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애월읍 납읍리 2098번지에서 2101번지 까지, 곽남로 137,139,139-1,139-5 주택 북쪽 울타리, 납읍리 2224-2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민속신앙
납읍리는 제주 서북쪽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동북쪽에 고내봉, 서쪽에는 어도봉, 남쪽은 금산공원으로 이어지는 애월곶자왈 지대, 북쪽은 과오름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납읍리의 설촌 연대는 1300년경으로 고려 충렬왕 연간에 해당되며 곽지남동(郭支南洞)이 되었고 이것을 약하여 곽남이라는 최초의 호칭이 되었다. 이들이 곧 납읍의 원주민이요 다음으로 곰팡이와 동댕이 등지에 사람들이 계속 입주함으로써 한 마을의 형태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예부터 서당이 설치되어 20여 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문인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납읍리는 사방이 오름으로 둘러싸인 분지이지만 마을 서북쪽이 비어 있어 걱정을 했다고 한다. 1900년도 초 납읍마을을 찾은 유명한 지관이 마을 형태를 살펴보고 마을 섯동네(서동)에서 보면 풍수지리학상으로 건해방(乾亥方), 즉 마을 서북쪽이 비어 있어 허(虛)하므로 축성하는 것이 온 마을이 무사태평하겠다고 하였다. 서북쪽 건해방(乾亥方)이 낮게 되면 겨울에 세찬 북서풍의 피해를 받게 되며, 풍수에서 건해풍(乾海風)은 황천살(黃泉煞)로 그 피해가 심하고, 건해풍은 마을의 지기를 흩어버리게 할 뿐 아니라 가끔씩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을 중심 남쪽에 거대한 암석이 노출되어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림읍 금악봉이 화체(火體)로 보여 화(火)의 재해를 피하기 위해 암석 지대에 나무를 심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을에서는 고민을 하던 중 1937년도에 재일본 청년회에서 마을에 필요한 곳에 사용하도록 성금을 보내오자 논의 끝에, 이 기금 일부를 사용하고 마을 주민들이 노력봉사를 부담하여, 사장밭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문직이 동네를 지나 서중동 절빌레까지 1,800여m를 높이 4~4.5m 겹담으로 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간마다 통로를 만들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성담에 이어서 비보탑도 쌓았다. 4・3 때에는 이 성담을 그대로 이용하여 마을방어성을 쌓았다.
비보성담 1구역
규격 ; 성담 높이 250(100)cm, 길이 약 230m, 상부 폭 70cm 겹담
1900년대 초에 납읍마을에 유명한 지사(風水地理士. 마을의 대소사나 지형 등을 보는 사람)가 마을 형태를 살펴보고 마을 섯동네(서동)에서 보면 지리학상으로 건해방(乾亥方), 즉 마을 서북쪽이 비어 있어 허(虛)하므로 비보(秘補)하기로 하여 성을 축성하는 것이 온 마을이 편안하여 무사태평하겠다고 하여 축성되었다.
서북쪽 건해방(乾亥方)이 낮으면 겨울에 세찬 북서풍의 피해를 받게 되며, 풍수에서 건해풍(乾海風)은 황천살(黃泉煞)로 그 피해가 심하고, 건해풍은 마을의 지기를 흩어버리게 할 뿐 아니라 가끔씩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비보를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자금이 없어 고민을 하던 중 1937년도에 재일본 청년회에서 마을에 필요한 곳에 사용하도록 성금을 보내와 향의(鄕議) 끝에 이 기금 일부를 사용하고 마을 주민들이 노력봉사를 부담하여 사장밭에서 서쪽으로 문직이 동네를 지나 서중동 절빌레까지 1.8km를 높이 4~4.5m의 겹담으로 축성하였다. 구간마다 통로를 만들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때 탑도 쌓았다고 하나 탑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성담은 어느 부분이 무너지면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보수하면서 1960년대말까지 그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납읍에서 애월로 가는 길과 납읍에서 곽지로 가는 길까지는 성담을 따라서 좁은 길이 연결되어 있다. 과납마을에서 곽지현청(郭支縣廳)으로 가는 ‘자드락길’이라 불리던 길이 있었는데 ‘과오름농원’ 앞을 지나는 그 길은 지금은 ‘성질(城路)’이라 부르고 있다.
이 성담은 어느 한 부분이 무너지면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보수하면서 1960년대 말까지 그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축성했던 돌들을 치우고 밭과 감귤원을 조성하면서 성담의 돌들이 사용되어 높이도 많이 낮아졌고, 또 북쪽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서 허한 방향을 가려 주고 있기 때문에 무너져도 방치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밭 임자가 허물어서 길을 내어도 그냥 두었다고 한다.(2008년 11월 9일 납읍리 거주 1929년생 진희익씨와 면담)
지금은 과수원 담의 재료로 전용되어 높이도 많이 낮아졌고, 또 북쪽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서 허한 방향을 가려 주고 있기 때문에 무너져도 방치하고 있고 심지어는 밭 임자가 허물어서 길을 내어도 내 버린다고 한다.(2008년 11월 9일 납읍리 거주 1929년생 진희익씨와 면담) 4․3 때에는 이 성담을 그대로 이용하여 마을방어성을 쌓았다. 현재도 높이는 2m도 안 되게 낮아졌지만 그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비보성담2구역과 비보탑
탑 높이 295(220)cm, 둘레 1000cm, 상부 직경 230cm
탑윗돌(석상) 높이 78cm, 너비 31cm, 폭 23cm
서쪽 문직이 동네의 성담은 납읍리 2224-2번지 비닐하우스 입구 울타리와 주변 과수원 울타리로 이용되고 있으며 약 120여 미터 정도 형태가 남아 있다. 이 성벽 중간에 방사탑이 설치되었는데 주변 성담을 쌓은 돌보다 조금 큰 돌을 이용하여 원기둥 모양으로 올라가다가 윗부분은 조금 좁아지게 쌓았고 꼭대기에는 길쭉한 돌을 세웠다. 탑의 서쪽 일부분이 무너져 내려 상부가 원추형이었는지 평편한 모양이었는지 정확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덩굴식물 등에 가려져 있어서 길 쪽에서는 방사탑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마을에서는 이를 문직서성(門直西城)이라 한다. 탑을 먼저 쌓고 성담을 이어서 쌓은 것처럼 보이는데 오랜 세월 풍파에 허물어진 부분도 있지만 큰돌과 작은 돌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 성담을 따라 걸으면서 돌 하나하나에 마을 사람들의 정성과 염원이 담겨있음이 느껴진다.
《작성 081111, 보완 220318, 26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