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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16세기 스페인이 명나라를 침공했다면? | 토론게시판 2005.09.0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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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가소로운 일이겠지만 16세기 말에 그런 공식적인 계획이 몇차례 있었습니다. 귀족과 성직자들이 쌍쌍히 모여앉아 중국을 정복하자고 떠들던 세비야 회의의 대화록을 보면 그 땅을 정복하고 콩키스타도르 귀족의 목양지를 넓힌다던지...연옥과 지옥에 빠진 중국 백성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떠드는 도미니카 수사들 등...
이 작자들은 서양인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워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던 일본에 대해서는 주워들은게 있어서 1580년 무렵이 되면 이미 경외심 비슷한 것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회 동방교구의 감독자인 바리냐노나 프로이스 등이 본국에 보낸 보고를 통하여 일본의 지도자들이 스페인 본국의 필리페 대왕처럼 수만에서 수십만의 정예병력을 동원할 능력을 가졌다는 점. 무와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식으로 인식하였기에 행여 일본을 정복한다는 시도는 꿈도 꾸지 않았죠. 1580년 포르투갈을 합병한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일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590년대에 스페인 선단이 일본에 표류했을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음모죄로 걸어 모두 처형시켜 버렸고 이 소식은 필리핀과 멕시코를 경유하여 스페인 본국에 전해집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항의조차 포기했습니다. 행여 무역관계에 먹구름이 낄까 해서였죠. 1630년대에 일본의 쇼군이던 토쿠가와 이에미쓰가 포루투갈과 스페인에 대한 쇄국을 단행하자 스페인은 포루투갈의 주권국 자격으로 이의 재고를 간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이에 대한 이에미쓰의 회답은 사절단 전원의 처형이었죠. 스페인은 분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일본과의 통상을 포기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스페인은 일본의 쨉이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일본 해적만 하더라도 남중국해에서 포루투갈과 스페인 상선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던 처지에 어찌 일본 본토의 정규군과 상대할 마음을 언감생심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즈텍이나 잉카와는 달리 거기에는 고도의 정밀한 관료-재정-군사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스페인은 의외로 일본에 대해서와는 달리 중국을 상당히 얕잡아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지리적으로 중국이 얼마나 거대한 제국인지를 스페인은 알지 못했습니다. 16세기에 스페인에 의해 작성된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일본이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고, 중국은 일본보다 약간 큰 정도로 묘사됩니다. 이 지리지식은 17세기가 되어야 수정됩니다. 두번째로, 중국의 서양인에 대한 내륙 봉금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자세한 내막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예수회 창립 멤버였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1549년 중국 동남부의 한 섬에 상륙합니다. 이미 성공적인 선교사업을 일본에서 행한 그였기에 미래에의 자신감은 충만했죠. 그러나 중국인들은 특유의 무관심으로 이제나 저제나 본토로 들어갈 생각만 하던 사비에르를 그곳에서 병들어 죽게 했습니다. 그 후 중국의 철저한 방해로 예수회는 16세기의 마지막 십년에 가서야 마테오 리치라는 선교사를 본토로 진입시키는데 성공하죠. 스페인의 중국 지식은 그가 유럽에 보내던 보고문에 이르러서야 충실해 집니다.
마테오 리치의 보고는 어떤 의문점을 스페인 정부에 제시합니다. 마테오 리치에 의하면 중국이라는 나라는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나라로 지목한 <키타이>를 가리킬지도 모른다는 거였죠. 마테오 리치는 북경 근처의 한 페허를 방문하고 그곳이 과거 몽고의 군주들이 살던 도읍지였다는 말을 듣고 동방견문록에 자주 등장하던 쿠빌라이가 키타이에 세운 도읍지 칸발릭(따뚜)을 연상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중국 동남부의 거대 항구들도 마르코폴로가 말한 몽고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망했다는 키타이의 구 도읍지일 가능성이 커 보였습니다.
<설마 중국이 마르코폴로가 방문했던 위대한 대칸의 나라 키타이란 말인가? 10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와 100만의 군대를 보유한 나라라니...도저히 믿을 수 없다> 스페인에 만연하던 중국 멸시가 이런 회의를 더욱 부추깁니다. 중국은 한동안 아즈텍이나 잉카처럼 스페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정복 가능한 땅으로 간주되던 못난이들의 나라로 치부되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예수회는 고에즈라는 청년 수사를 인도로 파견하죠. 비밀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말이죠. 무굴제국의 황제 악바르의 환대를 받은 고에즈는 아랍인으로 변신한 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서투르키스탄으로 나아갑니다. 그 곳에서는 해마다 <지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나라인 키타이>로 떠나는 대상들의 행렬이 있었고 고에즈는 거기에 합류하죠. 고에즈는 온갖 고초를 다 겪습니다. 사기꾼 대상들에게 도둑맞고, 살해당할 뻔 했으며, 산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이슬람 신자들의 눈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그의 에너지를 차츰 앗아갑니다.
1602년 무렵 고에즈는 드디어 동투르키스탄을 거쳐 지금의 가욕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중국 명나라의 서쪽 변경이었죠. 그곳에 도착한 고에즈는 자기의 사명이 끝났음을 알게 됩니다. 아랍 대상들이 키타이로 부른 그 땅은 바로 마테오 리치가 거주하는 나라 중국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마테오 리치에 전해야 했지만 1년에 걸친 사막여행과 이슬람 신자들과의 알력이 이미 그를 반죽음으로 만들었기에 내지 여행은 불가능했죠. 너무나 쇠약해져 보행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그는 혼신의 힘으로 북경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마테오 리치에 편지를 보냅니다. 마테오 리치의 중국명인 리마두(利馬竇)라는 이름도 알지 못했고, 마테오 리치가 거처하는 주소도 알지 못한 채 보내진 편지였기에 수신자에게 전달될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마테오 리치는 이 편지를 반년만에 받습니다. 놀란 리치는 동료 수사를 가욕관으로 급히 파견하죠.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고에즈는 절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수사님. 저는 확인했습니다. 키타이는 바로 중국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최후의 의지로 생명을 이어가던 고에즈의 몸에 영혼이 머무를 이유는 더이상 없어졌습니다. 온 몸이 해골처럼 변한 채 반년 이상을 버텨오던 고에즈는 북경에서 파견된 수사와 만난 며칠 후에 숨을 거둡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한 채 말입니다. 이 놀라운 뉴스가 스페인에 전해졌을 때 유럽 전체가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중국이 바로 세계 최강의 제국인 키타이였다> 유럽의 중국관은 크게 바뀌어 갔고 유럽인들은 중국으로 속속 상인과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합니다. <중국문명의 유럽 침투>라 불리운 현상이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을 풍미합니다. 이런 사실과 더불어 이미 유럽에서조차 쇠퇴하기 시작한 스페인은 두번 다시 중국 정복과 같은 시도는 하지 못하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중국사정에 아직 무지했던 16세기의 스페인이 동방 원정군을 소집하여 중국에 원정갔다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펠리페 2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세계 최강국인 스페인과 일본이 전 세계를 나눠먹자고 제안했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냈다는데..(일본 극우파들이 만든 교과서에 들어있는 내용) 안 그래도 도요토미가 중국을 정복하려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니 그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스페인군하고도 싸울뻔 했습니다.
