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 체험기
나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대구로 유학하였다. 초등학교 때는 교과서 외의 별다른 책을 대할 수가 없어서 읽고 싶어도 읽을 수가 없었다. 2학년 때 윤봉길 의사 전기를 읽었고 4학년 때 친구가 빌려준 정비석의 소년 소설 한 권을 읽은 것이 전부다.
중학교에 들어와 서점이란 걸 처음 봤다. 거기서 많은 책을 대할 수 있었고, 또 학교에 도서관이 있어서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게 되어 참으로 좋았다. 어느 날 나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도서관에 가서 ‘대위의 딸’과 ‘햄릿’을 빌려왔다. 68년 전의 일이라 꿈처럼 아득하다.
‘대위의 딸’은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푸가초프의 반란 사건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주인공 그리뇨프와 미로뇨프 대위의 딸 마리아의 사랑을 푸가초프의 반란이라는 사건과 융합시켜 그린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지방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리뇨프는 열일곱 살이 되어 변방의 요새 벨로고르스크에 육군 보병 소위로 부임한다. 임지로 가는 길에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는 우연하게도 건장한 농부를 만나 그의 안내로 길을 찾게 되었다. 그리뇨프는 그 고마움에 대해 술을 대접하고 자신의 토끼 가죽 코트를 내어줬다.
요새에 도착한 그리뇨프는 그곳의 사령관인 이반 미로노프 대위의 가족과 친해졌고 대위의 딸인 마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앞서 그녀에게 구애했다 거절당한 선임 장교 쉬바브린 중위는 둘의 관계를 질투하여 온갖 방해를 한다. 마침내 그리뇨프가 쓴 시를 쉬바브린이 보고 중요 시어가 마리아를 연상시킨다고 몰아대자 참다못해 결투를 신청하는 걸로 폭발한다. 처음에는 그리뇨프가 우세했으나 그의 늙은 하인이 도중에 그를 불러 그리뇨프의 시선이 하인으로 쏠린 틈을 타 쉬바브린이 그에게 부상을 입힌다. 이로 인해 요새는 발칵 뒤집어지나 다행히도 두 사람이 어찌어찌 화해하여 큰일 없이 잘 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푸가초프의 반란이 일어나고 쉬바브린의 배신으로 인해 반란군에게 요새가 함락되어 미로노프 대위와 그의 아내와 장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진다. 그런데 반란군의 지도자인 푸가초프는 다름 아닌, 부임 길에 그리뇨프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토끼 가죽 옷을 받았던 그 농부였고, 그때의 일을 기억한 푸가초프는 그리뇨프의 목숨을 살려주고 떠나보낸다.
주인공은 그 후 많은 역경을 겪지만 그것들을 잘 이겨내고 마리아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그 자손들이 러시아 심비르스크에 대대로 살고 있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하나는 그리뇨프와 마리아의 사랑 이야기다.그런데 나는 당시에 그러한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들지 않았고 지금도 거기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그 후 이 작품이 ‘템페스트’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나와, 인근 극장에서 관람했는데 그때도 영화가 잘 되었다는 생각뿐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전혀 내게 와닿지 않았다.
햄릿을 읽을 때도 그랬다. 햄릿과 오필리어의 사랑 이야기는 관심도 없고 지금도 거기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고 어머니까지 왕비로 빼앗아 간 삼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미친 척하는 햄릿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에 빠져 자살하는 오필리어도 그저 애처롭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이 ‘대위의 딸’을 읽으면서 가장 감명을 받았고, 지금까지 머리에 남는 장면은, 그리뇨프가 임지에 부임하는 과정에서 큰 눈을 만나 죽을 고비에서 허덕일 때 푸가초프를 만나 희망을 갖는 장면이다. 눈 속에서 노인이 말하기를 어디서 연기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멀지 않아 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나는 노인의 감각과 지혜에 크나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앞으로 큰일을 할 인물이란 것도 뇌리에 스쳤다.
그 후 나는 고 2학년 때 심훈의 상록수를 읽었다. 그의 소설 ‘영원의 미소’와 ‘직녀성’도 함께 빌려와 읽었다.
상록수는 193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농촌 계몽운동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나도 농촌 출신이라 브나로드 운동의 영향으로 전개된 당시의 농촌계몽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교우지에 그러한 내용의 짧은 글을 싣기도 하였다.
‘상록수’는 농촌 계몽운동에 헌신하는 두 젊은이, 박동혁과 채영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은 각각 남녀 농촌 계몽자로서, 서로 다른 지역에서 농촌계몽 활동을 펼친다. 그들은 농민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힌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있었고, 이로 인해 계몽운동은 쉽게 진척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혁은 채영신과 서로의 활동에 대해 소식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헌신한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동혁과 영신이 만나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영신은 온몸을 달팽이처럼 오므라뜨리고는 눈을 사르르 내리감고 있다가
“참 이 바닷가엔 왜 해당화가 없을까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살그머니 손을 빼려고 든다. 그러나 그 손끝과 목소리는 함께 떨려 나왔다.
동혁은 두 팔로 영신의 어깨와 허리를 바짝 끌어안으며
“해당화는 지금 이 가슴 속에서 새빨갛게 피지 않았세요?”
하더니 불시의 포옹에 벅차서 말도 못하고, 숨만 가쁘게 쉬느라고 들먹들먹하는 영신의 젖가슴에, 한 아름이나 되는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영신은 생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남자의 뜨거운 입술과,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도록 근지러운 육체의 감촉에 도취되는 순간, 잠시 제 정신을 잃었다.
동혁은 숨결이 차츰차츰 가빠오고, 두근두근하는 심장의 고동까지, 입술이 닿은 손등과 그의 얼굴에 짓눌린 가슴을 통해서 자릿자릿하게 전신에 전파된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때는 내가 농촌계몽에 깊은 관심이 있어 이 작품을 읽었는데, 정작 깊은 감동을 느낀 것은 계몽이 아니라 이러한 사랑의 장면이었다. 이 작품 또한 영화화된 것을 본 일이 있는데 전혀 감흥이 없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펼치는 이런 애틋한 장면을 영화가 담아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대위의 딸’이나 ‘햄릿’을 읽었을 때는 사랑의 이야기가 전혀 흥미가 없었는데, 상록수를 읽었을 때는 왜 그렇게 사랑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었을까? 그것은 나이 때문이라 생각된다. 전자를 읽었을 때는 어린 소년이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춘기를 맞은 청년기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초등학교 때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백천 대장을 향하여 폭탄을 던질 때,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상록수’에 나오는 동혁과 영신의 사랑 장면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한없이 쿵덕거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80이 넘은 지금은 그 장면들을 떠올려도 땅바닥을 치지도 않고 심장이 쿵덕거리지도 않으니 이 어찌 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