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板殿’…유작으로 속진 털어낸 기품 은해사‘佛’…굳세고 졸박한 필선 돋보여 ◇서울 봉은사 판전의 편액. ◇영천 은해사 우향각의 편액. 이번호부터 주요 사찰의 편액중 명필이 쓴 것들을 골라 매주 연재한다.(편집자)추사 김정희(1786∼1856)는 북학파의 태두 박제가의 제자로 고증학과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실학자였으며 제가의 법을 배웠으나 그 틀에 안주하지 않았던 선지적인 예술가였다. 이러한 추사가 불교에 빠져들게 된 것은 영조의 부마가 된 증조부 김한신이 화암사가 속해 있는 충남 예산 일대의 전토를 별사전으로 분급받아 일문의 원찰로 세습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추사는 이러한 불교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여러 사찰에 편액을 썼는데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 편액, 서울 봉은사 <대웅전>·<판전> 편액, 영천 은해사 <대웅전>·<보화루>·<은해사>·<불광> 편액,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시경루>, 하동 쌍계사 <육조정상탑>·<세계일화조종육엽> 편액 등이 그가 남긴 대표적인 묵흔(墨痕)이다.
봉은사 판전은 남호 영기(南湖 永奇)가 조성한 <화엄경소>목판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전각이다. 이 <판전>의 편액은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와 과천에 거처를 두고 봉은사를 오가던 때인 1856년에 쓴 것이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수일 전에쓴 것으로, 그의 마지막 글씨라고도 전한다. 칠십 노경에 이른 대가의 청고(淸高)한 정신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이 편액의 글씨는 일체의 속진을 털어 고박(古朴)함만을 액판(額板) 속에 남겨 놓았다. 본래 은해사 대웅전 한쪽에 걸려 있던 <불광> 편액은 추사가 병조참판으로 있을 때 당시 주지의 부탁으로 처음 써 주었으나 판목(板木)이 모자라서인지 아니면 서각자의 안목이 부족해서인지 ‘佛’자 마지막 내려긋는 획의 중간을 잘라 짧게 새겨 놓았었다고 한다. 나중에 절에 들른 추사가 이를 보고 떼어 태워버린 후 지금의 것을 다시 써 주었다고 한다. 편액의 글씨는 마치 철선을 구부려 놓은 듯 금방이라도 액판(額板)을 차고 뛰어나올듯 굳세면서도 졸박(拙朴)한 필선(筆線)을 지녔다. <안병인 대한불교진흥원>
【사찰 편액을 찾아서】<2>원교의 백련사 선운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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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대웅보전’… 힘차게 오르는 용의 기세 선운사‘정와’ … 정자체 벗어난 파격 장법 ◇고창 선운사 요사의 편액.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의 편액。 원교 이광사(1705∼1777)는 정종의 왕자 덕천군의 후손으로 하곡 정제두로부터 당시 이단시되던 양명학을 배웠고 백하 윤순에게는 글씨를 배웠다. 원교는 51세 때인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연루돼, 처음 회령에 유배된 후 다시 진도로 이배되었다가 결국 절해고도인 신지도로 옮겨 생을 마쳤다. 그는 조선 중후기를 대표하는 소론계 강화학파의 사상가였으며 스승 백하로부터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완성자였다. 본래 원교는 젊어서 불교에 심취했지만 회령에 유배되어서는 중옹 이광찬과 조카 이충익이 유학을 등한시하고 불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여 배불론을 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천불전>·<침계루>·<해탈문>, 구례 천은사 <지리산천은사>·<극락보전>·<명부전>,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명부전>·<만경루>, 고창 선운사 요사 <정와>·<천왕문>,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설선당> 편액 등 유배지 일대의 많은 사찰에 글씨를 남긴 것을 보면 배불 운운 한 것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의 진의는 아니었던 듯 싶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은 액판을 세로 두쪽으로 나누어 걸었는데, 공포가 촐촐히 자리잡고 있는 다포게의 건물이어서 마땅히 걸 자리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편액은 1760년 소실된 전각을 원담 윤철(圓潭 允哲) 등이 2년여에 걸쳐 중창하면서 때마침 근처 신지도로 이배돼 온 원교에게 부탁하여 쓴 글씨일 것이다. 용이 힘차게 틀어 오르는 듯 노건(老健)한 필치가 돋보이는 행서로 오랜 유배 생활의 회한이 담겨있다. 고창 선운사 요사에 걸려있는 <정와> 편액은 가로 두 판의 수수한 변죽에 “원교(圓嶠)”라는 두인과 “이광사인(李匡師印)”이라는 방인이 찍혀 있다.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원교가 신지도에 이배된 1762년 이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 글씨 쓰기를 쉰 적이 없다고 하는 원교는, 종래의 반듯한 글자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장법을 구사하는 이러한 행서를 즐겨 썼는데 이는 주자학에 젖은 평면적 사고로부터의 일대 전환이었다. <안병인 대한불교진흥원>
【사찰 편액을 찾아서】<3>대원군의 화계사 통도사 금강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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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 강함·부드러움의 원융조화 ‘화계사’ 질박함 풍기는 예서체 백미
◇통도사 금강계단 편액 ◇화계사 요사 편액
석파 이하응(1820-1898)은 영조대왕의 현손으로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아버지이다. 그는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늘 움츠린 생활을 하였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익종비 조대비의 후원으로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섭정을 하였지만 서원철폐, 원납전 징수 등의 실정으로 인해 1873년 하야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울 화계사의 만인(萬印)으로부터 충남 예산 가야사의 터가 “왕손이 나올 곳”이라는 말을 듣고 절을 불태워 그 자리에 부친의 묘를 썼는데, 훗날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왕위에 오르자 그 보답의 뜻으로 가야사와 가까운 곳에 보덕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 화계사 <명부전>·<화계사>, 서울 흥천사 <흥천사>(해서, 예서)·<옥정루>·<서선실>, 남양주 흥국사 <흥국사>·<영산전>, 양산 통도사 <통도사>·<영축산통사>·<금강계단>·<대방광전>·<원통방>, 예천 보문사 <극락보전> 편액 등 많은 사찰에 글씨를 남겼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적멸보궁) 앞쪽에 걸린 <금강계단> 편액은 그가 대원군에 봉해진 1863년 이후에 쓴 글씨다. 임금의 아버지가 쓴 글씨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금강과 같이 굳건한 계율이 설해지는 곳이어서 그런지, 글씨를 금색으로 칠하여 전각의 위엄을 더해준다. 편액의 글씨는 반듯한 해서로 강함과 부드러움이 잘 조화된 원융(圓融)한 서미(書味)를 지녔다.
서울 화계사 보화루 앞쪽에 걸린 <화계사> 편액은 1866년 흥선대원군이 시주하여 대웅전을 중수할 때쯤 쓴 글씨이다. 액판 좌측에 두인과 우측에 “대원군장(大院君章)”, “석파(石坡)”라는 방인의 도서 2과가 있으며 예서와 해서를 혼융한 질박한 서미(書味)의 글씨이다.
<안병인 대한불교진흥원>
【사찰 편액을 찾아서】<5> 신헌의 해인사 대둔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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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신헌(1810년∼1884년)은 초명을 관호(觀浩)라 하였고 1828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주부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어영대장, 판중추부사 등의 요직을 지냈으며 1875년 운요오호사건이 일어나자 전권대사가 되어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1882년에는 전권대사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기도 했다.
위당은 다산 정약용에게 실학을 배워 이를 개화사상으로 이끌어낸 개화파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무관 출신이면서도 학문에 힘써 유장(儒將)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개화파인 강위(姜瑋), 박규수(朴珪壽) 등과 가까이 지냈다. 또한 그는 추사 김정희로부터 글씨를 배워 추사의 의발을 받았는데, 특히 금석기(金石氣) 넘치는 예서를 잘 썼으며 묵란과 시서에도 능하였다. 서울 화계사 화장루 <보화루>, <화계사>, 해남 대둔사 <산신각>, <보련각>, <어서각>, <표충비각>, <화장법해>, 고성 옥천사 <자방루>, <연화옥천>, 밀양 표충사 <대홍원전>, <무량수각>, <보화루>, <서래각>, <승련암>, 합천 해인사 <법보전>, <수다라장> 편액이 사찰에 남아있는 그의 대표적인 글씨이다.
해남 대둔사 <보련각> 편액은 위당이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있던 1843년(헌종 9)에서 1846년(헌종 12) 사이에 쓴 글씨로 보이며 당시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스승인 추사 김정희와 대둔사에 머물던 초의 의순과의 각별했던 인연으로 말미암아 남긴 글씨로 생각된다. 편액의 글씨는 위당 특유의 금석기 넘치는 예서로 날아갈 듯 경쾌하면서도 뛰어난 조형미를 지닌 단아한 글씨이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고 남측 전각에 걸려 있는 <수다라장> 편액에는 ‘三道元帥(삼도원사)’, ‘申觀浩印(신관호인)’이라는 도서 두과가 있어 위당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있던 1862년(철종 13) 경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질박한 필선과 삽상(颯爽)한 운필을 지닌 창고(蒼古)한 서미의 예서로 그의 글씨 가운데 자미에 속한다.