출처-다음카페 역사 속의 전쟁사
[펌] 일본 種子島에 전래된 鐵砲(조총) | 아시아* 태평양사 2005.10.0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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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아시아 3國의 命運을 가르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鐵砲는 일본 열도에선 100여 년간 지속된 戰國시대를 마감시킨 촉매제가 되었다. 또한 한반도는
鐵砲의 위력을 과신한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도발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朝·明·倭의 3國이 7년에 걸쳐 피투성이의 소모전을 벌이는 틈을 이용,
滿洲에서 흥기한 女眞族은 중국 대륙의 征服王朝(淸)로 떠올랐다.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鐵砲의 섬―다네가시마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철포가 전래된 門倉岬(가도쿠라미사키). 아래쪽 해변(마에노하마)에「南蠻船」이 표착했다.>
지난 12월21일 오전, 필자는 다네가시마(種子島)의 니시노오모테(西之表)港에 상륙했다. 다네가시마라면 1543년 포르투갈의 상인들에 의해 신무기 鐵砲(철포·조총)가 전래되었던 섬이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일본에서 양산된 철포에 의해 엄청난 파문과 변화를 겪는다.
다네가시마는 규슈(九州) 남단 오스미(大隅) 반도 동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동서는 4~10km에 불과한데 남북은 72km이나 된다. 면적은 475km2. 제주도보다는 작지만 거제도보다 큰 섬이다. 현재의 인구는 약 3만5000명.
니시노오모테市의 중심가 中目에는 철포박물관이 있다. 뱃머리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이 박물관에는 포르투갈 사람이 전래한 철포와 그것을 모델로 다네가시마에서 제작된 種子島銃 제1호 등 90여 정의 화승총이 전시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박물관의 건물이 철포를 싣고 입항한 「南蠻船(남만선)」의 모습처럼 지어진 점이다.
철포박물관을 둘러보고 이와사키 호텔 전용버스에 올라 58번 국도를 타고 南進했다. 필자는 이와사키호텔그룹의 홍보행사에 초청을 받아 2004년 12월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간 가고시마 공항-이부스키市-야쿠시마-다네가시마-가고시마를 여행했다.
니시노오모테港에서 해변길을 따라 10여 리 내려오면 요키노(能野) 포구와 스미요시(住吉) 소학교가 보인다. 이 소학교는 철포 전래 당시 島主의 居館(거관)이 있었던 자리다. 버스는 곧 나카타네초(中種子町)로 접어들어 東進했다. 도로변으로 조그마한 種子島공항이 보인다. 이제 호텔버스는 다네가시마의 동쪽 해변길을 들어서 南進했다. 곧 미나미타네초(南種子町)이다. 미나미타네초의 동남단 다케자키(竹崎) 해안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우주센터 NASDA가 자리 잡고 있다. NASDA에서는 1966년 건설 이래 매년 2~3회씩 우주 로켓을 발사해 왔다. 이곳 우주과학기술관에는 실물 크기의 로켓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우주실험 시뮬레이션도 체험할 수 있다.
NASDA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3km쯤 西進, 種子島 이와사키호텔에 도착했다. 여기서 필자는 일행과 잠시 헤어져 서남단에 위치한 가도쿠라미사키(門倉岬)로 직행했다. 가도쿠라미사키는 철포를 전래한 남만선이 표착한 해변(마에노하마)을 조망할 수 있는 곶(岬·미사키)이다. 이곳 약 100m 절벽 위에는 鐵砲傳來紀功碑(철포전래기공비)가 세워져 있다.
남만선의 漂着
1543년 8월25일 未明, 정체불명의 선박 한 척이 다네가시마의 서남단 가도쿠라岬에 표착했다. 당시의 상황은 16대 島主 히사토키(久時)의 지시에 따라 승려 南浦文之가 쓴 「鐵砲記」(1606)에 기술되어 있다.
정체불명의 괴선박 출현-. 이 소식은 다네가시마의 治所가 위치한 니시노오모테(西之表)로 급보되었다. 이때 다네가시마의 치안책임자는 니시무라(西村直部丞)였다.
당시, 다네가시마는 그렇지 않아도 비상사태에 들어가 있었다. 불과 5개월 전, 오스미(大隅) 반도에 웅거한 네지메氏의 기습공격을 받아 다네가시마內 城의 함락으로 島主가 할복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島主 할복의 위기는 야쿠시마(屋久島)를 네지메氏에게 할양함으로써 겨우 해소되었다. 그러나 다네가 島民들은 네지메氏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야쿠시마의 면적은 500km2로서 다네가시마보다 오히려 조금 크다. 1993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필자는 다네가시마 상륙 직전에 야쿠시마를 들러 하루를 묵었다. 야쿠시마에는 규슈 최고봉인 표고 1935m의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를 중심으로 1000m 이상의 산이 대여섯 개나 솟아 있고, 그 속에 수령 1000년 이상의 삼나무, 즉 야쿠스기(屋久衫)가 우거져 있다.
