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6 - 부다페스트가 누린 황금기의 영화를 생각하며 옛날 여행을 돌아보다!
어제는 류블라냐 Ljubljana 에서 기차로 8시간 걸려 헝가리 부다페스트 델리역 Budapest-Déli 에 도착해
지하철로 Kossuth-Ter(국회의사당) 역에 내려 국회의사당 을 보고는 다뉴브(도나우) 강변으로 가서
건너편 부다지구 왕궁이며 유람선에 일몰 을 구경하고는 뉴가티역(서역) 근처 호텔에 도착해 1박했습니다.
2022년 5월 7일 아침에 헝가리 부다페스트 서역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새벽에 일어났는데 오늘은
기차로 멀리 북쪽 다뉴브강변에 자리한 도나우벤트 Dunakanyar 의 비셰그라드 로 가야 합니다.
이제 부다페스트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동아일본에 조종엽 기자가 쓴 존 루카스 가 지은 부다페스트
1900년 이란 책을 소개한 “부다페스트의 황금기, 그 낭만속을 거닐다”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폭포 처럼 이어지는 검은빛의 향연 속에서 관대(棺臺) 의 아래쪽 중앙에 문카치의 옆모습이 금박
으로 장식된 대형 흰색 부조가 눈에 띄었다. … 부다페스트의 길거리에 불이 켜졌다.
그 그림자 속에서 와인에 취한 도시의 밤 에너지가 생기를 되찾고, 요란하며 시큼한
소음이 밤공기의 틈새를 메웠다. 방금 지나간 이상한 휴일의 감상, 뒤늦은 애도의 감정이 흘렀다.”
아무리 봐도 소설의 문장 같지만 역사책의 도입부다. 책은 1900년 5월 1일 사망한 헝가리 화가 문카치 미하이
(1844∼1900) 국장(國葬) 으로 시작한다. 한때 위대했던 화가의 죽음은 낡은 시대의 종말 을 뜻하는 것이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 역사학자인 저자(1924∼2019)가 1900년 전후 10년 정도 기간을 대상으로
부다페스트 라는 도시의 물리적 변화, 사람, 정치, 예술과 지적 삶, 정신의 성향 등을 그려냈다.
유럽의 변방 부다페스트는 1900년엔 손꼽히는 역동적 도시 였다. 25년간 인구는 3배로, 건물은 2배로 늘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며 문화도 만개했다. 문학과 미술, 철학, 과학에서 ‘부다페스트 세대’ 가 출현해 낡은
관습과 편협한 전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봉건적 요소가
있는 부르주아 문화, 시골 특징이 담긴 도시적 요소 등 이질적이고 얼핏 모순돼 보이는 것들이 섞여 요동쳤다.
저자가 주목한 작가 크루디 줄러(1878∼1933)는 부다페스트를 두고 이렇게 썼다. “봄이면 이 도시는
페스트 쪽 강변을 산책하는 부인들의 향내와 제비꽃 냄새 로 가득 찬다. 가을에는 부다 쪽이
이런 분위기다. 왕궁 벽 산책로에 떨어지는 밤송이 소리, 약간은 쓸쓸한 적막 속에 저쪽 간이
판매점에서 조각처럼 바람에 실려 오는 군악대의 음악. 가을과 부다는 같은 어머니 에게서 태어났다.”
1946년 봄 부다페스트대에서 유럽 외교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소련의 위성 정권 수립을
예상하고 그해 여름 미국으로 이주, 필라델피아에 정착했다. 그리고 체스트넛힐 칼리지에서
역사학 교수로 일했다. 아름답고 쉬운 문체로 아름다운 시절, 아름다운 도시의 단면 을 소개한다.
부다페스트의 영화 를 생각하니 옛날에 처음 헝가리에 왔든 일이 떠오르니 그때 외갓집이라는 부다페스트
의 민박집에 묵었는데..... 밤에 도착해 다뉴브강변에 떠다니는 유람선 을 구경하고 하룻밤을 잔후
다음날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는 Moszkva ter 역에 내려 언덕을 올라가서는 거대한 성문 으로 들어갑니다.
몽골의 습격을 받아 에스테르곰에서 남쪽으로 피신한 벨라 4세 가 13세기에 고딕양식으로 세운
왕궁 은 그 규모가 웅장하니.... 왕궁의 내부에는 지하로 깊이 파내려가는등 방어에
무척이나 유리하건만 300년후에 터키에 패배해 그 속하에 들어갔고 그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하에 바로크양식으로 재건되었다고 하는데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 입니다.
오래된 엣 성문을 들어가 작은 돌을 깔은 골목길을 걸으니 마치 중세로 여행을 온 듯하고.....
음악 박물관 에 들르니 바이올린의 제작과정 모형 이며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는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음악가 ‘리스트’ 등 유명 작가 악보 가 전시되어 볼만한데 소아마비 여직원이 불편한
몸을 끌고 따라다니며 축음기로 음악을 틀어 주는등 자신의 직업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부다페스트의 다른 곳에는 구름 처럼 몰리는 관광객이 음악박물관에는 우리뿐이라 그게 좀 서운했다는...
그러고는 아름다운 "마차시교회" 에 들어갈려니 입구에서 경비원이 제지 를 하는데,
사람을 골라서 입장시키는게 아마 미사 시간인지라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 들만 입장이 가능한 모양입니다?
마차시교회를 뒤로 하고 옆에 흰색 건물은 "어부의 요새" 라 불리는데, 건물도 요술나라에
나오는 것 처럼 아름다울뿐더러 강건너 "페스트지구" 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입니다.
그러고는 왕궁 으로 들어가서 관광객에게 개방되는 역사 박물관 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오솔길 언덕을 내려오며 바라보는 강건너 페스트 시가지 가 볼만했다는?
