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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사모]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나도사랑을했으면
게로르기에프 교수와 렌프루 교수의 제안은 좀더 매력적이다. 그들에 따르면, 기원전 8000년~6000년에 거대한 신석기 문화(코니아 평원 카탈 휘이크의 그 유명한 문화를 포함하여)를 건설한 사람이 이미 남부 아나톨리아에서 인도유럽어(나라면 인도히타이트어라고 말하겠다)를 사용했다. 게오르기에프와 렌프루는 기원전 7000년경 농업의 확산과 더불어 인도유럽어가 그리스와 크레타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고학에 따르면, 그 시기 그리스 와 크레타에는 물질 문화의 현저한 단절이 있었다. 그렇다면 기원전 5000~3000년 그리스와 발칸 신석기 '문명'의 언어는 인도히타이트어의 방언이었을 것이다. 이 발칸 문화의 혼합 농경 체계로부터 쿠르간 유목민 문화가 유래했으며, 그 언어 역시 그로부터 유래했다는 미국인 교수 구디너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런 식으로, 인도유럽어를 쓰는 쿠르간 문화가 발칸과 그리스로 다시 확산해 인도히타이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미쳤다고 가정.
나는 기원전 6000~5000년에 셈어가 소위 우바이드 토기와 함께 아시리아 와 시리아 지역(대략 오늘날 셈어를 사용하는 서남아시아)에 퍼져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메르인이 북동쪽에서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4000~3000년 초라고 본다. 우르크애서 발굴한 기원전 3000년경의 초기 원문을 통해 셈어와 수메르어를 함께 쓰는 관습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레타에는 토기 시대 구분인 초기 미노아 1기초엽, 그러니까 기원전 3000~2000년의 시기로 접어들 무렵 레반트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문화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형 문자는 지배적인 문자가 되지 못했으며, 크레타는 결코 시리아-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다. 물리적인 거리를 제외할 때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크레타 원주민 문화의 탄력성, 그리고 크레타가 문화적으로 셈족과 이집트의 영향권 사이에 위치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3000~2000년에 청동기를 사용한 곳에서는 대부분 문자(설형 문자든 아니면 지역 문자든)사용했다. 그러나 이 시기 에게 해 지역에서는 문자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
초기 청동기 문명은 기원전 23세기에 붕괴했다. (중략)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북쪽에서 구티족의 침입이 있었다. 문명 세계 전체가 이민족의 침입과 내부의 폭동(둘 다 갑작스런 기상 악화 때문이었을 것이다)으로 고통을 겪었다. 아마 프리기아어나 원元아르메니아로르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집단이 아나톨리아를 칩입한 것도 이 시기였을 것이다. 이시기와 이후 몇 세기 동안 그리스 본토에서는 토기 시대 구분인 초기 헬라딕 2기 말에 대규모 파괴가 있었다. (중략) 3세기 후 초기 헬라딕 3기말인 기원전 1900년경에 비록 정도가 덜하기는 하지만 또 한 차례의 파괴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리스인에게 세소스트리스라고 알려진 이집트 파라오 센우세레트 1세의 정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때(기원전 21세기) 이집트는 제1중간기의 와해에서 회복하여, 이른바 새로운 제11왕조가 중왕국을 확립했다. 제11왕조는 이집트를 재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레반트를 공략했으며, 또한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더 먼 지역까지 영역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 크레타는 확실히 그 범위 안에 드는데, 그리스 본토 역시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멘트호트페 라는 이름을 함께 쓴 검은 피부의 상上이집트 파라오들은 누대에 걸챠 매와 황소의 신 멘추 혹은 몬트를 신성한 후원자로 삼았다. 같은 세기 크레타에도 왕궁이 세워졌고 왕궁 벽에서는 황소 숭배가 발견되었다.
