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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王都 江華의 歷史와 文物
韓 吉 洙
오래전에 서울시 시우회 광진구회 운영위원들이 강화도로 역사 탐방행사를 한바 있었고, 어느 해 인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구끼리 관광차 들린 일이 있었으며 2015년 11월 7일에는 한맥문학 동인회에서도 이곳으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그뿐 아니라 1977년도에 성동구청 도시정비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의 모임인 성도회의 김영중 회장의 차량으로 2015년 9월 11일 그 당시의 동료였던 일행 4명이 강화도 일부를 답사한바 있기에 그 모든 발품을 판 실적과 견문을 모아서 이 글을 썼다는 걸 먼저 밝힌다.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인 강화도는 302.14km2의 넓이에 인구는 65.000명이 사는 남북 길이 30㎞, 동서 길이 12㎞, 해안선 길이 99㎞인 큰 섬이다. 강화도는 본래 김포반도와 연결된 육지였으나 지반침강운동으로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 되었다. 강화라는 지명 유래를 잠간 살펴봐야 하겠다. 삼국시대 강화를 甲比古次(갑비고차)라 부른데서 갑곶이라는 이름이 전해온다는 설도 있고 고려 때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의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강화도는 서울에서 가까이에 있어 입과 입술과 같은 脣齒(순치)적위치인지라 만만한 외침으로 커다란 상처를 많이 입은 상처투성이여서 상이군인의 훈장을 단 섬이다. 입술인 강화가 상처 나면 서울시민들의 이는 시리게 마련이다. 피난을 위한 수도 강화, 이 말에는 강화의 자부심과 수난의 역사가 함께한다는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 왕실의 피난처이자 국난극복의 현장이기에 5진7보 53돈대의 방어시설을 두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대규모 군대가 있었다는 흔적으로 그만큼 강화는 국방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증거였다. 역사학자 호암 文一平선생은 朝鮮史話(조선사화) 古蹟(고적)편에서 강화를 “역사의 고장,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이라고 했던 것처럼 강화는 역사 속에서 수난과 고뇌의 땅이었다. 삼별초의 난으로 섬 전체가 뻘겋게 피로 물든 때도 있었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 말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1866년 9월 프랑스의 선박 3척이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영종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 서강의 언저리 양화진까지 올라왔고, 뒤를 이어 미국과 여러 나라들이 조선의 문호를 열어달라 마실 물을 달라는 명분으로 몰려들어 단잠을 덜 깬 이 나라와 수호조약이라는 걸 체결하였다. 그런 허울 좋은 조약들은 결국에는 이 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근대 우리 역사의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시달렸던 지역이 강화도이다. 또한 강화는 실학의 한 유파인 양명학에 커다란 태 자리를 제공했으니 이광사의 정음연구를 이영익과 정동유, 유희 등이 계승하여 발전시킨 곳이다. 書藝에서도 白下 윤순 이후 이광사에 이르러 독특한 필체가 창조되었고, 이긍익, 정문승 등이 특히 산수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예술의 고장이기도 하다. 문장에서는 명나라 李贄(이지)의 영향을 받은 성령문학을 토대로 하여 이광려, 이긍익, 이건창 등의 학자가 과거의 형식이나 時勢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적인 표현세계를 이루었다. 이상학 신작 등은 실학을 연구하였고 李建芳(이건방), 이충익 등의 논리는 실학자들이 표방하던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강화학파는 당쟁의 폐해를 비판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강화로 낙향하였던 이건창과 식민지 시대의 국학진흥에 힘썼던 鄭寅普(정인보) 등이 그 인맥을 이어갔다. 이밖에도 申采浩(신채호), 朴殷植(박은식), 金澤榮(김택영) 등 한말 민족주의 학자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학파가 바로 강화학파이다. 고려 때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왕도가 開京에서 옮겨왔으나 국력이 약하다 보니 결국에는 많은 수난을 겪었고 조선 인조 때는 청나라의 침공으로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비빈들이 청국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한 말에는 도도히 밀려오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느냐 이를 거절하느냐를 놓고 흥선대원군과 민 중전 즉 시아버지와 며느리간의 다툼으로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세계열강인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각축을 벌릴 때 이 섬은 초토화 되어갔다. 시아버지 고래와 며느리 고래싸움에 만만한 새우들만 등이 터졌던 곳이 바로 이 섬이다. 