야쿠스기는 목조건물의 지붕을 이을 때 사용되는 최고급 목재로 이름 높다. 야쿠스기는 유달리 樹脂(수지) 성분이 많아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다고 한다. 다네가시마 島民들에게는 야쿠시마는 꼭 탈환해야만 할 보물섬이었던 것이다.
치안책임자 니시무라는 니시노오모테로부터 130여 리의 길을 달려 가도쿠라岬의 둔치에 도착했다. 마침, 5명을 태운 보트가 대선을 떠나 해변 가까이로 접근하고 있었다. 니시무라는 敵은 아니라고 직감했다.
보트는 파도에 떠밀려 모래밭에 닿았다. 보트를 탄 5人은 조심스럽게 해안을 살피고 있었다. 승마용 채찍 하나만 지니고 있던 니시무라는 천천히 다가가면서 상륙하도록 손짓했다. 경계심을 풀도록 미소까지 지었다.
가도쿠라岬 해안으로 표착했던 괴선박은 南·東중국海를 무대로 밀무역에 종사하던 安徽省(안휘성) 출신의 「대두목」 王直의 소유였다. 王直의 배가 마에노하마(前之浜)에 닻을 내린 것은 바로 네지메 전쟁의 굴욕으로부터 아직 5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먼저 王直이 모래사장에 뛰어내렸다. 이상한 모습을 한 3명이 뒤따랐다. 니시무라의 눈길은 이 3명에게 못박혔다. 복장, 머리색, 눈 색깔, 높은 코, 이런 것들은 니시무라의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王直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시하며 니시무라에게 접근했다. 이어 승려를 만나고 싶다는 몸짓을 했다. 당시 일본에서 漢文으로 필담을 나눌 수 있었던 지식인은 대개 승려들이었다.
그러나 니시무라는 漢文을 아는 사무라이였다. 그는 모래바닥에 채찍으로 다음과 같이 써 보였다.
「船中之客不知何國人也 何模形之異哉(배 안의 손님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왜 모습과 형태가 이상한 것인가)」
이 글자 하나하나를 살피던 王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그는 니시무라의 채찍을 빌려 다음과 같은 답변을 모래 위에 썼다.
「此是西南蠻種之賈胡也 非可怪矣(이들은 서남방 미개국 종족의 상인들로서 별로 괴이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船主 王直의 정체
그렇다면 王直이란 이름의 明國人은 어떤 존재였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王直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倭寇(왜구)의 존재부터 추적해야 할 것 같다.
明國 기록에 의하면 왜구의 출신지로는 薩摩(사쓰마)·豊後(붕고)·長州(죠슈)가 주류를 이뤘고, 이어 大隅(오스미)·筑後(치쿠고)·博多(하카타)·日向(휴가)·種子島 등이었다. 죠슈 한 곳을 제외하면 일곱 곳 모두가 규슈에 있다. 이렇게 규슈는 왜구의 소굴이었다.
이런 왜구들이 중국의 東海岸 지역을 침입할 때 앞잡이 노릇을 한 明國人들은 「王直·抗虎(항호)·陳東(진동)의 패거리」로 기록되어 있다. 王直의 패거리는 밀무역에 종사하면서 때로는 왜구에게 협조했던 것이다.
明國 정부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국비의 태반을 투입, 해안경비를 강화했다. 그런 해안 요새 중 가장 유명했던 곳이 金山衛(금산위)였다. 이 밖에도 昌國衛(창국위)·太昌衛(태창위) 등 해안 요새가 많았다. 이렇게 단속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王直 등이 明國 연안에 기지를 유지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었다. 王直 등은 규슈 서쪽 해안에 떠 있는 하라도(平戶島)에 기지를 두려고 했던 것 같다.
1543년 8월 초, 王直은 그가 보유한 船團(선단)을 이끌고 廣東을 출항했다. 배는 길이 45m에 달하는 대형선이었다. 그들은 廣州灣 입구에 떠 있는 上川島에 기항했다. 王直은 上川島에서 일본行의 선편을 기다리고 있던 8명의 포르투갈人을 승선시켰다. 王直은 자기가 탄 「南蠻船」에 포르투갈人 3명을 태웠다. 나머지 5명은 다른 배를 탔다.
이 船團은 해적과의 전투에 대비, 뱃전이 높았다. 3매의 돛을 단 이외에 삼각 및 사각 깃발 20여 매를 펄럭이며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의 「西勢東漸(서세동점)」은 포르투갈이 선도했다. 1487년부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과 동해안의 대부분을 장악한 데 이어 아라비아로부터 페르시아의 일부, 인도의 서해안, 말라카해협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15세기 마지막 10년간에는 明나라의 마카오를 거점으로 삼았다. 포르투갈人들은 양자강 하구 교통의 요지 寧波(영파)까지 진출했다. 당시 중국에 있던 포르투갈 거류민이 1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王直으로서는 이런 포르투갈 해상세력과의 친선을 위해 선편을 제공했던 것 같다.
王直의 선단은 8월10일경 廣州灣 입구의 上川島를 떠났다. 그 이틀 후 투르크(터키) 해적의 습격을 받아 王直의 선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王直이 승선한 배는 해적의 공격을 겨우 뿌리친 직후에 이번에는 태풍의 直擊(직격)을 받았다.
王直의 남만선은 류규(琉球·오키나와: 당시 류규王國은 독립국이었음)열도로 북상하면서 섬마다 들러 기항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부되었다. 上川島 출항 10일째인 8월25일, 王直의 남만선은 다네가시마의 가도쿠라岬 앞바다에 겨우 닻을 내렸던 것이다.
가도쿠라岬의 하얀 백사장에서 니시무라와 王直의 필담이 계속되었다. 기괴한 세 사람이 南蠻國(남만국)의 상인이라는 점, 배는 태풍으로 표류를 계속하다가 겨우 이 섬에 표착했다는 점 등이 파악되었다. 배는 赤尾木(아코우기: 지금의 니시노오모테)港으로 회항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노를 대부분 잃어버린데다 서풍까지 불고 있었기 때문에 自力 회항은 무리였다. 이 대형 남만선을 曳船(예선)하기 위해서는 소형선 10척이 필요했다.
