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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教간 對話의 省察
松巖 이경재
우리의 이야기를 하나의 이메 지네이션(Imagination) 으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코리아나라고 하는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광활한 우주를 여행한다고 가정하자. 무한히 펼쳐지는 현묘한 우주, 나의 태양계말고도 수없이 나타나는 다른 태양계들, 더군다나 우리의 태양계보다도 더욱 긴 영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다른 태양계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코리아나라는 우주선이 타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것인가.
a.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태양계, 즉 나의 태양계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고집하며 다른 태양계의 존재를 인정치 않거나 無化시켜 버리는 앞뒤가 꼭 막힌 사람들 (宗教的 排他主義)
b. 다른 태양계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내가 속한 태양계에 비해 덜 발달된 지류나 아류에 불과하며, 나의 태양계만이 가장 진화되고 절대적으로 유일한 태양계라고 我田키水로 해석하는 사람들(宗教的 內包主義)
© 다른 많은 태양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유일한 태양계라는것은 없다는 사실, 즉 모든 태양계는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 " 中仁은 어디에도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宗敎的 相對主義) 또는 여러 개의 태양은 단순히 독립적으로 각기 개체적 절대성을 지니고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즉, "中仁은 어디에도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宗教的 多元主義)
d.마지막으로 수많은 태양계가 존재한다 할 때에 첫째로 각 태양계는 자신의 內的 共助體系 (inertial co-ordinating system) 안에서는 유일한 (Unique) 태양계이며 동시에 中仁이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원리에서와 같이) 唯一性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왜냐하면둘째로 각 태양계는 자신의 내적共助체계안에서는 유일하지만 모든 태양계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태양계의 원리라는 틀을 (아인슈타인의일반 상대성원리에서와 같이)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場으로서의 각 태양계는 보편적 태양계의 원리에 일치하면서 각기 독자적이고 " 상대적으로 절대적 (relatively absolute) 인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 (종교의 초월적 一致 또는 종교 에조테리즘). 여기서 "상대적으로 절대적"이라는 말은 각 태양계는 자신의 내적 공조체계라는 점에서 "닫혀진 조직"(closed system) 으로서의 독자성을 지니며 동시에 보편적 원리에의 참여라는 점에서 "열려진 조직"(open system) 임을 지칭한다. 따라서 "닫혀진 조직"에서 보면 절대적이고 열려진 보편성의 원리에서 보면 상대적이게 된다.
이같은 각기 다른 반응중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포괄적이고 합리적임을 쉽사리 간파할 수 있다. 이를 기하학적 상징주의를 빌어 풀어본다면 재미있는 비유가 될 수있다. 이차원적 공간을 다루는 유크리드(Euclid) 기하학에서 점과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 그러나 삼차원적 입망체 특히 거대한 球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점과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나타날 것이다. 즉 직선은 무한한 곡선의 상대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앞서 든 이메지네이션에서 첫번째 견해는 직선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이며 곡선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번 견해는 곡선은 직선을 통해 완성되고 직선에 도달키 위한 예비단계라는 견해일 것이다. 세번째 견해가 직선과 곡선이 독립적으로 병립하여 존재할 뿐이라는 해답아닌 해답, 또는 평면적 견해라면 네번째 견해야말로 무한한 공간에서 직선은 곡선과 보편성의 원리에서 一致한다는 통합적 원리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곡선은 직선과 모순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직선은 유일하게 절대적 성격을 지니나 무한한 공간의 곡선에서 그 직선은 상대적인 곡선 즉 "상대적으로 절대적"(relatively absolute) 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오늘날 제종교 상호간의 문제는 단순히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이 당면하고 있는 생존과 의미의 가장 절실한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행선을 타고 우주를 관찰하며 수다한 다른 태양계를 발견함으로써 받는 존재론적 충격과 함께 자신이 속한 태양계의 위상을 정립해야 했던 사람들과 같이, 아니 그보다 더욱 절박하게 우리는 나의 이웃이 기독교도요, 불교도이며, 이슬람이고, 힌두임을 자연스레 발견케 된다.
