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디자인하라
“성공이란 절묘한 언어 표현에 달려 있다. 종종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영감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정확한 말, 한 단어도 바꿀 수 없는 문장, 소리와 개념의 효과적인 결합으로 얻어지는 집중된, 잃을 수 없는 문장을 찾는 참을성 있는 탐구 끝에 얻어진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이다. 내가 특정 단어를 모르면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세계도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레벨이 당신 인생의 레벨이고, 언격이 인격을 결성한다. 삶의 격을 높이고 싶다면 사용하는 언어의 품격을 높이면 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언어력의 깊이와 크기 차이다. 언어가 가난하니 생각도 가난하고, 생각이 가난하니 행동의 폭도 좁다. 천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생각의 높이가 낮고 인격이 무너져 있다. 주고받는 언어가 그 공동체의 사고 수준을 결정한다. 다듬어진 언어 없이 생각하려는 사람, 감동적인 언어 없이 꿈을 꾸는 사람, 가슴에 뛰는 언어 없이 성공을 쟁취하려는 사람에게 미래는 걱정과 우려뿐이다. 요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생각 좀 해보자.”다. 다른 사람의 의견의 의견을 받아들여 비교하고 분석해서 따져보는 전두엽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현대인의 뇌는 몰입하고 생각하는 기능을 상실하는 중이라는 연구 결과다. 심각한 문제는 책을 읽지 않고 유튜브 등 동영상이나 이미지로 생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곧 당신이다. 저자는 충북 음성에서 자라 중학교 때까지 논과 밭에서 일을 도왔단다. 여기서 농사에 사용하는 언어는 삶의 얼룩과 무늬, 언어의 비늘이 되었다. 그는 국비로 운영되는 공고, 특성화고에서 용접을 배운다. 1980년대 공고 시절 한여름 불볕더위에서 3,000도가 넘는 용접기의 열기를 견디고 불가마에서 땀을 뺀다. 그때 어느 고시 합격 수기집을 쓴 공고생의 책이 그의 운명의 향방을 흔든다. 그리고 그는 좋아하던 술을 끊고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한다. 중학교 시절에 못 미치는 국·영·수 실력으로 독학을 한다. 아무리 공부해도 진도가 안 나간 고시를 포기하고 어느 날, 달밤에 고시 책을 모두 쌓아 놓고 기름을 부어 태운다. 그리고 책을 마음껏 읽고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에 입학한다. 앎은 상처다. 몰랐던 의미를 깨닫는 순간, 기존의 앎에 생채기가 난다. 앎은 감각과 느낌으로 전달되지만, 교육을 매개로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수되기도 한다.
사람은 자라 온 환경에서 하는 일에 따라 언어적 틀이 결정된다. 그들이 생산하는 제품이나 공정과 연관성을 갖는다. 공부하는 전공 분야에 따라 언어가 다르고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개념어를 갖는다. 전공에 갇힐수록 다른 분야 전문용어를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분야를 주체적으로 해석해낼 언어적 사유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남의 사유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려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무수한 사람들의 언어적 사유에 접속했다. 디지털 방해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이 책을 읽고 사색하는 능력이, 저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사유하는 뇌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깊이 읽어야 생각도 깊어진다. 우리가 책을 읽는 목적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낯선 사유체계에 접속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책을 읽을 때는 ‘깊이 읽어야’ 한다. 자기 경험만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어리석음과 오만함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모르고, 내 생각은 이런데, 그것이 틀릴 수 있다고 하는 자극을 받아야 자신의 짧은 경험의 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되 나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해석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 삶에 던져주는 의미와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해야 한다. 책은 딱 내가 살아온 삶만큼만 읽힌다. 내 그릇만큼만 해석할 수 있단다. ‘지성의 폐활량’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지성의 폐활량을 기르기 위해서는 책을 깊이 읽고, 주장이나 메시지를 물고 늘어져야 한다. 너무 쉽게 공감해서는 안 된다. 마치 저자의 메시지가 세상 유일무이한 대안인 것처럼 판단해서는 안 된단다.
