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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부패문제
오유석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연구교수)
■ 권력형 부정비리 : 대부분의 부패는 권력형부패죠..
1. 부정축재처리의 역사적 실패
▲5.16 군사혁명 박정희
4・19 혁명으로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했던 죄명으로 쇠고랑을 찼던 기업인들은 5・16으로 회생되었다.
원래 군사혁명정부의 부정축재 처리는 초강경했다. 혁명 발발 12일만인 1961년 5월 28일 당대 재계를 주름잡던 재벌 총수들이 수갑에 묶인 채 혁명군에 연행되었다. 당시 동경에 머물고 있던 이병철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고회의는 29일 이들의 구속을 발표하면서 부정축재처리요강을 공포하고 그에 따른 부정축재 처리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처리위원회는 부당이득은 모조리 환수한다고 강경 발표했다. 수사는 급진전 되었고 중간발표때 마다 축재액은 늘어났다. 7월 21일 5차 중간발표 때는 726억환에 달했다. 초창기 부정축재 처리의 중점은 거물 재벌의 재산 몰수 있었다. 6월 19일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이병철씨는 최고회의 의장 앞으로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뜻을 6월 25일 이정림, 최태섭, 설경동, 조성철, 남궁련 등 7명은 공동명의로 전 재산의 국가헌납의 결의문을 보내왔다.
이병철은 6월 26일 밤 김포공항에 내리는 길로 모 호텔에 연행되었는데 3일 후인 29일 오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공식으로 밝혔다.
6월 30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조사을 일단락 짓고 구속자를 모두 석방했다. 석방되기 직전 박정희장군은 이들과 직접 만나, 재계인사들에게 하루속히 기간산업 건설계획에 참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어떤 모종의 야합이 있었는지 이주일 처리위원장의 “..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는 매우 강도 낮은 특별담화가 있었다. 그리고 1961년 12월 30일 최종 통고된 부정축재 환수액은 42억 2천800만환으로 반감되었다. 부패와 구악일소의 한 본보기로 서슬 퍼렇게 시작된 부정축재자에 대한 단죄는 이렇게 6개월도 못돼 경제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혁명정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와 재벌의 밀월(유착)의 막을 여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석방된 인사들은 그 길로 경제재건촉진회(한국경제인협회의 전신)를 구성하고 기간산업건설안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시하고 부정축재 환수금의 환수기일 연기와 공장건설 후 주식으로 납부하는 방안을 건의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재계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군정이 마련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주요사업을 떠맡은 부정축재자의 공장건설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도리어 정부는 이들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외자도입, 공업단지조성, 내자지원 등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단지 경제개발게획에 참여한다는 명목으로 부정축재자들은 더욱 비대해 졌다. 또 다시 국민들로부터 기업윤리와 특혜시비로 지탄받는 기업풍토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2. 사카린 밀수 사건
1966년 9월 22일 삼성재벌 총수 이병철씨는 한국비료공업(주) 헌납 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당시 건설 중이던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가 건설자재를 가장하여 사카린의 원료인 OTSA 60톤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여 그 중 38톤을 금북화학에 내다 팔았다는 내용이다. 언론은 서슴없이 강경하게 이 사건을 밀어 부쳤다.
"생산이 있기 전에 무역이 있었고 무역이 있기 전에 밀수를 했다. 이것이 한국 재벌 생성의 과거사인줄 알았던 국민들은 지금도 공장을 짓는다고 밀수를 하고 수출을 한다고 밀수를 하는 재벌의 현실에 이제 대경실색의 상태를 지나 용솟음치는 분노를 억누르는데 온갖 이성을 앞세우고 있다.....“
파문이 번져가자 정부도 사건의 경위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박대통령까지 개입, 전면수사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사카린밀수사건 전담 수사반이 구성되었다. 사건이 호가대되자 이병철 회장이 한국비료헌납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건은 확대되어 정부고위관계자들이 수사반의 조사를 받는 가하면 한국비료의 핵심인물들이 구속 또는 불구속 되었다. 다만 이회장이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곧 정계로 확대되었다. 검찰수사결과에 대해 민중당은 박대통령에게 경고 성명을 발표하는 가하면 이러한 파동의 회오리 속에서 김두한 의원의 오물투척사건(국회에 출석한 국무위원석에 분뇨를 뿌려 부패정권을 규탄한 사건), 국무위원 총사퇴결의안 제출 등 정치적 사건이 꼬리를 물었고 장준하 의원은 규탄궐기 대회에서 박대통령을 심하게 몰아붙여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사카린사건이 밀수냐 수입이냐에 대한 공식적인 결론은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지만 1963년 3분(三粉)폭리(설탕, 밀가루, 시멘트)사건과 함께 그것이 누군가 상당히 부당하고 부정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굶주림에 허덕이던 국민을 담보로 일어났던 일인만큼 최고 권력자와 무관할 수 없다.
