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적상산 산행
2022. 11. 26. 토요일 새벽 5시 50분 집을 나서
무주 적상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06시 35분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 IC 진입
버스전용차선 외 일반차선 승용차의 정체에 놀랐습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직 깜깜한 이른 새벽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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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마을~장도바위~ 적상산 향로봉~ 적상산 안렴대~안국사~적상산성~장도바위~서창마을(원점회귀)
산행거리 10km, (5시간30분)
산행일시 2022년 11월 26일(토요일)
특징 100대 명산, 붉은 치마를 두른 여인의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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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성을 따라 걷는 길
장도바위에 새겨진 최영 장군에 얽힌 전설
안렴대
적상서고
안국사
영조시대 의겸의 괘불 탱화
깊은 역사의 전당을 밟고 걷는 감회가 컸습니다.
사랑을 품은 마음에 자비와 평화를 말하면서
화장실 문을 이중으로 잠근 까닭은 무엇인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화장실에 물을 공급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경제 사정인 것 같지는 않고, 바로 아래 적상호가 있어 수력발전소를 가동하고 있으니 물을 끌어올 수 있는 수자원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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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는 무주 양수발전소가 건립되면서 수몰지구 안에 포함 되었기에 1991년 현재의 위치인호국사자리로 이전 복원 되었습니다.
제철 아닌 때 피었어도 고운 빛깔과 당당한 자태를 갖추어 활짝 피었습니다. 누가 따로 자격이 있어 때 아닌 때에 핀 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피었으므로 제철인 것입니다.
장도바위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에서 장도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적상산성 장도바위」는 고려의 최영(崔瑩)[1316~1388] 장군이 제주 목호(牧胡)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개경으로 돌아가다가 무주군의 적상산에 머물게 되었는데 길을 가로막는 바위를 칼로 쪼개 길을 내었다는 인물 전설이자, 최영 장군이 장도로 쪼갠 바위라 하여 ‘장도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암석 유래 전설이다. 또한 최영 장군이 적상산의 지세가 천혜의 요새임을 알아보고 적상산에 적상산성을 축조하고 안국사를 창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덕유산 국립 공원의 적상산은 한국 100경에 드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산이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면 여인의 붉은 치마폭을 연상시킨다하여 ‘적상(赤裳)’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최영 장군이 축조하도록 건의했다는 무주 적상산성은 1965년 7월 10일 사적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국사는 무주 적상산성 안에 있다.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산성로 330[북창리 산119-1]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문화재 지정 일시 1965년 7월 10일, 2021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에 있는 백제 시대 산성.
개설
무주 적상산성(茂朱赤裳山城)의 중요성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방어 시설인 산성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부각되었다. 전라도 동부 내륙 지역의 주요 방어 시설로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광해군(光海君) 당시 후금(後金)이 강성해짐에 따라 국방 시설의 점검과 정비,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보존 문제가 논의되면서 산성의 정비가 본격화되었다. 즉, 묘향산(妙香山)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더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물색되었는데, 적지로 무주 적상산성이 지목된 것이다.
이에 따라 1614년(광해군 6)에 무주 적상산성 안에 실록각이 창건되었고, 1618년(광해군 10)에는 새로 편찬된 『선조실록(宣祖實錄)』이 처음으로 봉안되었다. 이와 함께 산성의 방어를 위한 조치 등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1632년(인조 10)에 작성된 『무주현 적상산성 조진 성책(茂朱縣赤裳山城條陳成冊)』[진성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주 현감 김수창(金壽昌)이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무주현 적상산성 조진 성책』에는 산성의 규모와 4대문 현황, 가사형지(家舍形止), 수성 제도(守城制度), 군량(軍糧)과 군기(軍器)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후 1634년(인조 12)에는 묘향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이 이안(移安)되었다. 그런데 1636년(인조 14)에 발발한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해 사고를 비롯한 산성의 방어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었다. 3년 후인 1639년(인조 17)에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주를 비롯한 인근 7읍을 적상산성에 영속시켜 산성을 수축할 것과 각성 대사(覺性大師)를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성중에 상주시킬 것을 계청하였고, 임금이 이에 따랐다. 1641년(인조 19)에는 사각 옆에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였고,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함으로써 명실공히 선사 양각(璿史兩閣)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645년(인조 23)에 승병들의 숙소 문제로 호국사(護國寺)가 창건되었다. 1674년(현종 15)에 무주현(茂朱縣)이 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되면서 현감이 도호부사 겸 수성장(都護府使兼守城將)으로 위상이 높아졌으며, 1703년(숙종 29)에는 토포사(討捕使)까지 겸임하게 되어 실질적인 독진관(獨鎭管)이 되었다.
