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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 밀 밟아주고 잠시 앞산을 보다
입춘도, 우수도 지났다. 소한에 얼었던 얼음 대한에 녹는다지만, 산등성 응달로는 잔설이 드물지 않다. 바람 끝이 여전히 맵다.
“어여 가세이잉.”
아내, 경숙이 나설 기미가 없다. 말린 엿기름을 방앗간에서 빻아오고 독에 담느라, 점심나절부터 분주하다.
“아, 해, 자빠져 불 것네.”
재촉한다. 밀밭이 넓다.
“부얼부얼한 털옷 입제는 그라요.”
경숙이 이내 마당으로 나서며 옷깃을 여민다. 창고에서 연장 정리하다 속에서 열이 나 겉옷을 벗어 놨다. 녹이 탱탱 슨 연장과 손때 절은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오늘의 농민들 처지처럼 느껴져 미안함과 서러움이 들었던 게다.
“볿다 보믄 땀, 안 나것능가?”
하면서도, 창고로 가 겉옷을 걸치고 나온다.
“옷이 날개요, 야.”
한복을 즐겨 입어 왔던지라 어색하기도 했다.
“두툼혀서 등짝에 땀띠 나불것네.”
겨울 막 들 무렵, 큰애가 사서 보내준 옷이다. 모자에 붙은 털이 걸렸지만 좋으며도 좀 쑥스러웠다.
“아덜이고 어른이고 죄다 그런 옷 입고 안 댕깁디요.”
“유행 타고 그럴 나이인가, 시방.”
“젊어 보인다고 시비 걸 사람도 읇지라아.”
“여그 요로케 털이 부숭부숭헌 게 쪼깐 그러네이. …어여, 앞 스소.”
자식에게서 뭘 받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속내였다.
“녹차 담은 보온 벵을 광이다 놓고 나와 부렀네. 당신 먼첨 나스씨요.”
“엎어지먼 코 닿을 딘디 항꾸네 가제, 머.”
해는 아직 중천에 있지만 밀밭은 이천오백 평이다. 오늘이 사흘째다.
“서둘지럴 말던가.”
경숙이 보온병을 들고 새실새실 한 마디 건네며 앞선다. 집 옆으로 난 길 따라 숨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뱉으면 닿을 데에 밀밭이 있다. 오이삼과 팔일팔, 누렁이 두 마리도 꼬리 흔들며 따라 나선다.
어제 오늘 사이, 밀싹이 키를 더 키운 듯 한층 푸르다. 입춘 전부터 밟아줘야지 하다가도 앞선 일에 밀린 밀밟기다. 올 겨울은 눈이 적게 내렸다. 눈이 보리 이불이라지만 밀의 이불이기도 하다. 덮어주고 밟아줘야 했다.
대여섯 살 무렵, 보리밟기할 때가 떠오른다. 마을에서 밀농사를 지었던 집은 없었던 것 같다. 어제는 우리집, 오늘은 아랫집 보리밭을 번갈아 밟고 다녔다. 할아버지 말씀이, 꽉꽉 눌러줘야 보리를 더 많이 거둘 수 있다고 했다. 그땐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보리밭에서 뛰노는 놀이였다. 보리농사를 몇 해 짓고서야 두텁게 밟아줘야만 땅속의 벌어진 틈새가 좁아져 뿌리가 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밀밟기도 다르지 않았다. 꽉꽉 눌러 두텁게 밟아줘야만 얼지 않고 뿌리의 생장점이 자극 받아 새 줄기가 생겨난다는 걸 터득했다. 줄기가 늘어나고, 그 줄기에서 이삭이 더 폈다. 수확량 또한 당연히 많아졌다. 밀밟기도 세태에 따라 변했다. 트랙터에 롤러를 달아 밀밭을 밀었다. 고령인 농민들이 밀밟기에 나서지 않았다. 밀밟기에 나설 젊은 사람마저 거의 없다. 아내와 단 둘이 이천오백 평 밀밭을 꾹꾹 밟아주려니, 일주일은 족히 매달려야 했다.
“오메, 오늘은 더 널찍허게 보이요, 이.”
“그믐까장은 혀얄 것 같으네. 요로케 볿다간.”
보리밟기와 밀밟기가 2월의 주요 농사일이다. 보리 수매가 거의 막힌 뒤부터는 보리를 파종하지 않았다. 2월 보리밟기는 이제 옛적 일이 되었다. 밀농사 짓는 농가는 해마다 늘었다. 쌀 소비는 줄면서 밀 소비는 늘고 있어서다. 국민 1인 연간 밀 소비량이 쌀 소비량의 반이라고 한다. 제 2의 주식이라 여기고 있고, 그렇게 부를 만하다. 함에도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명맥을 유지하던 밀 생산마저 거의 끊긴 건 1984년 수매 중단 이후부터였다. 가톨릭농민회가 우리밀살리기운동을 벌였다. 재배 농가 확산에 앞장서 왔다.
햇수로 26년째다. 결혼하고 3개월 뒤, 고향으로 내려온 게 1982년 초였다. 9대째 살다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10여년 비워두었던 집 여기저기를 고치고 정착하느라 그럭저럭 1년이 지난 이듬해, 뒷산을 개간해 밭 오천 평을 일궜다. 큰애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인 1989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천오백 평에 우리밀을 심었다. 우리밀 종자 구하기도 어려웠던 때였다. 오늘 따라 경숙의 말처럼 밀밭이 커 보인다.
“어제 모냥 한 번 뽑아보씨요.”
오천 평 밭 절반의 경계를 이루는 소나무 밑둥치에다 보온병을 내려놓으며, 경숙이 우스개처럼 건넨다. ‘한 번 뽑아보’라는 건 ‘나, 이제 노래 부를 흥이 돋아 있다’는 경숙의 에두름이다.
“당신이 먼첨 뽑아보제.”
“그러께라.”
가락이 흥겹다. 밭일을 이렇게 시작하곤 했다.
“요 며칠 새, 하도 들어서 그만 입에 붙어 불었제라.”
“허허, 당신은 안즉도 청춘인갑소.”
노랫말이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쩌고, 한다.
“당신 차례요.”
<농가월령가> 정월령 한 대목을 읊는다.
