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 AI의 답변 -
일상생활에서 **'쩨따나(의도)'**를 관찰하는 것은 마치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있는 운전자의 손을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그 행동을 일으키는 **'마음의 엔진'**을 확인하는 연습입니다.
일상에서 바로 실천해 보실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3가지를 정리해 드립니다.
1. '하기 직전'의 멈춤 (0.5초의 미학)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어떤 물리적 행동을 하기 직전에 마음을 잠깐 멈추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실천법: 전화를 걸기 직전, 문을 열기 직전, 혹은 누군가에게 말을 내뱉기 직전에 찰나의 순간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 하는가?'라고 마음을 챙깁니다(사띠).
관찰 포인트: * "지금 이 말을 하려는 의도가 상대방을 비난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도와주려는 것인가?"
"지금 이 음식을 먹으려는 의도가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려는 것인가, 아니면 탐욕(맛)에 이끌린 것인가?"
효과: 이 찰나의 관찰이 **'아꾸살라(해로운) 쩨따나'**가 업으로 이어지는 것을 중간에 끊어주는 강력한 브레이크 역할을 합니다.
2. 몸의 움직임과 의도를 연결하기
불교 수행에서 '걷기 명상'을 할 때 발을 들기 전 '들고자 하는 의도'를 먼저 관찰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실천법: 일상적인 동작(컵을 잡을 때, 앉을 때, 일어설 때)에서 몸이 움직이기 아주 미세한 순간 앞에 **'의도'**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관찰 포인트: "마음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몸이 움직이는구나"를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의도) → 몸이 일어남.
'손을 뻗어야지' 하는 마음(의도) → 손이 나감.
효과: 몸과 마음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마음(의도)이 동력이 되어 몸을 움직인다는 **'명색(名色)의 구분'**을 일상에서 지혜로 체득하게 됩니다.
3. 감정의 '뒷면'에 숨은 의도 찾기
우리는 보통 화가 나면 '화가 났다'는 감정에만 매몰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어떤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실천법: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는지 그 **'방향성'**을 봅니다.
관찰 포인트: * 화가 났을 때: "이 화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해코지)로 이어지고 있는가?"
자랑하고 싶을 때: "나를 높이고 남을 낮추려는 의도(자만)가 깔려 있는가?"
효과: 감정은 속일 수 있어도, 그 끝에 달린 **'의도의 꼬리'**를 잡으면 내가 어떤 업을 지으려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 일상 수행의 핵심 팁
"의도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이 끝난 뒤에야 "아, 그때 내 의도가 이랬구나"라고 후회하며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연습이 반복되면, 행동이 일어나기 동시에 혹은 직전에 의도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습관적인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 **'꾸살라 쩨따나(선한 의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오늘 하루 동안, 가장 자주 하시는 사소한 행동(예: 휴대폰을 집어 드는 일) 하나를 정해서 **'집어 들기 전의 마음'**을 딱 세 번만 관찰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혹시 이 과정에서 마음이 너무 빨라서 관찰하기 어렵다면, 마음을 조금 더 천천히 가라앉히는 '호흡 관찰' 방법과 병행하는 법을 안내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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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응답: 말하기 전에, 또는 반응하기 전에, 또는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0.5초라도 잠깐만 멈추고 나서, 행위 하라는 인공지능 에 이 아이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한번 해 보았습니다.
즉, 제가 문단속을 해야 하는데,
나이 많으신 어머니가 대신 문단속을 하고 계셨습니다. 평소라면 제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머니께, "그것은 제가 할 테니 힘들게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을 텐데, 오늘은 0.5초 동안 멈추었다가 말하려니까 자연스럽게 자애의 마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 말이 아주 부드러워졌고 어머니에게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어머니를 위하고 어머니의 행복을 바라는,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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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시 멈춤도 권한 적 있고, 천천히 하는 것도 권한 적 있지만, 특정 행위를 반복하면서 해당 의도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다만 미세한 법은 알기 어렵기에, 초심자는 거친 법부터 훈련하는 단계를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AI에게는 좀 안타깝지만, 언어적 생각을 많이 하는 거는 좋지 않아요. 그 방식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면, 사실 즉 법과 멀어지게 합니다.