3. 4대 의혹사건과 정치자금
최고회의는 그 직속에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국내정보사항 및 범죄 수사 활동을 감독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중앙정보부를 설치하는 내용의 중앙정보부 법을 공포하였다.(1961년 6월 10일) 군사정권은 중앙정보부를 가징 핵심적인 권력 장치로 삼아 우선 이를 통해 공무원의 심사에 착수, 관료체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내부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정보부조직을 근간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 여기에 지식인, 관료를 흡수한 민주공화당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기구를 가진 정당으로 부상했다.
새로이 구성될 민정을 장악하고 그 선거과정에서 경쟁상대인 구 민간정치인을 정치정화법으로 묶어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일부는 포섭하는 분열통치의 수법을 악용하여 정치권에 불신의 벽을 쌓았다.
이와 함께 군사정권은 자금원을 확보하기 위해 통화개혁, 통화증발등의 경제 조치를 단행하여 반대세력의 자금을 실질적으로 감소, 고갈시키고 국내 시장조작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다. 이른바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고 사건, 워커힐 사건, 증권파동 등의 4대 의혹사건이 그것이다.
1) 새나라 자동차 사건 : 중앙정보부(부장:김종필)가 일본으로부터 1,642대의 닷산 승용차를 면세(자동차의 정상적인 관세는 110%)로 수입하여 ‘새나라’란 이름으로 수입가의 두 배로 판매한 사건이다.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62년 불루버드란 이름으로 도입된 날씬한 승용차가 서울 거리에 나타났다. 이 불루버드 400대가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시발택시를 몰아냈다. 외국인 관광용 150대, 일반관광용 250대 모두 관광용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물론 관세도 물지 않는 특혜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들 관광차는 곧 일반택시로 모습이 바뀌었고 3-40만원 하던 시발차는 6-7만 원 선으로 폭락 그때 까지 한국 자동차산업을 이끌어 오던 시발자동차의 도산을 강요했다. 블루버드의 바퀴자국은 의혹으로 차게 되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이어 조립용 부품 1,721대분을 들여와 국내에서 조립 판매하여 단번에 국내 승용차 시장을 휩쓸어 버렸다.
1962년 1월 29일 새나라자동차가 설립되었다. 김종필과 재일교포 실업인으로 알려진 박노정씨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이 자동차 공장은 4대의혹사건의 호가대, 김종필의 출국 등으로 63년 1월부터 공장이 문을 닫았다.
2) 워커힐사건 : 혁명주체였던 K씨는 외화획득의 일환으로 관광사업을 착안, 동양최대의 관광지로 워커힐을 건설키로 했다. 소요자금 65억환(화폐개혁 후 6억5천만원). 정부와 정부관리기업체의 출자와 정부보증으로 시중은행에서 대출받아 건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워커힐의 모습이 갖추어져 가면서 의혹의 골짜기는 깊어갔다. 외화부족으로 경제위기가 감도는 판에 무슨 돈으로 외국자재를 들어오는가, 공사자금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고 있다는데.등등. 의혹은 사실로 들어 났다. 소장과 과장이 공사자금을 부정 유용했고 보관중인 입찰보증금이 행방불명되었다. 워커힐 자재중 일부가 공화당 보수를 위해 빠져나갔고 시공어자와 발주자 사이에 뇌물이 오갔다.
이 워커힐인 63년 4월 8일 개관되었는데 그날 자금 유용과 수뢰관련자들이 모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주한미군의 돈을 노렸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다. 빠나 도박장, 댄스홀 등 유흥장이 폐쇄된 까닭에 마땅히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곳이 없는 미군들을 대상으로 건설이 계획되었고 여기서 얻어지는 이득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미국언론(The New York Times)에 보도되자 미군당국은 워커힐을 출입금지 시켰고 이에 따라 막대한 재정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3) 빠찡꼬 : 의혹은 꼬리를 물었다. 새나라자동차사건이 한창일 무렵 돌연 임시국무회의에서 회전당구대(빠찡꼬) 시설의 폐지조치가 의결되었다. 회전당구는 5・16 이전 이미 도입되었던 것이나 그 후 혁명정부가 금수품목으로 막아놓고도 재일교포의 재산반입 명목으로 880대를 면세로 수입허가한데서 의혹이 비롯되었다. 더구나 정부가 3개월 시한부로 전업기간을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되니 기존 34개 업소는 8,000만원의 시설비와 선불세금의 피해를 입었다.