그러다가 조국 광복 후에는 6.25 참상이 일어나 공산치하이었던 섬을 용감한 해병대원들이 빼앗아 우리 땅으로 환원시켜 평화의 말뚝을 박았다. 강화도는 [지붕이 없는 역사박물관]이라는 말과 같이 곳곳 가는 곳 마다 역사가 숨 쉬고 조상의 흔적이 남아있는 섬이기에 史家들 모두가 구미를 당기는 곳이다. 강화대교를 건너 맨 처음 들린 곳이 사적 제133호인 고려 궁터이다. 이곳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 터이다. 지금은 江華留守府(강화유수부) 동헌인 명위헌, 이방청과 鐘閣(종각)만 남아 있고 외규장각은 새로 복원하였다. 외규장각은 대원군이 천주교를 전파했다고 프랑스 신부 8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군이 이를 보복코자 침입하여 여기에 보관했던 의궤 선원계보, 열성의제 등 궁중 문서를 몽땅 훔쳐갔던 곳이다. 강화 동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어서 종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이 종은 성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리던 종인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다가 너무나 무거워서 중간에 버렸다는 이 종의 무게는 3,912kg이다. 여기 종각에는 모형을 만들어서 전시하고 진품은 강화 역사박물관에 전시 해 놓았다. 고려 말에 원나라의 행패가 심하자 실력자 최우가 항몽 정책을 펼치기 위하여 이곳으로 궁궐을 옮겨 정궁인 연경궁 이외에도 강안전· 경령궁, 건덕전, 장령전, 만령전, 대관전 등의 건물은 지어 39년간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강화도가 고려의 왕도였던 시대에 몽골군이 노략질을 하여 황룡사의 9층 목탑과 대구 구인사의 대장경이 불타버렸다. 그래서 현재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서 16년간에 걸쳐 다시 만들었다. 민중의 절박한 삶과 달리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군을 물리치고자 한 집권 세력이 있는가 하면 몽골군과 대항하기 위하여 항몽 전위대로 삼별초라는 별동군대가 조직되어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었기 이제라도 우리들은 박수를 쳐 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강화 유수부를 설치하였다. 강화의 留守는 종2품의 높은 직위로 王의 신임을 받는 重臣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강화도는 난세에는 王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廢王(폐왕) 또는 王族의 유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이 파괴하였다. 그 후 윤순이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세웠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불 질러 없어지고 동헌과 吏房廳(이방청) 만 남아있었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서 지금 유수부 청사인 동헌의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다음에 들린 곳은 龍興宮이다 이곳은 조선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이 마지막을 보냈던 정 송강 집터라고 한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철종이 왕이 되기 전 19세까지 거처하던 곳으로 철종 4년(1853) 생가인 초가집 옆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으로 신축하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 이 궁은 창덕궁 낙선재와 같은 살림집이기에 소박한 느낌이 드는 집이다. 경내에는 철종의 옛 집터임을 알리는 碑와 碑閣이 있는데 초가3간의 집터치고는 너무나 협소하고 초라한데 용흥궁이라는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썼다고 한다. 용흥궁 바로 뒤에는 강화 성당이 있다. 광무 4년(1900)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프 주교가 건립하여 1889년 대한성공회의 포교를 시작한 곳이다. 코프 씨는 1896년 6월 강화에서 한국인 신자에게 세례를 주고 그로부터 4년 후 대한성공회로서는 가장 먼저 이 성당을 건립하였음으로 이 성당은 역사가 있는 건물이다.강화성당은 전통적인 조선 한옥 구조물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가미해서 동서양의 짬뽕으로 겉모양은 전통 조선사찰양식인데 내부구조는 기독교의 예배공간인 서양식으로 꾸몄는데도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것처럼 어색하지는 않다. 사적 137호인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세계의 다른 문화권과 비교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는 뛰어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던 고대문화를 밝히는 증거물이며 우리 문화의 뿌리를 이야기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세계에 자랑 할 만한 유산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밀집도가 높고 외형상 다양한 구조와 형식이 존재하는데 화려한 부장유물이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강화에는 15 여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탁자식고인돌이 많다. 