<안병인 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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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6> 해강의 쌍계사·경국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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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 쌍계사 글자 납작하게 쓴 필법 눈길 다 로 경 권 근대양식에 담백한 멋 지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은 외숙인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때 청에 유학하여 서화를 연구하였다. 귀국 후 궁내부 시종관(侍從官)을 지냈으며 고종의 어명으로 왕세자 영친왕의 스승이 되어 서화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배워와 1903년 종로에 ‘천연당’이라는 한국 최초의 사진관을 열기도 했다. 1913년에는 상업화랑인 ‘고금서화관’을 개설하였고, 1915년에는 안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晉) 등과 함께 ‘서화연구회’라는 3년 과정의 사설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해강은 각체의 글씨를 모두 잘 썼으며 산수·화조·난죽뿐만 아니라 채색화에도 두루 능하였는데 특히 대자(大字)와 묵죽에 뛰어났다. 그는 금강산 마하연 바위 위에 사람크기만 한 큰 글씨를 쓰기도 하였으며, 안순환(安淳煥)과 함께 만든 같은 형태의 사액을 수십 개의 사찰에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가 쓴 편액으로는 서산 개심사 <상왕산개심사>, 서울 경국사 <다로경권>, <화엄회>, 장성 백양사 <대가람백양사>, 경주 불국사 <불국사>, 하동 쌍계사 <삼신산쌍계사>, <선종대가람>, 양산 통도사 <통도사>,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가야산해인사> 등이 있다.
하동 쌍계사 일주문 앞쪽에 걸려 있는 <삼신산쌍계사> 편액은 해강이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 곳을 유람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 전에는 조선 후기쯤에 쓴 행서로 된 산문사액(山門寺額)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편액의 글씨는 고예(古隸)의 필법으로 중간 글자인 ‘三’, ‘山’, ‘磎’ 세 자를 납작하게 써서 장법(章法)의 통기(通氣)를 고려한 흥미로운 글씨이다.
서울 경국사 관음전에 걸려 있는 <다로경권> 편액은 해강이 영산전을 건립하던 1930년경에 <영산전> 편액과 함께 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은 좁은 청색의 변죽을 대고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전형적인 근대의 양식을 지녔다. 편액의 글씨는 한예(漢隸)의 결구에 고경(古勁)한 필선을 지닌 예서로 차를 달이는 화로와 경서가 있는 담백한 정취를 이르는 말이다.
<안병인 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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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7> 창암의 태안사·대둔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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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선원 편액 ◇대둔사 가허루 편액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5)은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의 한 사람으로 본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글씨에만 몰두해 평생을 곤궁하게 지낸 선비였다. 그는 글씨를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점, 획 하나를 한 달씩이나 가르쳤다고 하며, 먹을 갈아 벼루 3개를 구멍내겠다는 결심으로 병중에도 매일 천자씩 쓸 정도로 글씨 쓰기에 전념했다고 한다.
창암은 어린 시절 이광사의 글씨를 배웠으며 끝없는 노력을 통해 김정희도 탄복할 정도로 건유(健愈)한 필세를 특징으로 하는 창암체를 이뤄냈다. 또 여러 체의 글씨 가운데 특히 초서를 잘 썼다. 본래 정읍 사람으로 전주에 살았던 그는 해남 대둔사 <가허루>, 구례 천은사 <회승당>, <보제루>, 전주 송광사 <명부전>, 곡성 태안사 <배알문> 편액 등 호남 일대의 사찰에 많은 글씨를 남겼으며, 이외에도 강화 전등사 <원통각>, 공주 동학사 <동학사>, 금산 보석사 <대웅전>, 밀양 표충사 <원통당> 편액 등이 그의 글씨이다.
곡성 태안사 선원 구역 내에 있는 <배알문> 편액은 9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惠哲) 선사의 부도탑 앞에 세워진 작은 문에 걸려 있다. 지리산 구룡계곡 옥룡추 근처 암벽에 ‘용호석문(龍湖石門)’이라는 창암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산을 유람할 당시 절에 들러 쓴 글씨가 아닌가 싶다. 편액의 글씨는 그의 다른 글씨와는 달리 후중(厚重)한 서미를 지닌 해서이다.
해남 대둔사 <가허루> 편액은 천불전 입구에 자리한 단층 누문에 걸린 편액이다. 1815년 초의(草衣) 선사가 그와 함께 전주 한벽당에서 시회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 편액 역시 그 때를 전후하여 초의 선사와의 교분으로 인해 쓴 글씨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기굴한 맛은 없으나 선비의 의연한 심성이 엿보이는 강건(健勁)한 필획과 초솔(草率)한 서미를 지닌 해행(楷行)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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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8>해사의 대둔사·불영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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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 일주문 편액 ◇불영사 극락전 편액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은 1862년 정시문과에 급제해, 성균관대사성, 전라도관찰사, 규장각직제학, 홍문관제학, 이조판서, 예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다. 또한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대한제국 수립 후에는 법부대신, 탁지부대신 등을 지냈다. 해사는 특히 청렴 결백한 성품과 함께 당대 명필로 이름이 높았는데 필법이 매우 유려하고 웅건했고 대자(大字)에 능했다. 또한 송(宋) 미남궁체(米南宮體)의 글씨를 즐겨 썼다.
불법에 심취해 포교당을 직접 세울 만큼 불교를 가까이 했던 해사는 전국 여러 사찰을 순례하면서 글씨를 남겼다. 서울 개운사 대각루 <분다리향>, 남양주 불암사 <불암사>, 고양 흥국사 <흥국사>, 해남 대둔사 <두륜산대흥사>, <백설당>, 영암 도갑사 <세진당>, 순천 송광사 <해청당>, 부산 범어사 <금정산범어사>, <선찰대본산>, 고성 옥천사 <칠성각>, <옥천각>, 진주 의곡사 <대웅전>, 합천 해인사 <장경각>, 대구 동화사 <영산전>, 울진 불영사 <극락전> 편액 등이 대표적인 그의 글씨이다.
해남 대둔사 해탈문 앞쪽에 걸려있는 <두륜산 대흥사> 편액에는 특이하게도 ‘해사(海士)’, ‘김성근인(金聲根印)’이라는 2과의 방인 도서를 액판 좌, 우측에 나누어 찍었다. 해사는 두 번에 걸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는데 이 편액의 글씨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쯤에 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준일(俊逸)한 필치의 행서로 점획의 비수(肥瘦)와 경중(輕重)을 조화롭게 썼다.
울진 불영사 <극락전> 편액은 액판 좌측에 붉은 글씨로 ‘임자윤추(壬子閏秋) 칠칠옹(七七翁) 해사(海士)’라는 관지가 있어, 그가 77세 되던 해인 1912년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주권 침탈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나 암울한 심경을 달래고자 명산대찰을 순례하던 중에 쓴 글씨로 추청된다. 편액의 글씨는 대부분 미불의 글씨를 익혀 쓴 준일(俊逸)한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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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9> 성당의 청암사·파계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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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산 청암사 아름다움 돋보인 1912년 작품 팔공산 파계사 근엄한 장소에 흘려쓴 파격미
◇청암사 일주문 편액 ◇파계사 진동루 편액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7)는 법부 주사와 검사를 거쳐 중추원 촉탁의 벼슬을 지낸 근대 서예가이다. 성당은 1919년 서화협회 창립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뒤에 제4대 서화협회 회장과 조선미술전람회 서부(書部)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1910년 ‘한일병탄조약문’을 썼으며, 일제에 의해 작위를 받기도 했지만 서법 연구기관인 상서회(尙書會)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는 등 근대 한국 서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근대 직업 서예가의 길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성당은 어려서 안진경(顔眞卿)의 해서와 황정견(黃庭堅)의 행서를 배워 각체의 글씨에 두루 능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신선한 미감의 팔분예(八分隸)를 잘 썼다. 그가 사찰에 남긴 편액으로는 양양 낙산사 <의상대>, 해남 대둔사 <용화당>, 순천 선암사 <강선루>, 구례 천은사 <방장선원>, 곡성 태안사 <동리산태안사>, 김제 금산사 <용화지회>, 밀양 표충사 <대광전>, <약산초제>, 상주 남장사 <불이문>, 김천 청암사 <불영산청암사>, <대웅전>, 대구 파계사 <팔공산파계사> 등이 대표적이다.
김천 청암사 입구의 일주문에 걸린 <불영산청암사> 편액은 포와 포 사이의 공간에 맞추어 액판을 만들고 글씨를 두줄에 나누어 새긴 것으로 근대 이후의 산문사액에 더러 보이는 형태이다. 청암사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편액이 성당의 글씨인데 대부분 대운(大雲)스님이 절을 중창하던 1912년경에 쓴 것이다. 이 편액의 글씨는 북위(北魏) 해서의 필의와 행기(行氣)를 섞은 횡일(橫逸)한 예서로 성당의 글씨 가운데 수작에 속한다.
대구 파계사 진동루 앞쪽에 걸린 <팔공산파계사> 편액에는 ‘성당(惺堂)’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3과의 도서가 찍혀 있다. 이 편액은 유래 없이 행초(行草)로 쓰여졌는데, 일반적으로 사찰의 당우에 거는 편액을 반듯한 해서나 예서로 쓰는 것은 불보살이 상주하시는 근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편액의 글씨는 황정견에 바탕을 둔 것으로 수경(秀勁)한 서미를 지녔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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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0> 백련의 경국사·삼막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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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루…노년 선비의 청아한 정신 담겨 명왕전…삼막사 머물며 쓴 예서체 백미
◇경국사 관음전 편액 ◇삼막사 명왕전 편액
백련 지운영(白蓮 池雲英/1852∼1935)은 우리 나라에서 종두법을 처음 시행한 지석영(池錫永)의 형으로 김정희의 제자 여항문인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시문 등을 배웠다. 또 유·불·선에 두루 능통했으며, 시·서·화에 뛰어난 삼절(三絶)이었다. 백련은 1884년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주사가 됐고, 1886년에는 사대당(事大黨) 정부의 밀령을 받고 김옥균, 박영효 등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혀 압송된 후 영변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895년 유배에서 풀려나 재기를 꿈꾸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둔하며 시와 그림에 몰두하였다.