王直과 충분한 타협을 한 니시무라는 서둘러 말을 달렸다. 赤尾木까지 52km의 길이었다. 어떻든 조난선 구조 여부는 극히 중대한 사항이었다. 약 3시간 동안 말을 달린 니시무라는 島主 토키타카(時堯)에게 상황을 보고, 예선의 허락을 얻었다.
이번에는 니시무라가 예선의 책임자로 命을 받았다. 그는 급히 선박 몇 척을 수배하여 赤尾木을 출항, 인근 포구인 能野(요키노)·住吉(스미요시)·島間에도 들러 배를 조달했다. 12척의 예선대가 남만선의 표착 현장에 도착한 것은 하룻밤이 지난 8월26일이었다.
예선들이 明國船에 밧줄을 걸고, 다시 예선끼리 엮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날씨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가을철이라 철야의 예선이 개시되었다. 별빛이 밝았다. 8월27일 아침, 남만선은 赤尾木에 입항했다. 항내로 들어와 계류된 남만선에 니시무라가 먼저 승선한 데 이어 준수한 모습의 소년이 승선했다. 이 소년이 다네가시마의 島主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남만선에 탄 110여 명은 비로소 「살았다」고 실감했다고 한다.
사격시범을 보인 포르투갈人
아코우기(赤尾木)에 입항한 明國船은 島民들에게 「南蠻船」이라고 불렸다. 연일 해변에는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남만선은 돛줄이 끊어지고, 노가 부러지고, 선창도 크게 손상을 입어 수리하자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승선자 110명은 항만 인근 慈遠寺(시온지)의 宿坊(숙방)에 출항 때까지 기거하게 되었다.
慈遠寺는 島主인 種子島氏의 祈願寺(기원사)였다. 숙방은 36坊을 구비, 승선자 전원을 수용하기에 충분했다. 이 숙방엔 전년부터 사카이(堺: 지금의 오사카)의 화가 株幸(주행: 주코우)와 日向(휴가) 禪寺의 주지 住乘院(주승원)이라는 학승도 머물고 있었다. 住乘院은 중국의 구어체인 白話도 구사했다. 株幸은 남만선과 남만인을 寫生(사생)하는가 하면 그들의 진귀한 생활 및 일용품에 관해 기록하기도 했다. 승선자 중에는 南蠻語를 구사하는 玉城(타마구스쿠)란 이름의 琉球(유구) 여성도 있었다. 島主 토키타카는 住乘院의 통역으로 王直과, 玉城의 통역으로 남만인과 매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토키타카는 남만인이 가지고 있던 筒狀(통상)의 철봉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타마구스쿠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남만인 하나가 웃으면서 그 철봉을 토키타카에게 건넸다. 남만인은 둥근 납구슬과 검은 가루를 보이면서 설명했지만, 타마구스쿠의 통역만으로는 토키타카의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남만인은 그 둥근 구슬이 날아가 사슴이나 산돼지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남만인은 實演(실연)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토키타카는 家老, 니시무라, 株幸, 住乘院 등을 거느리고 慈遠寺 뒤편 언덕에 올라갔다.
남만인은 들판의 좀 높은 곳에 말뚝을 세우고 그 위에 큼직한 조개껍질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철봉에다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집어넣은 다음, 불 붙인 끈을 끼웠다.
사격거리는 50보였다. 남만인은 철봉의 한쪽에 오른 뺨을 대고 왼눈을 감은 채 조개껍질을 겨냥했다. 다음 순간, 철봉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과 굉음…. 모두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눈들은 발사된 구슬의 방향을 쫓았다. 표적의 조개껍질이 산산히 부숴졌다. 토키타카의 눈빛이 홀린 듯 반짝거렸다. 남만인이라고 얼마쯤 멸시하던 마음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일본에 등장한 최초의 철포는 가마쿠라 막부 때 몽골군이 침입했을 당시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것은 이름만 철포일뿐 화약을 가득 채운 鐵球(철구)였다. 그후 중국계의 소총도 전해졌으나 이것은 대포를 소형화한 것에 불과하여 명중률이 극히 낮았다. 그러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한 철포는 명중률이나 사정거리, 파괴력에 있어 중국제 무기를 훨씬 능가했다.
鐵砲에 매료된 젊은 島主
토키타카는 남만인으로부터 빌린 철포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무기의 기능과 조작법을 열심히 배웠다. 사격의 비법에 대해 남만인은 성의껏 가르쳤다. 불의의 사고를 우려하여 소년 島主에게 新무기 조작을 만류하던 家臣들도 이제는 호기심 이상의 정열에 휩싸였다.
남만인의 입항 12일째인 9월9일, 토키타카는 철포 試射(시사)를 자원했다. 그동안 그는 사격 예비훈련에 몰두했었다. 장소는 역시 春日山으로 이어지는 언덕. 한복판에 검은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판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거총에 이어 조준. 家臣들뿐만 아니라 남만인들도 숨을 죽였다. 토키타카는 방아쇠를 가만히 뒤로 당겼다. 발사와 동시에 굉음…. 표적판은 두 개로 갈라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토키타카는 그동안 궁술을 연마해 왔지만, 아직은 미숙한 상태였다. 그런데 철포는 달랐다. 단 한 방에 표적판이 두 조각 나버리는 데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철포야말로 야쿠시마 탈환을 몽매에도 잊지 못했던 그에게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던 것이다.
토키타카는 남만인에게 철포를 양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남만인도 호의적이었다. 토키타카는 家臣들과 상의해 총값으로 永樂錢(영락전) 2000疋(필)을 지불했다고 한다. 永樂錢이라면 明의 永樂帝 때 주조된 돈으로서 오늘날의 달러화처럼 국제적 신용을 누렸다. 당시 일본에서는 永樂錢을 수입하여 국내 통화로 사용했다.
영락전 2000필을 오늘날의 엔화로 환산하면 1억 엔(韓貨 10억원)에 상당한다. 거금의 총값을 받은 남만인은 토키타카에게 철포 1정을 더 증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총 하나의 값이 한화 5억원에 달했던 셈이다.
