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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탄생
이 세상에 축복을 주기위해
보디사트바가 지금 태어났다.
석가족 마을, 룸비니 촌락에.
이 때문에 우리 신들은 이토록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법구경 683>
네팔 타라이 지방에 위치한 룸비니동산 전경
지금으로부터 2626(2546+80)년전 사월초파일.
네팔 타라이 지방 룸비니 동산에 한 아기가 태어났다.
마야데비를 어머니로, 석가족 족장이자 카필라바스투의 왕인 슛도다나를
아버지로 태어난 소년. 싯다르타 태자(후일의 부처님)가 바로 그다.
후일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동남아시아, 파키스탄, 중국, 한국, 일본, 유럽,
미국 등 세계 곳곳에 '연기' '중도' '무아'의 가르침을 펼친 사람. 전쟁과
정복이 아닌 설득과 설법으로 '자신의 가르침'(불교)을 세계 각국에
전파시킨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기원전 624년경(기원전 566년 설도 있음) 태어난 싯다르타가 세상에 살았던
기간은 80여년(기원전 544년 입적).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빛을 발하고 있다.
불교라는 한 종교의 창시자이기에 앞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몸소
체험하고 자각(自覺)을 선언한 최초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명과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지혜와 자비의 길을 열어 보인
구도자라는 점도 인간 싯다르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바로 그 싯다르타가 2626년전 사월초파일,
현재의 네팔 타라이지방 룸비니 동산에서 출세(出世)한 것이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보인 그의 탄생이기에 경전들은 '당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마명(馬鳴)보살이 지은 불전(佛傳)문학의 백미 <붓다차리타>엔
이렇게 묘사돼 있다.
"그 때 왕후 마야부인은
/ 아기 낳을 때가 온 줄 스스로 알고
/ 룸비니 동산의 편안하고 훌륭한 자리에 눕자
/ 백천 시녀들은 왕후를 모시었네. 때는 사월팔일
/ 맑고 화한 기운 고르고 알맞은데
/ 그는 재계하고 깨끗한 덕 닦았기에
/ 보살은 오른쪽 옆구로로 나셨도다
/ 큰 자비는 온 세상을 건지려 하였기에
/ 그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았나니. …
(중략) …
환하게 태에서 나타나는 것
/ 마치 처음 오르는 해와 같아라."
옆구리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는
"편안하고 조용히 일곱 걸음 걸을 때에
/ 발바닥이 편편한 발꿈치는
/ 마치 환한 일곱 별 같았네
/ 사자 걸음처럼
/ 사방을 두루 관찰하면서
/ 진실한 이치를 환희 깨달아
/ '이 생을 부처의 생으로 한다
/ 곧 가장 마지막 생으로 한다
/ 나는 오직 이 생에 있어서
/ 마땅히 일체를 건져야 한다"고 외쳤다.
<수타니파타> 역시 부처님 탄생을 경이롭게 기록하고 있다.
"춤추며 기뻐하고 있는 저 신들에게 예언자 아시타는 물었다.
'신들이여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고 있는가.
웃옷을 벗어 흔들며 지금 무엇을 찬양하고 있는가'
아수라와의 전쟁에서 당신들이 아수라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뒀다 해도,
이렇듯 기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기에 당신들은 이다지 기뻐하고 있나이까."
예언자 아시타 선인의 물음에 신들은
"이 세상에 축복을 주기위해, 보디사트바가 지금 태어났다.
석가족의 마을, 룸비니 촌락에. 이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마야당은 현재 해체·발굴중이라, 마야당에 봉안돼 있던
탄생상은 룸비니 입구에 있는 가건물에 임시로 모셔져 있었다.
입장료는 없었으나, 사진 촬영비 1달러를 받고 있었다.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한 채
발굴이 진행중이었는데, 발굴하는 곳 한 가운데 '부처님이 탄생하신 장소'라는
표말이 붙어 있었다.
아쇼카 석주는 발굴중인 마야당 서편에 있었고, 석주 남쪽에 위치한 마야부인이
목욕했다는 사각형의 연못에는 물이 찰랑거렸다.
옆에는 큰 보리수 나무가 서 있는 이것이 룸비니의 전부였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불본행경(佛本行經)>
<수업본기경(修業本起經)> 등의 경전이 묘사하고
있듯, 부처님 아니 싯다르타가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현재의 룸비니가 경전에 나오는 룸비니 인가"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룸비니 동산에 아쇼카 석주가 세워져
있고, 석주에 '이곳이 부처님이 태어난 룸비니
임'이 기록돼 있다.
1896년 독일출신 고고학자 퓨러박사가 이곳을 발굴하던 중 아쇼카
석주를 발견하고, 룸비니 동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룸비니에 있는 아쇼카석주 명문
퓨러박사가 발굴해낸 아쇼카 석주(石柱. 돌기둥)는 현재도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다.
석주 머리 부분은 손상돼 없어지고, 중간엔 낙뢰로 생긴 균열이 있지만,
다섯 줄의 브라흐미 문자가 선명하게 적혀있다.
비문은 이렇게 해독됐다.
"천애희견왕(아쇼카왕)은 관정 20년 지나 친히 여기에 와 참배했다.
붓다 샤캬무니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울타리를 만들고 석주를 세우게 했다. 부처님이 이곳에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해주고 또 생산의 (6분의 1 대신) 8분의 1만을
지불하게 했다."
석주(石柱)에 나오는, 찬드라굽타의 손자이자 전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제3대왕 아쇼카는 정복전쟁의 비참함을 목격하고 불교로 개종한 인물. 개종한
그는 교단에 많은 기중을 하며, 수많은 불탑을 세우고, 마투라 출신의 우파굽타의
권유를 받아들여 불적순례(佛跡巡禮)를 한다.