사전에 '생각'하기 보다는, 사후에 (언어적 생각을 하기 보다는 기억에서) 사실 즉 법을 '발견'하려고 해야 하는데, 좀 훈련이 된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물론 실시간 발견을 할 수 있으면 더 좋지만, 훈련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에는 거친 법에서만 가능한 편입니다.
예, 방문객님. 말씀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제 상황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예, 사실이 그랬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연습이나 훈련이 거의(어쩌면 아예)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떤 법이 평소에 제게 드러나는 경우는 대체로 평상시의 마음과 다를 때이고, 그 이외에는 어떤 법이 드러났는지 모른 채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의도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저는 거의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탐욕이나 성냄이나 질투나 인색이나 자만이나 ... 등등의 법들이 제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주로 평상시의 그 마음과 달랐기 때문에 알아차리 편이었습니다. ‘아, 이것은 탐욕이구나, 이것은 성냄이구나, 이것은 질투이구나, 이것은 자만이구나. ... ’ 라고.
그래서 의도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한편, 며칠 동안 의도(쩨따나)에 대해서, 그리고 열의(찬다)에 대해서 AI에게 많이 질문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이나마 개념적으로 구분해 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또 돌아서면(자꾸 익혀 놓치 않으면 잊어버릴 것도 같았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훈련이 거의 없어서.
그러나 또 한편으로 다른 법들에 대해서는, 사띠 하고 걸으면, 불선법들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AI에게 한번 물어보려고 합니다.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마음이 아주 느긋하고 평온하고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그런데 밭으로 갈 때에는 마음을 좀 느긋하게,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처럼 평온한 상태가 되려고 애를 좀 써보아도 그렇게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평온하고 느긋한 마음이 되는 날도 있었습니다.) 안 되는 날은 마음이 밭일을 놓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할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과연 이것이 모든 마음 순간에 함께 일어난다는 반드시들에 속하는 심소법 중의 하나인, ‘의도’인가 하고 AI에게 물어보려고 합니다.)
저도 가명님과 비슷합니다. 평소에는 의도라는 다리는 쏙 빼고, 내적 충동과 외적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다이렉트로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종종 도드라지는 마음(탐진)이 거칠게 발생할 때만 '발생한 마음 기저의 조건- 나아가려는 행위의 의도' 따위를 자동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좀비처럼 다니다가 '경보'가 울릴 때만 '미세한 감지'가 작동.... 이거시 중생의 맛 아임까~
아, 예. 황벽님. 이렇게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이 나름대로 법을 염두에 두고 계시네요. 황벽님도 장하십니다.
불교는 수행으로 말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를 후발주자라고 비유하면, 아직 갈길이 멀기만 합니다.
적절한 말은 아니겠지만, 찾아보니 이런 말이 있네요. 임중도원(任重道遠), 제 경우도 여기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위에서 알아차림할 때는, 언어적 생각에 우선하여 발견하라고 하는 건요...
탐욕이나 성냄이나 질투나 인색이나 자만... ... 이거는요. 알아차림에서요. 알아차림을 하려고 한다면요. 적절한 접근이 아닙니다.
나름 알아차림을 열심히 한 바 있는데요. 다음의 말을 하면,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요. 성냄과 질투는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 모두 기본적으로는, 그냥 밀어내는 힘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림에서 알 수 있는 거는요. 밀어내는 힘이라는 점, 그리고 그 힘이 얼마나 강하고 약한가, 그 밀어내는 힘을 촉발시킨 '마음의 질감(수온)'이 어떤 것인가, 이 힘과 함께 하는 마음의 질감은 어떤가... 그런 것들입니다.
물론 아주 미세하게 들어가면, 힘이라도 색채라고 할 것의 차이는 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거의 알기 어렵습니다. 그거까지 아는 사람은 정말 빡세게 한 사람... 빡세게 했어도, 정확하게 분별하기는 힘듭니다. 거의 불가능해요. 질투나 분노 등의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다른게 아닙니다.