경내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거주했던 움집도 복원해 놓았고 북한에 있는 대표적인 고인돌과 외국의 거석 인물상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강화 역사박물관은 고인돌 유적지 인근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멋지다는 고인돌 주위를 공원으로 가꾸어서 역사박물관을 이전하였고 바로 옆에 자연사 박물관도 개관하였으니 3위1체라 해 두자. 박물관은 2010년 10월 23일에 개관하였으며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선사시대의 주먹도끼, 가락바퀴, 돌칼, 돌화살촉에서부터 고려시대의 청자죽순형주전자, 청자상감문학문수구호, 청자잔과 청자투각 잔받침 등을 전시 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고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 연구하기 위하여 강화 고인돌 공원 내 1만5천여㎡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축면적 4천200㎡ 규모로 세웠다. 강화역사박물관은 가족단위로 와서 아이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강화 동종은 보물 제 11-8호로 조선 숙종 때 승려인 사인비구가 만든 청동범종이라고 한다. 1층에는 고려. 조선시대 등 근 현대의 강화 유물과 민속사를 볼 수 있는 전시장이 있으며 2층에는 구석기에서 청동기 시대의 상설 유물전시장과 체험관이 있으며 지하 1층은 수장고로 쓰고 있다. 마침내 우리들은 2014년 7월 1일에 개통한 3.44km의 교동대교를 건너 교동도에 도착하였다. 교동도는 41.14km2의 면적에 3.000여 명이 거주하는 섬인데 한마디로 유배의 섬이다. 고려 제21대 희종(1200년)이 권신 최충헌에 의해 유배와서 살던 곳으로 慶源殿(경원전) 옛터가 있고, 조선조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유배 와서 기거하던 府芹堂(부근당)터가 있으며 철종임금이 등극하기 전 피신하여 잠저 하던 옛 터와 우물이 남아 있다. 그 외에도 광해군,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인조의 5남 숭선군, 철종의 사촌 익평군 이희 등이 유배 와서 살았다. 교동8경이 있으니 화개 曉鐘, 변장 暮帆, 잠두 牧笛, 말탄 漁火, 수정 落照, 호포 霽月, 인산 官倉(?), 진망 納凉이 있다고 하나 이를 찾아 갈 수는 없다. 읍내리에는 1629년에 축조된 邑城터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화개산성지, 喬桐縣廳(교동현청)터를 비롯하여 烽燧臺(봉수대) 壇廟(단묘) 등 많은 유적들이 있으며 화개사와 교동향교 등은 비석거리를 지나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 쌀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개펄을 막아서 만든 논은 우리나라 농민 1인당 경지면적이 제1많은 곳이 이곳이라고 하니 쌀 부자마을이다. 교동 읍성은 1629년(인조 7)에 축조된 읍성으로 동남북 세 곳에 성문이 있고 각 문에는 門樓가 세워졌는데, 동문은 統三樓, 남문은 庾亮樓(유양루), 북문은 拱北樓(홍북루)라 하였다. 남문인 유양루는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虹霓(홍예)만 남아 있는데 우리가 가던 날 주민들이 부근에서 벌초작업을 하고 있었다. 고구2리 향교 골에 위치한 향교 터는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에 고려 유학자 문성공 안유가 원나라에 갔다가 오는 길에 우리나라 최초로 孔子像을 들여와 봉안한 역사적인 향교로서 須廟(수묘)라고 한다.현재 읍내리에 있는 향교는 인조7년(1629)에 영흥으로부터 水營을 교동의 읍내리로 이설하자 교동현이 부로 승격하면서 고구리 향교골의 향교를 현재의 읍내리로 이전 한 것이라고 한다. 비석거리는 향교로 올라가는 길가에 40여기의 비를 모아놓은 곳이다. 통제사, 방어사, 현감 등의 선정비 또는 송덕비인데 장소가 너무나 협소하여 억지로 만든 것처럼 어색하고 옹색하였다. 교동 도호부 터에 갔으나 도호부 건물은 흔적도 없고 다만 풀 속에 안해루의 석주 2기만 남아 있다. 연산군의 잠저는 용 우물 부근에 연산군이 유배되어 살던 집터가 있었으나 풀 속에 비석만 남아있어 황량하고 쓸쓸하고 허전했다.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249교동읍성 남문을 들어서서 좌측 길로 약 100m쯤 마을길을 돌아서 올라가면 읍 성벽 안쪽에 오래된 오동나무 아래 神을 모시는 작은 당인 府芹堂이 있다. 堂내부에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 씨를 화상으로 봉안하고 죽은 원혼을 위로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대룡시장은 면소재지인근에 있는 70년대 농촌 풍경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전통시장으로 근처 식당에서 이종우 동료가 제공하는 갈치조림으로 점심식사를 마쳤는데 식당 주인이 교동의 관광안내원을 자처하고 있었으나 들은풍월일 뿐 현장감은 떨어졌다. 교동대교를 건너 와서 초소에 통행권을 반납하고 강화읍에 돌아오면 맨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 강화읍성인데 이는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성을 쌓고 왕궁과 관아는 1234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궁궐을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산이라 하였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성은 약 1,2k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현재 강화의 명소인 연미정에서 출발한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고려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생활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었던 것을 조선 전기에 강화성을 다시 쌓았다. 