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미사 중 영성체 준비를 하며 바치는 기도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그때 세상은 끝난다. 종말이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예수님도 모르신다. 오직 하느님만 아신다(마태 24,36). 초대교회 교우들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몇 년 후에 다시 오시는 줄 알았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아마 이 세상 삶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동시에 다른 교우들도 자신처럼 세상사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권고다. 여기 살고 있으나 여기 살지 않는 거처럼, 몸은 아직 여기 있지만 마음은 벌써 하늘에 있는 사람의 말이겠다. 유명한 그 시 구절처럼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게’ 될 거라는 마음이다. 더욱이 이 시가 천상병 시인이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억울한 옥살이와 전기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던 때 쓴 작품이라고 하니 그의 마음 또한 바오로 사도와 우리 순교 선조들의 그것과 같았던 거 같다.
오늘 예수님 제자인 우리는 복음을 듣는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참 좋으신 하느님 한 분 이외에는 어떤 거에도 희망을 두지 않고 또 둘 수 없어 가난하고, 주님 계명을 지키느라 가난해진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의 참 제자는 행복하다. 이미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 벌써 거기 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국 썩어 없어질 몸이라고 함부로 하지 않고, 어차피 사라질 세상이라고 자기 좋을 대로 대충 막 살지 않는다. 그 반대로 다시 돌려드려야 하는 생명이니 잘 관리한다. 남들이 보면 여기서 영원히 살 거처럼 열심히 생활하지만, 하느님이 부르시면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는 마음으로 산다. 열심도 염세도 아닌 충실이다. 하느님을 뵈면 나의 이 세상 모든 삶을 셈해야 하는 줄 알기에 두렵고 수시로 부끄러워지지만 내 죄보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한없이 더 크기 때문에 모든 죄를 용서받는 줄 믿는다. 굶주리는 아이들, 원하지 않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으로 신음하는 자연,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세상에 마음 아프고 슬프지만 그런 마음이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만나니 나의 영은 기쁘다. 부끄러움과 감사,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
열심히 살지만 집착하지 않는다. 세상사에 속상하고 슬퍼하지만 그 어둠에 휩싸이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더 크게 할 수 있어 좋다. 잘못하고 죄를 지으면 바로 그 즉시 뉘우치고 고백하고 용서를 청한다. 마치 철부지 어린이처럼 말이다. 여기 살지만 마음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다. 그곳은 눈을 하나 빼내고, 팔과 다리를 잘라낼 정도로 하늘나라를 열렬히 바랐던 사람들, 사랑함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상상만으로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행복해지는 곳이다.
예수님, 설령 그날과 그 시간을 안다고 해도 제 삶은 달라질 게 별로 없습니다. 몰라도 불안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죽는 생각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날 며칠 전에는 좀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뒷정리 잘 해서 여기서 더 있어야 할 형제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들여다봅니다. 어머니 눈을 마주치며 세상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