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천 농구장에서 운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벚나무 사이에 있는 리기다 소나무
미국이 원산지인 소나무과 소나무속 식물. 60~70년대 녹화사업에서 대량으로 식재되어 한 때 한국에서 가장 많이 심어진 외래종으로 황무지를 녹화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으나, 각종 단점들로 인하여 2000년대 들어서는 식재가 기피되고 있다.
생명력이 강하여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잘 자란다. 잎이 2개씩 모여 나는 소나무와 달리, 잎이 3개 씩 모여 난다. 줄기는 곧게 직립하여 25m 정도 크는데 가지가 옆으로 넓게 뻗질 않아 수형이 좋지 않고, 중심 줄기 곳곳에 싹이 새롭게 나와서 무척 지저분해 보이는 게 특징이다.
줄기에 상처라도 입게 되면 엄청난 송진을 뿜어내서 곤충 뿐만이 아니라 새들조차 가까이 가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떨어진 잎에도 천연 방부제인 송진 성분이 묻어서 분해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숲바닥 토양은 점차 영양분이 빈약해지고 척박하게 된다. 또한 송진이 많은 까닭에 산불에도 엄청 취약하여 산불이 크게 번지는데 일조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을 상쇄시키는 것이 리기다소나무의 엄청난 생명력이다. 생명력이 얼마나 강하냐면, 재생 능력이 너무 좋아서 주 줄기가 잘리거나 화재로 손상된 경우에도 자연적으로 마디에서 다시 싹을 틔울 수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모든 소나무 중에서 소나무재선충을 가장 잘 견뎌내는 나무이며 솔잎 혹파리에도 강해서,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는 소나무 중에서 탑티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원산지가 애팔래치아 산맥의 암각노출지로 산성토양이기도 하다. 이런 원산지의 극한환경에서는 극상림조차 리기다소나무 숲으로 유지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1907년 일본을 통해 처음 들어왔고, 60년대 녹화사업에서 많이 심어지면서 그 특유의 강한 생명력으로 산림 복구에 많은 공헌을 했다. 하지만 관상용으로도 보기가 안 좋은데다가 송진과 옹이가 많아 목재로써도 쓸모가 없어서, 최근에는 많이 베어내고 그 자리에 다른 수종을 심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산에 올라갔다 하면 볼 수 있는 그런 나무였지만 지금은 점점 주변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는 리기다소나무를 도입했던 일제강점기 당시 조림한 리기다소나무 숲이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 있다.
동래시장 밥집 코너에서 아침 먹고 비빕밥 8천원
죽집은 아직 장사 시작 안했네. 옛날 할매 그대론가 궁금하다,
법륜사
법륜사 담벼락 담쟁이덩굴을 바라보며 언덕배기를 넘어
오다 만난 젊은 늙은이가 " 8 개월째 놀고 있는데 죽을 지경이다" 라고 하며 따라 온다
포도과 담쟁이덩굴속에 속하는 덩굴성 갈잎나무. 이름답게 가지에 난 덩굴손 수십 개로 바위나 나무, 건축물들을 기어오르며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잎은 가지와 정반대 방향으로 나며, 3~5 갈래로 갈라진 손바닥 비슷한 모양이다. 초여름에 잎겨드랑이에 엷은 녹색으로 꽃이 피고, 가을에는 자주색을 띤 액과 열매가 열린다.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로, 이름처럼 주로 담이나 건물의 벽면에 붙어 자란다. 담쟁이덩굴이 붙은 오래된 건축물은 고풍스럽고 운치있는 분위기를 풍기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건물.
이 동아시아 덩굴이 미국으로 넘어가 보스턴에 많이 심어졌는데, 그래서 담쟁이덩굴을 영어로 '보스턴 아이비(Boston ivy)'라고 부른다. 보스턴 이외에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 필드 외야 담장에 자라는 담쟁이덩굴이 미국에서 유명하다.
관상용으로 좋을 뿐만 아니라, 건축물 측면을 담쟁이 덩굴이 감싸면 보온효과가 탁월하고, 여름철에도 태양빛을 많이 흡수한다고 하니 일석이조이다. 단, 덩굴손의 흡착반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이 페인트를 부식시켜 떨어지게 하므로, 페인트를 칠한 건물에서는 담쟁이덩굴을 심는 것을 피해야 한다.
내성초등학교 양버즙나무, 은행나무 암수 두 그루
내성초등학교
부산내성초등학교 萊城初等學校
Naesung Elementary School
동래구 복천동애 위치한 공립 초등학교. 대한민국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이다. 무려 117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이다.
Multi Park라고 건물 바로앞에 있는 화단을 개조시킨것으로 자그마한 연못과 쉴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다.
오른쪽에 있는 후문으로 가는 길의 바닥을 보면 상당히 난잡하다...
20분거리에 부산 1호선 동래역, 부산 4호선 낙민역과 수안역, 동해선 광역전철 동래역, 부산 1호선 명륜역 근처에 있는 롯데백화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6년학년도 학생수는 6학년은 3반까지만 있고 다른 학년은 2반까지밖에 없다.(15학급+특수2학급) 그런데 2km떨어진 근처 초등학교 명륜초등학교는 2016년기준 38학급(특수1학급포함)이나 된다. 이 지역을 직접보거나 찾아보지않은 사람은 의아하겠지만 사실 명륜초등학교 뒤에 재개발로 명륜아이파크 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는데 내성초등학교 주위는 그냥 주택단지이다. 단지 아파트때문에 한 도시의 학교를 시골 학교수준으로 만들어놨다. 더군다나 인근 거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내성초등학교 인근 거주자들 중에서도 위장전입으로 명륜초등학교로 배정하게 해놓은 경우가 제법 있다보니 두 학교의 학생수 차이가 더더욱 벌어졌다는 후문이 있다. 명륜초등학교가 상당한 과밀학급이라서 일부를 내성초등학교로 분산 배정하려 해도 워낙 반발이 심해서 어떻게 할 수 도 없다고...