조선 초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했던 것을 인조 15년(1637년) 병자호란 때 파손되었다. 이후 효종 3년(1652년)에는 성곽일부를 수축하고, 숙종 3년(1677년) 유수 허질이 전면을 돌로 쌓고 후면은 흙으로 개축하면서 확장하여 길이가 7,122m 에 이르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궁내의 비빈들을 인솔하고 왔던 김상용이 성이 함락되자 폭약으로 자결한 곳이 남문이다. 이 남문 안파루를 비롯 북문인 진송루, 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지만 남 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근처에는 김창집에 세운 김상용 선생 순의비가 있어 당시의 급박했던 사항을 전 해 주고 있다. 조선 후기 열강들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온 현장,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친 뒤 간악하고 음흉한 일본과는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등 수많은 외세침략을 역사적으로 종결한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다음은 삼랑성과 전등사를 찾아가 보자. 삼랑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았으나 지금은 사고는 다 없어지고 이를 관리하던 전등사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곳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르는 개가를 올린 곳이다. 삼랑성 내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傳燈寺(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眞宗寺(진종사)라 하였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 해서 전등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서면 보물 제178호인 대웅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관되고 있으며 정화궁주의 시주 물로 전해 내려오는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경내에 있는 보물 제393호 범종은 중국 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인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 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 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 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는 것이 특이하다. 광해군 6년(1614) 전등사에 불이 나서 모든 건물이 소실되어 새로 불사를 일으켰다. 이때 대웅전 공사를 맡은 도편수가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와 정분이 났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주모는 도편수가 알뜰히 벌어서 맡겨놓은 재물을 몽땅 들고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어처구니없이 당한 도편수는 앙갚음을 할 궁리를 하다가 그 주모를 닮은 4개의 나부상을 나무로 만들어서 법당의 네 귀에서 추녀를 떠받치게 해 놓았다. 이것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개과천선하라는 뜻이었고 악녀를 징치하는 벌이었다는데 지금도 대웅전의 추녀 끝에 나체로 애처롭게 서 있는 주모를 볼 수 있다.1866년 병인양요 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한 호국 불교 사찰로 당시 조선 수비 대장이었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마니산(469.4m)에 올라 사적 제136호인 첨성단을 살펴보았다. 이곳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는데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제단은 下圓上方,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자주 이곳에서 제사를 봉행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생겨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도 이곳에서 7선녀가 태양열을 이용하여 불을 붙이고 있다. 마니산 참성단에서 함허동천 쪽으로 하산했다. 조선 전기의 승려 己和(기화)가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法號(법호)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함허대사가 썼다는 [涵虛洞天] 네 글자가 남아 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이곳은 빼어난 산세를 끼고 곳곳에 거대한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이 바위들을 넘나들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특히 계곡 한편에 200m에 달하는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어 이곳을 마니산의 선경이라 일컫는다. 