“에고, 에고, 귓구녕도 싫타 허요.”
경숙이 산자락 동쪽 편 밀밭을 밟아 나간다. 앞산, 활성산이 오늘 따라 아내의 수다에 웃음을 지어 보이는 듯 가깝고 맑다.
-. 물푸레나무로 자루를 만들다
삼월 추위가 장독을 깬다지만 그래도 춘삼월이다. 햇볕에 따스함이 배여 있다. 경숙이 마루에 걸터앉아 해바라기 하고 있다. 앞산, 활성산을 건네 보는 경숙의 눈빛이 햇볕의 온기만큼 은근하다. 마당으로 들어서다 경숙을 하뭇이 건네 보느라, 등짐 무거운 줄 모른다. 겨우내 얼지 말라며 땅속에 묻어둔 무를 캐왔다.
“자루 부러진 괭이 어디다 뒀소?”
토방에 등짐을 부리며 부러진 괭이자루 바꿔달라던 두 달 전 경숙의 청을 떠올린다.
“낭구는 잘라 놨다요?”
“놔둔 게 있제.”
연장 창고에 세워둔 막대기가 잘 말랐던 걸 어제 봐뒀던 게다.
“괭이자루 껴 달라 헝 게 은젠디, 인자사.”
“작년 가실에 비어다 놔뒀는디 좀 더 몰라야 쓰겄다 싶어 그랬제.”
“지난 번이도 읍내 나간다 혔을 적에 상설시장 생선전 좀 들렀다 오시오 혔등만, 까먹고 오고 그리서 이참에도 그런갑다, 혔제.”
“….”
생각을 늘상 거기에다 두고 사는 것도 아니잖는감, 하려다 입을 다문다.
“인자, 일 좀 쭐이제는.”
“그라고 자픈디 맘대로 되능가?”
들어도 한 쪽 귀로 흘려버릴 만큼 총기마저 떨어졌다.
“동춘 아재, 저녁참에 읍내서 보자등만 어쩔라요?”
“또 전화했등가. 못 나간다 혔는디.”
우리밀영농조합 사업과 관련해 이야기 나눌 게 있다며 읍내에서 저녁참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마다했다. 이 일 저 일,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뒤로 빠질 나이다. 후배들 하는 일을 뒤에서 지켜주고, 북돋우는 울타리 역할이 이제는 마땅하다. 허나, 어려운 상황이다. 농민운동 하는 후배들 아니 젊은이들이 농촌에 몇 없다.
“자루로 쓸만헌 물푸레가 어디 있습뎌?”
“개똥도 쓸라먼 안 보이듯 선산 묏등 지킬 것들만 있드란 말시.”
집 뒤, 산자락에 물푸레나무가 듬성듬성 자랐다. 물푸레나무 중 매끈한 막대기 하나 찾아내기가 애써 힘들었다는 걸 굳이 드러내느라 ‘휘어진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속담을 아재개그처럼 끌어다 써보는 입담이다.
“수작도 인자 많이 늘었소야, 하하.”
경숙의 웃음이 밀싹처럼 파랗다.
“내 말인즉슨, 괭이자루고, 도끼자루고, 삽자루고 간에 튼실허질 안 허니, 멫 번 쓰다 보먼 금시 부러지는 게 연장 자루 아니던가, 허는 말이제. 자루 박아 파는 연장들은 죄다 그 모냥이당게.”
“그러게 말이요.”
“그런 장삿속으로다가 연장 맹글어 파는 것도 그렇지만, 그걸 그대로 사다 쓰는 농심도 난 여태껏 마땅허지가 안 혔네. 당신이 분질러먹은 그 괭이자루는 노루 몰아 본 막가지처럼 삼 년은 우려먹어도 될 성 싶게 짱짱허길래, 그냥 썼던 것이제.”
애당초 자루 박지 않은 연장을 샀다. 쇠로 자루를 만든 삽도, 도끼며 낫도 마다했다. 나뭇짐 져오는 지게도 옛것 그대로다. 날로 쓰는 쇠 부분만 빼면 옛것들은 죄다 나무로 만든 연장이었다. 창고에 걸려 있는 연장들 중 삽, 괭이, 낫, 호미 등속은 연중 쓴다. 손때가 번들번들 짙고, 깊다. 벼농사도 서른 마지기 넘게 짓고 있지만 이양기, 콤바인, 트랙터 등 농기계를 장만하지 않았다. 벼농사는 기계로 100% 가까이 심고 거뒀다. 농기계는 필요할 때 불러 쓰곤 했다. 언필칭, 일손 없는 농촌에 농기계는 이제 대용이 아니라 필수 장비였다. 비용 절감과 편리함을 줬다. 관행농업 하는 농민들 대부분 농기계로 농사일을 대체했다. 생태농업 하는 농민들 역시 농기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 소득 작물이 다양하지 않고 여전히 벼농사에서 가장 많은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나, 농사일 태반은 밭농사다. 밭농사는 애당초 손으로 짓는 손농사다. 농기계 작업이 그만큼 적다. 밭에 작물을 심고 가꾸고, 거둬들이는 데에 여전히 삽, 괭이, 호미 등속이 널리 쓰인다. 오랫동안 그 모양 그대로인 전통의 농구들이다. 질기고 단단한 나무를 자루로 써야 할 이유다. 꾸지뽕나무 자루를 최고로 쳤으나, 귀했다. 근동에선 물푸레나무 자루를 제일로 꼽았다.
“창고 안쪽, 괭이 걸어두는 디다 뒀는디 못 봤읍뎌?”
“정신머리 좀 봐. 어지께 거그서 봤는 디도, 글씨.”
“그러케 정신 놓아불먼 나는 어찌케 살으라 허요.”
경숙의 시선이 아릿하다.
“당신 생각혀서라도 그리 안 헐 거네.”
“그 말 믿소, 이.”
새삼, 절박함이 밀려온다.
-. 장날 벗들과 막걸리를 마시다
이불집에 들른다며 경숙이 가고 국밥집에 든다.
“이녁도 귀는 가렵던 갑제.”
한 시간이나 늦었다.
“막, 자네 야그 허고 있었동만.”
