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리아2 OST 입니다.
1. 영국 (United Kingdom, UK, 정식명칭은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thern Ireland)
영국 국기 '유니온 잭(Union Jack)'과 영국왕실문장.
영국의 역사는 그야말로 시대를 호령하던 대제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영국은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전세계에 심어놓아 오늘날 현대사회의 규범 및 제도가 되는 기초를 닦아놓은 최초의
세계제국이라 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의 언어는 오늘날 지구에 사는 전 인류의 공용어가 되었다.
초기初期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영국이 대제국으로 출발한 시기는 대략 대항해시대 직후인 16~17세기 경 기존의 강력한 세력이자 경쟁자였던
'에스파니아 제국'과 '네덜란드 왕국'의 아성을 무너뜨린 후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 대항해시대때의 강대국이었던
'포르투갈'은 이미 스페인에게 합병) 이 시기의 영국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과거 강대국이었던 포르투갈,
네덜란드,에스파니아 등의 식민지를 강탈,합병 또는 양도받는 형식으로 차츰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해 나갔다.
중기 中期 (본격적인 근대의 시작)
기존 강대국들을 차례로 무너뜨린 영국은 동인도 회사의 설립과 전세계 곳곳에 건설한 자신들의 식민지로 인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며 명실상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세계제국으로의 성장 배경에는
잔혹하고 혹독한 '노예무역'과 식민지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뒷바침 되었음이다.
영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시장이자 유럽에서 중요한 물건들을 수입해오던 인도를 합병하고, 아메리카 13개
식민주의 설립,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통한 자신들의 패권을 확장시켜 나갔다.
18~19세기가 되면 또다른 강력한 경쟁자인 '프랑스'의 출현으로 인해 전 세계 곳곳에서 이들과 마찰을 빗었으나,
오히려 기득권이었던 영국이 강력한 신흥국가 프랑스를 누르고 더 많은 식민지를 폭발적으로 확장시키기 시작한다.
프랑스와 충돌을 빗거나, 그들로부터 식민지들을 뺏거나 돈을주고 매입한 식민지 중엔 캐나다(일부),루이지애나(매입),
아프리카 제반,인도(축출)등이 있다. 이와 같은 제국의 패권을 유지,확장시키기위한 밀고 당기기가 17세기 부터
19세기 까지 200년동안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도 이집트,호주,뉴질랜드,중동의 식민지화가 가속되었다.)
그러나 영국에 대한 최초의 무력독립을 이루어낸 미국의 사례와, 세계 곳곳의 자주독립 정신이 퍼지면서, 영국의 식민지
들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대다수의 식민지가 독립을 이루어 냈다.
후기 後期 (근대)
대영제국의 막강한 힘이 기울기 시작한것은 19세기 초반,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식민지들이 제 1차 세계대전을 빌미로
영국의 힘이 잠시 약해진 틈을 타 우후죽순격으로 독립을 시도했다. 이들 대다수 식민지들의 독립 시도는 일단 무위로
그쳤지만, 제 2차세계대전의 발발,종전終戰과 동시에 또다시 독립을 시도, 마침내 독립을 이루어 냄으로써 막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영국은 점차 그 지위가 축소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이같은 영국의 쇠락衰落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사건은 1947년 '영국령 인도'의 독립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의 식민지로 파동이 퍼져나가 인도옆의 파키스탄,중동전역,아프리카 전역으로 독립의 횃불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세계 전역의 식민지들은 수십개의 나라들로 독립하게 되고 마침내 1997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홍콩반환'
을 계기로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의 위엄에 최종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프랑스'와 함께 전세계 오대양에 식민지가 남아있는 나라다.)
현대 現代
현재 영국은 더 이상 미국과 같은 과거 자신들이 가졌던 파워를 전세계에 휘두르진 못한다. 과거 식민지들의 동요가
극심하던 19세기에 설립된 '영연방(The Commonwealth of Nation)'이 그나마 대영제국의 찬란하던 과거의 유산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이 '영연방'의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은
사실이며, 과거 식민지들의 종주국으로써 영국은 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UN 안보리 이사국회원)
또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중 Top10위권안에 들며, 미국과 더불어 소수의 나라들만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정식 보유국이다. 그리고 영국은 무엇보다도 현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며
미국의 강력한 후원아래 또다른 미래의 초강대국인 유럽연합(EU)을 견제함과 동시에 유럽연합을 이끄는 중요한 나라로
대표되고 있다.