외포리에서 선편으로 석모도 보문사로 가 본다. 석모도 행 여객선의 선객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길 드려진 수많은 갈매기 떼가 먹이경쟁으로 장관을 이룬다. 너무 많은 갈매기 떼가 어지러울 정도로 몰려드는데 손바닥위에 있는 것도 잽싸게 채어 간다. 이것도 하나의 생존경쟁의 현장으로 구경꺼리에 포함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외포리에서 승선한지 20분 만에 석모도에 도착했다. 석모도 선착장에서 보문사로 가는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있는데 배타고 오는 시간과 맞먹는 20분이면 보문사에 도착하는데 10분 정도 가다가 중간에 어유정이라는 어촌을 찾아가면 고목이 쓸어져 비스듬히 누운 것 같은 경관이 훌륭한 바위군락지를 볼 수 있다. 이곳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남해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 중의 하나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곳에 와서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을 상징하여 보문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있으니 사리탑과 오백나한이다. 보문사 사리탑은 너비 4m, 높이 9m에 달하는 33관음보탑으로 33관세음보살님이 새겨져 있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보문사 오백나한은 백옥으로 만들었는데 2009년에 봉안되었다. 윤장대도 설치하였는데 윤장대란 책장의 일종으로 나무장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어 관광객이나 보살들이 소원을 빌 때 사용한다. 그 유명한 보문사 석실도 보인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무지개모양을 한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불상들을 모셔 놓은 감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셨다. 와불전에는 오백나한과 함께 열반당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을 자연석에 그대로 조각하여 모셨는데 부처님이 누워계신 모습과 손의 모양, 옷의 주름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보문사 중심에 자리한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3칸에 내부 60평 규모로 중수되었다.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는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는 법당으로 사찰에 따라서는 無量壽殿(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명장수의 성격을 갖고 있는 무량수불을 모시지만 아미타불의 한 속성이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경우는 정토신앙 계통의 종파나 화엄종 등 사찰의 주불전이 될 때 이런 현판을 단다.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미타전 또는 阿彌陀殿(아미타전)이라 한다. 아미타부처님은 법장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48대원을 세워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 외워도 극락왕생 시켜 준다고 한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많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는데 중생의 근기에 따라 아홉 가지 다른 手印을 취한다.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로는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과 大勢至菩薩(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地藏菩薩(지장보살)이 모셔진다. 대표적인 극락전은 천은사와 무위사에 있는 극락전이고 무량수전으로는 부석사가 유명하다. 낙가산 중턱에 있는 마애관음좌상을 참배 차 올라가려면 가팔라서 땀이 흐르지만 소원이 이루어진다니 안 갈 수도 없다. 오르는 중간에 있는 앞이 탁 터져 시원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모도의 전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는 꿈에 그리는 몽환의 세계라고 하니 한번 기대해 봄 즉도 하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니 아쉽지만 이 다음으로 미룰 수 박게 없다 오를 대로 다 올라와서 마침내 보문사 마애관음좌상을 알현했다. 보문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로서 마애관음좌상이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 모셔져 있는 것이다.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을 받쳐 든 채 연화대좌에 앉아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큰 코, 입, 귀 등 투박하기는 하지만 관대하고 서민적이라서 보는 이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가는 부처님이다. 