더군다나 한국적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기독교 이전의 찬란한 종교적 유산과 살아있는 신앙으로서의 제종교의 상호이해의 지평이 과제로 등장케 된다. 서구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한 때에는 서구 기독교 이외의 다른 전통은 모두 개종되어야 하고 페기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던 때도 있었다. 라턴 아메리카의 찬란했던 인디안문명이 십자가의 이름으로 말살되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선교사들간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던 때도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순히 과거의 그릇된 유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현금에도 종교적 독선주의와 상호간의 그릇된 이해의 지평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도처에서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한 종교집단만이 절대적 진리를 소유하고 타종교집단들은 사라져야만 할 죄된 무리라고 규정할수 있는 것인가? 내 마누라가 내게 가장 아름답고 귀한 존재라는 것이 다른 사람의 마누라는 모두 추하고 천박한 존재임을 의미하는가? 구원의 확신은 한 종교집단의 전유물이요, 계시는 한 집단의 전매품인 것인가? 타종교에 대한 긍정적 이해의 지평을 과연 소아병적 또는 신경병적 반응으로서 정죄의 대상으로 몰아 부쳐도 좋은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종교집단은 상호배척의 몰이해와 교인의 사상적 점유를 위한 제국주의적 경쟁을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사려깊은 성찰을 위하여 우리는 앞서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며 종교 상호간의 관계적 이해를 크게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1.絕對主義로서의 排他主義와內包主義
A) 종교적 배타주의 ; 신앙 그러나 지혜의 결여
종교적 배타주의 라는 말은 종교와 배타의 복합어이다. 종교라는 말은 "본질적 가르침" 또는 "근원적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영어의 宗教를 뜻하는 Religion 이란 말의 라틴어인 religio 는 근원에 "연결시킨다" (link back)는 뜻을 지닌다. 종교하는 말은 그러기에 현상계의 근원이요 본체인 신적 실상에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또는 현상계를 근원지우며 포괄하는 무한성의 범주를 근본으로 한다. 종교가 그러한 뜻을 지닐 때 정의상 배타라는 유한성의 한 범주와 병렬되어 사용됨은 자기 모순적이다. 종교는 현상계를 초월하면서 현상계를 모두 포함하는 즉 배타와는 달리 내포하는 그러한 세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전통적 용어로는 신적 실재의 초월 즉 내재라고 표현한다. 고대의 지방색을 근거로 하는 부족종교의 신을 제외하고는 소위 고등종교에 있어서의 신적 실재는 이러한 초월 즉 내재의 세계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라는 포괄적이고도 절대무한의 범주가 배타라는 유한 성의 범주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데에는 다음의 원인이 있다. 물론 종교와 배타의 복합은 역사적인 상호접촉의 결과이다. 세계가 지구촌으로 좁아지기 이전의 역사적 상황에서 각 종교는 자기가 속한 부분적 세계에서 우주관과 가치관과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아무런 충돌없이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가 좁아지기 시작하고 제 종교가 접촉되기 시작하면서 가치관과 세계관 등등이 교차 충돌되는 역사적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교차의 한 양태로 나타나는 현상이 배타주의이다. 배타의 심리학적 논리는 문화적 우월주의 내지는 문화적 보호주의이다. 그러나 배타의 종교적 논리를 말하게 되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1 첫째로 종교적 배타주의의 논리는 계시의 문제, 즉 신적 실재의 자기 현현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절대-무한의 범주에 속하며 현상계의 근원이 되는 신적 실재가 인간적 세계에 나타나려면 두가지길 밖에 없다. 신적 실재가 스스로를 현현 즉 계시하든가 또는 인간내에 신적 실재가 존재하든가의 길이다. 전자가 계시종교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교의 모습이다. 그러나 계시라는 말이 "감추어진 것의 나타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양자는 본질상 같은 맥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추어진 것이 신적 실재의 본래모습 즉 유한을 초월하고 言語道斷, 仁行處滅의 감추어진 신(Deusabscondius)이라면 나타난 신은 유한에 계시된 신(Deus revelatus )이다. 계시 즉 감추어진 것, 나타나려면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의 접촉점이 필요하다. 전통적 용어는 이 접촉점을 '答器"라는 말로 표현한다. 용기는 인간이 될 수도 있고 歷史가 될 수도 있고 自然이 될 수도 있다. 앞서 말한 것을 부연하면 감추어진 신은 개인 또는 더욱 널리 집단, 민족, 문화 등등의 용기에 따라서 자신을 현현하여 계시된 신으로 나타난다.
율곡의 싯귀, "물은 모나고 둥근 그릇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고 空은 크고 작은 병의 모습을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한다"(水遂方圓器 空隨小大瓶)라는 싯귀는 이러한 용기의 개념을 잘 말해주는 성 싶다. 모나고 둥글거나 크고 작은 용기는 문화적 상대성이며 종교적 상대성이다. 그에 담겨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물의 모습은 신적 실재의 상대적 현현이다. 물의 본체야 같은 물이지만 그 모습은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이를 전통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계시된 신은 절대이며 동시에 상대라는 "양극의 일치"("양극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말이 된다. 감추어진 신과 계시된 신은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성을 지니지만 그 나타난 형태(答器)에 있어서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계시된 신은 "相對的으로 絶對"(relatively absolute) 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불교적 용어로는 佛의 仁인 禪은 佛의 語인 教와 일치하면서도 그를 뛰어 넘는다는 말과 상통할 수 있으리라. 教는 상대적으로 절대인 반면 禪은 절대적으로 절대(absolutcly absolutc)를 말한다 하겠다.
老子는 이를 가리켜 道之道 非常道(1장)라고 했다. 道之道도 道요. 常道도 道다. 용기에 담긴 道(道之道)는 常道의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도의 모습이다. 그러나 상도는 용기에 담겨 국한된 도에 그치지 않고 그를 뛰어 넘는다. 만유가 도아닌 것이 없으되 어떤 용기에 국한된 道일 수 없다는 것이 또한 道의 본질적 모습이다. 그러기에 노자의 道之道 非常道는 종교적 본질을 꿰뚫는 혜안이 된다.