또한 그들이 쓰던 영어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공용어'로 남아, 그들이 남긴 문화적,정신적 유산이 아직까지도 전 세계에
뿌리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이것들로 인해 그들의 영광을 대신해주고있다고 할수있다.
보너스 자료. 근대 영국의 군주 초상화와 소개 (위키펌 :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British_monarchs)
앤 여왕 Anne of Great Britain (재위기간:1707년 5월 1일~1714년 8월 1일)
근대 영국의 최초의 왕. 왜냐하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의 마지막 왕이기도 하면서 최초의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초기 대영제국)'의 왕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재위기간 중 영국은 스페인내에 위치한
'지브롤터'를 획득하였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영국 '스튜어트'왕가는 단절되었다.
조지 1세 George I of Great Britain (재위기간:1714년 8월 1일~1727년 6월 11일)
영국 하노버 왕가의 시조. 독일 출신 왕답게 '영어를 전혀' 못했으나, 신기하게도 영국을 잘 이끌었다고 평가된다.
이 왕 덕분에 입헌군주제(왕은 군림하고 총리가 실질적 통치를 행사한다)의 틀을 확립하였다. (왕이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의 '국어'를 모르니...당연히)
조지 2세 George II of Great Britain (재위기간:1727년 6월 11일~1760년 10월 25일)
별다른 업적이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별다른 업적이 없다'라는 것은 그만큼 이시기 영국이 안정된 시기였다는 뜻이다.
선대 조지 1세때처럼 그는 국왕으로 '군림'만 할뿐 실권은 총리가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의 평온한 사정과는 반대로 먼 대양 밖에선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의 치열한 식민지 확보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의 본격적인 '식민지 확장 정책'이 이 시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캐나다와 아시아 전역에서 프랑스와의 경쟁)
조지 3세George III of the United Kingdom (재위기간:1760년 10월 25일~1820년 1월 29일)
영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왕이다. 그의 치세동안 왕권이 강화되고 영국 국내의 평온은 계속되었지만
식민지에 대한 자세한 실정을 모른채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과세때문에 아메리카 식민주들의 반란이 일어나 미국이
독립하게 되는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영국 재정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나폴레옹'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하였으며 선대 왕에 의해 땅에 떨어진 영국 왕실의
도덕적인 회복을 꾀하였다. 이로인해 대표적인 오늘날 영국의 대표적인 도덕군주로 통한다.(그러나 말년엔 '정신이상'
으로 비참한 노년을 보낸다.)
그는 선왕들과 달리 자신의 모국이라 할 수 있었던 '하노버'를 평생 가보지 않았으며 (선대 조지1,2세는 모두 방문하였다.) 영어를 할 수 없었던 전대 하노버 왕조 왕들에 비해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조지 4세 George IV of the United Kingdom (재위기간:1820년 1월 29일~1830년 6월 26일)
선왕이자 부왕인 조지 3세가 정신병으로 정사를 돌볼수 없게되자 왕세자 섭정자격으로 영국을 통치하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현명한 군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잦은 왕실행사와 '버킹엄 궁','윈저 궁'등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명하는등,
대부분의 재위기간동안 방탕과 사치를 일삼았으며, 미국독립전쟁,혁명공화국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영국재정에 또 다시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납세자들은 불만을 품게되었으며 납세자들이 권력을 총리에게
집중시켜주는 바람에 선왕 조지 3세가 이루어놓은 강력한 왕권이 와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때문에 이 시기 왕권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입헌군주제에 의한 총리의 권한이 더욱 강력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윌리엄 4세 Edward VII of the United Kingdom (1830년 6월 26일~1837년 6월 20일)
선왕이었던 조지 3세의 셋째아들이다. 형인 조지 4세의 뒤를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노버 왕가의 마지막 남성군주였으며
선거법 개정과 의회개혁안등을 수용해 의회민주주의의 전통을 확립했다. 그는 또한 아주 불행한 왕이어서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 아일랜드 출신 여배우에게선 모두 10명의 자녀를 얻었으나 정작 정략결혼을 통해 낳은 두 딸이 어려서 모두 죽고
'적법한'후사가 없어 결국 왕위는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이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왕위를
물려받은 '빅토리아'여왕이 영국을 바야흐로 '대영제국'으로 올려놓게끔 한 영국의 명군이 되었다는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of the United Kingdom (재위기간:1837년 6월 20일~1901년 1월 22일)
영국 역사상 손꼽히는 군주이자 가장 훌륭한 여왕으로 꼽히는 왕이다. 그녀는 후사가 없었던 불행한 윌리엄4세의 조카
로써, 영국 왕실의 법칙상 '적법한' 승계를 통해 즉위한 왕이다. 여왕이 즉위하던 당시만 해도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과
식민지 유지비용, 선대 군주들의 막대한 사치로 인해 많은 부담을 떠맏고 있었으며 노동계층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투쟁과 요구로 인해 시끄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로 인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깨달았으며,
매일 수상과의 면담을 통해 군주로써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익혀나갔다.
