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고려왕실 근친혼◈
◆원나라 때문에 고려왕실의 근친혼이 없어졌다◆
원나라 때문에 고려왕실의 근친혼이 없어졌다.
1270년부터 약100년간
고려는 사실상 원의 지배하에 있었다.
두 나라는
‘몽고풍 고려양’ 이라는 말까지 생기게
풍습들이 바꾸어진 것이 많았다.
장사치, 그치, 이치 등 ‘치’ 자가 붙는 말,
족두리, 도투락댕기, 연지, 왕의 식사를 수라,
라고하는 등
말이 몽고에서 왔다는 기록들을 본다.
또
고려는 그들의 풍습 다처제의 풍습이 전래되었고
동성 동본의 근친 혼인은
그들로 인해서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왕실에
그때까지는 왕들이 근친혼이 많았다
그러나
몽고족이 지배하고 동성 동본
즉
근친간의 혼인은 신분의 강력한 결속으로
원이 고려를 지배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고
몽고인 출신
왕비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고려로 간 몽고 관리들이
고려 귀족여인과의 결혼을 쉽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전에
4대 광종, 9대 덕종, 11대 문종은
모두 배다른 누이와 결혼,
8대 현종은 5촌 질녀와 등 자연스러운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1275년 충렬왕 1년10월 원 세조가
“고려에서는
여러 왕들이 동성근친간에 결혼하는데
이 무슨 도리인가?
이미
우리와 더불어 한집안이 되었으니
통혼 해야 한다
만일
그리 되지 않는다면
어찌 일가가 된 의리라 하겠는가?” 라고
조서를 보냈다.
또
충렬왕떄 들어온 중국의 성리학 역시
근친혼 동성혼을 금지하였다.
1309년 충선왕 1년 11월에
문무 양반에 동성 금혼령을 내렸다.
그전에도
안 된다고는 하였으나 결혼은 하였다
다만
그 자식에게
관리등용 기회는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공민왕시에
원나라공주 노국공주가 죽고
종실녀인 왕씨를 맞아들여 익비로 삼았다.
그 후
공양왕의 세 딸중에 하나는 종실과 결혼하였다.
아마
이때는 공민왕이
원나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반원정책으로
노국공주가 죽자 한 것이아닐까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하면서
성리학의 가족이념인
가족의 윤리 사회윤리 정착이 되고
남녀가 동성이면
그 가족이 번성하지 않는다는
좌전(左傳 유교의한경전)의 구절을 인용하며
고려왕조는
근친혼과 동성혼으로
후사가 없어 망했다고 비판 하였다.
그렇지만
현대의학의 발달로 근친간의 혼인은
건강한 자손 번성에 도움이 안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으니
좌전이라는 옛날의 책이
그것을 알고 쓴 것인지 그렇다면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랑이라는 괴물 때문에
요즈음 허물어 지고있다.
얼마 전까지도
근친은 말 할 것도 없고
동성동본은 법으로 금혼을 하였으나
얼마 전부터는 허용하여
서로 사랑하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동등해지는 권리
잘난 자식은 처가 자식이라는 말이 생기고
동등한 유산상속 등
규범과 속박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등이
고려시대의
풍습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아울러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고려 때가
우리 한민족의 개인 생활,
시체말로
프리이버시의 전성시기가 아니였을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좋은정보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글 감사합니다.
지나온 과거사를 거울로 삼아 또다시 치욕을 겪지 맙시다.
여자의힘이 대단해요 만약에 여자가 꽈악 쪼이면 끈어질까요라고라이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덕분에 좋은 것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근친 혼을 했음에도 별 문제가 없이 대를 이었음은 왕권이 강해서일까?
역사공부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마음으로 담습니다
행복하세요.......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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