백련은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과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노년에는 동생 지석영과 함께 관악산 연주암과 삼막사에서 오랜 동안 기거하기도 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안양 삼막사에서 잠시 승려 생활을 했다고도 한다. 그는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안양 삼막사 <명왕전>, 서울 경국사 관음전 <보화루>, 서울 봉은사 <영산전> 편액 등을 남겼다.
서울 경국사 관음전에 걸려 있는 <보화루> 편액에는 ‘칠십팔옹 백련 지운영(七十八翁 白蓮 池雲英)’이라는 관지와 ‘백련(白蓮)’이라는 주문의 방인이 있다. 이 편액은 백련이 79세 되던 1929년에 쓴 것으로 당시 주지로 있던 보경(寶慶)스님이 절을 중수하면서 그의 글씨를 받아 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한예(漢隸)를 아윤(雅潤)한 필치로 써낸 것으로 노경에 이른 선비의 청아(淸雅)한 정신이 엿보인다.
안양 삼막사 <명왕전>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지운영 백련(池雲英 白蓮)’이라는 방인의 도서 2과가 있다. 이 편액은 백련이 노년에 이 절에서 지낼 때 쓴 것으로 보인다. 명왕전은 명부전의 이칭으로 전각에 따라 주존인 지장 보살이 강조될 때는 지장전으로, 명왕이 강조될 때는 명부전으로 불리는데 그 내부 구성에 있어서의 큰 차이는 없다. 편액의 글씨는 대부분 그의 예서가 그렇듯 한예(漢隸)에 바탕을 두고 쓴 청수(淸秀)한 서미의 글씨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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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1> 동농의 신원사·봉정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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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웅 전 충청 관찰사 시절 쓴 근엄한 서체 천등산 봉정사 강직한 성품 드러난 1913년 작품
◇신원사 대웅전 편액 ◇봉정사 만세루 편액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은 1877년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감찰, 동부승지, 주일본판사대신, 안동대도호부부사, 전우국총판, 공조판서, 농상공부대신, 황해도관찰사, 중추원 의장, 충청도관찰사, 규장각제학 등의 벼슬을 지냈다. 또한 그는 1909년 대한협회 회장이 되어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했고, 비밀결사인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도 활약했다.
동농은 이처럼 조선 말기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행정 요직을 두루 지낸 문신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독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6세에 이미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모두 배워 한학에 밝았고, 진당(晉唐) 이후 제명가의 필의를 체득해 당대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사찰에 남아 있는 그의 글씨로는 공주 신원사 <대웅전>, 문경 김룡사 <운달산김룡사>, 안동 봉정사 <천등산봉정사>, <덕휘루>, 부산 범어사 <금정선원>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공주 신원사 <대웅전>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동농, 김가진인(東農, 金嘉鎭印)’이라는 2과의 도서가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1876년 보연 화상(普延 和尙)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하는데 편액의 글씨는 1906년 동농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해 있던 시기쯤에 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미불과 동기창(董其昌)의 글씨를 익혀 쓴 해서로 서품이 근정(謹整)하며, 변화보다는 후실한 맛이 나는 글씨이다.
안동 봉정사 만세루 앞쪽에 걸려 있는 <천등산봉정사> 편액에는 액판 우측에 ‘백운동리인(白雲洞裏人)’, 좌측에 ‘동농노어서(東農老漁書)’라는 관지가 있다. 이 편액은 함께 쓴 것으로 보이는 만세루 안쪽의 <덕휘루> 편액에 ‘시년육십유팔(時年六十有八)’이라는 도서와 ‘계축중하 김가진(癸丑中夏 金嘉鎭)’이라는 관지가 있어 1913년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편액의 글씨는 그의 다른 글씨와 마찬가지로 서품이 강직(剛直)하고 근정(謹整)함이 드러나는 글씨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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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2> 우남의 문수사·해인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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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수 사 신도이던 부모위해 쓴 명작 해인대도량 대통령시절 쓴 유려한 필체
◇문수사 요사 편액 ◇해인사 해탈문 편액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1875∼1965)은 배재학당을 나와 조지 워싱턴대학과, 하버드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그는 ‘매일신문’ 주필 등을 지내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개화,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우남은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됐다. 그는 1948년 초대 국회의장과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19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해 하와이로 망명,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우남은 본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나, 미국 유학 등을 통한 신문물을 접하면서 기독교에 가까워졌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서울 문수사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지성을 드려 우남을 낳았다고 한다. 어쩌면 1954년 불교정화유시를 통해 비구승의 입장을 수용했던 것은 그 나름대로 불교를 아끼려는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우남은 대통령 재임시 여러 사찰에 글씨를 남겼는데 서울 경국사 <경국사>, <삼성보전>, 서울 문수사 <문수사>, 합천 해인사 <해인대도량>, 영주 부석사 <부석사>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 문수사 요사에 걸려 있는 <문수사> 편액은 도서나 관지는 없으나 1960년 경 우남이 쓴 글씨다. 생전에 이 절을 다녔던 인연으로 모신 부모의 신위를 참배하기 위해 그가 산길을 걸어 올라가 그 기념으로 쓴 글씨라고 전한다. 우남의 글씨는 필획이 원윤(圓潤)하고 운필이 유려(流麗)한 것이 많은데 이 편액은 주경한 필치로 쓴 글씨다.
합천 해인사 해탈문 뒤쪽에 걸려 있는 <해인대도량> 편액은 세로 10개의 쪽판을 이어 붙여 글씨를 새기고 윗부분의 변죽에 봉황문으로 단청을 했는데 아마도 현직 대통령의 글씨였기 때문일 것이다. 편액의 액판 좌측에 ‘계사국추 우남(癸巳菊秋 雩南)’이라는 관지와 음, 양각의 도서 2과가 있어 1953년 우남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절에 들러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편액의 글씨는 운필이 유려(流麗)하고 후윤(厚潤)한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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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3>송하의 직지사·마곡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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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악산 직지사 여유있고 부드럽게 쓴 해서 마곡사 심검당 활시위 당기듯 활달한 필체
◇직지사 일주문 편액 ◇마곡사 심검당 편액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 1725∼1799)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스승인 백하 윤순(白下 尹淳)의 사위이다. 또 시, 서, 화의 삼절(三絶)로 불리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의 장인으로 첩파(帖派)의 맥을 이은 조선 후기의 명필이다. 그는 본래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글씨로 1766년에야 벼슬길에 올랐는데 임금의 지우를 입어 예조정랑, 책례도감상례, 안악군수, 성주목사, 호조참의, 공조참판, 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송하는 어려서 원교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각 체의 글씨에 능했는데, 그 중에서도 시체(時體)를 본받아 획법이 굳세고 예스러운 해서와 원교를 본받은 초서를 특히 잘 썼으며 팔분(八分)에도 장기가 있었다고 한다. 글씨로 벼슬을 할만큼 당대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송하는 당시 공관의 금석과 편액을 도맡아 썼다고 하는데 사찰 편액으로는 공주 마곡사 <심검당>, 김천 직지사 <황악산직지사> 편액 등이 남아 있다.
김천 직지사 일주문 앞쪽에 걸린 <황악산직지사> 편액은 가로 두 쪽의 나무판에 다섯 개의 큰 꺾쇠를 박아 이어 붙이고 좌우에 꼬리를 단 변죽에는 소박한 연화문의 단청을 했는데, 액판 좌측에 ‘경인하절(庚寅夏節)’이라는 전서로 쓴 관지와 ‘조윤형인(曺允亨印)’이라는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그가 45세되던 1770년에 쓴 것으로 이전의 일주문에 걸렸던 것을 현재의 일주문을 건립하면서 옮겨 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운필이 유여(裕餘)하며 결구가 전실(典實)한 해행(楷行)이다.
