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동지>(3회)
(일묵 서예) 네 칸짜리 목조 단층 건물 중간쯤에 두 쪽의 자그마한 여닫이식 대문을 내고, 대문 위에 훈민정음체로 ‘일묵서예’라고 새긴 통나무 현판을 걸어 놓았다. 대문 앞의 채색타일로 마감한 계단 둘을 내려서면 작은 승용차 한 대가 주차할 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지선과 그녀의 일곱 살 난 아들과 이십 대의 두 청년이 동지를 기다린다. 골목 어귀에 동지가 나타나면 ‘아, 저기 오셔요.’ 지선이 한껏 낮은 목소리와 눈짓으로 그의 등장을 알리고, 네 사람은 서둘러 자세를 고쳐 서서 스승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 “잘 계셨습니까? 동해도 잘 있었어?” 동지는 한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지선과 인사를 나눈다. 그런 다음 두 청년 앞으로 다가가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준다. 금요일 오후면 반복되는 비슷한 장면이다. 수련실의 양쪽 출입문은 편개형 레자 방음문을 달았고, 이중창을 둔 벽은 암막 커튼으로 외부의 빛을 차단했다. 방음문과 암막 커튼을 닫으면 수련실은 동굴 속이 된다. 천장의 귀퉁이에 은폐된 불빛이 두꺼운 화이트 오크 원목을 깐 바닥과 멀바우 집성판으로 마감한 내벽에 반사되어 동굴의 격리감을 더욱 짙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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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부좌로 앉은 스승 앞에 세 제자가 나란히 반가부좌로 앉아있다. 금요일 오후에 스승과 제자가 만나면 스승은 먼저 닷새 동안 제자들에게 일어난 작은 변화를 파악하고 이어서 스승과 제자가 함께 수련의 전 과정을 시전한다. 이들이 수련에 열중하는 동안 아래층에서는 지선이 이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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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
재희는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진 바지에 흰색의 라운드넥 티를 입고 그 위에 옅은 하늘색의 오버핏 코튼 롱코트를 입었다. 감각적인 패션을 추구하면서도 실용성에 무게를 둔 옷차림이었다. 재희는 금요일 아침이면 꽤 많은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낸다. 주말마다 만나는 사이에 너무 튀는 옷차림은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건 용납하지 못한다. 차려입으려 애쓴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트렌디하고 세련미가 돋보여야 했다. 가까운 방배역에서 전철을 타고 안국역까지는 열네 정거장 거리다. 교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긴 통로를 걸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인사동길을 향해 가는 동안 그녀의 생각에는 오직 그 남자만이 가득 차 있다. 그 남자를 사랑한다. 자신을 향한 그 남자의 마음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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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오 학년 여름방학 때 소녀는 소년을 처음 보았다. 소년을 처음 본 느낌은 그해 여름의 유달랐던 더위만큼이나 확실하였고 그때부터 한 소녀의 운명적인 사랑은 시작되었다. 주말마다 전철을 타고 인사동으로 가는 대략 사십 분 동안은 소녀가 소년을 처음 만난 때로부터 서른을 넘긴 지금까지의 추억을 담은 영상을 돌려보는 시간이다. 재희는 전철을 타면 작정하고 그 긴 영상의 재생 버튼을 클릭한다. 다행히 빈 자리를 찾아 앉으면 그 시간이 더욱 감미롭지만, 서서 가더라도 상관이 없다. 눈을 감은 채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혼자만의 드라마에 푹 빠져서 간다. 영상의 첫 장면은 이렇다. 십오 년 전 어느 가을날, 음성의 목련당 거실에 세 여자가 앉아있다. 뜰에는 물든 나뭇잎이 흘러내리고, 벚나무와 살구나무가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한 늦은 가을 오후였다. 인기척과 함께 소년의 손을 잡은 인경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한 비구니와 두 여자는 숨을 죽인 채 소년의 얼굴에 시선을 모은다. ‘동지야, 인사드려라. 엄마 친구분들이야.’ 인경이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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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시키고, ‘안녕하세요?’ 소년은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와 함께 ‘아! 어쩌면···· 아름다워, 정말 아름다운 아이야!’ 내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아름다운 아이’란 말이 폭죽을 터트리고, 그 순간에 오빠의 첫 번째 별명이 탄생했다. ‘아름다운 아이’는 그 후부터 엄마가 오빠를 말할 때 가끔, 그러니까 엄마가 옛 추억을 회상하거나 기분 좋은 일로 감정이 상승곡선을 그릴 때 사용하는 엄마만의 전용어가 되었다. 