4) 증권 파동 : 증권 파동의 주역과 주변인물들이 공식적으로 확인 된 것은 파동이 일어난 10개월 뒤 그러니까 김종필, 김용순 씨의 뒤를 이어 김재춘부장이 취임한 후 정보부 수사를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이 사건은 혁명정부가 공화당 사전조직의 자금 조달을 위한 방편으로 이권과 결탁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해 보자는 의도로 구상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의 증권 파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거지가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되었다.
세칭 4대의혹사건 뿐 아니라 재일교포 재산반입사건을 포함 군부지도자들 사이에 터져 나온 각종 의혹사건들은 공화당 사전 조직과 관련된 것으로써 구악을 일소시키겠다던 혁명정부가 구세대보다 깨끗할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 스위스 비밀은행의 정치자금
1960년대 대통령비서실장, 1970년대 초반 중정부장 이후락씨는 1980년 봄 유명한 ‘떡고물’ 이라는 발언을 했다. 정치자금은 그 조성과정이나 용도도 문제이지만 더 뒷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조성자의 손에 들어가는 ‘떡고물’ 때문이다. 이후락씨는 정치자금조성에 깊이 관여했고 국내외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교통정리하고 ‘검은돈’을 주물렀다.
대미로비사건으로(박동선 사건) 한미관계가 한계상황으로 치닫던 70년대 후반 미의회국제(한미)관계 소위보고서(이하 소위)에도 이후락은 가장 빈번한 논의 대상이었다.
이후락(중정부장): 스위스에 비밀정치자금을 예치하고 관리함
김성곤(국회의원, 기업가): 수표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수집
김형욱(중정부장): 수표를 현금화하고 현금으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수집(소위 보고서 346쪽)
정치자금원으로서의 이후락의 역할과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는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의 소위 증언에 의해 상세히 호가인댔다.
이동훈은 소위에서 “스위스 은행자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자금’이었다”고 진술했다.(청와대 고위 측근들에 의해서도 비밀계좌 존재는 확인됐다) 그러나 물론 그 자금이 대통령의 사적(私的)인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쫒아낸 야당지도자 및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해, 그리고 군(軍)의 충성을 보증받기 위해 다시말해서 자신의 장기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소위보고서에서는 박정권이 1971년 4・27 대선자금 600-700억원 (그해 예산 5,242억원의 10%가 넘는 액수)에 미국의 기업들도 한몫 거들었음이 드러났다. 석유사인 걸프는 선거자금 1000만덜러 요청을 받고 300만달러를 냈다. 걸프는 1967년 대선때에도 100만 달러를 현금으로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넣어 달라는 이후락 비서실장의 요청에 따라 정치자금을 냈다.(걸프사 극동조정관 허버트 굿멘의 1975년 소위 증언). 그 대신 걸프는 헌금의 대가로 유공과 손잡고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1971년 칼텍스 석유사들도 정치자금 100만 달러를 스위스은행에 넣었다. 이 돈들이 모두 공화당 정부로 들어 간 것으로 보고서는 판단하고 있다. 이 무렵 총기 메이커 콜트도 경호실장 박종규 측으로부터 1971년 선거자금 헌납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지하철 전동차메이커 미쓰비시 등도 1971년 120만 달러를 미은행계좌로 이전시켜 정치자금을 낸 사실이 밝혀졌다. 서울 지하철개통(1974년 8월 15일) 이전부터 지하철도입을 두고 정치자금 커넥션이 있었던 것이다.(최근 고속철도를 둘러싼 검은돈과 정치자금의 커넥션과 마찬가지로)
5. 조선일보와 코리아나 호텔
박정권은 언론에게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제 사명을 잊고 오직 상업적 성장에 몰두하게 유도했다. 1967년 당시 일반 자금의 대출금리가 25%였을 때 신문들은 18%의 낮은 금리로 대출특혜를 받았으며 신문용지에 대한 수입관세에서도 신문들은 일반 수입관세 30% 대신에 4.5%의 관세율을 적용받았으며 저리의 차관도입이라는 특혜까지 누렸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1968년 박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 호텔을 짓기 위해 7-8%에 불과한 4천만불의 일본 상업차관을 들여왔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겠는가? 조선일보는 3선을 향한 박정희의 정치야욕에 편승하여 대대적인 3선개헌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캠페인에 앞장섰다.