공주 마곡사 <심검당> 편액은 가로 두 개의 쪽판을 이어 붙이고 마름모꼴의 도형으로 단청된 변죽을 했으며, 액판 좌측 아래에 ‘송하(松下)’라는 관지가 있다. 편액의 글씨를 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황악산직지사> 편액과 같은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이며, 이와 같은 글씨가 성남 봉국사에도 번각되어 걸려 있다. 편액의 글씨는 획법이 활시위를 당기는 듯 강건(强健)하며 활달한 운필(運筆)의 해행(楷行)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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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4> 이광의 화엄사·송광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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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대웅전 바르고 우아한 품격 지닌 해서 송광사 대웅전 한석봉체 닮은 조선 중기 작품
◇화엄사 대웅전 편액 ◇송광사 대웅전 편액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1589∼1645)은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의 여덟번째 서자로 호를 기천(杞泉)이라 했으며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그는 판서를 지낸 허성(許筬)의 딸과 혼인했는데 1618년(광해군 10) 처족 허균(許筠)이 모반죄로 주살되자 그에 연루돼 훈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인조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의창군은 글씨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 중에서도 부친인 선조가 즐겨 썼다고 하는 석봉 한호(石峰 韓濩)체의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 대자(大字)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쓴 사찰 편액으로는 구례 화엄사 <대웅전> <지리산 화엄사>전주 송광사 <대웅전> 편액 등이 전하며, 이외에도 전에 걸렸던 수덕사 <대웅전> 편액이 그의 글씨였다. 또한 글씨가 수려해 서울 조계사, 정읍 내장사, 하동 쌍계사, 서울 진관사, 서울 선학원 등에도 번각된 그의 글씨가 걸려 있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 편액에는 ‘숭정구년 세사병자중추 의창군 광서’(崇禎九年 歲舍丙子仲秋 義昌君 珖書)라는 관지가 있어 의창군이 1636년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서울 조계사, 예산 수덕사 대웅전 편액 등이 이를 번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殿)’자의 경우 화엄사 <대웅전> 편액은 ‘尸’(주검 시) 아래에 ‘共’(함께 공)자인데, 다른 두 종류는 모두 ‘尸’ 아래에 ‘只’ 로 되어 있고, ‘웅(雄)’자의 경우도 좌우변의 여백처리에 차이가 있는 다른 글씨이다. 편액의 글씨는 결구와 필획 모두 전아(典雅)한 품격을 지닌 해서이다.
전주 송광사 <대웅전> 편액은 좁은 변죽에 세로 열 개의 쪽판을 이어 붙이고 액판에도 문양을 넣어 장식한 보기 드문 형식을 취했다. 액판 좌측에는 ‘의창군 광서(義昌君 珖書)’라는 붉은 색과 흰색의 관지가 있다. 편액의 글씨는 결구가 건경(健勁)하고 운필이 청수(淸秀)한 해서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글씨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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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5>의재의 도림사·내원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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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사 고고한 선비정신 담긴 행서체 화청루 걸림없듯 유려하게 쓴 노년작
◇도림사 오도문 편액 ◇내원사 선원 편액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은 진도 출생으로 어려서 진도에 유배 온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1913년 도일해 메이지 대학에서 법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 유학 중 진로를 바꾸어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귀국 후에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수화를 출품해 입상하기도 했다. 1927년 이후 그는 광주에 머물면서 연진회(鍊眞會)를 통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또 1949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1960년에는 예술원회원이 됐다.
의재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에게서 이어지는 정통 남종화의 맥을 현대에 전해준 한국화가로 김은호, 노수현, 박승무, 변관식, 이상범 등과 함께 한국화 6대가로 불린다. 또한 그는 무등산 기슭에 춘설헌(春雪軒)을 짓고 다원을 직접 운영했을 만큼 차를 좋아했던 다인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농촌기술학교를 건립해 교육사업에 힘썼던 교육가 이기도 했다. 현재 사찰 편액으로 남아 있는 그의 글씨는 곡성 도림사 <도림사> 편액과, 양산 내원사 <화청루>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곡성 도림사 입구의 작은 사문인 오도문 앞쪽에 걸린 <도림사> 편액은 변죽 없는 평판에 바탕을 흰색으로 글자를 청색으로 칠한 소박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백련(百鍊)이라는 관지와 음각 방인이 하나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일필로 써 내린 의재의 창노(蒼老)한 행서인 것으로 미루어 그가 노경에 이르러 쓴 글씨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만, 꼿꼿한 선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담백한 글씨이다.
양산 내원사 선원 앞쪽에 걸린 <화청루>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의도인(毅道人)’이라는 관지와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이라는 도서가 찍혀 있으며, 변죽 없는 검은 평판에 글자만 흰색으로 칠한 근대 편액의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의재가 노경에 이르러 쓴 글씨로 보이며 서화를 겸전한 그의 고고한 품격이 배어있는 유화(柔和)한 서미의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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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6>석재의 통도사·선석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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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재 호방함 보이는 추사풍 작품 선석사 곧고 힘있게 쓴 1920년대작
◇통도사 극락암 편액 ◇선석사 사문 편액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는 대구에서 만석꾼 서상민(徐相敏)의 아들로 태어나 신령 군수를 지낸 한말의 서화가이다. 1897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갑신정변으로 망명해 있던 민영익의 집에 머물며, 푸화(蒲華), 우창스(吳昌碩) 등의 중국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3년 뒤 귀국한 그는 대구에 머물며 활동했는데, 1920년에는 교남서화연구회(嶠南書畵硏究會)를 발족시켜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또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글씨와 사군자 부문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석재는 처음 안진경체를 체본(體本)으로 삼아 글씨를 썼으나 나중에는 구양순, 왕희지, 동기창 등과 추사체까지 각 체를 두루 섭렵했는데, 그 가운데 특히 행서를 잘 썼고 그림은 사군자에 능했다. 젊은 시절 가문의 원찰이던 대구 동화사에 한동안 머물며 학문에 전념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평생 불교를 가까이 했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양산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원광재>, 밀양 표충사 <세계일화>, 성주 선석사 <선석사> 편액 등 영남 일대의 사찰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양산 통도사 산내 암자인 극락암 승방에 걸린 <원광재> 편액에는 ‘석재(石齋)’라는 관지와 ‘서병오인(徐丙五印)’, ‘석재(石齋)’라는 음·양각의 도서 2과가 있다. 변죽 없는 평판으로 이루어진 이 편액은 석재가 교남서화연구회를 이끌던 1920년 무렵에 쓴 것으로 추측된다. 편액의 글씨는 그가 즐겨 쓰던 추사 풍의 주일한 행서로 다방면에 재주가 많아 팔능(八能)이라 불렸던 그의 호방함이 엿보인다.
성주 선석사 사문에 걸려 있는 <선석사>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행서로 된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라는 관지와 도서 2과가 있다. 이 편액은 좁은 변죽에 초화문 단청을 했고, 변죽 위아래에 모양을 낸 귀와 꼬리를 단 것으로 근대 조성된 편액의 일반적인 형태를 지녔다. 편액의 글씨는 건경(健勁)한 행서로 이 역시 영남삼절(嶺南三節)로 불리던 1920년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인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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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7>소전의 수덕사·불국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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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제일선원 회화성 강한 전서 대표작 관 음 전 둥글고 부드럽게 쓴 행서
◇수덕사 일주문 편액 ◇불국사 관음전 편액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1903∼1981)은 전라남도 진도 출생으로 1925년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했다. 그는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예서로 처음 입선했고, 특히 제10회 때에는 특선을 수상했다. 또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분리된 제1회‘조선서도전(朝鮮書道展)’에서는 다시 특선을 했고, 제2회 때에는 심사위원이 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소전은 고향인 진도에 진도중학교를 설립했으며 예술원 회원, 민의원 의원,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예술원 부회장, 국회의원 등을 지내기도 했다.
소전은 김돈희(金敦熙)로부터 글씨를 배워 글씨와 문인화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회화성이 강한 전서를 잘 썼으며 한글 전서를 창안하는 등 현대 한국 서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서예가였다. 소전은 당시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였던 만큼 명승고적에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사찰에 걸려있는 편액으로는 남양주 봉선사 <칠성각>, 예산 수덕사 <덕숭산수덕사>, <동방제일선원>, 경주 불국사 <관음전>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예산 수덕사 일주문 뒤쪽에 걸려 있는 <동방제일선원> 편액에는‘임인장월 소전산인(壬寅長月 素筌散人)’이라는 관지와 2과의 도서가 있다. 이것은 소전이 1962년 절에 들려 일주문 앞에 걸려 있는 산문사액과 함께 쓴 것으로 보인다. 세로 9개의 쪽판을 연결한 이 편액은 변죽을 청색으로 액판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조선 시대의 편액 형태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그가 즐겨 썼던 회화성이 강한 전서로 금문(金文)의 결구를 차용하여 쓴 것이다.
경주 불국사 <관음전>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액판의 크기에 비해 다소 커 보이는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이라는 관지와 2과의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대대적으로 불국사를 복원할 즈음인 1973년에 관음전을 새로 건립하면서 소전의 글씨를 받아 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당해(唐楷)의 뼈대 위에 전서의 획법(劃法)을 담은 소전 특유의 원윤(圓潤)한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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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8> 석촌의 동학사·선암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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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 삼은각 충남도 문화재 자료 59호 선암사 강선루 문재·꼿꼿함 엿뵈는 수작
◇동학사 삼은각 편액 ◇선암사 누각 편액
석촌 윤용구(石村, 石邨 尹用求·1853∼1937)는 부사를 지낸 윤회선(尹會善)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서화가이다. 그는 15세에 돈령부(敦寧府) 직장을 지내고, 19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또한 그는 후에 규장각에 들어가 상대(常帶), 한림(翰林), 대교(待敎), 직각(直閣), 사인부제학(舍人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석촌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난죽(蘭竹)과 구양순(歐陽詢) 풍의 해서, 행서, 그리고 금석문(金石文)을 즐겨 썼다. 석촌은 대한제국 수립 후에도 법부, 탁지부, 내무대신 등으로 10여 차례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獐位山) 아래에 기거하면서 시, 서, 화로 여생을 보냈다. 현재 명승고적과 사당, 재실 등에 많이 전하는 그의 글씨는 대부분 벼슬에서 물러나 필묵으로 소일하던 때에 쓴 것인데, 사찰에 남긴 것으로는 공주 동학사 <삼은각>, <인재문>, 순천 선암사 <강선루>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공주 동학사 삼은각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윤용구(尹用求)’라는 관지와 도서가 하나 찍혀 있다. 삼은각은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길재(吉再) 등 고려 고려유신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돼 있다. 좁은 변죽으로 장식한 편액은 액판 바닥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이러한 형태로 보아 일제강점기쯤에 조성된 것이 지금까지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석촌이 쓴 대부분의 글씨와 마찬가지로 수경(瘦勁)한 행서이다.