강하고 소박하며, 정직한 성격으로 내각의 보고서를 한 자, 한 구절까지 면밀히 검토하는 성실한 여왕이었다. 주요 업적으로 선거법 개정,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국과의 전쟁, 아일랜드 문제, 초등 교육법, 크림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 등 국내외의 중대 문제를 교묘하고 과단성 있게 해결하여 제국의 번영을 실현시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세기 대영 제국이 번영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여왕으로, 그녀가 정치를 하는 동안 영국은 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림과 동시에 모든 분야에서 발전해나갔다.
그녀는 또한 최초의 영국령 인도의 황제로 즉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인도가 독립할때까지 영국왕은 인도황제도
겸임하게 된다.)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군주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짐바브웨와 잠비아 사이의 빅토리아 폭포를 비롯한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지명과 건물명으로 남아 있다. 또한 오늘날 남아있는 유럽 군주들의 대부분은 그녀의 자손들이다. (위키문서 '빅토리아'편 통채로 인용)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of the United Kingdom (재위기간:1901년 1월 22일~1910년 5월 6일)
하노버 왕가의 마지막 군주이자, 그 과도기에 있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왕가의 유일한 군주이다.
그는 전임 군주였던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으로써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칭송받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후광때문에 비교적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왕이지만 왕세자로 있을 동안 여왕을 대신하여 각종 국제,외교계 행사에
참석하여 대영제국의 왕세자로써 영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전세계에 대영제국으로써의 국위를 높였던 인물이다.
왕으로 즉위해서는 왕세자 시절때의 경험을 살려 각종 외교시험대에서 영국에 유리한 입장을 관철시켰으며 그 뛰어난
외교술이 그를 비교적 성공한 군주로 인식되게 하고있다. 그가 죽고 즉위한 조지 5세가 왕조의 명칭을 '작센코부르크고타'
에서 '윈저'왕가로 변경함으로써 하노버-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조지 5세 George V of the United Kingdom (재위기간:1910년 5월 6일~1936년 1월 20일)
영국 하노버-작센 왕조를 대신한 '윈저'왕가의 창시를 알린 군주이다. 그가 하노버왕가의 명칭을 버린데에는
하노버가 위치한 독일이 일으킨 제 1차세계대전이 큰 몫을 한셈이다. 독일이 근대 최초의 세계대전을 벌이자 그는
즉시 독일식의 모든 작위,칭호를 버리고 윈저로 개명함과 동시에 전왕들과 다른 순수 영국혈통임을 내세웠다.
또한 그가 즉위할 당시 수백년동안 식민지로 있었던 이웃국가 '아일랜드'의 독립을 승인해주었으며 왕세자 시절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자유롭게 전세계에 흩어진 영국령 식민지들을 돌아보는등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인해 영국국민들의
인기도를 한층 높였으며, 더욱이 독일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영국 런던에 끝까지 남은 것으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두터운
존경과 신망을 얻게되었다. (이때의 전통으로 인해 불과 몇십년만에 또다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영국 런던이 대규모
폭격을 맞고 영국 왕실의 상징인 버킹엄 궁마저 일부 파괴될때 조지 6세가 선왕의 전통을 들어 폭격이 일어나는데도
버킹엄 궁을 지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제 1차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영국의 국제적 지위를 승전국으로 함으로써 대영제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으나
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고 식민지들의 독립화에 불을 붙이게 됨으로써 빅토리아 여왕이후 기울어 가던
영국의 운명에 더욱 채찍을 가하게 된다.
『에드워드 8세와 세기의 스캔들의 주인공인 '미세스 심슨'의 사진』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of the United Kingdom (재위기간:1936년 1월 20일~같은해 12월 11일)
근대 영국의 군주들 중 영국인들이 잊지 못하는 군주가 있다면 당연 에드워드 8세일 것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역대 왕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에 피'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과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 재위기간동안 어느 왕보다 숱한 논란거리를 불러일으켜 영국 왕실역사상 가장 특이한 군주로 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왕실인물이라면 누구나 꿈꿀 왕의 자리, 그것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대영제국'의 왕이 되엇음에도
불구하고 왕세자 시절 사모하던 미국출신의 그것도 이혼여성인 월리스 월필드 심슨(Wallis Warfield Simpson) 과 단지
'결혼'을 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즉위 1년만에 왕위를 자진포기하여 윈저공公으로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격하시킨 다음
원하던 여성과 결혼을 한것이다.