“핸드폰도 없응게 연락도 안 되고 혀서, 안 올라나 혔네.”
매달 17일 장날, 단골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 잔씩 나누는 오랜 벗들의 모임이다. 두어 사발씩 돌았는지 벌써 낯빛이 붉다.
“퇴비 5톤을 오늘 아니먼 갔다 줄 수 없다는디, 워쪄껴.”
밀밭에 거름 얹혀 주고 왔다.
“4월 들자마자 뿌렸는디, 자네가 좀 늦고만.”
“흰가루병이 쪼깐 비치길래 방제도 허고.”
“멀로 혔당가?”
“황토유황 멩글어 썼는디, 잘 듣도만.”
“아이고, 후레 삼배라는디 잔에 술도 안 따랐네.”
“우체국장 되아분졌네, 나가.”
“자, 항꾸네 들제.”
“묵념이라도 허고 묵세. 어제가 세월호 뒤집힌 2주기 되는 날 아닌감.”
“그렇잖혀도, 잔 듬서부터 그 야그 혔네.”
“몇 순배 걸쳐 부렀는디….”
“‘나가 쥑였다’, 험서나 또 들세.”
“그려, 그리 들세.”
벗들 모두 가톨릭농민회와 보성농민회의 중심들이다. 몇 안 되는 후배들 다독이며 여전히 치열하게 산다. 말없이 술잔을 든다. 득량 강골마을 오가 화장실 간다며 일어선다. 벗의 눈자위가 어느덧 묽다. 4·16, 말만 들어도 울화가 치밀고 부끄럽고, 서럽다.
“….”
“….”
조성 시장리 김, 벌교읍 부용마을 강, 겸백 자포마을 황, 문덕 석동마을 이, 율어 모암마을 장, 보성읍 오서마을 최 그리고 나, 모두 육십의 아홉 수에 있는 정해년 돼지띠 갑계다. 이마 벗겨지고, 배도 나온 벗이며, 거뭇거뭇 죽음버짐 돋은 늙다리 사내들이다. 술잔을 입안에 붓질 못한다. 강골 오가 화장실에서 세면한 듯 물기 묻은 얼굴을 닦으며 나온다.
“아따, 지랄들 허고 자빠졌네, 늙은 것들이. 그럴나먼 자리 비워 작것들아. 딴 손님 받을랑게. 장날 대목 깨지 말고. 아, 인나라고, 어서. 빈 자리 읎넌 거 보고 저 아랫집으로 가는 치들 안 보여, 시방.”
자리가 비지 않은 것도 아니다. 치우지 않아 어지러운 술상이 두 자리다. 애당초 늙다리들이 주로 찾는, 국밥 파는 선술집이기도 하다. 주방할매 입이 늘 저렇다.
“누님. 예, 앉소.”
강골 벗이 할매를 챙긴다.
“아, 자식 죽고 멫 날 메칠 밥 굶고 있는 디서, 젊은 놈으 새끼들은 닭도 처묵고 피자도 처묵고 그라던디. 이 엠병헐 늙은 축들이 어찐다고 술잔 앞에 놓고 눈물로 잔을 채워, 금메.”
겸백 벗이 누님 잔에 소주를 따른다. 누님은 소주만 마셨다.
“크아, 목구녁이 그만, 쌔 허다.”
몇 순배 더 돌았다. 침묵이 안주였다.
경숙의 짐 받아 어깨에 걸머진다. 아들 방에 넣어줄 봄 이불이다. 짐은 가벼웠으나, 못박인 마음이다.
“낯빛이 어찌 채, 어둡소.”
“…눈 번연히 뜨고 보믄서도…이게, 무신 나라여.”
“속 끓이며 마셨것네, 다들.”
“그러게 말이시.”
벗들 속내인들 모를 경숙이 아니다. 운전대 잡은 경숙이 차를 차분히 몬다.
-. 유월이지만, 여전히 오월광주 속에 살고 있다
오뉴월 겻불도 쬐다 나면 서운한 법이러니, 봄꽃 지고 여름꽃 아직 이른 오월이면 지는 봄꽃마저 아쉽다. 피는 여름꽃 마중하는 눈길 또한 접어야 하는 시절이 유월이다.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오뉴월, 농번기다. ‘비 끝에 볕이 나니 날씨도 맑고 따뜻하다/떡갈잎 퍼질 때에 뻐국새 자로 울고/보리 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농사도 한창이요, 누에도 제철이라/남녀노소 바삐 나대 집에 있을 틈이 없어/적막한 대사립을 푸르름에 닫았’다는 농가월령가 사월령 한 대목, 그대로다.
온갖 모종내고 씨 뿌리는 오월이다. 가지, 오이, 고추, 토마토, 토란, 호박, 참외를 파종하거나 모종을 냈다. 4월 말에 파종하거나 모종내는 옥수수지만 올해엔 늦어져 오월 초에 모종을 사다 심었다. 상추는 시기 별로 나눠 파종하니 적기가 따로 없다. 상추, 부추는 겨울에도 하우스에서 키우는 집이 없지 않다. 참깨 파종하고 수수와 서리태는 돈 사지 않으려 먹을 만큼만 씨를 뿌렸다. 고구마 모종 심으려 치켜세운 밭고랑 다시 도닥이는 일에도 잔손이 많이 간다. 오이와 토마토 넝쿨이 자라 섶을 만들어줬다. 땅콩은 작년보다 네 도랑 더 심었다. 종묘상에는 해마다 처음 보는 종자가 넘쳐난다. 채종한 재래의 씨앗만 가지고는 밥상이 풍성하지 않다. 새로운 품종 들먹이지 않으면 농사 정보에 어둡다는 소릴 듣기도 한다. 아무려나, 오월 농사 중 제일은 모내기 채비다. 꼼꼼히 준비하고 서두른다. 위탁영농회사에서 모판까지 판매하지만 애당초 사서 쓰지 않는다. 관행농업 하지 않는 농가나 노인들이 짓는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못자리판을 만든다. 모가 자리를 제대로 잡아가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살핀다. 이른 모내기를 하려면 논에 물 댈 준비도 단단히 해둬야 했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병충해도 많아진다. 생태농업 하는 농사꾼들은 유기농 약제를 만들거나 구입하여 방제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방제는 적기, 정량에 맞게 했다. 더도 덜도 어긋나서는 병해를 피하지 못한다. 비온 뒤 끝, 햇볕 따뜻해지니 밭고랑이고 논두렁 어디고 빈틈 비집고 풀이 자랐다. 무성하기 전에 한 번 매줬다. 장마 뒤에는 예초기 작업을 해야 한다. 풀은 아무리 속아내도 해볼 도리가 없다. 멀칭 하지 않고 제초제 쓰지 않는 생태농업 하는 농사꾼에게 풀매기는 그냥, 농사일이어야 했다.