이름은 그냥 상황에 따라 붙입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면 분노, 저런 상황이었으면 질투... 그렇게 이름붙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황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은요. 대단히 복잡한 과정입니다. 복잡한 만큼, '드러난 바로 이 법' 즉 '사실'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면 알아차림을 못합니다. 알아차림을 한 바 없는 사람들이 분노니 질투니 알아차림으로 구별한다고 해요.
알아차림을 정말 했다면요. 위에 적었듯, 밀어내는 힘, 그 힘의 강약의 강도 차이, 함께 하는 마음의 질감, 아주 미세할 때 간혹 색채라고 할만한 어떤 차이를 발견한다, 알아차린다...라고 말합니다. 언어적 표현을 하더라도 그래요. 그게 사실에 입각해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탐, 진, 치를 말합니다. 탐은 뭔가? 당기는 힘입니다. 진은 뭔가? 밀어내는 힘입니다. 치는 뭔가? 무기, 기억에 없음, 분별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밀어내는지 당기는지 모름... 등등의 표현으로 할 수 있는 겁니다. '명료한 의식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기도 하구요.
이러한 삼독(탐, 진, 치)이요. 가이드라인이예요.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그에 터 잡아 좀 더 미세하게 '사실' 즉 '법'을 발견(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너무 많은 단어를 가져오지 마세요. 단어는 단어일 뿐입니다. 단어는 '그 사실 즉 법'이 아닌 상황 등까지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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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에서 활동한지 오래 됐지만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아차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알아차림을 하는게 아니라요.
생각은 생각일 뿐이지, 생각이 알아차림은 아닙니다. 알아차림은 알아차림입니다. 생각은 생각입니다. 이것이 저것이 되지도 않고, 저것이 이것으로 변하지도 않습니다.
예, 방문객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저는 이해하지 못하여 그냥 남겨두겠습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려고 제 나름대로 추론하자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제가 희론(사량분별, 빠빤짜)에 빠질 것 같아서 그냥 모른채로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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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래는 저의 평소 생각입니다.
사띠는 사람들마다 그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초등학교 수학, 중학교 수학, 고등학교 수학이 그 수준에서 각각 차이가 나듯이. 그래서 초보자는 요만큼의 사띠가 있고, 중급자는 이만큼의 사띠가 있고, 고급자는 저 만큼의 사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단계에서 꾸준히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꾸준히 해나가면 되죠. 채찍들고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노예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알아차림을 한다면, 알아차림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알아차림이 아닌 것을 하면서 알아차림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어리석음을 더 키우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발바닥 감촉 같은 정말 혼동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자주 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발바닥 감촉 같이 쉬운 거, 누구나 처음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서, 알아차림이 도대체 뭔지 그 감을 잡아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밀어내는 힘 등의 색채라 이름할 것을 알아차림의 대상인 드러난 바로 이 법(현상, 사실)에서 알려고 하면,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부터 자신을 연습시키지 않고, 자신을 과대 평가해서 말만 보고 알아차림을 하니까 , 만구 "나는 알아차림한다"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즉 생각을 하면서 알아차림한다고 착각하는 거죠.
이제 조금 관념 말장난에서 한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 여유도 있는데요. 법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법을 파악하려고 해야 합니다. 사실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게 실참에서는 출발점입니다. 안그럼 출발도 몬하구요.
예, 방문객님.
지금 말씀 해 주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즉 실참하시오. 라고 지적해 주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가이드라인...신 수 심 법 ...난이도 순이예요.
신 수 심 법 을 동시에 할 수도 있지만, 순차적으로 행하며 자신을 준비시켜 나갈 수도 있어요.
부처님 당대 빼어난 요가행자가 많았죠. 특히 부처님 초기 빼어난 제자는 예외 없이 요가행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을 보면, "네가지 동시에 함께 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글이 나와요.