즉위 20년 후 룸비니를 참배한 아쇼카왕이 부처님 탄생지에 세운 것이 바로 현재의 석주다.
7.2m 높이의 석주 남쪽에 마야당이 있다.
마야당은 2002년 3월 현재 네팔 고고학국에 의해 발굴중이며, 마야당 남쪽에 부처님
탄생 전 마야부인이 목욕했다는 연못이 있다.
정사각형의 연못 옆에는 거대한 보리수 나무가 서 있는데, 긴 그림자를 연못에 드리운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현재의 룸비니 동산은 이러한데, '룸비니의 과거'는 과연 어떤 상태였을까.
5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중국 법현스님은 <불국기>를 통해 "성(카필라성)의
동쪽 50리에 왕원(王園)이 있는데, 이름은 논민(論民. 룸비니)이라고 한다.
마야부인이 못에 들어가 세욕(洗浴)하고 못을 나와, 북쪽으로 못가를 걷기를 20보,
손을 들어 나무가지를 잡고 동향하여 태자를 낳았다. 태자는 땅에 떨어지자 7보를 걸었으며,
두 용왕이 태자를 목욕시켜 준 곳이 있다.
이 욕처(浴處)는 뒤에 우물을 만들었고, 부인이 세욕한 못은 지금도 여러 스님들이
항상 그 물을 퍼 마신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가유라위국(카필라바스투)은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은 흩어지고 드물어 길
가기가 무섭고, 백상(白象)이나 사자도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룸비니 근방에는 밤이되면 자칼 무리들이 나타나 '날카로운 울음소리'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3월18일 룸비니 근처에 있는 대성석가사에서 잠을 잘 때도 자칼
무리들이 떼지어 나타나 아기울음 소리 비슷한 괴음(怪音)을 밤새도록 내는 것을 들었다.
법현스님 보다 200년 뒤 룸비니를 찾은 당나라 현장스님 역시 <대당서역기>에서 '황폐한
룸비니'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전천(箭泉)의 동북쪽 80∼90리 지점에 룸비니 동산이 있다.
석가족 사람들이 목욕하던 못이 있는데, 물이 맑고 깨끗하여 거울처럼 비치며 온갖
꽃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 북쪽으로 24∼25걸음 걸어가면 무우수(無憂樹)가 있다.
지금은 나무가 시들고 말았지만 이곳은 보디사트바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 (중략) …
보살께서 태어나신 뒤 사방으로 일곱걸음씩 걸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존귀하다.
이제부터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태자가 발로 밟는 곳마다
커다란 연꽃이 솟아났다."
신라의 혜초스님도 8세기 이곳을 찾았다.
<왕오천축국전>에 "이 근방은 숲이 무성하고 길에는 도적이 출몰하기에, 순례자는
방향 잡기가 무척 어려우며, 길을 헤매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13세기경 네팔에서 인도의 불교유적, 특히 보드가야의 금강보좌 참배를
목표로 순례한 티벳 스님 다르마스마빈은 여행기에서 룸비니와 관계되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8세기 이후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나 룸비니는 문헌에서 이름이 사라지고,
잊혀진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1896년 12월. 독일 출신의 고고학자 퓨러가 현재의 룸비니에서 아쇼카 석주를
발견하고, 룸비니 임을 확인하며, 다시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룸비니가 보다 세인들의 관심을 끈 시기는 1967년 4월이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U Tant)가 룸비니를 공식 방문해 "위대한 성인 태어나신
이곳을 세계 공유의 종교·문화·관광을 위해 개발할 것"을 제의했기 때문이다.
1970년 4월 아시아 13개국이 뉴욕에 모여 룸비니 국제개발위원회를 결성하고
사업계획을 마련했다. 마야당을 중심으로 약 2백30만편의 넓이에 성스러운 정원,
룸비니 센터, 문화센터, 승원 등을 세운 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가 보니 룸비니 개발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무척 강하게 들었다.
주지하다시피 룸비니는 불교도만의 단순한 성지는 아니다.
여기서 태어난 한 소년이 나중에 발견한 진리가 인도·중국·동남아·동북아 등
거대한 지역에 퍼져,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인류의 역사·문화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가 발견한 진리는 우리나라에도 전래돼 한국의 문화·역사·사상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끼치고 있다.
현재의 한국불교 역시 이 소년의 탄생과 함께, 그 소년이 깨달은 진리에 의해
다듬어진 것에 다름아니다.
때문에 소년의 탄생은 인류사적 의미가 있는 탄생이며, 그가 강조한 "나는 오직
이 생에 있어서 마땅히 일체를 건져야 한다"는 언명(言明)은 우리가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할 명구임에 틀림없다.
동양에서 불교적인 것을 모두 없애버렸을 때 과연 남는 것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몰(日沒) 즈음 다시 룸비니 동산을 찾았다. 오후에 본 인상과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새 들은 지저귀고,
꽃은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석양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아쇼카 석주는 훨씬 다정해 보였고, 시대를 뛰어 넘는
성인이 태어난 곳 다운 풍광이 룸비니 동산에 드리워져 있었다. 여기서 탄생한 소년
싯다르타에 대한 경외심이 아주 자연스럽게 절로 생겼다.
룸비니에는 일몰 즈음에 가보라고, 가서 한 시간 정도 가만히 앉아 있다
돌아오라고 강하게 권하고 싶다.
부처님 탄생 장면
7세기. 네팔 카트만두 박물관 소장.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