발등에 오줌 싼다는 유월 농사 역시 눈코 뜰 새 없다. 감자 캐 장에서 돈 사고 도시 피붙이들에게 보냈다. 고추밭 매고, 늦콩 심고, 마늘과 양파 거뒀다. 매실 따서 효소도 담았다. 효소도 가지가지였으니, 백초 효소까지는 언감생심이다. 논둑, 밭둑 다듬는 일은 장마가 곧이니 빠뜨릴 수 없다. 보리 심지 않아 타작 일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밀 거두는 건 너무 힘들어 손으로 거두지 않았다. 트랙터를 불렀다. 올해는 밀 수매량이 조금 늘어 밀 재배 농가가 한 시름 놓긴 했다. 농협 수매는 정부의 수매 고시 양보다 좀 더 늘려 잡곤 한다. 수매하는 날까지 잘 말려 건조도를 높여야 한다. 제대로 건조하지 않으면 등급에서 밀린다. 우리밀은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에서 전량 수매했다. 우리밀을 재배하는 일반 농가의 우리밀도 받았다.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의 주된 사업이다. 벼와 논보리 등 까끄라기 있는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가 6월 망종이지만, 비닐 모판에서 모가 10일 정도 빨리 자라는 요즘은 모내기가 망종 이전, 오월 중순부터 말엽으로 앞당겨졌다. 좀 더 일찍 모내기를 하니 병충해를 덜 입었다. 수확도 이르고 그만큼 많아졌다. 모내기는 이제, 남녘에서는 오월 농사일이기도 하다. 오뉴월은 죽은 송장 손이라도 갖다 쓴다는 농번기인 터, 오뉴월 하루 놀면 동지섣달 열흘 굶는다는 옛말이 참으로 무섭게 닿았다.
함에도, 오월이면 오월광주가 있다. 전국 방방골골, 처처에서 축제를 여는 계절의 여왕이라지만 오월은 눈물의 계절이기도 하다. 보성역 앞에서 갖은 5·18,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보성에서 집회가 열리기 시작한 때부터는 광주의 망월에 가지 않았다. 흔히 신묘역이라는 국립묘지에는 발길이 향해지지 않기도 했다. 보성 집회가 열리기 전, 광주 망월에 가더라도 구묘역을 더 찾았다. 35주년 째 맞는 오월광주는 여전히 광주만의 오월로 갇혀 있다. 오월광주를 광주만의 오월로 치환하여 부식시키고자 혈안이다. 오월광주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WTO에 맞서 자결한 이경해 농민열사의 죽음과 2005년 WTO 홍콩각료회의 반대 시위에 수백 명의 농민들이 참여하여 바다에 뛰어들고 홍콩 경찰에 붙잡혔던 싸움 역시 쌀 수입을 막겠다는 정부의 말을 믿을 수 없는 농민들의 분노, 오월광주였다. 현 정부는 17만원 대인 쌀값을 21만원 대까지 올리겠다는 대선 공약을 저버렸다. 올해는 도리어 14만원 대로 떨어졌다. 작금에도 농민에게 가해지는 오월광주다.
오월광주는 나의 삶도 바꿔놓았다. 1980년 5월, 서울에서 학생운동하다 구속되어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이듬해 3 ·1절 특사로 가석방되어 나온 뒤,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그해, 박경숙과 결혼하고 3개월 뒤인 1982년 2월, 고향집에 정착했다. 농사를 짓기로 했다. 10여 년 비워뒀던 집을 고치면서 논농사, 밭농사를 시작했다. 논농사는 논농사대로 밭농사는 밭농사여서 버거웠다. 아내, 경숙과 함께 하지 않았으면 어림없는 일이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학생운동과는 달랐다. 삶의 운동이었다. 발 딛고 서 있는 여기, 이 자리에 마땅한 운동을 하고자 했다. 가톨릭농민회에 가담했다. 한 시절, 갈멜수도원에서 3년을 정진한 수도자였다. 지역의 농민회와도 늘 함께 했다. 정부의 농업정책을 따르지 않고 농사짓는 게 남는 것이라는 현실 확인을 수없이 겪으며 아파했다. 가족농 중심의 농촌 소농구원론에 몰입했다. 농민 생존권 투쟁에 온몸을 내밀었다. 인류의 생존이 6인치 깊이의 땅의 표층, 토양층에서 생산하는 모든 먹을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며 땅을 살리고 지구를 보존하는 첨병의 역할이 농사라는 인식을 해를 거듭할수록 견고히 다져갔다. 농사를 지으며 생명과 평화에 대해 늘 고뇌했다. 마땅히 GMO를 배격하고 생태농업을 했다. 한반도 질곡의 원천인 분단문제를 활동의 중심 의제로 세우고자 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에 동참했다.
오이삼과 팔일팔은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영면한 날이다. 6·15와 10·4 남북 공동선언은 두 대통령이 일궈낸 한반도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목의 벅찬 마중물이었으니, 누렁이 이름으로 붙여 죄스럽긴 하나 늘 곁에 두고 품에 안는 반려견인 터, 부를수록 생생해지는 두 분의 죽음이 아쉽고 서러운 연유였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유신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지만 여전히 또 다른 형태의 오월광주 안에 갇혀 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 아내에게도 그 말은 못하겠다
아침나절 한바탕 쏟아지던 소나기 잠시 그은 틈 타, 피 뽑으러 논에 다녀온다. 논두렁에는 비 온 흔적이 없다. 여름 소나기 밭고랑을 두고 다툰다더니, 옛말이 틀리지 않는다. 마당에도 비는 그어 있다.
“그새 논에 갔다오요.”