크레타가 그 이후로도 600년동안 호아소 숭배를 중심적인 제식으로 유지한 반면, 이집트는 기원전 2000년 직후 제12왕조의 발흥과 더불어 왕실의 멘추 숭배를 폐지했다. 새 왕조는 상 이집트의 숫양 신 아몬을 수호신으로 삼았다. 아몬과 하下이집트의 멘데스(숫양/염소) 숭배에서 유래한 숫양 숭배가 에게 해 주변에서 발견되고 대개 제우스와 관련되는 것은 바로 이시기의 영향인듯 하다. 해로도토스 와 그 이후 작가들은 세소스트리스라고 불리는 한 파라오의 광범한 정복 활동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제12왕조의 여러 파라오가 공유한 S-n-Wrst(센우세레트) 또는 센워스레트라는 이름과 같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헤로도투스의 주장은 대단히 비웃음을 샀다. 에티오피아(혹은 이집트) 왕자 멘논의 광범한 원정에 관한 고대 전설 역시 같은 취급을 받았다. 멤논이라는 이름은 제12왕조의 다른 중요한 파라오들의 이름은 Imn-m-h*t(이멘-엠-하트)에서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다. 후기 그리스 작가들은 그들을 암메네메스 라고 표기했다. 이제 두 전설은 멤피스 에서 발굴된 비문을 최근 해독함으로써 입증된 것으로 보인다. 그 비문은 제12왕조 파라오인 센우세레트 1세와 암메네메스 2세의 육,해로를 통한 정복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센우세레트의 또 다른 이른음 케페르카 라 와 전설상의 아테네 건설자인 케크롭스 사이에도 흥미로운 유사점이 눈에 띤다. 일부 고대 사료는 그를 이집트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파급의 물결이 다시 인 것은 힉소스 시기였는데, 이에 관한 전승은 더욱 명확하다. 힉소스라는 이름은 '외국 땅의 지배자'라는 뜻의 이지트 헤카 카세트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들은 북쪽에서 온 침입자로 기원전 1720년부터 1575년까지 적어도 하 이집트를 정복하여 통히했다. 비록 후르루어 같은 다른 요소가 섞여 있었다고 보이지만, 힉소스는 압도적으로 셈어를 사용했다.
다나오스가 그리스에 도착한 시기를 고대 연대기가 기록한 바와 같이 힉소스 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157
5년이나 그 이후로 잡을 것이 아니라, 힉소스 시대가 시작하는 기원전 1720년경으로 잡자는 것이다.
기원전 15세기 중반 제18왕조는 레반트에 강력한 제국을 확립한 후 에게 해지역에서 공물을 받았다. 제18왕조의 유물이 그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나는 이를 이집트의 영향력이 다소 고조된 결과라고 믿는다. 아마도 바로 이시기에 디오니소스 숭배(정통 학설은 '더 늦은' 시기에)가 그리스에 도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나는 데메테르를 섬기는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는 고대 전승을 받아들인다. 기원전 14세기 초 아나톨리아에서 펩롭스 가문 혹은 아카이아인이 그리스에 침입했고,그로 인해 새로운 유형의 요새와 더불어 아마도 전차 경주가 도입된것으로 보이.
기원전 2000~1000년의 동부 지중해는 문맹 지역이 아니었다. (중략) 크레타는 고유의 상형 문자와 선형 문자 A를 사용하고 있었다. 크레타의 상형 문자와 선형 문자 A는 기클라데스 제도에서도 사용되었다. 더욱이 기원전 2000~1000년 전반기 동안 기원전 15세기에는 동부 지중해 지역 대부분이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제18왕조 첫 파로의 어머니인 아흐호테페 여왕이 기원전 16세기 초에 외지 하우 네부로부터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외지는 에게 해 지역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진 적이 있었다. 이는 그녀가 지닌 보석 중 일부가 에게해 지역 디자인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확증되는 듯하다. 그녀가 아들 아모세 1세 또한 그 곳에 대한 일종의 종주권을 주장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후 한 세기 동안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전하는 바가 없다. 