건립 경위
무주 적상산성의 축성 시기에 관해서는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로 정리되어 왔다. 그것은 고려 말 장군 최영(崔塋)의 축성 건의와 조선 초기 성곽 정비에 따라 체찰사(體察使) 최윤덕(崔潤德)이 반드시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하는 등 주요 국방 시설로 거론된 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옛 문헌에 따르면, 최소한 고려 중엽 거란의 제2차 침입[1010년] 이전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시대적 정황과 축성 방식 등을 볼 때 읍성(邑城)이 허술하였던 백제 시대 주계현(朱溪縣)의 방어 시설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멸망 후 통일 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방치되었으나, 고려 중기 이후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따라 인근의 여러 고을 백성이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다.
위치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1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무주군 적상면의 중심부로서 북창리와 포내리, 괴목리, 사천리 등 4개 리에 걸쳐 있는 적상산(赤裳山) 정상부에 자리한다. 적상호에서 산성로를 따라 800m 가다가 우측의 안국사(安國寺) 방면 산성로를 따라 900m 이동하면 무주 적상산성이 나온다.
형태
적상산의 정상부에 형성된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 절벽을 이용해서 석성(石城)을 쌓은 대표적인 방어 산성이다. 전장은 8,143m, 면적은 21만 4976㎡이다.
현황
무주 적상산성 안에는 안국사가 이건(移建)되어 있고, 적상산 사고가 복원되었으며, 인근에 무주 양수 발전소 상부 댐과 전망대 등이 있다. 1965년 7월 10일 사적 제14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무주 적상산성은 삼국 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 지대에 축성되어 한때 방치되기도 하였으나, 고려 시대에는 국란이 있을 때마다 인근 백성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 조선 시대에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는 요지가 되었다. 1910년(순종 3) 국권 피탈 이후 사고가 폐지되고 그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방치되었으나, 현재는 성벽 일부가 보존되었고 그 유지가 남아 있다.
적상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찰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화상이 지었다고 전한다. 광해군6년(1614) 적상산성 내에 사각이 설치되고, 인조 19년(1641)에 선운각이 설치되어 적상산 사고로 조선왕조실록과 왕의 족보인 선원록이 봉안되었다. 이때 사고를 방비하기 위하여 호국사를 지었으며, 안국사는 그 전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호국사와 더불어 이 사각을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안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설 때문에 이 사찰은 호국사지의 위치로 옮겨져 안국사가 호국사지에 있다. 전각 15여 개로 1995년 이건, 중창되었고 산 정상에 산정호수가 조성되어 있다. 가을철 단풍이 절경이며, 산 정상까지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할 수 있다. 인근에는 무주리조트와 라제통문 구천동 계곡이 있다. 주요문화재는 영산회상괘불(보물)과, 유형문화재인 극락전 , 호국사비, 사적 적상산성, 기념물 사고 등이 있으며, 세계의 불상을 수집하여 모신 성보박물관이 있다.
청하루
노을하
청하루(淸霞樓)
안국사 영산회괘불탱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인데,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길이 10.75m, 폭 7.2m 크기의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다보여래, 문수, 보현보살이 있고, 왼쪽에는 아미타불, 관음,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모니는 화면 중앙에 서 있는데 이목구비는 큼직큼직하며 건장하고 각진어깨, 노출된 가슴, 유난히 길게 늘어진 팔, 짧아 보이는 하체를 지녔으며 이렇게 크고 건장한 신체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듯하다. 인다. 녹색과 주황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회색, 분홍 등 중간색을 넣어 은은한 분위기를 나타내며 구름, 연꽃, 단청문양 등으로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의겸 등 여러 승려 화가들이 그린 이 그림은 본존불을 강조하여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정조 16년(1792), 순조 9년(1809)에 뒷벽을 새단장한 기록이 있어 승려화가인 의겸이 활약한 영조 6년(1730)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국사 극락전의 괘불 탱화/조선시대 영조때 의겸과 천신 등이 그림
첫댓글 와~자세한 문헌 설명까지 곁들여 사진을 보니 문화유산답사를 한거 같네요 솔향기님의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그야말로 고대로 거슬러 올라 역사 탐방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못 보아 아쉽지만, 그렇기에 다음에 또 가 볼 기대를 가집니다.
향기나는솔향기님~♡
마치역사기행을
한듯하네요~
볼수록예사롭지않은
인품을지닌
멋진여인이느껴지네요~^^
이번산행은지대로
우리스퇄이였죠~~~ㅎ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지닌 캔디님이야말로 멋진 여인입니다. “달려보자 너른 들판, 날아보자 푸른 하늘, 완주하자 백두 대간, 네 이름은, 네 이름은 캔디~~!!”
우리 스퇄을 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