이곳에서 앞을 바라다보니 석모도의 산과 검은 갯벌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어서 펼쳐지는 서해 바다의 수평선은 아련히 걸려있는 수채화의 한 폭이다. 저 넓은 곳으로 한 없이 가 보다보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궁금하기 그지없다.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우선 마음속 깊이 쌓여있던 시름들을 확 뱉어 내고 나면 갑갑했던 마음이 뚫려버리는 느낌이다. 가슴에 앙금이 가득한 자들이여! 낙가산 눈썹바위에 올라오시라. 이곳에서 저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심호흡을 한번 해 보시라. 그리고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시라 그러면 저 밑바닥에 고여 있던 모든 번뇌가 한꺼번에 씻겨 질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 꽉 찬 열매를 얻어 갈 것이다. 이곳은 그만큼 권장하고 싶은 아름다운 조망 명소임과 동시에 기도발이 잘 받는 기도처이다. 본섬으로 되 돌아와서 다음에 들린 곳은 한말에 우리강토 수호의 일익을 담당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인 강화도 해안가 방어진지였다. 사적 제225호인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 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하여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 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 화약고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려고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이 있었는데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단초가 되었다. 그 뒤 관리부실로 허물어진 돈대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가 1973년 초지진을 복원하여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을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도 진열하였다.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 상을 그대로 전해 주는 역사책이 되고 있다. 사적 제226호안 덕진진은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하여 내성 외성 돈대 진 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효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겨왔는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가 되었으며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바위에는 <海門防守 他國船勿過>(바다의 출입문을 지키고 있으니 타국의 배는 지나다니지 말라)라는 비가 세워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군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이곳에서 악전고투 하다가 전투력의 열세로 밀려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게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장도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사적 제227호인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닷길을 따라 길게 만들었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별도로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무기가 열악한데도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무너진 요새를 1976년 다시 복원하였다.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수 장군의 쌍충비가 있다. 쌍충비각 맞은편 아래쪽에는 1871년(고종 8) 4월 23일 廣城津(광성진)에서 벌어졌던 미 해군 육전대와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이 있으니 신미 순의총이다. 그뿐 아니라 이곳에는 손돌목의 전설도 있으나 오늘은 생략한다. 사적 제306호인 갑곶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이나 대포를 배치하여 적의 침입을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온 뒤 몽골과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다가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난바 있다. 1977년 돈대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리는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했던 것이다. 강화도 역사탐방 마지막으로 선원사 터에 들렸다. 선원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 최우가 고종 32년(1245)에 창건한 절이다.