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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삶이었다. (중략)
묘는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장례식·고별식도 일절 하지 마라.
시간이 얼마간 지난 뒤에 딸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쓰시마해협(대한해협)에 내 뼛가루를 뿌려줬으면 좋겠다.”
폐암으로 지난 10일 생을 마감한 쓰카 고헤이(본명 김봉웅·62)가 올 1월 1일 미리 작성해둔 유언장이다. 자신을 낳아준 조국 한국과 길러준 고향 일본을 잇는 가교로서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직접 연출한 셈이다.
그는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나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 소설가로 살아온 일본 연극계의 풍운아였다.
2월 생의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는 컴퓨터로 배우들의 연습 영상을 보면서 병상에서 연출하는 열정을 보여줬다.
일본 언론들은 “큰 별이 졌다” “아름다운 퇴장이지만 62세의 타계를 쉽사리 받아들이는 팬은 아무도 없다”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는 생전 자신의 유년 시절을 “조선인이라고 차별받지 않기 위해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조선인을 이지메(왕따)한 비굴한 인간이었다”고 고백했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엔 “이런 시국에 연극이나 만들고 있는 비겁한 놈”, 연극계에서 처음으로 상업극장에 작품을 올렸을 때는 “자본주의의 앞잡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작품에서나 일상에서 단 한 번도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쓰카의 아버지는 일제시절 탄광 인부로 일본(후쿠오카)에 건너왔다.
자신들을 강제 연행한 일본 정부를 원망했던 다른 동료들과 달리 아버지는 신세 한탄을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3남1녀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 역시 가난과 차별을 겪으며 세상이란 원래 철저한 계급사회라는 생각을 키워갔다.
그는 자신의 문학 원점을 어머니라고 했다.
남동생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왜 일본에서, 그것도 조선인으로 우리를 낳았느냐”고 어머니에게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글을 모르는 어머니가 같은 학교에 다니며 글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창피하다는 이유로 극구 말렸다. 그후 어머니는 글을 배우지 않았다.
배움이 짧은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항상 부끄러운 존재였다.
고등학교 시절 화가 나면 “못 배운 것들은 어쩔 수 없다”고 쏘아붙여 어머니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뒤돌아 우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필명 쓰카 고헤이(つかこうへい)를 어려운 한자가 아닌 히라가나로 표기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속죄의 뜻이 담겨 있다.
필명의 뜻은 일본어로 ‘언젠가(いつか) 공평(公平·こうへい)해지길’이라는 의미다.
의대에 진학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는 학자가 되기 위해 게이오(慶應)대 문학부 프랑스철학과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연극을 만났다.
1969년 ‘붉은 베레모를 당신에게’로 극작가로 데뷔했다.
74년엔 대표작인 ‘아타미(熱海) 살인사건’으로 일본의 권위 있는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을 당시 최연소인 25세에 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82년에는 희곡을 소설로 바꾼 ‘가마타(蒲田) 행진곡’으로 나오키상을 받았다.
70~80년대 일본 연극계엔 쓰카 붐이 일었고, 90년대부터는 도쿄와 오이타, 홋카이도 등지에서 극단을 만들거나 연극인 양성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의 연출 기법은 정해진 대본 없이 상황을 설정해 놓고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는 “대사의 60%는 배우가 만들어낸다”고 할 정도로 배우의 개성을 극대화시키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연출가 오카무라 슌이치(岡村俊一)는 쓰카에 대해 “배우의 몸을 통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연출가”라고 평가한다.
2007년엔 일본 문화훈장인 자수포장(紫綬褒章)을 받았다.
일본에서 명성을 얻고 금의환향한 그를 조국은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고 했다.
87년 김포공항 입국심사대 직원이 그에게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는 질책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됐다. “일본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말을 유도하려는 한국 기자들의 태도도 불편했다.
반대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힌 뒤엔 더러 “그렇게 일본이 싫으면 당장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일본인도 있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 어디에서도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재일 한국인의 가정에서 자란 것을 핸디캡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비참한 일이다.
철 들고부터는 한 번뿐인 인생,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쓰카는 끝내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귀화하지 않은 젊은 재일 한국인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귀화한 한국인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는 “본명을 숨기고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작은 생활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여성가극단 다카라즈카(寶塚)의 배우로 활약 중인 딸 아이하라 미카(愛原實花)는 일본 국적자다.
아이의 출생신고를 마친 그날 밤, 그는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저서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에서 그는 조국을 이렇게 정의했다.
“조국이란 너의 아름다움이며, 엄마의 한결같은 상냥함 같은 것이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는 그 뜨거움 속에, 두 사람이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눈길 속에 조국이 있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 “내 딸도 고민하는 날이 올 텐데 …”
‘쓰카 고헤이(김봉웅·한국인) 36세, 처 23세, 딸 3세’.
쓰카 고헤이가 딸의 유치원 입시원서 가족란에 써넣은 내용이다.
연극연출가이자 극작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일본에서 살아야 할 자식의 앞날을 걱정한 아버지는 딸에게 일본 국적을 갖게 했다. 하지만 유치원 입시원서를 앞에 두고 또다시 고민했을 재일 한국인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본명 세 글자를 괄호 안에 적어넣었다. 딸은 유치원 입시에서 탈락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이 에세이집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1990년·고분샤(光文社)간]이다.
“아빠의 필명은 쓰카 고헤이라고 합니다.
본명은 가네하라 미네오(金原峰雄), 정확하게 말하면 김봉웅…한국입니다.”
그는 네 살배기 딸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일본 사회에 자신이 재일 한국인임을 공개했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 사회의 민족차별을 고발하려는 취지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책을 내면서 “내 딸도 먼 훗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준비해 두고 싶었다”고 했다.
“세상에 이 책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혀졌을 무렵, 어른이 된 딸아이가 책장에서 꺼내 혼자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이 책은 이달 말 증판될 예정이다.
연극계에선 쓰카 추도공연도 준비 중이다.
도쿄 시부야 코쿤은 다음 달 6일부터 22일까지 무대에 올리는 쓰카 원작의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날’을 추도공연으로 하기로 했다. 국영방송 NHK에서는 19일 쓰카의 대표작 ‘아타미 살인사건 몬테카를로 일류션’(98년 공연 녹화본)이 방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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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인도 아니구 한국인도 아닌.......안타까운 현실이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