그 ‘아름다운 아이’는 이제 ‘God’이란 별명을 하나 더 가진,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남자로 바뀌었다. 세 여자가 동지 오빠를 만난 이듬해부터 엄마는 나의 방학 시기에 맞춰 나를 데리고 조락헌 나들이를 시작했다. 나는 초등학교 오 학년이었고 오빠는 중학교 일 학년이었다. 진국 아저씨와 인경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나와 사랑에 빠지셨다. 인경 아주머니는 나에게 맛난 음식을 만들어주시느라 바쁘셨고, 진국 아저씨는 내 손을 꼭 잡고 농장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셨다. 나도 키가 큰 진국 아저씨와 커피색 개량 한복을 즐겨 입는 인경 아주머니와 금방 정이 들었다. 오빠와는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오빠라고 부르며 다가가려 했지만, 오빠는 내가 거북한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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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무렵, 무술을 수련하는 오빠를 처음 본 날, 나는 커다란 적송의 밑동에 앉아 오빠가 연출하는 이상한 동작을 턱을 괴고 지켜봤다. 조락헌 뒤로 대나무 숲 샛길을 지나면 작은 언덕에 기대앉은 모양의 목련당이 있고, 목련당 뒤편 작은 언덕 너머에 교실 하나 크기의 평평한 공간인 수련장은 굵은 적송들이 둘러싸고 있어 아늑했다.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 같고, 정지하는가 싶으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오빠가 연출하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동작을 나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수련을 마친 뒤 오빠는 수련장 한쪽 모서리의 두 무덤을 향해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그때 나는 무덤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동작을 수련의 끝 동작인 줄 알았었다. ‘예, 너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앞으로 여긴 오지 마! 알았어?’ 오빠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툭 건드렸다. 다른 남자아이가 그랬다면 분명히 가만두지 않았을 테지만, 난 최면에 걸린 아이처럼 다소곳이 서 있기만 했었다. ‘오빠, 좀 전에 한 거, 그거 뭐 한 거야?’ 조락헌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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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몰라, 말해줘도.’ ‘말해 봐! 모르는 게 어딨어? 나 바보 아니야!’ ‘모른다니까! 넌 모르는 거야!’ 오빠는 무척 퉁명스러웠다. ‘매일 해?’ 자존심이 상하는 걸 꾹 참고 다시 물었지만, 오빠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는 ‘안 하면 안 되는 거야?’하고 다시 물었고, 오빠는 ‘스승님하고 약속했으니까!’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수련장 한쪽의 무덤을 쳐다보았다. 그때 오빠의 얼굴에 드리웠던 짙은 그늘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빠가 슬픈가 봐.’ 나는 금방 오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조락헌 가까이 왔을 때 ‘오빤 다른 곳에 놀러 못 가겠네, 스승님하고 약속 때문에?’라고 물었지만, 그때도 오빠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부터 나는 훨씬 얌전하고 차분한 아이로 변했던 것 같다. 오빠가 수련하는 모습을 볼 때도 바로 코앞에서 올려다보는 대신 언덕 위 소나무 뒤에 숨어서 봤다. 해 질 무렵, 수련을 마친 오빠가 내게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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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주기를 주간으로 생각했었는데 인터벌이 짧아지네요. 이야기 전개에 대한 감을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진도를 조금 빨리 나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더불어 회원들이 주말에 분수처럼 글을 쏟아부으니 더운 여름에 시원한 샤워를 하는 기분이 듭니다. 방향이 정해지기까지는 탐색을 해야겠군요. 의상 가옥구조 교통시설 등등에 대한 기술을 보면서, 소설가는 만물박사여야 한다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유년시절에 만들어진 러브 라인은 좀처럼 수정하기가 어렵지요. 어떤 모습으로 그 선로가 그려질 지 궁금해집니다~
관찰력이 대단하십니다. 인사동, 안국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