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성도(聖徒)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을 할 수 있고 반대로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릴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느님 편과 그 반대편 사이 중간 지대가 없거니와 하느님 말씀을 안 듣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데다가 불의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니 하느님 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그 반대편에 서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성사를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 자녀이다. 그렇다고 그날 이후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다. 세례는 갓 태어난 아기 또는 은총이라는 씨앗이 심어진 것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인은 계속 성장해 간다. 아기는 젖을 먹어야 하지만 그것만 먹어서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딱딱한 음식도 먹고 때론 상한 걸 먹어 배앓이도 하면서 점점 어른 몸이 되어 간다. 씨앗이 주변 조건만 맞으면 싹이 패고 많은 열매를 맺는 거처럼 우리가 받은 세례 은총은 씨앗처럼 그 안에 많은 보물이 담겨 있다.
죄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 살기를 바란다. 영웅은 아니어도 나쁜 짓 안 하고, 나름 성실하게 일하고 돈 벌어 먹고살고, 기회가 되면 좋은 일과 봉사도 하면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보편적인 바람을 넘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거룩한 욕망을 선물로 받았다. 그래서 주일만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편에 서고 그분이 기뻐하실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하느님을 말하고 그분 뜻을 찾는 건 수도자나 성직자가 하는 일종의 전문직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수도서원은 세례 성사가 준 은총을 충만히 살아내겠다는 것의 그 이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뽑은 열두 사도들을 보듯이 성직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다른 죄인들과 다르지 않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만 그들도 자신이 선포한 것을 듣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거룩해지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거룩함은 결코 수도자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성도(聖徒)’라고 불렀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 거룩해질 사람, 거룩해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알폰소 성인은 가장 친한 친구보다 더 친근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자주 대화하라고 가르친다. 과연 기도의 박사라고 불릴 만하다. 일반 성도들은 수도승처럼 하루에 몇 번씩 모여 함께 기도할 수 없고, 성직자들처럼 교회 일만 하며 살 수 없다. 그렇지만 하루 중 1, 2분 그렇게 여러 번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로 마음을 향하고, 마음속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대화하듯 기도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사람은 본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바로 자기 마음대로 제멋대로 살기를 바라고 그러면 십중팔구 불의한 세상사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다. 하느님 편은 아니어도 하느님 반대편에 있지는 않을 거라는 소박한 바람도 이루지 못한다. 그 중간은 없기 때문이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9).”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그분 몸이나 옷에 손을 댈 수는 없지만 그분의 영이 내 안에서 살아 계시니 오히려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다.
예수님, 저를 친구라고 불러주셨으니 쉽지는 않지만 저도 주님을 친구처럼 가깝게 대합니다. 그렇다고 주님과 맞먹을 마음을 조금도 없습니다. 주님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십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오늘도 주님을 따르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