生殺與奪權(생살여탈권)을 가진 島主가 표류인들이 소지한 조총 하나를 매입하면서 과연 그런 거금을 지불했겠는가―최근 일본의 연구자들도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포르투갈人들이 타고 온 남만선의 수리비와 慈遠寺에서의 숙박비용은 어떻게 계산되었는가―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種子島銃의 완성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의 국산화를 위해 섬의 全기능이 집중되었다. 원래부터 다네가시마는 砂鐵(사철) 산지가 해안을 따라 널리 분포되어 있어 제철업이 발달했던 섬이다. 제작 책임은 刀匠(도장)이었던 야이타 킨베(八板金兵衛)에게 떨어졌다.
철포 제작은 모루(대장간에서 사용하는 쇠 받침대)부터가 연구 대상이었다. 일본도를 만들어 온 경험, 感, 솜씨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異質의 세계였다. 제1의 난관은 80cm 길이의 筒(통) 제작이었다. 결국 짧은 筒을 깎고, 그것을 용접하여 하나로 붙였다.
제2의 난관은 銃身의 筒底(통저)를 수나사와 암나사로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암나사 깎는 법을 알지 못해 그냥 붙이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이런 초보단계의 철포라도 만들 수 있었던 데는 킨베의 딸 와카사(若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16세였던 와카사는 아버지의 기술적 난관을 해결하려고 포르투갈人 牟良叔舍에게 몸을 바쳤다. 현재, 니시노오모테市의 구모노시로(雲之城) 묘지에는 「와카사 忠孝碑」가 세워져 있다.
種子島銃은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이것은 1544년 1월4일에 시작된 야쿠시마 탈환작전에서 기대 이상의 戰果를 올렸다. 그렇다면 왜 다네가시마 島民들이 야쿠시마를 탈환하려 했는지 잠시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야쿠시마 탈환 작전
야쿠시마는 다네가시마(種子島) 서남쪽에 위치한 섬이다. 섬의 크기는 야쿠시마가 種子島보다 오히려 조금 크지만, 인구는 種子島가 야쿠시마보다 2배 이상 많다. 種子島의 13대 島主 시게토키(惠時)에게서 야쿠시마를 탈취했던 네지메 타카시게(寢尊重)는 규슈의 남단 오스미 반도의 領主이다. 시게토키의 딸은 네지메 타카시게의 부인이기도 하다.
당시 규슈의 남부지역에선 사쓰마의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가 최대 세력이기는 했지만, 肝付씨·寢씨·本田씨 등이 反시마즈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규슈 북부지역의 최강자인 豊後(붕고)의 大友宗麟(오토모 소린)은 사쓰마 정벌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네지메씨는 種子島의 시게토키에게 反시마즈 연합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시마즈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種子島의 시게토키로서는 反시마즈 연합에 가담하기 어려웠다.
1543년 3월23일, 네지메氏는 兵 300을 이끌고 種子島의 북단 우라다(浦田)에 기습 상륙했다. 다음날에는 種子島 측에게 방어전의 틈도 주지 않고 일거에 內城으로 진공, 점령해 버렸다.
島主 시게토키는 배를 타고 야쿠시마로 도주했다. 뒤처리는 그의 장남 토키타카(堯時)가 맡았다. 14대 島主가 된 토키타카는 네지메씨에게 야쿠시마를 할양해 주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따라서 토키타카로서 1544년 1월의 야쿠시마 진공은 복수전이었다. 토키타카 軍은 야쿠시마에 기습 상륙하여 나카다-요시다-미야노우라-구스카와로 진격, 야쿠시마에서 네지메氏 세력을 몰아냈다. 이때 種子島 조총은 그 발사음만으로도 네지메 세력을 압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완성도가 낮은 鳥銃이었던 만큼 총저에 화약의 찌꺼기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導火孔(도화공)이 잘 막혔고, 連射할 때는 화약재가 타다 남아 불발 또는 폭발의 위험까지 있었다. 결함투성이의 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철포의 위력은 곧장 주목을 받아 그 일부가 사쓰마(가고시마)로 전파되었다.
남만인 중의 하나인 「핀트」는 豊後의 영주(大名)인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에게 초대받기도 했다. 「핀트」가 種子島로 歸島할 무렵에 남만선은 수리를 끝내고 중국 양자강 하구의 寧波를 향해 닻을 올렸다.
種子島에서 돌아온 핀트 등 3명은 곧 寧波에 거주하던 포르투갈人들 사이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지금까지 상품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철포가 예상 이상으로 환영받았다는 것, 南蠻상품이라면 무엇이든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寧波의 포르투갈人들은 種子島를 다시 방문하기로 작정했다. 이번에는 復航船(복항선)을 포함, 16척의 대선단이 조직되어 種子島로 출항했다. 그러나 그중 15척은 풍랑 때문에 실종되고 1척만 種子島의 能野(요키노)에 입항했다. 이 배에는 남만인과 결혼했던 八板金兵衛의 딸 와카사(若狹·약협)도 타고 있었다.
전년에 토키타카가 입수했던 총의 탄환은 13g짜리였지만, 이번에 남만인들이 상품으로 가져온 총의 탄환은 30g짜리였다. 이번의 승선자 중에는 철포 제작기술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술자로부터 암나사를 깎는 방법, 短冊型(단책형)의 細長한 철판을 비스듬히 말아서 筒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드디어 완전한 일본판 철포가 제작되었다.
亂世를 살아가는 지혜
철포가 다네가시마에 전래될 무렵, 일본은 각지에 군웅이 할거한 戰國시대였다. 다네가시마의 島主 토키타카는 철포 제작기술이나 화약 調合法을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포르투갈人에게 입수한 철포를 규슈의 最强 사쓰마의 시마즈 다카히사에게 헌납했다. 이것이 난세에서 살아남는 小영주의 지혜였다.
사쓰마의 다카히사는 바로 이 철포를 인근의 加治木城 공격 때 사용, 그 우수성을 입증했다. 雄藩(웅번) 시마즈氏의 客臣으로서의 다네가시마氏가 明治維新 때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토키타카의 선견력·정치력의 교묘함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44년,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포르투갈 철포 2정 중 1정은 당시 僧兵의 지휘자로 이름을 떨치던 기슈 네고로사(紀州 根來寺)의 스노기노보(衫坊)에게 전해졌다. 이로써 네고로도 철포의 명산지가 되었다. 1545년, 다네가시마에 체류하고 있던 사카이의 상인 다치바나야(橘屋又三郞)도 철포의 구조와 제조법 등을 습득한 후 사카이로 돌아왔다. 원래 사카이에는 鑄物師(주물사)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카이는 철포의 양산체제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오미(近江)의 구니토모(國友)촌에도 제조기술이 전해져 철포 명산지가 되었다. 이렇게 사카이, 네고로, 구니모토의 3大 철포 생산지가 형성된 것은 포르투갈 사람이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지 겨우 2~3년 사이의 일이었다.