“요, 며칠 논에 못 나갔드마 피가 그냥 천지시.”
비 오고, 아침나절이라 해도 땀이 온몸에 흥건하다.
“셋째헌티서 연락 왔습디다.”
수건을 건네며 경숙이 마음을 정했나, 묻는다.
“거그는 밤중일틴디, 머 헌다고 또 혔으까?”
“7월 건너고 8월 중순 지나서 오먼, 헙디다.”
막내딸이 봄부터 네덜란드에 오라고 재촉했다.
“그려?”
“가기 힘들먼 언능 못간다고 해불제는 그라요.”
경숙도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는 속내를 짐작하고 있을 터다.
“이래도 서운 저래도 서운헐 것 같이서, 말여.”
네덜란드 여행 제의가 반갑고 고맙기도 했다. 허나, 선뜻 응하기가 쉽지 않다. 막내네 가서 짐이 될까, 염려도 크다. 감기약 한 알 먹어보지 않았을 만큼 건강 체질이지만 장담할 수 없다. 보름이나 되는 장기간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기도 하다. 오뉴월 농번기 지나고 어정 칠월 건들 팔월이라지만, 보름씩이나 농사일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
“일 쪼까 쉬고 갔으믄 허요, 나는.”
딸도 손주도 경숙은 더 보고 싶을 게다. 막내 역시 고등학교를 타지로 보냈다. 이후, 쭉 떨어져 살았다. 결혼마저 네덜란드 청년과 했으니 아무리 씨억씨억한 경숙이라도 섧다 할 만큼 마음이 아릿할 테다.
“당신 혼자 댕게오믄 으짜것소.”
이렇듯 말해서는 아니 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말이요, 막걸리요, 시방.”
“대한항공이 네덜란드 공항까장 안 쉬고 간다는디 그러먼, 막내가 거그에 나와 있을테고, 머가 어렵것능가.”
한국에서 비행기 타는 것까진 언니나 오빠가 알아서 할 테고 네덜란드 공항에만 내리면 하나에서 열까지 편하게 모실 테니, 오라는 막내의 애타는 주문이었다. 사위도 꼭 오라고 권했다.
“바늘 가는 디 실 안 가먼 어찌케 꿰메 쓴다요.”
“막내 보고자븐 이녁 속내 아니께, 그라제.”
“나 맘을 그러코롬 알아준다먼 이참에 일 쪼매 내리놓고 항꾸네, 갑시다.”
“칠월이먼 몰르것는디, 팔월이넌 암캐도 밭 일이 좀 있잖여.”
경숙이 납득하지 않을 변명이다.
“칠월은 사우도 그라고 시부모들도 안 된다고 안 협뎌.”
칠월은 그쪽 휴가철이라, 한다.
“그짝은 건들 팔월은 아닌 게비네.”
“그라고 야그를 헝게 물을라요. 칠월이믄 진짜로 갈라고는 혔습디여, 당신?”
아차, 싶었으나 엎질러진 물이다.
“생각은 혀 봤제, 칠월이라먼.”
“8월에는 먼 일이 그리 크다요?”
아들이 집에 와 있으니 보름을 비운들 농사일 걱정은 크지 않다. 오이, 토마토, 호박, 참외 따서 먹고, 볕 나면 고추 따 말리는 소소한 일이다. 가을 농사 채비하고 겨울 김장 대비하는 건, 여행 다녀온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기간을 줄여서라도 다녀오려면 다녀올 수 있는 여행이기도 하다. 집 안팎의 이 일 저 일이며 농사일 모르지 않는 경숙이다.
“….”
큰애 도라지, 둘째 두산, 막내 민주화라 이름 지은 자식들 생각하며 ‘민주화된 세상에서 백두산에 올라 도라지 타령을 부르자’는, 오랜 숙원을 아직 이루지 못한 채 하물며 유신시대로 회귀하려는 흉계를 숨기지 않는 이 정권 하에서, 딸아이 사는 곳에 초청받아 가는 것이라지만 외국 여행에 나서는 게 참으로 마뜩찮다는 속내는 지금, 이 자리에서 경숙에게 차마 꺼내지 못하겠다.
-쌀값 하락, 분노를 삭이지 못하다
구월도 추분 전까지는 아랫녘, 윗녘으로 마실도 다닌다. 추분 지나니 온갖 곡식이 영글었다. 들녘이 누렇다. 보기에 참 좋다. 추석 지나고 개천절 즈음해서 이른 벼는 거두느라 여기저기 콤바인이 부산하다. 콤바인 작업 날짜에 맞춰 중순에 벼 수확을 마쳤다. 쌀값 근심이 크다. 해마다 그렇다. 서둘러 차를 몬다. 해가 중천에서 함지 쪽으로 기운 듯하다. 회의가 길었다. 경숙이 밭에서 겨울 쪽파를 심고 있다. 월동 작물인 양파, 마늘, 시금치, 봄동도 심어야 한다. 참깨 애벌 털고, 두벌 털려고 단을 쌓아 놨다. 콩도 타작했다. 가을 농번기다.
“땅콩은 폴쎄 캤어야 허고 호박 따서 광이다 들여야 허는 거, 알믄서도 어디 갔다 인자 오요?”
읍내 다녀오는 걸 경숙이 모르지 않는다.
“오늘 회의가 쪼까 길었네.”
“가실걷이 놔 두고 먼 야그가 그리 많다요?”
“가실이먼, 쌀값 투쟁 야그제.”
본 집회는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주관하는 민중총궐기대회였다. 쌀값 투쟁은 전․농 주관 사전 집회다. 참여 단체 별로 사전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부문 별 최대 인원이 집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가 길어진 이유이다.
“해마다 허는 투쟁인디 해질녘 그림자멩키로, 먼 야그가 그리 질다요?”
“전․농에서 정권 퇴진 투쟁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냥이여.”
“이짝이서 저것덜보다 더 쎄게 나갈 무신 수, 있답뎌?”
경숙의 말끝 마디마다 사분사분하지 않다.
“겨울 쪽파 종구는 쪼까 깊이 심제는.”
“첨 해보는 농사요?”