순천 선암사 일주문 밖의 계곡 옆에 있는 누각에 걸린 <강선루> 편액에는 ‘석촌 윤용구(石邨 尹用求)’라는 관지와 두 개의 도서가 찍혀 있다. 이 편액은 가로 두 개의 쪽판에 새긴 것으로, 1930년 6월 전각을 중수할 때쯤에 석촌의 글씨를 받아 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역시 석촌의 문기(文氣)어린 수경(瘦勁)한 해행(楷行)으로 그의 꼿꼿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글씨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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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19>검여의 용주사·해인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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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단정한 북위 해서 필체 범 종 루 굳세고 단단한 기운 서려
◇용주사 사문 편액 ◇해인사 범종루 편액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1911∼1976)은 현대 한국 서예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예가로, 인천에서 출생해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후에 명륜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의 ‘동방학회’에서 서화와 금석학을 연구했으며, 1943년에는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배우기도 했다. 1946년 귀국한 검여는 박세림 등과 ‘대동서예연구회’를 조직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밖에도 그는 인천시립박물관장과 한국서예가협회장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검여는 각 체의 글씨에 모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전각과 그림에도 능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육조체(六朝體)의 행서를 잘 썼으며, 소동파의 글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1968년 뇌출혈로 인해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어 오른손으로 글씨를 쓸 수 없게 되자 좌수서(左手書)를 연구하여 또 다른 경지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가 사찰에 남긴 글씨는 많지 않으나 수원 용주사 <용주사>, <경기제일가람용주사>, <범종각>, 합천 해인사 <범종루>, <사운당> 편액 등이 전하고 있다.
수원 용주사 사문에 걸려있는 <경기제일가람용주사> 편액은 무늬 없는 좁은 변죽을 덧댄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액판 좌측 위쪽에 ‘검여(劍如)’라는 관지가 있다. 검여의 초기 글씨는 웅건(雄健)한데 비해 만년의 좌수서(左手書)는 청경(淸勁) 하였다. 이 편액의 글씨는 1968년 이전에 쓴 것으로 북위(北魏) 해서의 필의(筆意)를 지녔으며, 결체(結體)가 단정하고 필치가 주경하다.
합천 해인사 <범종루> 편액에는 도서나 관지는 없으나 1968년 검여가 전서로 된 <사운당> 편액과 함께 쓴 글씨이다. 해인사의 종각은 본래 구광루 동쪽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80년대 초에 주지 명진(明振)이 지금의 자리에 종각을 새로 지으면서 편액을 옮겨 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북위(北魏) 해서의 제법을 혼융(混融)하여 쓴 것으로, 근골(筋骨)이 견강(堅剛)한 서미(書味)의 해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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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0>염재의 도갑사·천은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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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해탈문 편액 ◇천은사 설선당 편액
월출산 도갑사 해탈한듯 빼어난 서미 설선당 선방 편액답게 선기 서려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1873∼1943)는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서화가이다. 그는 일찍이 송사호(宋沙湖)에게 글씨를 배웠고, 글씨는 물론 사군자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후에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입선을 하기도 했다. 염재의 글씨는 영암 도갑사 <월출산도갑사>, 장성 백양사 <청운당>, 순천 선암사 <장경각>, 순천 송광사 <향수원>, 구례 천은사 <설선당>, <수홍루> 편액 등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찰에 특히 많이 남아있다. 이는 그의 서화 활동 지역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불우(佛宇)에 글씨를 많이 남긴 것과 함께, 1900년에 성용(成鏞)이 쓴 안양 삼막사 <망해루> 편액에 염재의 부탁으로 글씨를 썼다는 부기(附記)가 보이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가 불교와도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암 도갑사 해탈문 앞쪽에 걸린 <월출산도갑사> 편액에는 두인과 ‘송태회인(宋泰會印)’, ‘염재(念齋)’라는 방인 도서 2과가 있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이 해탈문은 1473년 중건된 것으로, 1960년 해체 보수시 중도리 밑에서 발견된 묵서(墨書) 상량문(上梁門)을 통해 건립 연대가 확인되었다. 이 편액은 그가 많은 활동을 했던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지금은 없어진 <대웅보전> 편액과 함께 써서 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송(宋) 황정견(黃庭堅) 풍의 수일(秀逸)한 서미(書味)가 엿보이는 글씨이다.
구례 천은사 <설선당> 편액에는 두인을 비롯해 액판 좌측에 ‘염재(念齋)’라는 관지와 ‘염재(念齋)’, ‘송태회인(宋泰會印)’이라는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변죽을 따로 붙이지 않고, 두꺼운 통판에 글씨를 새겨 걸었는데, 아마도 선을 참구하는 선방에 건 편액이기 때문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송(宋) 황정견(黃庭堅) 풍의 계행(楷行)으로, 당대 명필 김돈희(金敦熙)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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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2> 석전의 화엄사·금산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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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엄 사…왼손으로 쓴 석전 행서 대적광전…정방형 4자 전각 편액
◇화엄사 산문 편액 ◇금산사 대적광전 편액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1993)은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5살 때부터 한학을 익히고 글씨를 쓰기 시작하여, 1920년부터 10여 년 간 금강산 돈도암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고, 1930년에는 고향에 돌아와 신위(申緯 1769-1845)를 사숙하며,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를 익혔다고 한다. 이후 석전은 나이 70이 넘은 1973년에야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그는 60대에 서예가로는 치명적인 오른손 수전증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쓰는 악필(握筆)을 시작하여, 마침내 독창적 경지를 이루어냈으며, 85세부터는 오른손의 악필도 곤란하여 좌수서(左手書)로 마지막까지 창작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않았다.
석전은 일체의 기교를 멀리한 심법(心法)으로 글씨를 썼다는 평가를 받는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망백에 이르도록 고향에 은거하면서 오로지 선비로서의 인품을 지켜온 서예가였다. 석전이 사찰에 남긴 글씨는 많지는 않지만 구례 화엄사 일주문 <지리산대화엄사>, <해동선종대가람>,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편액 등 주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찰에 남아 있다. 구례 화엄사 산문에 걸린 <지리산대화엄사>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석전 구십일옹 황욱(石田 九十一翁 黃旭)’이라는 관지가 있다. 이 편액은 1988년 사역 입구의 산문을 신축하면서 뒤쪽에 걸린 <해동선종대가람> 편액과 함께 석전의 글씨를 받아 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석전이 오른손의 심한 수전증을 이겨내고 왼손으로 써낸 담백한 행서로, 기교를 넘어선 웅건(雄建)한 글씨이다.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편액은 흔하지는 않지만 4자로 된 전각의 편액에 더러 있는 정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액판 좌측에 한 줄로 ‘금강산인 구삼옹석전황욱(金剛山人 九三翁石田黃旭)’이라는 관지와 ‘황욱장수, 석전(黃旭長壽, 石田)’이라는 도서가 찍혀 있다. 이 편액은 1986년 전각이 전소된 후 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1990년에 석전의 글씨를 받아 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역시 노경의 선비를 연상하게 하는 웅건(雄建)한 좌수(左手), 악필(握筆)의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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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3>경봉의 낙산사·송광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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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홍련암…변죽없이 평판에 쓴 글 송광사 설법전…서법 매이지 않은 禪筆
◇낙산사 홍련암 편액 ◇송광사 설법전 편액
경봉 정석(鏡峰 靖錫·1892~1982)은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본명은 김용국(金鏞國), 법호는 원광(圓光)이다. 경봉은 16세가 되던 1907년에 양산 통도사에서 성해(聖海) 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여, 청호 학밀(晴湖 學密)에게 사미계를 받았고, 해담 치익(海曇 致益)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내원사, 마하연, 해인사 등에서 참선 수행을 하였고, 통도사에서 만일염불회를 설립, 지도하였다. 또 통도사 강원 원장, 통도사 주지,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이사장,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 등을 지냈다.
경봉은 어려서부터 한문사숙에서 수학하여 한학과 글씨에 모두 능하였으며, 서법(書法)을 뛰어넘은 호방한 글씨를 주로 썼다. 그의 글씨는 1953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30여 년 간을 머물며 포교와 수행에 전념하였던 양산 통도사 극락암 <정수보각>, <여여문> 편액을 비롯하여 양양 낙산사 <원통보전>, <홍련암>, 평창 월정사 <정법보각>, 순천 송광사 <설법전>, <수선사>, 여천 향일암 <영구암>, 양산 내원사 <선나원>, 산청 대원사 <방장산대원사>, <범종각>,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경주 불국사 <무설전>, <안양문> 편액 등 전국의 많은 사찰에 남아 있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편액은 변죽을 따로 붙이지 않고 평판에 글씨를 새긴 것으로, ‘경봉(鏡峰)’이라는 관지와 ‘원광(圓光), 경봉(鏡峰)’이라는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1976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낙산사 원통보전을 복원하면서 <원통보전> 편액과 함께 경봉의 글씨를 받아 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원통보전> 편액과 마찬가지로 혼일(渾逸)한 맛을 풍기는 행서이며, 필획을 무겁게 두고 글자의 균형은 위를 넓게 아래를 좁게 하였다.