철포는 차츰 일본 전국으로 유포된다. 그러나 아직은 활의 효용성에 미치지는 못했다.
노부나가의 新전술-연속파상사격
철포의 전략전술적 가치에 눈뜬 일본 최초의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長) 싸움에서 철포대의 운영으로 일본 최강이었던 다케다(武田)씨의 기마부대를 격파했다. 철포의 압도적 위력이 발휘된 결전이었다. 나가시노 싸움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1575년 5월21일,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군은 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가쓰요리의 기마부대와 격돌했다. 전투가 벌어진 나가시노는 미카와 동쪽의 이마가와(今川)·다케다(武田)·오다(織田)·도쿠가와(德川)씨가 인접한 지역이었다.
나가시노城은 원래 이마가와氏 소유였는데,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戰死 후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1572년 「戰國 제1의 武將」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공격을 받고 다케다氏가 소유하게 되었다. 신겐은 계속 공격하여 이에야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는데, 불운하게도 이에야스軍의 소총수에게 저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고 본거지 고슈(甲州)로 회군 중 사망했다.
신겐의 사망 후인 1573년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勝賴)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서쪽 영지의 확대를 위한 공세를 벌였다. 1575년, 가쓰요리는 1만8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시 이에야스의 소유가 된 나가시노城을 공격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 3만8000명의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노부나가 軍은 馬防冊(마방책)으로 진지를 굳힌 나가시노 들판으로 가쓰요리의 기마대를 유인했다. 이때 노부나가는 3000정의 조총으로 무장된 철포대를 3개조로 운용, 연속파상사격으로 가쓰요리의 기마대를 궤멸시켰다.
新무기 철포의 출현으로 이제까지의 전투방식이 일변했다. 교전 양측의 무사가 하나씩 말을 타고 나서 창과 칼로 맞겨루던 싸움은 이제 구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싸우는 일이 없어졌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서로 죽이게 되었다. 이후 戰國武將들은 철포의 조달에 혈안이 되었다.
일본어에서 앞뒤 생각 없이 무턱대고 저지르는 경솔함 또는 무모함을 나타내는 낱말은 無鐵砲(무데뽀)이다. 결국, 鐵砲 없이 전투하는 것은 경솔하거나 무모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다네가시마로부터 철포 제조방식을 전수해 양산체제로 들어간 지역은 사카이(堺)·쿠니토모(國友) 등 近畿지역이었다. 사카이와 쿠니토모를 장악한 노부나가가 新무기 확보에 유리했음은 물론이다.
아시카가 幕府의 마지막 쇼군(將軍)도 추방해 버린 노부나가는 전국통일의 문턱에 섰다. 그런 절정기의 노부나가도 1982년 6월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하루밤을 묵다가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아 토멸되었다. 이를 「혼노지의 變」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下剋上(하극상)의 시대였다.
「혼노지의 變」 발생 10여 일 후 노부나가의 副將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야마사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 軍을 격파하고 최강자로 부상했다. 히데요시는 1585년 關白, 1586년 太政大臣에 임명되고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臣)란 성을 받았다.
그는 1587년 규슈, 1590년 關東·東北지역을 평정해서 전국통일을 달성했다. 일본 전국통일을 이룩하는 오다하라(小田原) 전투 직전에 히데요시는 이미 총병력 30만 명에 鐵砲 수만 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 후 論功行賞(논공행상)으로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당했거나 그 일부를 빼앗긴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또한 恩賞을 받은 다이묘(大名)와 호족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충성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하여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히데요시의 구상이었다. 그 위에 히데요시는 朝鮮·中國·印度를 아우르는 일종의 大아시아제국 건설을 꿈꾸는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었다.
임진왜란 初戰의 승패 결정한 鳥銃
1592년 4월13일 저녁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 1만8000명이 800척의 배에 분승, 부산포에 상륙했다.
4월14일, 고니시軍은 부산진성을 공격, 3시간 만에 함락시켰다. 조선군이 쏜 화살은 맞아도 즉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일본군이 쏜 철포, 즉 鳥銃(조총)을 맞으면 그대로 즉사했다. 처음 보는 조총의 위력 앞에 조선군의 사기는 여지없이 떨어졌다. 4월15일, 東萊城은 공격개시 후 2시간 남짓 만에 함락되었다.
히데요시는 히젠(肥前: 규슈 西岸)의 나고야(名護屋)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고니시의 제1군에 이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제4군 등을 차례로 출정시켰다. 마지막 부대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제8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날은 5월3일. 8개 軍의 총병력은 15만8000명이었다.
고니시의 제1군은 이후에도 無人之境(무인지경)을 가듯 北上했다. 尙州에서 순변사 李鎰(이일)의 부대를 일축한 고니시軍은 이틀 후인 4월27일 천험의 요새 鳥嶺(조령: 새재)를 넘어 都순변사 申砬(신립)이 거느린 3000명과 충주의 彈琴臺(탄금대) 앞 벌판에서 맞붙었다. 다음은 「懲毖錄(징비록)」의 관련 기록이다.
<신립의 군사들은 충주 서쪽 탄금대 앞,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강물 좌우에는 논이 있어 벼가 무성하게 자라고, 또 길길이 잡초가 우거져 사람과 말이 내달리기에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얼마 있다가 왜병이 단월역으로부터 쳐들어왔다. 길을 나누어 진격해 오는데,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적의 한 무리는 산을 넘어 동쪽으로 몰려오고, 또 한 무리는 강을 끼고 달려왔다. 먼지는 자욱하게 하늘을 덮고 총소리는 땅을 울렸다>
신립은 탄금대 앞에서 기마부대를 거느리고 背水陣(배수진)을 쳤다. 그는 고니시의 보병부대를 기마부대로 짓밟을 작정이었다.