이렇게 차관 특혜를 받아 시작한 코리아나호텔은 1972년 완공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외국 관광객이 적어 객실이 텅텅 빌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는 여기서 또 정부에 압력을 넣어 자구책을 마련했다. 당시 본점 신축을 추진중이던 주택은행의 계획을 취소하고 코리아나 호텔에 입주시킨 것이다. 대지에 대한 지분이 전혀 없이 건물만 주택은행에 매각한 어처구이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조선일보는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유신찬양에 광적으로 매달렸다. 역사의 기록을 위해 조선일보의 유신찬양이 과연 어느정도였는지 그 광신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라고 했다. 또 “헌법 기능의 일부 정지와 아울러 이에 따르는 몇가지 조치가 선포된 것은 새로운 헌정 질서의 존립을 위하여 만부득한 조치”라고 했으며 “ 비상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조선일보 1972년 10월 28일자,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 중에서)
■ 도덕성문제 : 문란했던 박정희의 여성편력, 도덕적 이중성
최고 권력자는 실제 모습과 관계없이 온갖 포장을 둘러쓴 채 만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소탈하고 서민적이고 검소함에 대한 박정희에 대한 신화는 그러한 포장이 빚어낸 결과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여론의 사정권을 벗어나게 되면, 국민의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숱한 곳에서 인간 박정희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궁정도 안가일 것이다.
1. 3공의 요화 정인숙 사건
본명 정금지(鄭金枝), 자유당 시절 대구부시장을 지낸 공직자의 딸. 대구 신명여고 졸업 후 문리사대(명지대) 중퇴.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정인숙은 오빠 정종욱의 총에 맞아 한강변에서 숨졌다. 당시 정인숙의 수첩에 기록된 전현직 고관 및 재계인사는 20여명이 넘었고 정인숙이 남긴 3살박이 사내애가 대통령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이 사건은 결국 김계원 중앙정보부 부장이 직접 나서기 까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지만 당시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의 가사가 바뀌어 박의 소생이라는 노래로 퍼질 만큼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 육영수 여사는 어디서인지 변조된 가사 전문을 입수, 박대통령에게 들이대며 따졌다고 한다.(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2. 궁정동 안가
이렇게 사건화 된 여인관계 말고도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관계는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통령의 사생활을 관리한 박선호(예비역대령, 중정 의전과장)는 10・26으로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린 80년 1월 25일 육군고등군법회의 증언에서 " 궁정동 안가에 박대통령은 한달이면 열 번이나 그곳에 왔다" 말했다.
박선호의 진술에 의하면 이 집은 암살사건으로부터 10년전인 60년대말 이후락(6대 중정부장)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부터 대통령의 특별한 안가로 사용되었다.
"박대통령은 궁정동 안가를 만들기 전에는 위장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박종규만이 야행시간과 장소를 아는 천기에 속했다. 육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박경호 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못 본 체 모른 체 하고 넘어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박대통령은 스태미나가 절륜했고 상대는 두세 차례 만난 뒤 꼭 바꾸었다. 그래서 교유 여배우 숫자가 많아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10・26 당시 박선호(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최후 진술)
100여명에 가까운 연예인이 이곳을 다녀갔다. 세검정에도 비슷한 안가가 있었으나 청와대와의 거리가 멀어 궁정동이 주로 쓰였다. 잡지나 TV에서 대상이 선정되면 궁정동에서 가까운 내자호텔로 불렀다. 부르는 과정에 회유도 압력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란한 여성편력은 육영수여사의 사후 한층 더 심해졌다. 궁정도 안가에서는 사흘에 한번 꼴로 대행사, 소행사로 불리는 미녀파티가 열렸고 측근들 사이에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한 경쟁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은 여성관은 당시 고위층들의 입에서 흔히 오르내리던 배꼽 아래 인격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첫댓글 죽을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고 발악한 그는 3선개헌을 하더니 야당이 많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다고 국회를 해산하는 10월 유신을 강행했다. 마치 명치유신처럼... 유신헌법은 박정희를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6년의 임기를 무제한으로 했다. 그래서 이숭만 대통령의 3선개헌으로 초대의 대통령은 죽을때까지 할 수있는 길을 텄었다. 그런데 그는 3.15부정선거로 4.19를 맞아 하야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죽을때 궁정동 안가 여대생 치마폭에서 숨져갔다. 그러니까 죽을때까지 대통령을 해먹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71년 선거유세에서 영구히 대통령을 하겠다는 총통제 구상이 바로 그말이다. 지도자는 앞을 내다보고 가야한다.
이승만은 쫓겨날 때까지 해먹고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해먹었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ㅠ
그런데 박근혜의 뻔뻔함을 보면 .....어떻게 대통령 된다고 나섰는지.....다행히 물먹었지만,박정희 닮은 명박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