아모세 1세와 외지 하우 네부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든, 힉소스 시기 말과 제18왕조 초에 두 지역의 거주민이 일부 교환되었음은 분명하다. 이 시기 이집트에서 '크레타인'을 뜻하는 이름 파 케페티위가 나타나며, 같은 시기의 이집트 파피루스에서 발견되는 크레타인 이름 목록에는 이집트인과 레반트인이 등장한다. 기원전 17세기 남부 에게 해 지역에서 거주민이 뒤섞인 이러한 상황은 테라 섬의 프레스코 벽화, 그리고 선형 문자 A 와 B에서 발견되는 후기의 인명에 의해 확인된다. 에게 해 지역과의 접촉을 보여주는 이집트의 문헌 증거는 기원전 15세기 와 14세기에 훨씨 더 풍부하다. 비문과 고분 벽화는, 기원전 15세기 중반 투트모세 3세와 시리아 정복 이후 이집트인이 크레타 및 그 너머에 대해서까지 일종의 종주권(이 종주권은 이후 백 년 동안 여러 차례 갱신되었다)을 행사할 수 있다고 느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중략) 이 시기에 미케메 문명권 사람들이 미노아인을 정복했음을 시사하는 크노소스의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한다. 이집트 원문에는 더 이상 에게 해 지역 케페티우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타-나-유 혹은 티나가 등장한다. 이것이 다나오스인과 그리스를 가리킨다는 점은 타나유의 여러지명을 언급하고 있는 14세기의 비문으로 보아 거의 확실하다. 그 지명 가운데 몇몇은 충분히 크레타 및 그리스의 지명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했다. 더욱이 같은 시기에 티로스의 페니키아 왕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다-누-아의 왕을 언급하고 있다. 기원전 14세기 레반트와 에게 해 사이의 접촉에 관한 언급이 우가리트 문자 기록과 선형 문자 B 기록 모두에서 나타난다. 우가리트 상인은 크레타와 교역하고 있었는데, 나는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인명 다난이 곧 '다나오스인'을 의미하며, 이는 그 항구에 그리스인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선형 문자 B로 기록된 서판은 크레타와 펠로폰네소스에 그리스어로 소통하는 웅장한 사회와 경제(동시대 근동에 있었던 사회 및 경제와 대단히 흡사한)가 있었음 보여준다. 또한 언어학적 측면에서, 션형 문자 B로 기록된 비문은 14세기 그리스어에 이미 상당수의 셈어가 외래어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테라의 화산 폭발이 기원전 1626년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크레타는 정확히 이 시기, 즉 기원전 1450년경 이집트에 공물 사절단을 파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라의 확산 폭발이 후기 미노아 1A기(기원전 1650~기원전 1550)에 일어났다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중기 미노아 3기 기원전 1730년 ~ 기원전 1650년
후기 미노아 1A기 기원전 1650년 ~ 기원전 1550년
후기 미노아 1B기 기원전 1550년 ~ 기원전 1450년
16세기라는 연대는 이 시기의 중대한 전면적 파괴를 보여주는 크레타의 고고학 적 증거가 없다는 점과 상충된다.
힉소스가 이집트에 도착한 직후 에게 해 지역으로 침입했을 것이라는 가설에 꼭 들어맞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크레타의 궁정은 기원전 18세기 말에 모조리 파괴된 뒤 다시 건축되었는데, 이 때의 건축 양식은 아주 약간, 그러나 충분히 의미 있을 정도로 달랐다. 그래서 초기 궁전 시기와 후기 궁전 시기 사이에는 관습상의 경계가 존재한다. 칼과 수갱 분며, 그리고 왕의 의장에 사용된 그리핀(세 가지 모두 보다 이른 시기부터 레반트에 존재했으며 미케네 그리스에서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의 도입은 두 시기 사이의 변화 가운데 일부이다. 크노소스의 파괴 지층면에서 발견된 인장은 상당히 미케네적인 외양을 지닌야만적이고 수염이 덥수룩한 왕을 보여준다. 중기 미노아 3기/중기 헬라딕 3기 에게 해 지역의 유물과 힉소스 시기 및 제 18왕조 초기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물 사이에는 놀랄 마한 예술적 유사성이 존재한다.