순천 송광사 <설법전> 편액에는 관지는 없으나 액판 좌측에 ‘원광(圓光), 경봉(鏡峰)’이라는 방인 도서 2과가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경봉이 1968년 당시 송광사에 주석하던 구산(九山)의 부탁으로 <수선사> 편액과 함께 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후중(厚重)한 맛을 풍기는 행서로, 서법에 매이지 않고 뜻을 살려 쓴 선필(禪筆)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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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4>탄허의 월정사·정암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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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적광전… 心意대로 쓴 선필 행초 태백산 정암사… 통판에 음양각으로 새겨
◇정선 정암사 일주문 편액.
◇평창 월정사 편액.
탄허 택성(呑虛 宅成·1913~1983)은 근대를 대표하는 학승으로 전라북도 김제군 망경에서 김홍규(金洪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2세가 되던 해에 오대산 상원사 한암 중원(漢岩 重遠)을 은사로 출가, 참선 수행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대산연수원 원장, 월정사 조실,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 원장 등을 지냈으며, 특히 한문 대장경의 한글화에 힘써 120여 권의 경전을 번역, 출간하였다.
탄허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15세가 되면서부터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후학인 이극종으로부터 다방면의 학문을 섭렵한 그의 글씨는 호방한 필치를 특징으로 하는데, 평창 월정사 <적광전>, <오대산월정사>, <설청구민>, <천왕문>, <월정대가람>, <삼성각>, <대강당>, 강릉 보현사 <영산전>, 홍천 수타사 <삼성각>, <심우산방>, 정선 정암사 <태백산정암사>, <자장각>, <삼성각>, <범종각>, <육화도량>, <선불도량>, 화성 용주사 <지장전>, 아산 강당사 <관선재>, 아산 봉곡사 <봉곡사>, 예산 향천사 <극락전>, 정읍 내장사 <정혜루> 편액 등 강원도와 충청도 일원의 사찰에 많이 남아 있다.
평창 월정사 <적광전>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신해춘 탄허(辛亥春 呑虛)’라는 관지가 있다. 이 편액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칠불보전 자리에 1971년 봄에 절의 본전인 적광전을 새로 지으면서 탄허가 쓴 것이다. 이 편액의 글씨는 대부분의 그의 글씨와 마찬가지로 서법에 매이지 않고 심의(心意)대로 쓴 선필 행초(行草)다.
정선 정암사 일주문에 걸려있는 <태백산정암사> 편액은 변죽을 따로 붙이지 않은 통판에 음양각으로 글씨를 새긴 것으로, 액판 좌측에 두줄로 ‘무오중추 탄허(戊午仲秋 呑虛)’라는 관지가 있다. 이 편액은 1978년 가을에 일주문을 신축하면서 당시 월정사에 머물던 탄허의 글씨를 받아 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탄허 특유의 호방한 선필이지만, 글씨의 아래 위 액판의 여백이 충분치 않아 편액의 모양이 다소 옹색한 느낌을 준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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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5>구하의 통도사·운문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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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굵은 서체의 조화 ‘안정’ 오 백 전…86세 쓴 거침없는 선필
◇양산 통도사<적멸보궁>.
◇청도 운문사<오백전>.
구하 천보(九河 天輔·1872∼1965)는 경상북도 울주 출생으로 13세가 되던 1884년 양산 내원사 주관(主管)에게 출가하고, 경월(慶月)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예천 용문사를 비롯한 여러 절을 돌며 교와 선을 참구하였고, 다시 통도사로 돌아가 명진학교를 설립, 교장을 지냈으며, 통도사 주지, 중앙학림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구하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도제양성에 힘썼으며, 또한 수차에 걸쳐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고,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던 근대의 고승이었다.
자재(自在)한 운필(運筆)을 특징으로 하는 구하의 글씨는 세수 94세, 법랍 81세로 입멸에 들기까지 오랜 기간을 주석하며 수행에 전념했던 통도사 <적멸보궁>, <명부전>, <개산조당>, <삼성각>, <전향실> 편액을 비롯하여, 하동 쌍계사 <화엄전>, <삼성각>, <영모각>, 양산 내원사 <선해일륜>, <심우당>, 남해 용문사 <대웅전>, <명부전>, <적묵당>, <용화전>, 의성 고운사 <삼성각>, 경주 불국사 <극락전>, 청도 운문사 <오백전>, <전향각>, 장성 백양사 <칠성전> 편액 등 주로 경상도 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 우측에 걸린 <적멸보궁> 편액에는 ‘해동사문 천보서(海東沙門 天輔書)’라는 관지와 두인 그리고 ‘취산(鷲山)’, ‘김구하인(金九河印)’이라는 도서 2과가 찍혀 있다. 절의 본전인 이 전각에는 앞쪽에는 <대웅전>, 왼쪽에는 <금강계단>이라는 편액이 함께 걸려있는데 이 편액은 사내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까닭에 붙여진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구하가 노경(老境)에 이르러 쓴 것으로 후경(厚勁)한 서미(書味)를 지닌 선필(禪筆)이다.
청도 운문사 <오백전> 편액에는 ‘해동사문 천보 당년팔육세시서(海東沙門 天輔 當年八六歲時書)’라는 관지와, ‘김구하인, 취산(金九河印, 鷲山)’이라는 도서 2과가 찍혀 있다. 이 <오백전> 편액은 오백나한전을 줄여 쓴 것으로, 구하가 86세 되던 1957년에 쓴 것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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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6>권상로의 심원사·표충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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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주 전…예서체 필획 진중한 글씨 고 령 정…꾸밈없어 보는 눈 편해
◇철원 심원사 ‘명주전’.
◇밀양 표충사 ‘고령정’.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1879~ 1965)는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1896년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서진(瑞眞)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그는 김룡사 불교전문강원을 마치고, 원종(圓宗) 종무편집부장, 문경 대승사(大乘寺) 주지, 조선불교월보사 사장, 불교사 사장,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불교조계종원로회 원장, 동국대학교 초대총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퇴경은 일생을 한국불교학의 정립과 불교사상의 선양에 전념하였던 근대의 고승이며, 조선불교사 등 3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펴낸 위대한 불교학자였다. 퇴경은 7세부터 10여 년 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서법에 구애받지 않고 각 체에 능했으며, 학자다운 고박(古朴)한 글씨를 썼다. 현재 사찰에 남아 있는 편액으로는 서울 화계사 <삼각산제일선원>, 철원 심원사 <명주전>, 밀양 표충사 <예제문>, <고령정>, 문경 대승사 <사불산대승사>, 영주 희방사 <희방사> 등이 대표적이다. 철원 심원사 <명주전> 편액에는 ‘임인자자일 팔십사세 사문 퇴경 상로(壬寅自恣日 八十四歲 沙門 退耕 相老)’라는 관지와 ‘퇴경 권상로인(退耕, 權相老印)’이라는 방인 2과가 있다. 명주전은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의 이칭으로 지장보살이 명주(明珠)를 들고 있기 때문에 붙인 전각의 명칭이다. 이 편액은 1962년 자자일, 즉 하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인 7월 보름에 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질박(質朴)한 필획의 예서로 진중(鎭重)한 서미(書味)를 지녔다.
밀양 표충사 <고령정> 편액은 변죽 없는 통판에 음양각으로 글씨를 새긴 것으로, 액판 좌측에 ‘퇴경(退耕)’이라는 관지만 있다. 이 편액은 현재 박물관 내에 전시되어 있는데, 1839년(헌종 5)에 시작된 표충사의 이전과 관련된 편액으로, 표충사가 옛 영정사(靈井寺) 터로 옮겨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꾸미지 않은 고박(古朴)함에 의연한 문기(文氣)가 어려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글씨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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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7>만공의 수덕사·부석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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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련 당…유려하고 통쾌한 행서 부 석 사…담대한 기상 잘 나타나
◇예산 수덕사 ‘백련당’ 편액.
◇서산 부석사 ‘부석사’편액.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은 전라북도 태인 출생으로, 1883년 김제 금산사에 갔다가 환희심을 느껴 출가를 결심하고, 이듬해 공주 동학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유발동자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그는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경허(鏡虛)를 계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였고, 그 뒤 수년간 천장사에 머물다 아산 봉곡사, 서산 부석사, 부산 범어사 계명암, 공주 마곡사 등을 돌며 오로지 참선에 전념하였다. 그는 1905년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가 수덕사 금선대에 머물면서부터 40여 년 간 수많은 납자들을 지도하며 선풍을 진작하였다. 만공은 경허의 의발을 받아 한국불교의 커다란 선맥을 형성한 근대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그의 글씨는 그의 성품만큼이나 지정(至精)한 서미(書美)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당시 제일가는 서예가로 꼽히던 김돈희(金敦熙)와도 글씨로 교유하였다고 하는데, 예산 수덕사 <백련당>, <청련당>, <향운각>, 정혜사 <쌍수루>, 견성암 <견성암>, 아산 강당사 <관음전>, 서산 부석사 <부석사> 편액 등 주로 수덕사를 중심으로 한 사내 암자와 인근 사찰에 글씨를 남겼다.