빼어난 요가행자의 특징은 뭔가? 집중력이 뛰어나요. 특히 무색정이 알려질 정도면, 최고봉 수준이라... 그런 사람이 동시에 할 수 있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경]등을 언급하며 "나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그냥 조건을 살피지 않는 거죠.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조건을 살펴라"고 하셨어요. 그런즉 조건을 살펴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러면서 소위 정정진을 가미하구요.
글을 보면, 가명님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말만 있어요. 소위 실참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글에서 대략 알 수 있거든요. 그 사람의 표현력을 떠나 어느 정도 알 수 있어요. 표현력이 좋으면 더 잘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도 나쁜 건 아닙니다. 스스로 그런 줄 알고, 그에 머무르는게 스스로 찾은 행복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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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도 나와요. 불은 그 조건에 따라 이름지어진다. 장작에 붙으면 장잣불, 호롱에 붙으면 호롱불... 하지만 그 모두 불(이라 이름할 것)이다... ... ... 마찬가지로, 형상에 대응해서는 안식, 맛에 대응하면 설식... 하지만 그 모두 식(즉 감지작용이라 이름할 것)이다...
마찬가지입니다. 미움, 분노, 질투, 시기, 원망... 그 모두 밀어내는 힘입니다. 형성작용입니다. 다만 그 조건에 따라 마움, 분노, 질투, 시기, 원망 등이라고 이름지어집니다.
장작불이든 호롱불이든 불을 보려고 하는 자는 장작과 호롱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모두 '불'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불을 알려는 자는, 단지 불을 봅니다. 불을 알아차림하는 자는 오직 불을 살핍니다. 불이 무엇인지 알려고 합니다. 그 불의 연료가 무엇인지는 또 다른 알아차림 영역입니다.
쓸데 없는 관념의 나열은 아무것도 알게 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계 정 혜 3학의 [정]이 없게 됩니다. 소위 실참은 [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참이라 이름해 줍니다. 알아차림이나 삼매요...
위에 인용한 [경]에서도 알 수 있듯, 수많은 [경]에서 말하는 바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 방문객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루 중 실참할 때에는 실참에 마음을 기울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단지 저의 이야기입니다. 실참에 대해서는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드는 비유입니다. 여기 철봉대가 있고 김철수는 종종 철봉대 근처에 갑니다. 그리고 턱걸이를 해봅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개도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자주 철봉대 근처에 놀러 갔지만 한 개도 못해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한번 오더니 턱걸이를 몇 개씩 해 냅니다. 젊은이 뿐만 아니라 장년, 노년에 이른 사람들도 턱걸이를 자신의 형편에 맞게 해냅니다. 심지어 어떤 어린이들도 턱걸이를 거뜬하게 몇 개씩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김철수는 교학은 좀 배웠지만 자신은 턱걸이를 하나도 못해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실참에서는 초보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넷에서 논점이 된 바 있는데, 지식파와 체험파를 나눌 때, 저는 지식파입니다. 지금도 동일한 입장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게, 종교에서 지식파가 쉬운게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생각만 한다고 이해가 성립하지 몬해요.
불교는 대부분 최소 천년도 더 된 텍스트들인데요. 거기서 사용되는 말의 의미, 천년전의 말의 의미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어떻겠어요?
일상어를 놓고 봐도, 오늘날 고려시대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천년전 고려인과 만나서 대화가 잘 되겠습니까?
그런데 다행히 특히 불교는 법 즉 사실 곧 현상을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 단어가 의미하는 사실을 찾으면 동시대와 동등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체험구조 즉 경험구조가 천년전과 변한 것은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실에서 뜻을 찾아 '이해'해야 하는겁니다. 구체적 이해를 할 수 있는 거죠. 고어를 공부하지 않아두요.
제가 글로 적는 것은 이해를 위한 것, 이해를 하자는 것이지...어떤 체험을 해야 하고, 체험으로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앎에 있어 체험과 지식은 본질적 차이는 없습니다. 행에서 좀 차이 나지만, 앎도 물들게 하니 부족하진 않아요.
체험으로 체험파 뚝배기 깨는 담당일진인데..