여기서 종교적 배타주의는 상대적 절대로서의 계시를 절대의 신적 實化로 확대하는데서 생기는 오류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용기에 담긴 계시만을 절대적으로 절대화함으로써 타자의 용기에 담긴 계시를 거짓 幻影으로 또는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무한-절대라는 말은 그 자체가 만유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개의 무한이나 두 개의 절대라는 말은 자기 모순적이다. 무한-절대는 하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에 둘,셋, 넷, ·••· 의 근원이요, 모든 수를 내포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절대인 용기에 담긴 계시를 무한-절대의 하나로 확대할 때, 용기의 모습마저 무한-절대의 하나로 확대함으로써 나와 다른 타자의 용기는 배타되어야 할 대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종교 제국주의가 문화적 침략주의와 더불어 나타나게 됨은 이러한 오류의 결과라 하겠다.
2 둘째로 종교적 배타주의는 신앙고백적인 수직적 언어를 수평화 시킬때에 나타나게 된다. 전자가 존재론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실론적인 차원의 것이다. 한 인간이 어느 특정종교의 신앙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했을 때에(특수 계시에 대한 신앙고백) 그에게 있어서 그 종교는 절대적이며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어떤 종교에의 헌신은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상 우리는 어떤 종교에의 헌신을 통하여 종교의본질인 신적 실재의 대해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이며 유일하다고 고백되는 신앙고백적 수직의 언어가 수평적으로 확대될 때에 나의 용기 자체가 나를 가두고 독선적이 되게 한 배타의 언어로 둔갑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용기에 담긴 절대-무한은 또한 그 형태를 초월한다는 존재론적 진리의 망각이다. 이때에 상대적으로 절대인 계시는 절대적으로 절대인 궁극원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타종교의 형태에 대한 진리/거짓의 이분법적 논리가 산출되게 된다.
진리는 하나이며 나에게 나의 종교가 진리로 고백됨으로 타종교의 진리체계는 거짓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인간은 진리/거짓의 이원적 선택에 서 있다는 것, 더우기 진리는 거짓을 이겨야만 한다는 것, 즉 진리로서의 나의 종교는 거짓으로서의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시적 진리의 전매특허적 독점주의는 종교가들의 종교판매의 이익적 독점의식과 맞물려 추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왜 그들은 잘못인가? 그들의 신앙적 열정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왜 그들은 절대-무한의 진리를 좁은 용기에 국한시키는 오류를범하고 있는가? 왜 그들은 만유에서 절대-무한의 진리를 바라보는 如如한 지혜를 결핍하고 있는가?
앞서 말한 절대-상대의 형이상학적 진리를 깨닫는 지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적 배타주의의 오류는 다음과 같은 데에서 그 모순을 볼 수 있게 된다.
첫째로 신앙고백적 수직의 언어는 나의 실존적 언어로써 그것이 그대로 타자에 대한 객관적 판단의 수평적 언어로 적용될 수 없다. 내가 나의 마누라를 가장 아름답다고 고백할 때에 그것은 곧 수평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누라는 다 추한 것으로 즉 수평적 언어로 환원될 수 없음과 같다.
둘째로 진리/거짓의 이분적 논리는 종교에 있어서 실재/비실재의 수직적 언어로만 사용될 수 있다는점이다. 이슬람에서 "알라 이외에는 실재가 없다" 할 때에 그 말은 모든 현상계는 신적 실재인 알라에 근원 되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는 근원이 아닌 즉 비실재로서 나타나게 된다는 실재/비실재의 수직적 언어를 가리킨다. 베단타의 아트만/마야나 불교의 體/用 등의 언어도 다 이러한 수직적 언어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서의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한 조항도 실상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신의 자리에 놓지 말라는 것 즉 비실재를 실재의 자리로 놓지 말라는 수직적 언어일 뿐이다.
앞서 든 마누라의 경우를 다시 예로 들자면 내 마누라의 아름다움을 고백하는 것은 내 마누라에게 현시된 아름다움 자체, 즉 신적 실재의 본질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그러한 수직적 언어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하자면 타인의 마누라에 현시된 신적 실재의 아름다움을 또한 볼 수 있는 지혜로까지 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세째로 수직적 언어가 수평적 언어로 해석되고 확대될 때에는 타자에 현현되어 있는 신적 실재를 이해할 줄 아는 에조테릭한 지혜의 언어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종교적 배타주의는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신앙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에 나타난 신적 현현의 현묘함을 바라보는 지혜의 결여, 또는 "거룩한 지식"(sacra scicnuia) 으로서의 그노시시(Gnosis: 신적 지혜)의 결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종교적 배타주의는 신앙을 소유하나 다른 형태의 우주(즉 容器)를 관찰하여 그의 내적 의미를 발견하는 根本智를 결여하고 있다. 근본지를 결여하고 있기에 종교적 배타주의자들은 신을 만나기 위해 "너회 자신에 대해 죽으라"는 종교적 秘義, "신적 실재에는 모든 곳이 중심이며 변두리는 없다"는 지혜를 망각한 채 우주의 중심을 오직 한곳, 나의 것으로만 국한시키는 오류 를 범하고 있다 하겠다. (계속)
1992년 5월호미주현대불교제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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