읽기는 결국 쓰기로 완성된다. 깊이 읽기 방법은 저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질문을 던지고 역지사지 자세로 생각해본 다음,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고,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탐문형 독서가 결국은 깊이 읽기의 전형인 셈이다. 책을 다 읽고 그 장을 순서대로 타자한다. 그 문장 중에서 느낀 점을 추가하면서 독후감을 쓴다. 쓰기를 목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과 그냥 읽는 사람은 출발부터 다르다. 쓰는 사람은 한 문장도 허투루 보지 않는단다. 글쓰기는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다. 비밀 문장 노트를 만들어 손글씨로 적는단다. 그래야 오래 기억에 남는단다. 진짜 독서는 몸으로 읽는 體 讀이란다.
우리는 개념의 최소단위인 단어를 조사로 연결해 말과 글의 의미를 완성한다. 부사를 통해 느낌의 강도를, 형용사를 통해 감정을 드러내고, 접속사를 통해 말의 흐름을 만든다. 완성되어가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언어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언어를 통해 관계를 만들고 남의 지식을 이해하고 남을 설득하고 내 생각을 미래에 남길 수도 있다. 앎도 사람의 사이의 언어에 대한 앎이다. 앎이 지식에 대한 앎, 삶에 대한 앎이다, 그래서 언어는 인생이다.
나는 산만하고 너는 바쁜 세상이다. 종이로 읽는 집단과 태블릿으로 읽은 집단의 점수는 차이가 두 배 정도 종이가 높다. 이유는 디지털 매체는 무언인가를 읽을 때 딴짓으로 이어질 확률이 85%다. 화면 위에 이미지 링크, 광고, 소리 등이 와글와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산만하고 너는 바쁜 세상이다. 우리 뇌는 장기 기억력과 단기 기억력이라는 두 가지에 의존하는데, 단기 기억력은 폭발적인 정보가 들어가면 병목현상이 일어나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해진다. 반면 책을 읽는 사람 뇌는 고차원적인 이해와 사고력을 담당하는 장기 기억장치가 활성화된다.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흘러가는 이미지와 영상에 순간적으로 반응할 뿐, 거기서 언어와 사고를 배울 수는 없다. 외부 정보를 해석할 사유가 없다면 좋은 정보가 들어와도 기존 정보와 새로운 정보를 연결할 수 없다. 미지를 상상할 기반이 없으므로 상상은 공상, 환상, 몽상, 환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건너뛰고 훑어보는 습관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들은 문자 기피증, 난독증, 텍스트 혐오증까지 이른다. 조금만 문장이 길어도 읽지 않고 넘어간다. 참을성이 없어진 탓이다. 이제 글자는 읽어도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新 문맹이라 불러야 할까? 영상과 이미지를 보는 데만 익숙한 신 문맹들은 인터넷 뉴스조차 읽지 않고 관람한다. 한 권의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이처럼 ‘다 일고 난 나’와 ‘지금 읽고 있는 나’의 극적인 만남이다. 이제 컴퓨터와 책이 맞서는 시대는 갔고, 스마트폰에 맞서는 책은 완패당했다. 독서 혁명보다 기술혁명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문해력은 문장의 의미를 해독하는 것을 넘어 문맥 안에서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는 능력이다. 현대인은 3초마다 딴짓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5분 이상 몰입하지 못하는 것을 ‘쿼터리즘’이라 한다. 이제 3초도 못 견디는. ‘팝콘 브레인‘이라 부른다. 자극적인 정보에 수시로 지속해서 노출된 뇌는 더 강력한 자극이 들어와 팝콘이 터지듯 크고 강렬한 반응을 보인단다. 뇌는 텍스트처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정보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단다. 여기서 모국어 읽기의 문제가 생긴다. 국어가 외국어보다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디지털이나 동영상 강의의 치명적 약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배경지식을 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깊이 읽지 않으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보나 지식을 듣는 사람의 입맛에 맞게, 지나치게 가공해 전달한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사고력을 퇴보한단다. 그러니 인간은 사유조차 아웃소싱 해버린 것이라 저자는 주장한다.
2022.10.03.
언어를 디자인하라-1
유영만 박용후 지음
셈엔 파카서 발간
첫댓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나로구나.
그래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