대몽항쟁을 위한 민심안정과 단결, 그리고 불력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원대한 계획으로 대장경 조각에 착수하였던 곳이다 최초의 대장경판 조성은 고려 현종 2년(1011년)때 시작하여 현종20년(1029년)까지 18년 만에 완성한 것으로 初雕大藏經(초조대장경)이라고 하는데 그 수가 6천권에 달했으며 開國寺(개국사) 興王寺(흥왕사) 歸法寺(귀법사) 등에 나누어 봉안했다. 그후 이 대장경은 대구 팔공산의 符仁寺(부인사)에 옮겨 보관하였다가 고종 19년(1232) 몽고의 兵禍(병화)로 모두 불타 버렸다. 8만대장경의 조판은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거국적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집권자 崔怡(최이)의 주도 아래 착수 진행되고 그 아들인 崔沆(최항)에 의해 완성되었다. 최 씨 정권은 소요되는 막대한 재력과 노동력을 비교적 용이하게 투입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禪源寺(선원사)는 세계적인 불교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 판각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무신집권 초기 보조국사 지눌이 제2수선사를 여기에 세웠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사항이다. 修禪社(수선사)는 명종20년(1190)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시작되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고려말 무인 정권이 들어서며 중앙 중심의 불교가 쇠퇴하고 지방 중심으로 불교결사운동이 일어날 때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은 수도를 떠나 지방의 조용한 곳에서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는 것으로 불교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결사로는 지눌이 중심이 된 선종의 수선사, 요새가 일으킨 천태종의 백련사 등이 있는데 수선사와 백련사가 중심이 되었다. 대장경 판각을 위하여 선원사에는 장경도감을, 진주등지에는 분사를 두어서 판각하여 처음에는 이곳 선원사에 봉안하였다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더욱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태조7년(1398)에 서울 서대문 밖 支天寺(지천사)를 거쳐 1398년에 해인사로 옮겨서 600여년을 안전하게 잘 봉안하고 있는 것이다. 사적 제259호인 선원사 터를 찾아가노라니 길가에 [고려대장경박물관]이라는 입간판이 우리를 위협하며 서 있다. 입구 왼쪽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의 영정을 봉안하고 무슨 행사를 한 것 같다. 박 대통령의 집무모습과 경제발전을 위하여 현장으로 뛰어다니던 사진도 있고 바지를 걷고 논두렁에서 촌로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하는 모습도 보이고 박대통령의 독특한 필체인 여러 가지 휘호도 전시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초라한 모습으로 사찰건물이 몇 동 서 있는데 절간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박물관을 보려고 반 지하로 내려가니 목판 경전 몇 점과 선원사의 주지였던 진명국사, 원오국사 등 큰 스님의 사진이 걸려있고 몇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으니 옥 등잔이다. 이 등잔이 설마 전등사의 옥등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근무하는 보살에게서 인준식 동료가 연잎차를 주문하였기에 잠간 쉬면서 목을 축였더니 은은한 향이 살짝 번져 온다. 절 뒤편으로 가니 호랑이가 나올듯한 풀 속에 돌로 된 부처님이 노천에 앉아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는데 부처에 대한 대접이 영 말이 아닌 듯하다. 왼편으로 잠간 눈을 돌리니 3.000여 평이나 된다는 빈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선원사 터라고 한다. 이 공터는 이발까지 마친 잔디로 잘 가꾸어 있었으니 부처님보다도 빈 절터가 더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길가 왼쪽 허름한 가건물로 들어서자 한우 3마리가 서서 염불을 하다가 우리들을 보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도 입안에서 혀로 목탁을 치고 있었으니 이거야 말로 신기한 볼 꺼리요, 자랑꺼리이었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 >에 방영되었다고 한다. 절 뒤편과 절 입구에 웅장한 석등이 있는데 구멍이 뚫려있고 막힌 곳에는 사진이 걸려있고 꽃을 매달았는데 혹시 이승을 하직한 자의 납골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8월 1일에 연꽃축제를 연다는 연 밭은 우리가 한발 늦게 왔기에 이미 연잎과 줄기 연밥 등 모든 걸 수확해서 이곳에서 팔고 있다는 걸 보살이 알려주었다. 그러니 장관을 연출하는 논두렁 연꽃 축제도 인연이 닿지 아니하기에 후일을 기약하고 이쯤해서 우리는 아침에 왔던 길로 되돌아오는 노정을 밟았다. 김포를 지나 서울시계에 들어서니 온 국민이 반기는 비를 만났는데 내 집으로 내가 가는 길을 누가 막는 것도 아닌데 엄청 길이 막혀 걷는 것만도 못하기에 강변북로에서 마포 공덕동으로 빠져서 만리재로 길을 잡아 지금은 휴도가 된 서울역 고가로 넘어오니 충무로와 왕십리길이 가로 막는다. 도진 개진으로 엎어 치나 되치나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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