<신립은 말을 몰아 적진으로 쳐들어가려고 두 번씩이나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쳐들어갈 수 없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그는 말머리를 돌려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忠州의 敗報가 서울에 전해진 것은 4월28일 저녁. 4월30일 새벽, 宣祖 임금은 피란길에 올랐다. 5월3일, 고니시軍은 서울에 입성했다. 일본軍은 破竹之勢로 북상했고,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鐵砲隊(철포대)였다. 種子島에 철포가 들어온 지 50년. 이때 이미 일본은 鐵砲를 양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기병과 보병(足輕·아시가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철포대를 주력으로 한 사격과 기동의 戰法은 전국시대를 통해 이미 단련되어 있었다.
朝鮮 정부도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鐵砲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590년 3월, 대마도의 島主 소 요시토모(宗義智)가 사신으로 와서 宣祖에게 공작 두 마리와 조총 등을 진상했다. 試射(시사)를 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발사음이 크고 탄환이 200m쯤 날아갔지만, 50m의 지근거리가 아니면 치명상을 가하지 못한다. 더욱이 비 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으면 화약의 調合이 어렵고, 발사까지에 시간이 너무 소요된다는 약점이 있다. 반면 조선의 활은 200m 상거한 적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으며 20~30발의 화살을 계속 날릴 수 있다.
柳成龍(유성룡)의 「懲毖錄(징비록)」에 따르면 요시토모가 宣祖에게 진상한 철포는 그 후 軍器司(군기사) 창고에 처박혀 버렸다. 일본의 철포는 전래 50년 만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병기로 발전해 있었다. 이 철포가 「鳥銃(조총)」이라고 불린 것은 날아다니는 새도 명중시킬 수 있다고 하여 명명된 별칭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에야 조선 정부도 훈련도감을 설치, 날쌘 병졸 수천 명을 뽑아 조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李舜臣의 함대가 일본 水軍을 압도한 까닭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인 1592년, 朝鮮 육군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했으나 李舜臣(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水軍은 일본 水軍에게 옥포해전(5월2일)에서부터 부산포해전(9월1일)에 이르기까지 10戰10勝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군의 개인 화기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것은 물론 조총이었다. 일본 水軍이 언제부터 조총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578년의 이시야마(石山) 전투 때부터 해전에서도 조총 사용이 본격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2차 이시야마 전투 때 오다 노부나가 휘하 구키 요시타가(九鬼嘉隆)의 水軍이 사용했다는 大鐵砲(대철포: 대형 조총)는 주목되는 병기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 水軍의 大鐵砲도 조선 水軍이 보유한 銃筒(총통: 대포)의 위력이나 사정거리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海戰에서는 육지에서와는 달리 조총의 명중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선 水軍의 승리에는 물론 李舜臣 장군의 탁월한 전략·전술에 힘입은 바 크지만, 병기와 軍船의 우수성도 빼놓을 수 없다.
壬亂 시기에 조선의 板屋船(판옥선)에 맞선 일본의 軍船은 세키부네(關船)와 아타케(安宅船)였다. 그러나 판옥선은 强度面에서 일본의 군선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뱃전이 높아 일본 수군이 長技로 삼아온 登船肉薄戰(등선육박전)을 어렵게 했다.
兵站線 유지 못해 후퇴하는 倭軍
조선 水軍이 임진년(1592) 해전에서 거둔 全勝은 전체 전쟁국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이 분쇄됨으로써 西海연안 항로를 통한 병참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또한 陸路에 의한 병참선 유지도 전국 곳곳에서 봉기한 義兵의 활약으로 왜군에겐 至難한 일이 되었다.
1593년 1월7일, 李如松이 이끄는 明軍 4만, 조선군 1만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평양성의 고니시軍은 보급선이 막혀 굶주리고 있었다. 원래 히데요시는 육군이 북상하는 속도에 맞춰 補給船도 서해를 통해 우회시켜 군량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때의 전투 모습을 「懲毖錄(징비록)」은 『明나라 군사는 대포와 불화살로 공격하는데, 대포 소리는 땅을 울리고 몇십 리 안에 있는 산악이 모두 흔들리는 듯 요란하였다』고 표현했다. 明軍의 대포가 倭軍의 조총을 압도한 전투였다.
그날 밤 고시니의 부대는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러나 후퇴의 강행으로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부르터서 제대로 걸음을 옮기는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고니시軍은 황해도 방면에 포진해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대의 구원을 받아 겨우 서울로 후퇴했다.
李如松의 明軍은 평양성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서울로 남진하여 왜군의 주력부대를 격멸할 작전을 세웠다. 이후에 전개되는 벽제관 싸움은 그 후 東아시아史의 진전에 있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전투이다.
서울에 집결한 왜장들은 숙의 끝에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을 선봉으로 삼아 총력의 반격을 시도했다. 고바야가와 軍은 礪石峴(여석현)에 진을 쳤다.
왜군의 鳥銃 공격에 혼이 난 李如松
1월27일 오전 7시경 礪石峴에서 쌍방의 선봉대가 조우, 전단이 열렸다. 明의 선봉장 査大受는 왜군 선봉대의 조총 공격을 받고 벽제역까지 후퇴했다. 이 소식을 들은 李如松은 기마부대를 이끌고 惠陰嶺을 넘어 벽제관으로 급행, 望客峴(망객현)으로 진격했다. 여기서 明·倭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왜군은 왜군의 대부대는 3隊로 나뉘어 明軍을 공격했다. 砲軍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기병만으로 싸우던 李如松 軍은 결국 왜군에 포위되어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대패했다. 뒤늦게 도착한 부총병 楊元(양원)이 거느린 火軍의 도움을 받아 李如松 軍은 死地에서 벗어나 파주-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후퇴했다.
李如松은 평양에서의 승전에 고무되어 왜군을 얕잡아 보고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고 진격하다가 왜군의 조총 전술에 결정타를 얻어맞았다. 이 싸움에서 李如松은 李備禦(이비어)·馬千摠(마천총) 등 직속 맹장과 요동병을 다수 잃었다. 이후 李如松은 倭軍과의 전투를 회피, 倭軍의 주력부대를 섬멸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싸움에 동원된 明軍 병력은 4만3000명이었고, 倭軍의 병력은 7만1000명이었다.