네덜란드 여행이 어긋나고 경숙이 좀 뒤틀려 있다. 7월에는 갈 수 있다면서 8월에는 갈 수 없다는 걸 경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네덜란드 여행을 물리친 진짜 이유를 차마 꺼내지 못한 탓이다. 경숙에게 민망하고, 면목 없다. 쌀값 투쟁 집회 마치고 나면 경숙에게 차마 가지 않으려 한 이유를 밝히리라, 다짐한다. 감추고 건네지 않은 말이 서로에게 없다. 함께 살아오는 동안 그렇다고 여겨왔다.
“머 허고 서 있소. 씻든 지, 허제는.”
“해 안즉 있응게 지금 캐제.”
해가 함지 쪽으로 기우뚱 걸쳐 있다. 땅콩 밭에 든다. 북주기도 잘 해주고 풀도 제때 매줬다. 까치가 파먹고 굼벵이도 많이 먹어치운 듯 수확은 예상보다 덜하다. 작년보다 네 고랑을 더 심었는데, 그렇다. 식구들끼리 나눠 먹을 정도다. 껍질 곱고 알은 굵다. 땅콩은 잘 씻어 말리면 보관이 쉬었다. 해를 넘겨 먹을 수 있다.
“해 지고만 호박은 언지 딸라고 그라요?”
호박넝쿨이 시들시들하다. 서리 내린다는 상강 전에 따야 한다. 늙은 호박이 보기에도 여러 덩이다.
“낼 아측에 따제, 머.”
해가 산등성이에 아직 걸쳐 있다. 지금 따도 늦지 않다. 회의 중에 느낀 감정이 결삭지 않아서다.
“찬도 별반 읎넌디, 언능 때 질러붑시다.”
경숙이 주방에 든 동안 몸을 씻는다. 쌀값 생각하면 절망감이 몰아쳤다. 쌀값 하락 추이와 대책에 대해 살핀 회의 자료를 되새김해 본다. 광주에서 온 젊은 활동가가 차분하게 설명해줬다. 몇 가지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작년 동기 대비 쌀값 하락률은 수확기인 10월 기준, 8%로 예상했다. 출하기인 11월과 12월에는 하락 폭이 더 클 것으로 봤다. 쌀 자급률이 90%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저가 수입쌀 수입 의지를 정부가 여전히 내려놓지 않았단다. 저가 수입쌀의 시장 격리 없이 쌀값 안정은 확보될 수 없다는 지적은 백 번 옳다. 밥상용 쌀 수입은 그나마 주춤하고 있다고 한다. 40만 톤의 쌀을 차관 형식으로 대북 지원을 하면 쌀(80㎏) 한 가마당 7∼8,000원의 가격 상승이 예상된다고 한다. 가격 상승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대북 쌀 지원은 인도적 차원의 동포애다. 퍼주기가 아니다. 정부의 대북 쌀 지원 외면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
“밥 다 식어부요.”
그랬다. 한 끼 밥에 들어가는 쌀값이 커피 한 잔 값보다 못하다. 아니 커피 값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쌀값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쌀농사로 애들 대학 보내지 않았다. 밭농사와 과실 농사가 그나마 보태주곤 했다.
“오메, 밥 다 식고마는 머 해쌓요?”
온몸에 찬물을 훅 끼얹는다. 경숙의 성화를 한 쪽 귀로 흘린다.
-백중밀을 손파종하다
초겨울 비가 매초롬히 왔다. 바람 끝은 갈수록 매서워졌다. 상강 지나고 서리가 내렸다. 서리 내리기 전에 거둬야 할 과일과 채소, 서리 맞아도 괜찮은 작물을 미리 갈무리했다. 씨생강은 서리 맞으면 보관이 어렵다. 모래 넣어둔 장독단지 항아리에 담아뒀다. 겨울이면 생강차를 즐겨 마셨다. 밭 두 마지기에 심었더니 양이 낙낙했다. 생강편강도 처음으로 만들었다. 대봉은 헐값이었으나 그나마 다 돈 샀다. 월하시는 깎아 곶감으로 처마 끝에 매달았다. 줄줄이 걸어놓은 모양이 보기에 늘 좋다. 가을걷이로 바쁘다. 오곡백과 거둔다지만 월동 작물 파종하는 막바지 가을 농번기다.
밭벼 거둔 뒤 밀밭에 넣어둔 퇴비가 고슬고슬하다. 작년보다 두 배는 더 뿌렸다. 손 직파를 할 요량이어서 많이 넣었다. 밀농사 역시 땅심이 우선이다. 그동안 파종기로 밀을 뿌렸다. 볍씨 손 직파 농법이 생태농업 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며 생산비 절감이 뒤따르고 생산량 역시 이앙기를 이용한 모내기 방법과 거의 동일한 양이 생산되는 걸 확인한 이후, 다른 농작물 파종에도 손 직파 농법이 널리 도입되었다. 관행농업 하는 규모가 상당한 농사꾼들은 요즈음 볍씨 직파 첨단 파종기로 씨를 뿌린다. 모판 비용 절감하고 모내기 일손 줄이는 효과에다 생산량도 오르는 까닭이었다. 벼농사의 기계화가 첨단화될수록 농업의 화석연료에 의한 의존도는 높아갔다. 두어 해 전부터 밀을 손 파종해야겠다고 하면서도 미적미적했다. 30 마지기 벼농사도 기계를 최소한 빌려 썼다. 직파기 사용을 마다하면 밀농사만큼은 콤바인으로 거둘 때 말고는 거의 손농사를 짓는 셈이다.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여몄다. 파종기 사용하지 않고 손 파종 해야겠다고 했을 때, 경숙은,
“최신 기계 직파기넌 그런다 치고, 분무 직파기도 안 써불라요?”
하고, 염려했다.
“그럴란다 말이시.”
“너르디 너른 디를 어쩌게 헐라고 그라요?”
“기계화 영농을 줄여야제.”
