돼서 죽는 것은 참사일 뿐이고 비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주님을 따라가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곧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 당신을 따라 우리가 하늘로 가도록 내려오신 것이 성탄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찬미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순교한 어린이들 기억하면서 찬미의 노래불러 공경하오니 세상은 그들잃고 통곡했으나 하늘은 기쁨으로 영접했도다
포악한 헤로데가 살해했으나 그들을 하느님이 맞이하시어 당신과 함께있게 불러주시고 영원한 천국복락 허락하셨네
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죽음 찬란히 주님앞에 빛을발하니 천사들 두살아래 어린이들을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갔도다
얼마나 축복받은 마을이던가 구세주 거기에서 탄생하시고 순교한 아기들이 첫제물되어 탄생한 주님앞에 바쳐졌으니
그리고 독서에서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위대한 은총의 선물이여! 아기들이 누구의 공로로 그와 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까?”
무릇 모든 죽음은 개죽음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윤창호법이 제정되지 않았으면 윤창호의 죽음은 개죽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기를 그의 부모가 원했고, 다시 말해서 그의 죽음 덕분에 음주 운전이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부모가 바랐고 우리 사회가 부모의 바람을 받아들여 법을 제정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의미 있고 숭고한 죽음이 되게 하였는데 이것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은 아이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은 것 곧 순교로 의미 제고함으로써 죄 없이 일찍 죽는 것이 악이요 참사가 아니라 더 선이고 구원임을 받아들이게 교회는 우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알더라도 가자 지구에서 아이들이 죽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힘들고 그들의 부모는 더 힘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아이까지 학살하는 폭군들의 죄악까지 우리가 괜찮다거나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오늘 이 축일은 아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이런 짓을 저지르는 인간의 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일깨우게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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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2,16)
<성탄과 속죄제물!>
오늘 복음(마태2,13-18)은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는 말씀'입니다.
헤로데가 동방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며,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아기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죄없는 아기들이 희생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무죄한 아기들이 죽습니다.
오늘 독서(1요한1,5-2,2)에서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은 빛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1,5-6 참조)
그리고 '우리는 죄인이고, 이 죄를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께 고백해야 하고,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고 권고합니다.(1요한1,8-9 참조)
또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하면서,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1요한2,1-2 참조)
오늘 독서가 전하는 말씀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 이유'이며, '아기 예수님의 성탄의 참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탄의 참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완전함 앞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그리고 그 완전한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빛 속에서 살지 못한 죄인, 기쁘게 살지 못한 죄인입니다.
이 죄를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고백합시다! 그래서 용서받고 다시 태어납시다. 그래서 다시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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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55WBeR14R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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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 16)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성탄의
시간 옆으로
죽음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성탄 앞에서
더이상 비참할
것이 없는
죄 없는
아기들의
살인이
빚어진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들
교만의 끝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연약한
생명의
처참한
죽음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불쌍한
아기들을
기억하는
날이다.
아기의 울음소리
어머니의
통곡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해맑은
아기를 죽인다.
누가 잔혹한
이 슬픔과
누가 잔인한
이 고통을
달래어 줄 것인가.
죄 없는
아기들의
희생처럼
당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성탄이
우리의
욕망과 교만을
정화시켜 주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는
성탄의 눈물이다.
절규와
통곡사이에서
하느님은
많이 아프시다.
성탄도
순교도
십자가를
향하고 있다.
주님, 우리의
사악함과
잔인함을
평화로 바꾸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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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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