예산 수덕사 <백련당> 편액에는 ‘2961(二九六一)’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송월면인, 만공(宋月面印, 滿空)’이라는 백문, 주문의 방인 2과가 찍혀 있다. 백련당은 대웅전 우측에 청련당과 마주하여 자리한 ㄷ자형의 요당으로, 편액은 만공이 수덕사에 머물며 절을 중창하던 시기인 1934년에 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방필(方筆)로 통쾌(痛快)하게 써 내린 행서이다.
서산 부석사 심검당에 걸린 <부석사> 편액에는 ‘칠십옹(七十翁)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송월면, 만공(宋月面, 滿空)’이라는 도서가 있다. 나무결이 드러난 느티나무 액판의 가장자리를 파서 변죽을 대신 한 이 편액은 만공이 덕숭산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는 띠집을 짓고 지내던 1940년에 쓴 것으로, 아마도 그 무렵에 절을 중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강직(剛直)한 성정과 담대(膽大)한 기상이 잘 드러난 심후(深厚)한 필선의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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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8>기성의 동화사·은해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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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황 문-동국진체 특징 드러나 극 락 전-운필 수윤한 해서체
◇대구 동화사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 편액.
◇영천 은해사 ‘극락전’ 편액.
기성 쾌선(箕城 快善·1693~1764)은 경상북도 칠곡 출생으로, 13세 되던 해 칠곡 송림사에 들어가 14세에 민식(敏湜)을 스승으로 득도하였으며, 16세에 서귀(西歸)로부터 구족계를 받았고, 대조(大照)와 홍제(弘濟)에게서 교학을 배워 25세에 홍제의 법을 이었다. 이후 그는 수년간 각처의 명산과 대찰을 돌며 수행하다가 다시 팔공산으로 돌아가 기기암(寄寄庵)을 짓고 정진하였다. 저술로는 정토신앙의 선(禪)적 수용을 설한 ‘청택법보은문(請擇法報恩文)’과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 등이 있다.
칠곡 송림사에 있는 기성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글씨에 능해 많은 사찰에 글씨를 남겼고, 준건(遵健)한 서체를 특징으로 한다고 하였다. 현재 사찰의 전각에 걸려 있는 그의 글씨는 대구 동화사 <대웅전>, <봉서루>, <팔공산동화사봉황문>, 영천 은해사 <극락전>, 대구 북지장사 <대웅전>, 성주 선석사 <대웅전> 영광 불갑사 <대웅전>, 창원 성주사 <대웅전>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대웅전> 편액은 모두 같은 글씨로, 대구 동화사의 것을 비슷한 시기에 번각한 것이다. 대구 동화사 봉황문에 걸린 <팔공산동화사봉황문> 편액에는 ‘갑자춘성(甲子春成)’이라는 관지만 있을 뿐 도서는 없다. 1725년부터 1732년까지 절을 중창하면서 이에 대한 기록을 모아 편찬한 ‘팔공산동화사사적’에 기성의 서문이 있는데, 이 편액은 팔공산에 머물며 절의 중창에 관여했던 기성이 1744년에 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가로획을 굵고 세로획을 가늘게, 왼쪽보다는 오른쪽을 무겁게 쓰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글씨이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편액은 가로 두 개의 쪽판을 3개의 거멀못으로 앞에서 고정 하였다. 이 편액 역시 ‘성상이십이년 을축육월일서(聖上二十二年 乙丑六月日書)’라는 관지만이 있는데, 기기암에 머물던 기성이 1745년에 쓴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보살전의 편액은 조성 연대가 오랜 것일수록 액판의 전면에 서명하거나 도서를 찍는 예는 드물며, 필요한 경우 그 후면에 묵서나, 음각으로 표시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결자(結字)가 근정(謹正)하며, 운필(運筆)이 수윤(秀潤)한 해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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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9>환경의 해인사·용천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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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경학원’…호방하게 쓴 선필행서 용천사‘범종각’…97세때 썼지만 힘차
◇합천 해인사 ‘경학원’ 편액 ◇청도 용천사 ‘범종각’ 편액.
환경 효동(幻鏡 曉東·1887~1983)은 경상남도 합천 출생으로, 13세 되던 1899년에 해인사 백련암(白蓮庵)에서 연응(蓮應)을 은사로 출가하여, 1902년에 사미계, 1908년에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주로 가야산에 머물며 선리 참구와 불교 포교에 힘썼으며, 해인사 교무와 주지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환경은 1919년 용성(龍城), 만해(萬海) 등을 만나 탑골공원에서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1929년 홍제암(弘濟庵)에 머물 당시엔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시조 ‘백로가’를 지어, 유포한 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환경은 어려서부터 사서(四書)를 배워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평생 서도에 정진하며 붓을 놓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관세음보살로부터 꿈에 붓을 얻고 뜻한 바 있어 글씨 쓰는 것을 포교의 일환으로 삼았다고 한다. 환경은 그의 성품만큼이나 준건한 행서를 잘 썼는데, 합천 해인사 <경학원>, <선불장>, <수월문>, <금선암>, <죽림선원>, 청도 용천사 <범종각>, 거창 송계사 <극락보전>, <육화문>, <덕유산송계사>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합천 해인사 <경학원> 편액에는 ‘해방후이년 병술지추 사문 환경(解放後二年 丙戌之秋 沙門 幻鏡)’이라는 관지가 있다. 지금은 승가대학 도서관으로 쓰이는 경학원은 본래 왕실의 안녕을 비는 ‘경홍전’이었던 것을 1946년 해인사 주지를 맡은 환경이 전각의 명칭과 편액을 바꾼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호방하게 써 내린 선필 행서이며, 관지에 ‘해방후이년’이라 써넣은 것에서 독립에 대한 그의 남다른 감회를 엿볼 수 있다.
청도 용천사 <범종각> 편액에는 ‘구십칠세 효동 임환경(九十七歲 曉東 林幻鏡)’이라는 관지가 있다. 이 편액은 환경이 97세로 입적하던 해인 1983년 절에 종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쓴 것이다. 함께 걸려있는 범종각 주련도 그의 글씨인데, 환경의 글씨는 사찰의 편액보다는 주련으로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편액의 글씨는 노경의 글씨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지만 젊은이 글씨 못지 않은 기상을 지녔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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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21>영조의 청룡사·흥국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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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후암… 단종의 비 추모심경 피력 약 사 전 나라발전 염원 담긴 글씨
◇청룡사 비각 편액 ◇흥국사 약사전 편액
영조(英祖/ 1694∼1776)는 조선 제21대 왕으로 숙종의 넷째 아들이며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이름은 금(昑)이다. 영조는 1721년 왕세자에 책봉돼 1724년에 즉위했는데, 50여 년의 긴 재위 기간 동안 탕평책(蕩平策)을 통해 당쟁 방지에 힘썼다. 또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켰으며, 균역법 실시와 ‘속대전’을 편찬하는 등 조선 후기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걸쳐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이었다.
사찰에 전하는 편액 중에는 영조의 고양 흥국사 <약사전>, 서울 청룡사 <전봉후암어천만년> 편액 외에도 어필이 적지 않은데, 고려의 것으로는 공민왕의 부석사 <무량수각>이 유일하다. 또 조선의 것으로는 세조의 공주 마곡사 <영산전>, 정조의 해남 대둔사 <표충사>, 숙종의 법주사 <대웅보전>, 순조의 순천 선암사 <대복전>, 헌종의 합천 해인사 <사방무일사>, 고종의 예산 보덕사 <소석시경> 등이 있다. 불교를 멀리했던 조선의 통치 이념과는 달리 역대 왕들은 불교를 신봉하면서 국가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고, 그런 지극한 마음을 담아 불보살을 모신 전각에 제액(題額)했던 것이다.
서울 숭인동 청룡사 정업원구기비각에 걸린 <전봉후암어천만년> 편액은 조선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가 영월로 유배가는 단종과 이곳에서 작별하고 정업원으로 출가해 허경(虛鏡)이라는 비구니로 살았던 까닭에, 영조가 1771년 이를 기려 비를 세우고, 비가 오래 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이 편액의 글씨는 송설체(松雪體) 풍의 가느다란 행서로, 액판 좌측에 두 줄로 ‘신묘구월육일 음체서(辛卯九月六日 飮涕書)’라는 서자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는 부기(附記)가 있다.
고양 흥국사 <약사전> 편액은 1770년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의 묘인 소녕원(昭寧園)에 가던 중 이 절에 들려, 이 곳의 약사불이 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절 이름을 흥국사(興國寺)로 고치고, 절을 망모(亡母)의 원찰로 삼으면서 함께 쓴 글씨로 전한다. 편액의 글씨는 결구가 단정하고 혼후(渾厚)한 운필(運筆)의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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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31> 남전의 해인사·선석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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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구광루’…6개 쪽판 이어 음양각 선석사 ‘정법료’…소박하고 단아한 서체
◇합천 해인사 ‘구광루’ 편액.
◇성주 선석사 ‘정법료’ 편액.