경숙도 그럴 심사를 지녀 왔다는 걸 안다. 농사가 소득 위주의 산업화된 농업으로 바뀐 지 오래다. 농산물의 수확량을 최대한 끌어올려 농가 수입을 높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환경 파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사 자체가 지구 환경을 지키는 첨병 역할을 맡고 있는 건 엄연하다. 논의 담수 효과는 대단하다. 비가 많이 오면 담아뒀다가 서서히 땅속에 스며들어 좋은 지하수를 공급해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시에 산업화된 농사로 인해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인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300만ton 이상의 농약이 한 해에 살포된다. 환경 파괴의 주 요인 중 하나이다. 농약의 과다 사용을 억제하고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기계화된 상업 영농을 줄여나가야 한다.
경숙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름 안 쓰고 농사 지서 보자고, 맘속으로는 혀 왔제만서도…당신, 괜찮을럅뎌?”
힘들지 않을까, 하는 표정을 드러내며 경숙이 동의한다.
“날짜는 언지가 좋겄는가?”
경숙이 다른 일 없는 날 잡아야 한다.
“열나흗 날에 서울 간다고 혔지라.”
“열이튿날 허먼 쓰것는디.”
“달력을 봅시다. 목요일잉만. 딴 일은 읎넌갑소.”
“종자를 멀로 헐까, 그간 고민을 좀 혔네.”
그동안 여러 밀 종자를 심어 봤다. 국수용으로 나가는 그루밀, 은파밀, 백중밀과 제빵용인 금강밀을 재배해 봤다. 수확량과 특성을 파악했다. 국수용으로는 백중밀이 그 중 나았다. 문제는 국수용 우리밀 소비량이 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금강밀은 수입산 제분보다 단가가 월등히 높다고 제빵사로부터 외면 받으면서도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금강밀을 심어야 돈 되지 않나 하면서도 제 2의 식량원이라면 당연히 국수용이어야 했다. 딴은, 꼭 돈 되는 농사만 짓지 않은 터다. 해서, 경숙에게 경제력은 0점이라는 핀잔을 들어왔다. 제빵용보다 국수용을 심는 게 맞다. 경숙에게 또 지청구를 들을까, 걱정이 들었던 게다.
“백중밀이 으째서라?”
경숙도 밀 종자의 특성과 수확량에 대해 알고 있다. 백중밀을 선호해 온 그간의 경작을 공유해 왔다.
“돈이라도 쪼매 되는 금강밀을 심어야 허지 않을까, 허기도 허고.”
“애당초 생각대로 심어부씨요, 이.”
“그걸로 심어야 쓰것제.”
고맙네, 마누라, 하는 말은 입안에서만 굴렸다.
열이튿날, 아침이 맑고 밝다. 경숙과 함께 백중밀을 손으로 뿌렸다. 힘이 들었다. 가을 하늘처럼 마음이 푸르렀다.
-. 경숙을 부르다
“성님, 회관 앞으로 나와 제계쓰시오, 이.”
동춘의 전화다. 회관 앞으로 나오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다. 회관 앞으로 나간다. 후배 동춘이 벌써 차를 대놓고 있다.
“어찌 자네가 왔당가?”
민둑골 상모가 오기로 했었다.
“밀을 손파종 혔다문서 괜찮허요?.”
동춘이 안부부터 묻는다.
“어제 하루 쪼까 쉬었드만 개운허네. 근디, 자네는 소 밥은 어짜고 이렇게 일찍허니 왔당가?”
“성님이 상모더러 소 밥 주러 제 집에 가자고 혔담서요.”
“자네, 서울 가먼 자네 집사람이 소 밥 줘야 허는디, 자네 각시 아프잖은가. 그리서, 상모더러 우리가 먼첨 자네 집으로 가서 소 밥 주고 자네 데리고 군청 앞으로 가자고 혔제.”
“오지랖도 넓으요, 성님.”
“상모는 그럼 어딨당가?“
“글안해도 새복부텀 와서 소 밥 같이 줬어라. 상모는 지그 마을 아재가 아침에 전화혀서 민중대회 항꾸네 가잔다고 헝게로, 성님은 나 보로 모시라고 허고는 부리나케 민둑골로 다시 갔제라.”
“오지랖은 자네덜이 더 넓네, 그랴. 자네 각시는 어쩐당가?”
동춘의 안사람이 위암 3기다. 방사선 치료 마치고 집에 왔다.
“서울 댕겨 오랍디다.”
“대통령 잘 뽑아 놨으먼 이런 나들이를 안 혔을텐디.”
“말 허먼 머 헐랍뎌.”
군청 앞에 상경할 차량이 와 있다. 싸우러 가는 동지들의 밝은 얼굴이 밝아서 서럽다. 차량 주위로 정보과 형사 둘이 나와서 아는 체를 하고 다닌다. 그네들의 표정이 동지들과 대비될 만큼 어둡다. 그 또한 밉상이다.
“잠시 말씀드리렵니다.”
버스가 출발하고 진행을 맡은 사무국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먼저, 소개할 두 분이 있습니다. 노동면으로 귀농한 분과 율어로 귀농한 분입니다. 잠시 말을 들어 보도록 하지요.”
박수 치고 인사를 끝내자 사무국장이 나머지는 유인물을 참조하되, 유인물 뒷면에 자기 핸드폰 번호 적어 놨다며, 각자 입력해 놓으란다. 이런 집회에 가면 꼭 한둘이 늦거나 헤맨다면서 떨어지면 바로 전화하라, 강조하고 마이크를 놓는다. 그 말을 듣자, 경숙이 아침에 건넨 쪽지 생각이 났다. 일행들과 떨어지게 되면 동춘 아재와 큰애 번호 적어 놨으니 공중전화로 전화 걸으라며 준 쪽지였다. 핸드폰이 없어, 이런 때면 경숙이 불안해했다. 피식, 웃음을 머금는다. 동춘이 핸드폰 없는 나를 힐끗 건네 보고는 그럴 염려 없기요, 하는 웃음을 자아낸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출발 때부터 날이 궂더니 윗녘으로 갈수록 더 흐리다. 그래도 풍경은 얄궂지 않다. 가까이 보이는 산에서도 멀리 보이는 산에서도 단풍이 참 곱다. 남녘은 단풍이 절정이다. 윗녘으로 갈수록 붉은 옷 벗은 산 중턱도 눈에 띤다. 가을 가뭄이 들어 단풍이 예년만 못하다지만 관광 차량이 하행 차선으로 적잖이 보인다. 봄과 가을, 농사일 시작 전과 농사일 마친 뒤 관광 여행을 다니던 마을의 단체 여행도 시들해졌다. 단풍 여행을 다녀온 지도 오래 되었다. 봉고차 한 대도 차지 않을 만큼 나들이 나설 만한 어르신들이 줄어서다. 집회 마치고 내려가면 경숙에게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자 할까, 생각하다가 네덜란드 여행도 못 갔는데 간다고는 할까, 지청구나 듣지, 하는 생각이 들어 또 피식, 웃는다. 아침, 집을 나서기 전 경숙의 핀잔이 떠올라 다시 입가에 웃음을 담는다. 비 올 지 모른다며 경숙이 배낭에다 넣어준 우산을 빼놓는데,
“그게 먼 짐이 된다고 빼요. 갖고 가씨요.”