그는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통해 영국 국민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또한 위대한 신분의 왕이 몸소 천한 신분의 여자와 결혼을 함으로써 영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의 호기심과
판타지를 심어주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왕실에게는 '치욕적인' 군주로 기록되었으나 영국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의 평민들에게는 '사랑을 위해 왕위도 포기한 남자'로 각인되어 오늘날까지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왕실에서 물러난 뒤에도 끈임없는 사고를 일으켰는데, 대표적인 예로 1939년 제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직 영국의 국왕임에도 불구하고 적국인 '나치 독일'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발언을 해 영국 왕실을 더욱 곤욕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그 뒤 독일이 패망하자 자신이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1972년 사망할때까지 심슨부인과 전세계를 누비며
여생을 행복하게 살며 모든 것을 가졌던 남자로 기억되고 있다.
조지 6세 King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Emperor of India
(재위기간:1936년 12월 11일~1952년 2월 6일) (여기부턴 많은 부분 위키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힘들어서..)
조지 6세는 빅토리아 여왕 때인 1895년 12월 14일 요크 공작(훗날의 조지 5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특히 위염 때문에 자주 고생했으며, 말을 더듬었다.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하야하자 그의 동생인 조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에드워드 8세의 퇴위는 전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로서의 수업을 전혀 받지 못했던 조지 6세는 3주간의 간단한 준비 후에 공식적인 행사에 들어가야만 했다.
건강하고 젊은 나이에 왕이 된 형이 있었기에, 자신이 왕이 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는 갑작스런 형의 퇴위와 함께 자신이 왕이 되자 모든 것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한 가지씩 시험 대상에 올려놓고 얼마간 지켜본 후 결정을 내리는 신중함을 보이곤 하였다.
당시 유럽에는 전체주의 세력 파시즘과 나치즘이 팽배해 있었고, 에스파냐가 프랑코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독일의 총통 히틀러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자칫 전쟁의 조짐마저 보이자 그는 평화를 대내외 정치의 우선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유화 정책과 평화를 내세우는 조셉 오스틴 체임벌린이 수상이 되자 조지 6세는 그를 일단 지지하였다.
체임벌린의 노력으로 외교적으로 평화적인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독일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은 쪽으로 진행되어 갔다. 여기서 조지 6세는 평화보다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고통 속으로 국민들을 다시 몰아넣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끝없는 탐욕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1939년 6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영국과 미국 간 공조 방안을 마련하고 돌아온 조지 6세는 곧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날 밤 방송을 통해 조지 6세는 영국 및 영국 연방 전역에 전쟁 선포를 알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은 독일군의 공습 때문에 어느 전쟁 때보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국민들과 함께 한 조지 6세는 1940년 9월 공습 때 포격으로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위험한 상황인데도 조지 6세는 인근 이스트엔드 지역의 상처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곤 하였다. 조지 6세가 국민들과 함께 한 시간은 동생인 켄트 공작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1942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부왕이 행했던 것처럼 1943년부터 군사단과 병기 제조 공장 등을 수시로 시찰하였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10일 전에 버나드 몽고메리의 지휘 하에 출정을 기다리는 영국군과 함께 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5월 8일 마침내 독일이 항복하였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 해군에 복무해 독일과 싸웠던 경험이 있으며, 그것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영국 왕실이
실천하던 고귀한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쥬'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것을 현대에까지 적용시키고 '겉모습으로만' 보여주는 귀족의 의무가 아닌, '진정한' 행동에 의한 의무를 실천한 왕으로서 현재까지도 영국 국민의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위 대관식이 열렸던 1936년의 즉위식과 1952년의 장례식은 전세계 최초로 TV생중계된 영국국왕의 대관식,장례식으로
유명하다.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II (재위기간:1952년 2월 6일~ 현재)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년 4월 21일~)는 영국을 포함한 16개국과 기타 국외 영토와 보호령의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영어: Elizabeth Alexandra Mary Windsor)이다. 호칭은 ‘영국 연방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영어: 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of the United Kingdom)’이다. 그녀는 1952년 2월 서거한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또한, 영국 외에도 (실질적으로는 연방총독이 대표하고 있지만)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바하마,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루시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벨리즈,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키츠 네비스의 여왕이기도 하다. 여왕을 모시는 영국 연방 16개국의 총인구는 보호령까지 포함해서 1억 2900만 명이 넘는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셈이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정치적 문제에 좀처럼 개입하지 않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밖에도 영국 성공회의 수장, 노르망디 공작,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피지의 최고 추장, 함대 사령장관 등의 다양한 직함을 보유하고 있다.