엘리베이터로 부다 언덕을 내려와서는 세체니 다리 를 걸어서 건너니 이제 페스트의 부르슈
마르티 광장 인데.... 호텔 도로변 좌석인데도 "굴라슈" 가 메뉴판에 710 Ft 로 되어있어
주저하는 마눌을 재촉하여 두개를 시켰는데.... 종업원이 더 시킬 것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됐다고 하니 빵을 그냥 가져다 주기에 콜라와 물 을 시켰키니 물병을 들어보이면서 프랑스 에비앙 상표
를 보여 주기에 미심쩍었는데 나중에 보니 작은병 물값이 790 Ft 라니...... 배 보다 배꼽 이 더 크다는?
우리나라 육개장 보다 더 짠 것 같은 굴라슈 가 비교적 싼 것은 정식 요리가 아니고, 요리 전에 입축임
으로 먹는 수프 의 일종이기 때문이니 수프만 먹고 본요리는 안먹는다고 욕하는게 아닐까 했는데....
계산을 치르면서 레스토랑 종업원은 팁 을 달라기에, 제대로 된 요리를 시킨 것도 아니라 미안해 얼마냐
물으니 피프틴.... 뭐라고 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점심 값의 15% 라는 뜻이었는데
1,500 포린트로 알아듣고는 주저하다가 절반이나 깍아서 준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배나 주고 말았다는?
Hosok tere 역에 내리니 "영웅광장" 이 펼쳐지고 "건국천년기념비" 가 하늘을 찌를듯 타원형으로 둘러섰는데
천사 가브리엘의 동상과 건국 영웅 아르파드와 6명의 족장의 기마상 이 우뚝 서있으니..... 로마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기념관에 견줄만한데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는게 빈말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영웅광장 옆의 제우스 신전을 본뜬 미술관 에는 고대의 지중해 도자기 외에도 라파엘로, 렘브란트,
루벤스, 고흐와 헝가리 화가들의 작품들로 가득 찼으니 참으로 볼만했으며 옆 공원에는
윗 옷을 벗고 일광욕 하는 여인들도 많고, 또 No Gas 라며 산 물이 탄산수라 마시기 힘들었다는.....
유학온 남편을 따라온 주부가 하는 외갓집 민박 은 부자페스트 시내로 인터넷을 할수있고 냉장고에 찬물
을 준비해주어 좋은데, 부다페스트 골동품 벼룩시장 에 가면 운이 좋다면, 잘고르면 오래된 유명
바이올린을 싸게 살수 있다는 여사장의 말에 솔깃한 울 마눌이 가보자고 했지만 매일 열리는게 아니라는...
부다페스트 서역의 T62 Hote 호텔 에서 주는 뷔페식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가니 여인의 그림이 참 인상적인데..... 문득 AP 연합뉴스에서 보도된
이 도시 부다페스트 에 세워진 ‘사토시 나카모토’ 조각상 이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정체 드러날까… 미 재판에 시선” 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사토시의 비트코인
76조원의 소유권을 놓고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진행중인 재판을 통해 가상화폐 비트코인의
창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 의 정체가 드러날지 관심을 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 이 보도했습니다.
문제의 재판은 지난 2013년 4월에 사망한 데이비드 클라이먼의 유족 이 동업자인
크레이그 라이트 (51) 를 상대로 100만개의 비트코인 소유권 을 놓고 제기한
소송에서 비롯됐으니 현재 시세로 640억 달러(75조 5천억원) 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클라이먼과 라이트가 모두 사토시 이고, 따라서 사토시 소유의 비트코인 100만여개 가운데 절반 은 유족의
몫이란 주장인데.... 호주 출신의 프로그래머로 현재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라이트는 지난 2016년 부터
자신이 비트코인을 처음 만들었다고 주장했으나 가상화폐 업계에서는 그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우세합니다.
클라이먼의 유족은 라이트와 클라이먼이 초기에 비트코인 100만개를 공동 채굴 했다며....
유족이 절반인 50만개의 비트코인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으니 원고 측은
두 사람이 초창기 부터 비트코인 개발에 함께 관여 하면서 협력한 증거를 제출할 계획이랍니다.
유족을 대리하는 티보 나기 변호사는 WSJ에 “동반자 관계인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 명이 세상을 떠난 뒤
나머지 한 명이 어떻게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 했는지에 관한 재판” 이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라이트
측은 그가 비트코인의 단독 창시자 고 클라이먼의 역할은 없었음 을 보여주는 증거를 갖고있다고 밝혔습니다.
비트코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 2008년 10월 31일 사토시 나카모토 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누군가가 인터넷에 비트코인 시스템을 설명하는 9장짜리 백서 를 올리면서
부터 인데, 유족들은 2008년 초 라이트가 클라이먼에게 이 백서 작성과 관련해
도움을 요청했다고 주장하며 이들이 협업해 함께 백서를 쓰고 비트코인을 개발 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던 사토시 는 지난 2010년 12월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가 2014년 도리안
나카모토라는 인물이 진짜 사토시라는 뉴스위크의 보도에 “나는 도리안 나카모토가 아니다”
라는 반박문을 올린 뒤 다시 사라졌으며 이어 라이트 가 2016년 5월 자신이 비트코인의 창시자
라고 주장했다가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사흘 뒤 사과문을 올리면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자신이 사토시가 맞는다며 말을 다시 바꿨으며 라이트에 대해선 해커이자 사기꾼
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클라이먼 의 경우에는 그의 컴퓨터 지식을 고려할 때
정말로 비트코인을 창시했을 가능성 이 있다는 전문가 평가가 나온다고 WSJ 은
전했는데.... 그런데 저 ‘사토시 나카모토’ 조각상이 부다페스트에 세워진 연유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