아테네에서 아테나 여신애 대한 국가적 숭배가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는, 6세기 중반 사이스 출신 이집트 파라오 아모세 2세가 동부 지중해의 다른 곳에서 아테나 숭배를 장려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기원전 21세기 크레타에서 왕궁의 건립과 동시에 이루어진 호아소 숭배의 확립에 미친 식별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의 종교적 영향, 즉 매/황소신 멘추 또는 몬트에 대한 이집트 제11왕조의 왕실 숭배의 영향을 다룬다. 초기 미노아 시기, 즉 기원전 3000~2000년에 크레타에서 황소 숭배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으로 볼때, 기원전 7000~6000년 아나톨리아에서 발견되는 황소 숭배가 이어져 내려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욱이 산악 지역인 크레타는 결코 소를 기를 만한 지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크레타에서 황소숭배가 갑작스럽게 출현했다는 점과 시기적인 일치. 멘트호트페로 불린 제11왕조의 여러 파라오가 통치하던 시기 동안 이집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는 잘 알려진 사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집트와 에게 해 지역 사이에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 외에도, 이 시기에 크레타가 이집트로부터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전설상의 증거가 있다. 나는 멘추와 멘트호트페라는 이름이 그리스 전설에서 그리스 섬들의 재판관이자 입법자이며 지배자로 등장하는 라다만티스Rhadamanthys의 이름에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에게 해 지역으로 유입된 이집트의 황소 숭배가 오로지 멘추 숭배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크레타의 첫 번째 왕이자 입법자인 미노스라는 전설상의 인물을 기원전 3250년경의 인물로 추정되는 이집트의 첫 번째 입법자이자 파라오인 메네스(헤로도투스는 메네스를 민Min이라고 불렀다)와 충분히 관련시킬수 있다고 생각한다.
멘추 숭배뿐만 아니라 민과 므네비스, 그리고 아피스 숭배에서 유래한 황소숭배가 그리스 전역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염소와 숫양 숭배가 등장하자 황소 숭배는 곧 퇴색하고 말았다. 제12왕조가 시작될 무렵 이집트 왕실은 매/황소 신 멘추 대시 숫양 신 아몬을 섬겼다. 이미 언급했듯, 이멘-엠-하트 및 센 우세레트라는 이름의 제12왕조 파라오들은 그리스 전승에 등장하는 강력한 정복자 멤논 및 세소스트리스와 동일시할 수 있으며, 비문 증거에 따르면 이들은 동부 지중해 지역에 대한 광범한 원정을 수행했다. 따라서 에게 해 유역 전체에서 널리 발견되는 예언적인 숫양/염소 숭배가 기원전 20세기에 이집트에서 두각을 나타낸 직후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집트에서 숫양/염소 숭배는 아몬 및 오시리스와 관련되었고,
공교롭게도 중기 미노아 크레타에서 발굴된 가장 놀랄만한 이집트 유물들 가운데 하나는 와지트를 숭배하는 사제의 조각상 받침대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상형 문자가 불규칙한 것으로 보아 크레타에서 새겨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어쨋든 그 발견은 당시 크레타에 와지트 숭배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두 마리의 뱀을 쥐고 있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신상, 즉 수많은 학자닥 잠정적으로 아프로디테와 연결시키는 여신상들 몇몇을 이 시기로부터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인 일이다. 와지트 숭배는 중기 미노아 말엽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도래를 기원전 18세기 말과 17세기 초 힉소스의 침입과 더불어 밀려들어 온 이집트-레반트-미노아의 영향과 관련시키는 것이 그럴듯해 보인다.