1970년 80년 대에는 명륜초등학교 전교생이 내성초등학교에 걸어서 영화 보러 왔다. 현재 동래 교육청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리에 큰 강당과 뒷 운동장이 있었다. 67회가 졸업하던 1977년 당시에는 전교생이 4천명 가량 되었던 것 같은데... 복천동고분군이 공원화 되면서 일대 집들이 철거된게 치명타 였던 것 같다. 그 일대가 재개발되고 교육청도 이전 한다고 하니 학생수가 다니 늘어나서 전통이 이어질 것 같다.
학교 위치한 곳은 칠산동이다. 물론 행정동명은 복산동이다 (복천동 + 칠산동)
복천동 골목길
칠산동 전경
칠산동(漆山洞)의 지명 유래는 과거 이곳에 있던 거칠산국(居漆山國)의 ‘칠산’에서 유래하였다. 거칠산은 ‘거칠다’는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친 뫼’, 즉 황령산을 지칭한다고 말하는 견해도 있고, 현재 동래읍성의 주산인 마안산을 칠산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는 견해도 있다.
칠산동은 조선 후기 동래부 읍내면이었다가,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 칠산리가 되었다. 1946년 칠산리가 칠산동으로 바뀐 뒤, 1957년 구제(區制)가 시행되면서 부산시 동래구 칠산동이 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 동래구 칠산동, 1995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이 되었다.
칠산동은 동래읍성 내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산지가 풍수지리상 동래읍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줄기이다. 주산인 마안산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인생문 고개를 거쳐 동장대가 있는 망월산으로 이어진다. 산지의 산기슭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서쪽으로 흘러 온천천으로 유입한다.
칠산동은 동래구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명장동, 서쪽은 복천동, 북쪽은 명장동, 남쪽은 수안동에 접해 있다. 동쪽의 산지를 따라 동래읍성의 성곽이 복원되어 있으며, 이곳에 인생문과 동장대가 복원되어 있다. 교육 기관으로 동래고등학교가 있으며, 학소대에 대한불교 조계종 법륜사가 있다. 법정동인 칠산동은 복천동과 함께 행정동인 복산동의 관할이다.
인생문
조선시대 다양한 이야기가 내려오던 동래읍성지 인생문.
지난 2015년 붕괴 이후 최근 복구공사를 완료했습니다. 붕괴 당시 부실공사에 따른 비난도 있었지만 새롭게 복구된 인생문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설계도를 활용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고 합니다.
지난 2015년 9월 17일 비 오는 날.
동래읍성지 인생문은 준공 1년 만에 붕괴되는 사고를 겪습니다.
과거 동래읍성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를 담았던 인생문의 붕괴는 철저한 부실공사의 결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후 동래읍성지 인생문의 복구공사에 대한 계획은 몇 차례 수정됐습니다.
'지난 2015년 9월 붕괴됐던 동래읍성 인생문이 정확히 2년 10개월 만에 복원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당초 계획보다 1년이 늦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생문 붕괴 이후 복구공사는 2017년 8월로 예정되었지만 정밀안전진단 이후 무너진 부분만 아니라 전체 복구라는 결정을 내려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복구공사에 투입된 예산도 17억 원가량에서 31억 원으로 늘어났습니다.
"동래구청 뒤를 발굴해보니깐 성문 주변에는 성벽폭이 5.5m로 기존(인생문)보다 2m 가까이 더 늘어난 게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깐 옹성도 같이 커지면서 전체적으로 공사기간도 늘어나고 사업비도 많이 들어가게 된 것 같습니다."
최종 복구공사를 마친 인생문은 지난 과오에서 벗어나 원형에 걸맞게 설계과정을 거쳤습니다.
인생문 성벽의 너비도 과거보다 2m 더 넓어졌고 이에 따라 옹성의 규모도 커졌습니다.
또 공사기간 동안 수시로 문화재위원회의 점검을 통해 길이 63m 규모의 인생문이 제 모습을 찾은 겁니다.
"꼼꼼하게 점검받았고 문화재청에서도 점검을 두 차례나 받으면서 나름대로 전과 다르게 튼튼하고 옛날 원형에 좀 가깝게 할 수 있었습니다."
첫댓글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서 명장동으로 이어지는 인생문 고개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을 넘어간 이들이 살아남아 새로운 삶을 이어갔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부산에는 150여개의 고개가 있다. 남북 방향의 낙동정맥과 동서 방향의 낙남정맥이 부산에서 만난다. 고개가 많은 이유다. 가히 부산은 고개의 도시다. 도시의 길흉화복이 고개에서 갈라졌다. 고개에는 생과 사가
오가기도 했다.
인생문고개가 있다. 동래구 칠산동과 명장동을 잇는 이 고개를 칭하며 “부산의 제삿날”이다
제삿날은 음력 4월 15일. 1592년 그날이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3만여 병력으로 동래성을 포위했다. 왜군은 동래성 북문과 동문 사이의 ‘약한고리’인 현재의 인생문을 집중 공격했다. 동래성이 넘어갔고 숱한 희생자가 생겼다. 한데, 이 고개를 먼저 넘어간 사람들은 목숨을 건져 삶을 이어갔으니 인생문고개라고 이름 붙었단다.
어스름.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혈육이나 혈육 같은 이들의 손을 잡고
장애우가 인생문고개를 넘어간다. 한 쌍, 두 쌍, 세 쌍…. 근처에는 장애우 학교가 있다.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이들이 인생문고개를 점점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