남전 한규(南泉 光彦·1868~1936)는 합천 출생으로 1885년 18세 되던 해에 해인사를 참례하고 문득 발심하여, 신해(信海)를 은사로 득도하고, 완허(玩虛)의 법을 이었다. 이후 그는 청암사 혼원(混元), 동화사 회응(晦應) 등으로부터 교학을 배웠고, 범어사, 오대산 상원사, 해인사, 통도사 등에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으며, 1908년 해인사 제산(霽山)으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또한 남전은 동래포교소 포교사, 범어사 중앙포교당 포교사, 해인사 총섭, 직지사 조실 등을 지내며 포교와 수행에 진력하였고, 1922년에는 도봉(道峰), 석두(石頭), 성월(惺月) 등과 함께 선학원을 설립, 선풍 진작에 노력하였다.
남전은 어려서 12년 동안 인동(仁東) 서송재(徐松齋)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고, 시문과 글씨 모두에 뛰어 났다고 한다. 남전의 글씨는 특별히 서법에 안주하지 않은 선필이면서도 승려의 글씨라기보다는 의연한 선비의 글씨를 떠올리게 한다. 합천 해인사 <구광루>, 성주 선석사 <정법료> 편액 등이 그의 대표적인 필적이며, 이외에 해인사 법보전 중앙 통로 좌우에 걸린 주련도 그의 글씨이다.
합천 해인사 <구광루> 편액은 세로 6개의 쪽판을 이어 붙이고 그 위에 글씨를 음양각으로 새긴,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것이다. 이 편액은 도서나 관지는 없으나 남전의 강건(剛健)한 필선의 계행(楷行)으로, 1908년 해인사 총섭이 되어 절을 정비하면서 써서 건 것이 아닌가 싶다. 편액의 글씨는 조심스럽게 쓴 여타의 대자필(大字筆)과 달리, 일필로 휘쇄(揮灑)한 듯 경쾌하며, 호방하다.
성주 선석사 요사에 걸려 있는 <정법료> 편액은 변죽 없이 액판의 사방을 둥글게 귀를 죽인 민판 형식을 취하고 있다. 편액의 형태나 그 단청은 편액이 걸릴 건물의 격에 맞추어 하는 것이 상례로, 이 편액은 한적한 승방을 연상케하는 소박한 것이다. 글씨를 쓴 인연은 알 수 없으나, 액판 좌측에 조그맣게 “남전(南泉)”이라는 관지가 있으며, 청경(淸勁)한 선질과 단아한 서미를 지닌 글씨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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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32> 동산의 범어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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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당 유공권의 서미 엿보여 원응정사…민판에 새긴 노건한 선필
◇부산 범어사 <금강계단>편액.
◇부산 범어사 <원응정사>편액.
동산 혜일(東山 慧日, 1890~1965)은 충북 단양 출생으로 1913년 동래 범어사에서 용성(龍城)을 은사로 득도하여, 평남 맹산의 우두암(牛頭庵)에서 한암(漢岩)에게 사교과를 수학했고, 1917년 범어사 강원의 영명(永明)으로부터 대교과를 배웠으며, 1923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성월(惺月)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금강산 마하연사, 범어사 등의 조실을 지냈으며, 1954년에는 비구 종단의 초대 종정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동산은 어려서부터 향숙에 입학하여 한학과 서법을 배웠으며, 이어 보통학교와 중동중학교를 마치고, 191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동산은 서법에 매인 글씨를 쓰지는 않았지만, 간혹 당(唐) 유공권(柳公權)의 서미가 엿보이는 단아한 글씨를 즐겨 썼다. 그가 사찰에 남긴 글씨로는 부산 범어사 <금강계단>, <원응정사> 편액 등이 대표적이고, 이외에도 범어사 대웅전, 천왕문, 불이문에 걸린 주련이 그의 필적이다.
부산 범어사 대웅전 아래쪽의 보제루 후면 <보제루> 편액 아래에 걸린 <금강계단> 편액에는 ‘계묘초하 석동산(癸卯初夏 釋東山)’이라는 관지와 ‘석동산인(釋東山印)’이라는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동산이 입적하기 두 해 전인 1963년에 쓴 글씨로, 위쪽에 걸린 <보제루> 편액이 정면 5칸의 규모와 어울리는 매우 큰 것이어서 작은 편액이 상대적으로 더욱 왜소해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당(唐) 유공권(柳公權)의 서미가 엿보이는 해서로 군더더기를 다 떨어내고 근골(筋骨)만 남긴 청경(淸勁)한 글씨이다.
부산 범어사 보제루 우측에 자리한 원응정사는 1925년에 성월이 중건한 건물로 강원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요당의 앞쪽에 걸린 <원응정사> 편액은 서법(書法)을 뛰어넘은 동산의 노건(老健)한 선필로 도서나 관지는 따로 없다. 편액의 형태는 액판을 직사각형으로 파내고 글씨를 양각으로 새긴 민판 형태인데, 후에 변죽을 덧붙인 것으로 테두리의 구획이 중복되어 어색한 느낌이 든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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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30>홍경의 선암사·은하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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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암 사…민판에 글씨만 음양각 서 림 사…액판 흰색 글씨 검은색
◇부산 선암사 종무소의 <선암사>편액.
◇김해 은하사 선정당의 <서림사>편액.
홍경 장륙(弘經 藏六·1899~1971)은 경기도 양주군 출생으로 24세에 건봉사(乾鳳寺)에서 철우 대후(鐵牛 大吼)를 은사로 득도하였고, 27세에 동선 정의(東宣 淨義)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이후 그는 건봉사에 머물다가 35세 되던 해에는 예산 정혜사(定慧寺) 만공 월면(滿空 月面)의 문하에서 처음 안거를 시작하여, 각지의 선방을 돌며 선리 참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조계종 경남종무원장과 통도사 주지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노경에 이르러는 김해 청량사에 머물렀다.
홍경은 본시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유학에 능통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즐겨 썼던 청(淸) 하소기(何紹基) 풍의 글씨도 서법을 익히던 그 즈음부터 배워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통도사에 세워진 그의 비갈에도 그의 서품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담백한 생애만큼이나 맑은 기품을 지닌 글씨를 썼던 홍경은 김해 영구암(靈龜庵)에 전하는 해서 금강경판목을 비롯하여 부산 선암사 종무소 <선암사>, 김해 은하사 선정당 <서림사> 편액과 양산 내원사 정려헌, 심우당 주련, 산청 대원사 대웅전 주련 등을 남겼다.
부산 선암사 종무소에 걸린 <선암사> 편액은 관지나 도서는 없으나 맥문관주인(麥門館主人) 홍경의 선필(禪筆)이다. 변죽 없는 민판에 글씨만 음양각한 이 편액은 홍경이 김해 청량사에 머물던 시기쯤, 절을 중수하면서 글씨를 받아 건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운필(運筆)의 절제(節制)와 법도(法度)가 느껴지는 아윤(雅潤)한 품격을 지닌 해서이다.
김해 은하사 선정당 한쪽에 걸린 <서림사> 편액은 장식 없는 좁은 변죽에,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액판을 흰색으로, 글씨를 검은색으로 칠한 것이 특이하다. 이 편액은 인도로부터 온 절의 창건주 장유(長遊)와 관련되어 한 때 절 이름을 서림사(西林寺)라고 불렀던 것에 비롯된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관지와 도서는 없지만 <선암사> 편액과 필체와 서품이 동일한 홍경의 해서로, 당(唐)의 안진경(顔眞卿) 체에서 나온 글씨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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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33> 성재의 수덕사·청룡사 편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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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칠보문 단청 변죽 달아 명부전…전각 비해 규모 작은편
◇예산 수덕사 조인정사의 <수덕사> 편액.
◇안성 청룡사 <명부전> 편액.
성재 김태석(惺齋 金台錫, 1875~ 1953)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서예가이자 전각가로 일찍이 중국, 일본 등을 왕래하며 견문을 넓히고 작품 활동도 하였다. 그가 중국에 머물던 38세에는 당시 총통이었던 원세개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국무원 비서직에 있으면서 옥새(玉璽)를 비롯한 수많은 인각(印刻)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15년 동안을 중국에 체류하며 많은 활동을 하였고, 귀국 후에는 ‘대동한묵회’를 조직하여 전람회를 여는 등 서예와 전각을 통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성재는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으며, 해서(楷書)는 안진경체를 본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정학교, 유한익, 강진희, 오세창 등과 함께 근대 전각의 오대가로 꼽히며, 한국 근대의 전각을 현대로 이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성재의 사찰 편액은 예산 수덕사 <수덕사>, 안성 청룡사 <명부전>, 하동 쌍계사 국사암 <명부전>, <칠성각>, <옹호각> 등이 대표적이며, 이외에도 해인사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가 그의 글씨이다.
예산 수덕사 청련당 아래쪽, 조인정사에 걸려 있는 <수덕사> 편액에는 ‘불기이천구백칠십이년 칠십이수 성재 김태석(佛紀二千九百七十二年 七十二 惺齋 金台錫)’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2과의 방인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성재가 72세 되던 1946년에 쓴 글씨로, 액판의 크기에 비해 비교적 넓은 칠보문 단청의 변죽을 달고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조형미가 돋보이는 예서이다.
안성 청룡사 <명부전> 편액에는 두인을 비롯하여, 액판 좌측에 ‘성재(惺齊)’라는 관지와 ‘김태석인 성재(金台錫印 惺齊)’라는 방인의 도서가 찍혀 있다. 이 편액은 전각에 비해 그 규모가 아주 작은 편인데, 변죽을 이중으로 한 것이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편액의 글씨를 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성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활동하던 1950년을 전후한 때일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청인풍(淸人風)의 유연(柔軟)한 소전(小篆)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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