제5장은 계속해서 성이 변화된 이유와 더불어, 아폴론-아르테미스와 카드모스-에우로파Europa(카드모스와 에우로파라는 이름은 각기 셈어 카담[동쪽]과 아라브[서쪽,저녁]에서 유래한다)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조사한다. 그리스 테베의 제식과 신화는 이러한 측면에서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스핑크스와 관련되면서 이집트 태양 종교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측면과의 복잡한 연결망을 부가하기 때문이다. 나는 테베의 스핑크스가 에우로파와 아프테미스의 야만적이고 사자 같은 본성으로 확인되수도 있지만, 두 스핑크스(기자의 스핑크스와 테베의 스핑크스) 사이의 보다 긴밀한 연결성은 그리스의 스핑크스에 의해 제기된 수수께끼('목소리는 하나인데, 발은 두 개였다가 때때로 세 개가 되고 또 때로는 네 개가 된다. 발의 개수가 가장 많을 때 가장 약한 존재는 무엇인가?')로부터 제공된다고 주장한다. 오이디푸스의 대답은 인간의 삶을 언급했지만, 그 수수께끼는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일단의 수수께끼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대부분은 아침과 저녁에 나타나는 태양의 나약함과 한낮에 나타나는 태양의 강함을 가리킨다.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아침과 저녁의 태양에 봉헌되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그러한 유사성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폴론이라는 이름이 시기적으로 뒤늦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와 셈족의 영향이 상호 작용했다는 점은 이 일군의 태양 신화가 힉소스 시기에 도입되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한편 제6장의 주제였던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은 좀더 뒤늦게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데메테르와 디오니소스 숭배가 기워전 15세기 후반 아티카에 도래했다는 점에 대체로 합의하고 있다. 테메테르라는 이름이 기원전 2000~1000년의 초기에 기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상당히 그럴듯하게 보인다. 기워전 15세기 말은 투트모세 3세의 정복 이후 이집트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자, 이시스Isis와 오시리스를 숭배하는 신비 의식이 이집트와 레반트에서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여겨지는 시기였다. 신전 모퉁이 아래 놓인 이집트의 채색 장식판이 미케네에서 발굴되어 그 연대가 아메노피스 3세의 치세(기워전 140
5~1367년)로 추정됨에 따라, 상고 그리스의 엘레우시스 의식이 그곳에서 7백 년 앞서 만들어진 이집트적 토대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에서 유일하게 이 의식만이 가지고 있는 많은 양식 가운데 하나는, 이집트 신전처럼 정착된 사제 계층(이 경우에는 두 부족으로 구성되었는데, 헬레니즘 시기에 이 부족의 구성원은 잊비트와 연결성을 가진다고 확신했다)이 존재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토로이 전쟁 당시 양측 진영 모두에 펠라스고이가 있었다. 헬레네스와 아카이아인으로 구성된 아킬레우스의 군대에는 테살리아에 위치한 '펠라스고이의 아르고스' 출신의 군사가 있었던 거스로 보인다. 반면 트로이 진영에는 히포토오스Hippothoos의 전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라리사 출신 펠라스고이였다. 라리사라는 지명은 필시 이집트어 지명 레-아하트(비옥한 땅으로 들어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이집트어 지명은 동부 나일 강 삼각주의 비옥한 지역에 위치한 힉소소의 수도 아바리스를 지칭한 듯 싶다. 라리사와 레-아하트는 의미론적으로 굉장히 잘 들어맞는다. 더구나 호메로스가다른 두 라리사에 붙인 형용어구는 에리볼락스(기름진 토양의)였다. 기원 전후에 걸쳐 살았던 지리학자 스트라본이 지적했듯이, 라리사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그리스 도시는 모두 충적토 토양에 위치해 있었다.
힉소스의 그리스 식민화를 연구 가설로 받아들일 경우, 펠로폰네소스에 위치한 아르고스(다나오스가 건설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곳의 많은 제식이 그와 관련된다)의 아크로폴리스가 라리사로 불렸다는 점은 충분히 눈여겨볼 만하다. 더군다나 스트라본은 자신의 저서『지리학』의 또 다른 부분에서 아르고스가 그리스어로 '평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힉소스의 수도를 지칭하는 이름인 '비옥한 땅으로 들어감'에서 유래한 라리사의 어원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르고스는 또한 '속도'와 '개' 또는 '늑대'를 의미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의미들은 펠로폰네소스 도시의 신화와 도사학에 반영되었다. 아르고스의 핵심적인 의미는 '빛나는' 또는 '은銀'이었다. 이는 하이집트의 수도인 멤피스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이넵 헤즈(은빛 성벽0와 부합한다. 테살리아에 있는 두 라리사 지역의 '펠라스고이의 아르고스'라는 존재가 펠라스고이와 라리사, 그리고 아르고스 사이의 연결성을 강화한다.