1951년에 들어서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엘리자베스는 자주 왕실 행사를 대행하게 되었다. 특히 건강을 1순위로 요구하는 외국 순방은 더욱 엘리자베스의 몫이었다. 그녀가 케냐에 도착했을 때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폐암으로 서거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의 서거는 자동으로 그의 맏딸이자 웨일스 공작 부인의 작위를 받은 엘리자베스에게 왕위가 돌아감을 의미했다.
조지 6세가 서거하고 다음 군주로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올랐을 당시 그녀는 케냐에 머무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에게 부왕의 부고 소식을 전한 사람은 남편인 필립 공이었다. 그 후 왕실 일행은 즉시 영국에 돌아왔다.
맨 처음 엘리자베스는 1952년 2월 6일 캐나다 추밀원에 의해 캐나다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녀의 영국 여왕으로서의 선포는 다음날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이루어졌다.
1년 후인 1953년 3월 24일에 조모 메리 대왕대비가 폐암으로 서거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임종 시 그녀의 소망은 손녀의 대관식이 뒤로 미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1953년 6월 2일 TV를 통해 전 세계에서 2,5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웅장하게 거행되어 여왕으로 정식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대전쟁 후 위축되어가던 영국의 대외적 위상 회복과 국내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화려하게 진행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The END-
(엘리자베스 2세 부분과 조지 6세의 대부분은 위키백과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힘들어서 그랬음. 용서해주세요ㅠㅠ)
p.s 프랑스편도 해야되고 서유럽 모든 국가들을 써야되는데 영국편을 너~~~무 크게 벌려놔서 겁남 ㅠㅠㅠ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각국은 메테님처럼 초 간단하게 작성해야겠네요 ㅡㅡ 아니면 국왕들만 정리하던가..
(그냥 하지말까...? 반응을 보고 결정해야겠군..ㅋ)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현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한 여왕들 수명이 정말 길군요. 막중한 업무에 시달렸을 텐데 의외이군요.
영국 왕의 업무량이 높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글쎄요. 군림은 하나 통치는 하진 않겠다는 모토니 업무 자체는 많지 않았겠으나, 명색이 일국의 '왕'이다 보니 행동거지 하나도 함부로 할 수 없어 스트레스가 엄청 많았을 거 같은데요. 거기다 각종 회의 등에도 참석은 해야 했으니 한가했다고는 볼 수 없죠.
정사를 돌본다고 시달리진 않았을테지만
역시 국가의 상징인지라 공식행사 다 참석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는게 60년이면 편하지만은 않을듯
역시 영국 왕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만국의 귀감을 살만하군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외계인설도 존재하죠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어째선지 서브컬쳐계로 들어가면 마법세계최강국가가 영국;;
대체역사계열로가면 영국이 2차대전패전시 영국왕은 에드워드8세 ㄲㄲㄲ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유가 마눌님이 단순히 이혼녀라서기보다도 나치의 간첩이라서라는 설도 있더군요... 물론 줏어들은 이야기라 ;;
근데 엘리자베스 여왕의 작위중 노르망디 공작도 있다는게 좀 아이러니 하네요;;;;;;;
노르망디는 프랑스 땅인데 프랑스가 가만 있을런지...? 아님 그냥 뽀대용 작위인가요?
형식적인 작위입니다. 헨리3세가 공식적으로 포기했죠.
1066헤이팅스 전투에서 노디망디 월리엄이 (프랑스 봉신) 앵글로 색슨왕 해럴드를 물리치고 영국을먹고 노르만 왕조를 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에 영국왕의 영토가 꽤 있었습니다
손으로 그린 초상화와 색감...분위기.... 대단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포클랜드 전쟁은 다루지 않으셨네요... 늙은 사자의 위엄을 보여주었는데요...
포클랜드 전쟁 말고도 상당히 많은 중요한 사건들을 빼먹었습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다른 국가편들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되도록
100% 투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약간 틀린게 있다면 루이지애나 는 당시 미국(독립)이 나폴레옹 프랑스로 부터 백만달러에 구입한걸로 알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