패전 직후 李如松은 대성통곡을 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왜 그랬을까.
李如松이 거느린 明軍은 요동병과 절강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평양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것은 대포를 능숙하게 구사한 절강병이었다. 李如松으로서는 절강병보다 자기의 직속부대인 요동병의 戰功이 더욱 바람직했다. 그런데 백제관 싸움에서 직속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요동병의 핵심은 李如松과 擬制的(의제적) 혈연관계를 맺은 家兵들이었다. 많은 家兵의 戰死는 요동병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李如松은 1597년 遼東總兵官(요동총병관)이 되었으나 이듬해 吐蕃(토번: 티베트)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는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흥기하고 있었다. 李如松의 요동병은 여진족의 대두를 막는 明나라의 최전선 부대였다. 여기서 李如松의 家系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女眞族의 興起
李如松의 조부는 평안도 江界 출신으로 요동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李成梁은 요동의 左都督으로 출세했던 인물이다. 만주 全域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李成梁은 나중에 淸 태조로 추존되는 建州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에 대해 견제와 협력의 관계를 유지했다.
누르하치는 李成梁에게 공물을 바치는 한편, 가만히 여진족을 결속시켜 세력을 키워 갔다. 누르하치가 견제를 받아야 할 시점에 공교롭게도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감행되어 明國으로선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한반도에서 東아시아 3國이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정황에서 누르하치는 조선 정부에 원군을 파견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그만큼 강성해졌음을 나타낸 일이었다. 누르하치의 제안은 조선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백제관 전투 이후 李如松은 평양에 주둔하면서 沈惟敬을 倭軍 진영에 파견, 화의를 교섭했다. 왜군은 조선 水軍의 활약으로 본국과의 병참선이 위협받고 의병들의 유격전에 시달린데다가 惡疫(악역)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했다.
그러나 明國과 倭國의 화의교섭은 히데요시의 무리한 화의조건(조선 8道 중 4道의 할양 등)에 의해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1597년 1월 倭軍의 재침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丁酉再亂(정유재란)이다. 이때 李舜臣은 왜군의 反間之計(반간지계)에 넘어간 宣祖의 미움을 받고 투옥되었다. 李舜臣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元均은 동년 7월15일 왜적의 유인에 빠져 칠천양 해전에서 대패했다.
倭軍은 동년 8월16일 남원을 함락시키고 공주·직산까지 점령하였으나 9월7일 직산 북방 소사평에서 朝·明 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9월15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李舜臣이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을 명량해전에서 격파했다. 倭軍은 남해안 일대로 후퇴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1598년 7월, 조·명軍은 4路軍을 나뉘어 총공격을 개시했다. 麻貴(마귀)는 울산의 가토를, 董一元(동일원)은 사천의 시마즈를, 劉綎(유정)은 순천의 고니시를, 李舜臣과 진린은 倭의 수군을 공격했다.
이 총공격에서 특히 董一元의 中路軍은 사쓰마의 藩主(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궤멸적 타격을 당했다. 시마즈 휘하에서는 種子島의 16대 島主 히시토키(久時)가 복무했다.
1598년 8월18일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가 病死했다. 倭軍은 히데요시의 사망에 따라 철군을 시작했지만, 순천의 고니시 軍만은 李舜臣에게 퇴로를 봉쇄당했다. 고니시는 사천에 주둔해 있던 시마즈와 창선도에 주둔해 있던 요시토모(宗義智: 고니시의 사위)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시마즈·요시토모의 왜군 함대 500척은 고니시를 구출하기 위해 西進했고, 李舜臣·진린의 연합함대는 이를 迎擊하기 위해 東進했다. 여기서 7년 전쟁의 최후 결전인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이 결전에서 李舜臣은 200여 척의 적선을 격침시켰으나 불행히도 敵 조총의 유탄을 맞아 전사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고니시는 탈출에 성공했다.
東아시아 3國의 운명
前後 7년간에 걸친 왜란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대변혁을 가져왔다. 조선 8道가 거의 전장화하여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중국대륙에서는 임진왜란의 휴유증으로 明國이 멸망하고 그 틈을 타 창업한 여진족(만주족)의 淸國이 새로운 정복왕조로 군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死後에 도요토미 정권이 패망했다. 1600년 7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東軍 10만 명과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를 받드는 西軍 8만 명이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당초 西軍에 가담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秋秀)가 갑자기 배신하여 西軍을 공격는 바람에 東軍이 압승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왜장들도 세키가하라 전투에 의해 그 운명이 엇갈렸다. 東軍에 가담했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은 다이묘(大名)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西軍을 지휘했던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전 후 도주했으나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역시 西軍에 가담했던 우키다 히데이에는 약 50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病死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히데요리의 편에 섰던 모리 테루모토는 83만5000석 大名에서 37만 석 다이묘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西軍에 참전했으나 예외적으로 감봉처분을 받지 않고 石高 60만 석 大名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것은 사쓰마에 온존되어 있는 시마즈家의 전투능력을 이에야스로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승리로 정권 장악에 성공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에 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이 되어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염려스러웠던 일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정권 만회를 노리는 오사카 세력이었다. 이에야스는 2차에 걸친 싸움을 벌여 1615년 마침내 오사카城을 함락시켰다. 오사카城이 불타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기미(淀君)와 히데요리가 자결함으로써 도요토미家는 멸망했다.
필자는 12월22일 오전 8시, 쾌속선 「토피」에 승선, 다네가시마의 관문인 니시노오모테港을 출항했다. 「토피」는 오전 10시40분 가고시마港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우연히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鐵砲는 바로 이 항로를 따라 일본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다네가시마-가고시마 항로가 鐵砲의 北上路였던 만큼 필자에게는 결코 그것이 단순한 바닷길이 될 수 없었다. 철포가 東아시아 3國의 命運을 바꿔 놓지 않았던가.●
첫댓글 스페인 이야기는 괜찮네요. 좋은자료감사합니다.
열국의 흥망사는 결국 기후의 변화에 달렸지요 좋은 자료 훔쳐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