걍 지식파(교학파)라고만 하시는건 좀.. ㅡ..ㅡ;
부처님께서 "이 법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니 설법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시잖아요?
당대의 언어로 이야기하셨음에도, 당대의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게... '법'인 겁니다.
그러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사람에게조차 '사실 즉 법 곧 현상'의 파악이 필요한데, 그 방법이 알아차림입니다.
위와 같다면, 삼매는 (알아차림과 달리) 사실을 파악하는 방법이 아닌가? 삼매도 사실을 파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알아차림과 삼매는 다른 방법인가? 같은 방법입니다. 다만 알아차림은 총론적, 삼매는 각론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를 두고 삼매에는 알아차림의 요소가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부처님 당대의 아라냐카 시대를 열었던 주류가 출가사문이고, 그들의 주류가 그들의 목표를 위해 선택한 방식이 삼매입니다. 이런 연원으로 별도인 것처럼 나열될 뿐, 본질적으로 알아차림과 삼매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연원상, 삼매수행자들이 빼어난 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이미 삼매로 구족한 (상대적으로 더 파악하기 어려운) 알아차림 대상과 요소를 파악하는 힘을 갖췄기에, 그들이 승단에서도 선두 그룹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겠죠?
어려운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데, 쉬운 거는 당연히 별 다른 노고 없이 알아차릴 수 있잖아요. 훨씬 많은 법 즉 사실 곧 현상을, 이미 갖춘 수행력으로 쉽게 소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구요. 불교에서는 '법(사실,현상)'을 많이 아는 만큼 전문가입니다. 이른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은 총론, 삼매는 각론... 그 단어가 지금 꼬리말에서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 우리가 [정]의 요소로 삼매와 알아차림을 이야기할 때, 통상 쓰이는 의미의 삼매와 알아차림... 알아차림은요. 일반론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총론이라고 한 겁니다. 삼매는 알아차림 요소(대상) 중 최근 논해진 '애 취 유'로의 식의 증장과 관련할 때에 쓰이는 표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좁은 지류죠... 그런 의미로 각론이라는 표현을 쓴 겁니다.
물론 선정 영역에서 알아차림하는 전승은 모두 그냥 삼매라고만 표현하기도 합니다. 단어는, 단어 모양새만 보지 말고, 그때 그때 뜻을 잘 파악해야 혼동이 없어요. 전승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뜻이 달라져요.
대충 이상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황벽님의 지적에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까먹은 거도 많은 중 일일이 다 적는 것도 힘든.
어쨌든 이해를 하면, 이해는 까먹긴 힘들어요...
위와 같으므로, 불교이 지식파와 체험파라는 것은요. 나름 좀 안타깝지만요. 오늘날 말로 하는 그런 불교가 지식파가 아닙니다. 그거는 그냥 의심을 다스려 불교를 알기 위한 준비를 하는 사람 수준일 뿐입니다. 물론 그 수준도 무시할 수는 없죠? 절대 다수거든요. 다만 그런 수준을 지식파로 불러주진 않아요. 불교의 지식파는 소위 마른 위빠사나 행자, 건혜 행자를 두고 이르는 겁니다.
마른 위빠싸나, 건혜는요. 알다시피, 삼매의 습기를 갖추지 못한 앎입니다. 알아차림의 대상 중 "애 취 유"라는 식의 증장은 알려진 바가 없어... 현상을 파고들어 꿰뚫어 직접 성립한 앎은 없어. 그렇죠?
건혜로 충분한가? 그러면 지식파입니다. 아니다 삼매를 구족해야 한다... 이러면 체험파입니다. 불교에서는요.
일체, 이 세계가 법이므로... 건혜의 수준도 천지 차이입니다. 어느 정도 건혜가 필요한가? 이거는 어느 정도 삼매가 필요한가? 그런 문제와 똑 같은 겁니다. 삼매라도 색계 선정만으로 충분하다는 쪽이 있고, 그거는 입문 쌩초보라고 하는 쪽도 있듯이 말입니다.
어쨌든 이해는 사실에 입각해야 합니다. 아주 쉬운 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