호메로스는 에피로스의 도도나에 내려진 제우스의 위대한 고대 신탁에 '펠라스고이의'라는 형용어구를 덧붙였으며, 이후 다른 작가도 이 어구를 사용했다. 호메로스는 또한 다른 곳에서 크레타인의 목록 안에 펠라스고이를 등장시키는데, 그 목록에는 아카이아인과 에테오(순수한)크레타인, 키도네스, 도리스인도 포함된다. 헤시오도스(혹은 밀레토스의 케크롭스)에 따르면, "그리스의 세 부족, 즉 펠라스고이와 아아인, 그리고 도리스인이 크레타에 정착했다." 훨씬 이후에 시실리 출신 디오도로스는 펠라스고이가 에테오크레타인 보다는 뒤늦게, 그리고 도리스인보다는 먼저 크레타에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설령 앞의 인용문이 헤시오도스의 시대(고대 모델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0세기에 살았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호메로스의 목록과 정확히 부합한다. 호메로스의 목록에서 펠라스고이는 에테오 혹은 '진짜' 크레타인과 구별된다. 에테오크레아인은 헬레네스어가 아니라 아마도 아ㅏ톨리아어나, 아니면 셈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더군다나 호메로스는 크레타에 다나오스인이나 아르고스인이 거주했다고 언급한 적 이 없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그 이름과 관련된 '원주민'이라는 일반적인 함의를 고려할 때, 펠라스고이가 크레타에 거주한 가장 초기의 그리스인이거나 그리스어를 말하는 주민이었다는 주장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인다. 따라서 '헤시오도스'의 언급 순서는 연대기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페라스고이가 크레타에 정착했고, 그 후 기원전 14세기에 아카이아인의 침입이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 기원전 12세기에 도리스인이 침입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목록에서 펠라스고이는 다나오스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리스티아인이 실제로 사용한 언어가 무엇인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리디아어나 그리스어 같은 서부 아나톨리아 언어일 가능성이 높다. 내 생각에는 그리스어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다. 따라서 펠라스고이와 필리스티아인 사이에 등치 관계가 성립하다면(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피리스티아인이 그리스어를 사용했다면(필시 그럴 것이다), 크레타의 펠라스고이가 헬라네스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진다.
지금 그리스(헬라스)라고 불리는 곳을 펠라스고이가 점령했을 때, 펠라스고이 민족인 아테네인은 크라나오이Kranaoi라고 불렸다. 케크롭스의 치세에 그들은 케크로피다이Kekropidai라는 이름을 얻었다. 에렉테우스Erechtheus가 즉위했을 때는 자신들의 이름을 아테네인으로 바꾸었다. (헤로도토스 )
50명의 딸을 둔 다나오스는 아르고스에 이르자 이나코스Inachos의 도시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는, 그때까지 펠라스고이라고 불린 모든 사람에게 다나오스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법령을 그리스(헬라스) 전역에 서노했다. (에우리피테스)
나는 펠라스고이가, 이집트-페니키아인으 침입에 의해 식민화되어 어느 정도 문화적으로 동화된, 인도유럽어를 말하는 토착민에게 널리 붙여진 이름이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또한 아르카디아인이 적어도 미케네 시기 말엽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인 가운데 오직 아르카디아인만이 미케네 문화의 요소를 철기 시대까지 유지한 것은 아니다. 이오니아인과 아이올리아인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다.
도리스 지도자들은 자신을 '헤라클레스 가문'이라고 주장했다. '헤라클레스 가문'은 다나오스인-이집트인 식민지 개척자의 후예로, 기원전 14세기에 아나톨리아로부터 건너 것으로 보이는 후기 탄탈로스 왕조 혹은 펠롭스 왕조를 대체한 사람이다.
펠라스고이가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다는 헤로도토스의 명백한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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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세기 초기 청동기 문명은 붕괴.메소포타미아에서는 구티족의 침입.프리기아어나 원元아르메니아로르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집단 아나톨리아를 칩입.그리스 본토 파괴.이시기와 이후 몇 세기 동안 초기 헬라딕 2기 말에 대규모 파괴
기원전 21세기 제1중간기의 와해에서 회복 제11왕조가 중왕국을 확립. 크레타에서 왕궁의 건립.
기원전 2000년 제12왕조의 발흥과 더불어 왕실의 멘추 숭배를 폐지. 새 왕조는 상 이집트의 숫양 신 아몬을 수호신으로 삼음.
기원전 1900년경 이집트 파라오 센우세레트 1세의 정복, 그리스 초기 헬라딕 3기말 정도가 덜하기는 하지만 또 한 차례의 파괴.
기원전 1720년 힉소스의 이집트 침입 지배.
기원전 1626년 테라섬의 화산폭발.
기원전 1575년 이집트 힉소스의 지배에서 벗어남.
기원전 15세기 중반 제18왕조는 레반트에 강력한 제국을 확립한
기원전 14세기초 아나톨리아에서 펩롭스 가문 혹은 아카이아인이 그리스에 침입
기원전 1450년 크레타 이집트에 공물을 바침.
첫댓글 블랙 아테나 글은 띠엄띠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중국 기후 관련 글 과 유럽에서의 기후 관련 글도 있는데 시간되면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