하는 말에, 우산을 넣어 왔다. 요즘 들어, 경숙의 염려가 눈에 띄게 도드라진 걸 느낀다. 얼마 전, 입동 지나고 캔 무 묻을 구덩이를 파고 있을 때였다. 서글프게 바라보던 경숙의 눈빛이 떠올랐다. 비켜서라는 눈짓을 보내는 데도 경숙이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구뎅이 한나 파문서 어찌 그리 힘들어 해쌓소.”
“안즉은 심 쓰네, 그랴.”
“삽질이, 심알텡이가 한나도 읎어 보이는디라.”
“허허, 참. 무신….”
주머니 속에 넣어둔 쪽지를 확인한다. 시선을 돌린다. 풍경이 차창으로 빠르게 흐른다. 괜한 염려 놓으라며, 경숙을 떠올린다.
태평로 삼성생명 본사 앞에서 농민대회가 2시에 열렸다. 사전 집회였다. 집회를 마치고 행진을 시작했다. 광화문까지 가는 길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듯 험난했다. 방패로 무장한 경찰병력이 탱자나무 울타리처럼 인도까지도 틈새 없이 막았다. 밀리면 다시 밀고 저지당하면 뚫으면서 광화문에 도착했다. 민중총궐기대회는 처음부터 공방이 치열했다. 차벽을 뚫지 못했다. 차벽 앞의 대치 상황은 일방적으로 불리했다. 차벽에 밧줄을 걸어 차벽을 부수려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물대포를 연신 쏘아댔다. 직선의 물줄기다. 경찰은 고춧가루 범벅을 한 것처럼 매운 캡사이신과 최루액을 미친 듯이 뿜어댔다. 시나브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 받은 초겨울 비가 이팝나무 꽃잎 지듯 간간이 내렸다. 보성 동지들이 보였다 보이지 않다, 했다. 동춘 후배의 얼굴이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얼추, 내려갈 시간이 된 듯하다. 공방은 한층 격렬해졌다. 광화문에서 종로구청 쪽으로 향했다. 종로구청 네거리에서 상여를 메고 농민들이 앞으로 나선다. 뒤를 따랐다.
“여그 기시네. 한참 찾았고만이라. 내리갈 시간이어라, 성님.”
동춘 후배다.
“요로케 치열한 싸움이서 베갈기먼, 어찌 헌당가.”
여기서 밀리면 정권에 무릎 꿇고 말 것 같은 절망감이 밀려왔다.
“내리갈 질이 안 머요.”
정권 퇴진과 쌀값 보장을 외치며 상여가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상여 메고 나가는 젊은 농민들에게만 앞장서게 할 순 없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만장은 안 들었어도 따라갈 디까장은, 가야 쓰제.”
상여는 이 땅에서 민주주의가 종 치고 말았다는, 농사가 끝장났다는 농민들 내면에 담긴 분노의 상징이다. 이렇게 내려가면 밀밭에 손 파종한 밀씨가 싹을 틔우지 않을 것 같은 마음마저 스며든다.
“성님, 다들 지둘린단 말이요.”
물줄기가 파팎, 거세게 튄다. 폭압의 물줄기가 상여를 직격했다. 상여가 물대포를 맞고 부서졌다. 대열이 흩어졌다. 저네들은 부서진 상여 위에 계속해서 물줄기를 살포했다. 상여 틀에서 나온 통나무를 들고 젊은 농민들이 다시 앞으로 나간다. 아, 여기서 더는 물러설 수 없다. 앞으로 나가자. 싸움의 앞줄을 젊은 농민과 노동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지 않나, 하는 마음이 솟고라졌다. 앞으로 나섰다. 물대포가 저들에게는 총알이다. 일회용 비옷은 방패가 아니다. 물대포에 맞설 수 없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앞장섰다. 물대포가 계속해서 직사를 한다. 저들의 울타리가 돼 줘야 한다. 한 발짝,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간다. 의혈중앙 4,000인의 선두에서 투쟁의 중심으로 이끌었던 80년 오월이 떠올랐다. 오월의 광주에 대한 부채감이 되살아났다.
“성님, 인자 고만 갑시다.”
어느 새 다가와 동춘이 옷깃을 잡아끈다.
“한 발짝 더 가세.”
여느 정권 아래에서도 무릎 꿇고 살지 않은 농민들이다. 농산물 제값 받지 못하고 살면서도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논밭 갈아온 농민들이다. 여느 싸움에서도 불일듯이 일어선, 이 땅의 잉걸로 살아온 농민들이다. 물러서지 않으리라.
그 순간, 물대포가 얼굴을 퍽, 쳤다. 거셌다.
“경숙아.”
“경…,”
쿵, 머리를 찧었다.
첫댓글 우리 안에 평생을 따라다니는 하얀 속그림자가 있어 분단이고 오월이고 사월인 것을 소설이 감동적으로 그렸군요. 한 세월이 주검 앞에서 어찌 다 '휘어'졌는지 모르것소이다. 그 사이를 '어정 건들' 싸돌아다닌 우리들 '물푸레나무' 같던 바깥 그림자도 한 편의 소설이오. 한형! 이윽고 우리들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소. 마르고 스산한 쭉정이들이 그윽한 데로 스며들어 새 봄을 꿈꾸는 겨울비처럼, 한 세월 '눈물로 잔을 채운' 취기어린 저 '<농가월령가> 정월령 한 대목'처럼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